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봉산을 아시나요
節氣가 봄 농사준비를 한다는 淸明을 지나 다음주말쯤 농사비가 내린다는 穀雨를 바라보는 時點이다. 주위가 그만큼 포근하고 시간의 餘裕를 주는 마음들이다.
平素보다 한시간 일찍 會同하는 오전 10시가 가까워 오고 있다. 서남지부 등기멤버 외에 오일석이가 모습을 나타내 주어 반가움을 더했다. 지수의 승합차에 승차한 우리들은 對話의 꽃을 피우며 오늘의 목적지 경기도 안산시 대부동의 구봉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새로 잘 정돈된 국도길을 따라 서울市界를 벗어나 경기도를 접어들자니 이 산, 저 산의 나무들이 오는 길손님을 따사로이 맞이한다. 때로는 푸른잎을 준비하고 있다는 곱스러운 인사말도 해주고 때로는 꽃망울이 앙증스럽지 않느냐는 수줍은 표정도 아끼지 않는 山川의 景致이다. 아직은 山景이 완전한 봄빛은 아닌 듯 하다.
일석이와 정섭이가 슬슬 내 생각, 네 의견을 나누면서 화답의 모양을 갖추어 간다. 일석이가 오랜만에 참여해 주어 지수가 서남지부의 모임계획에 대해 이모 저모를 알려준다. 문득 일석이의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명일동이라고 일러준다. 극과 극을 이어 오늘 참가해 준 것이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특별히 참여해 준 그에게 따뜻한 친우의 交感을 더해주고 싶다. 정다운 친구들과 동기회 모임, 동호회 모임 등의 이야기들로 차안의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산뜻한 국도를 주행하며 안산시계를 접어들 무렵 도로 좌,우측으로 푸르름을 善事하는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지수가 알려준다. 회화나무라 한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가까이에 두고 아끼던 나무라고 한다. 회화나무의 ‘회’자는 한자로 괴(槐 : 홰나무 ‘괴’)라고 쓰지만 중국식 발음으로 ‘회’라하여 회화나무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자 괴(槐)자를 풀어보면 ‘나무(木)가 귀신(鬼)을 물리쳐준다’는 의미로써 迷信을 많이 의지했던 우리 조상들이 귀를 쫑긋 세울만한 뜻풀이가 되는 셈이었으니 求福차원에서 절이나 서원, 집에 많이 심는게 당연했다고 여겨진다. 회화나무를 집에 심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幸福樹’로도 불렀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믿음에 동서양이 따로 없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에서는 거슬러 올라가 주나라 