오마이뉴스
구로3동에서 만난 2001년의 또 다른 용욱이
'너무 늦은 건 아닐까'
휴가인파·퇴근차량으로 꽉 막힌 도로를 뚫고 광화문에서 두 시간 반만에 어렵사리 도착한 구로3동 구로남초등학교 입구에서 잠시 망설였다. 오후 8시30분.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은 판자촌은 이미 불그스레한 불빛으로 뒤덮였다.
구로남초등학교 뒤편을 빽빽이 메운 판자촌들. 두 명이 교차해서 지나가기가 힘들 정도로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수백 채의 판자촌이 이 더운 여름 서로의 몸을 바싹 붙이고 늘어서 있다.
'구로국민학교 3년 용욱'은 없다
판자촌 입구에 서서 잠시 [공개수배-네티즌 울린 편지, 용욱이를 찾아서] 그 후를 정리해본다. 오마이뉴스 취재 결과 구로동 벌집을 배경으로 1991년에 쓰여진 '감동의 편지'는 '구로국민학교 3학년 용욱'에 의해 작성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구로초등학교 서무계는 오마이뉴스 보도 이후 1989년부터 2001년까지의 졸업생대장을 전부 뒤졌지만 결국 '용욱'이라는 이름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미 '동일인이 아니다'라고 밝혀진 96년 졸업생 주용욱을 제외하고는.
1991년 최초로 '용욱의 편지글'을 게재했던 기독교잡지 '낮은울타리'의 편집국도 91년 당시 편집국 관계자를 수소문하고, 편지글 게재경위를 추적해봤지만 '용욱'의 실체를 추정할 만한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서정희 편집차장은 "당시에는 편집국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고, 직원들도 자원봉사자가 많았다"며 "용욱이의 글은 아마도 우편으로 배달된 편지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시나 서울교육청도 "적어도 10년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글짓기대회는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문제는 그 '지은이 미상'의 편지글이 '현실'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구로동 벌집 근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편지글은 이곳 벌집 일대에서는 충분히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현실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누가, 왜, 무슨 이유로 썼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2001년 8월3일,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구로3동 판자촌(벌집)에서 오마이뉴스 취재진이 제2, 제3의 용욱을 발견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나는 구로남초 3학년, 우리집은 58호"
"-앵, -앵."
민철(가명)은 손바닥을 쫙 편 채 귓가에 갖다대고 흔들어대면서 그렇게 소리를 내지른다.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다. 옆에 있던 주희(가명)가 "얘네집은요..."라며 말을 꺼내려다가 그런 민철을 보고는 입을 다물고 만다.
구로남초등학교 3학년과 5학년인 민철과 주희를 발견한 시각은 오후 10시. '판자촌 아이들은 새벽까지 골목을 서성댄다'던 구로청년회 회원의 말 그대로였다. 소꿉놀이를 하던 여자애들 주변을 서성대던 민철을 불러세웠다. 주희가 따라온다. "잠시 앉아서 얘기 좀 하자"는 요청에 그다지 적극적이지도,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는 그들.
구로3동 판자촌은 1970년대 구로공단 조성과 함께 생겨난 삶터로 대부분 가족 단위로 살고 있다. 이곳에는 곧 '두산개발'에서 재개발을 할 예정이라는 말이 떠돌지만 정작 재개발 대상인 '판자촌 주인'들은 돈이 없는 것만 원망스러운 상황이다.
4평에서 8평 남짓한 집들은 담이 없다. 아니 담이 있을 틈이 없다. 벽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집과 마주한다. 사람만 들어가기에도 좁은 실내공간은 가전제품, 가스통, 심지어는 신발까지도 집밖으로 몰아냈다. 이 집들의 공통점은 화장실이 없다는 것. 곳곳에 설치된 이동화장실과 공중화장실은 때로는 세면장으로, 때로는 목욕탕으로도 쓰인다.
"니네 집은 어디야?"
"7××-58호요" "전 8×호요"
58호라고 답했던 민철의 집은 사실 할머니네 집이다. 진짜 집은 가리봉동이라는 민철, 그러나 그는 7살까지 이곳에서 할머니와 살았다. 지금은 가족들이 시골에 가면서 잠시 와있는 것이라고.
가리봉동 집도 화장실을 갖추지 못한 집임은 마찬가지다. 8×호에 사는 주희는 "우리집은 방이 두 개"라고 덧붙인다.
민철의 귀가시간은 보통 밤 11시다. 때때로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가기도 한다. 놀고 싶다는 게 이유다. 상당수의 판자촌 아이들은 부모가 없는 빈 집에 혼자 있기 싫어 거리로 나온다. 늦게까지 '돈을 벌어야 하는' 부모들은 이들의 잠자리를 돌볼 시간조차 없다. 주희는 며칠간 빈집에서 혼자 자야 할 때도 있었다.
"엄마, 아빠는 시골(?) 가셨어요"
민철과 주희는 가족이 많다. 위로 오빠 셋을 둔 주희와 위로 누나 둘, 아래로 동생 한 명을 두고 있는 민철. 그러나 온 가족이 한집에서 자본 적은 없단다. 적어도 누구 하나는 일 때문에, 또는 술 때문에 외박을 한다.
"우리 누나들을 다 날라리예요. 큰누나는 중학교 2학년 때 때려쳤구요, 작은 누나는 지금 중2인데 학교 안가고 엄마 구슬 꿰는 일 도와줘요. 그래서 아빠는 나한테만 기대하고 있어요."
"넌 왜 할머니랑 살았니?"라는 물음은 외면한 채 민철은 괜히 묻지도 않는 누나들 얘기를 꺼냈다. 옆에서 "얘요, 알고 보면 참 불쌍해요-"라며 말을 꺼내는 주희에게 진철의 그 '-앵'소리가 또 나온다.
가족사를 감추고 싶은 마음은 주희도 마찬가지. 3살부터 7살때까지만 엄마와 살았다는 주희에게 "엄마는 어디에 가셨냐?"고 하자 "시골에 가셨다"고 답한다. "친정에 놀러가셨어?"라고 되묻자 민철이 주희의 만류를 무시한 채 "저 누나네 엄마는 집 나갔어요"라고 말한다. 더 이상 물을 수가 없다.
판자촌 아이들은 결손가정인 경우가 많지만 서로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아는 체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엄마, 아빠는 시골 가셨어요"라는 표현으로만 대신할 뿐이다.
"한 달만 기다려라, 한 달만..."
이들의 학교생활은 어떨까.
"넌 제일 좋은 게 뭐야"라는 물음에 민철은 망설임없이 "오락"이라고 말한다. 이어 물었다, "그럼 제일 싫은 것은?".
오랜 침묵 뒤에 나온 대답은 "친구들".
"2학년 때까지는 친구들하고 막 싸웠어요. '야, 니네집은 가난하잖아'하고 놀리고 무시하는 친구들하고요. 난 싸움대장이에요. 그러나 3학년 되고나서는 이제 싸우진 않아요."
주희도 4학년이었던 지난해 왕따를 당하기도 했었다며 "아이들이 가난하다고 차별한다"고 말한다.
"한번은 그것 때문에 학교에서 엄청 울었어요, 아니, 여러 번 울었어요..."
청량음료를 뚜껑에 따라 조금씩 아껴 마시면서 주희는 소망을 말한다.
"텔레비 보면 너무 부러워요. 우리집은 왜 이렇게 가난하냐고 아빠한테 물어보면 아빠는 '한 달만 기다려라'라고 해요. 그렇게 몇 년을 지나왔어요... 난 이다음에 커서 화장실 있는 집에 살 거예요, 수퍼마켓 같은 거 하면서 엄마 아빠에게 효도하고 싶어요"
"아맞, 아맞."
거꾸로 말하기 좋아하는 민철이 맞장구를 친다. 순간적으로 두 판자촌 아이의 얼굴에 어둠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이내 이들은 '하하하'라고 웃는다.
2001년의 또 다른 용욱이들은 그렇게 여름밤을 지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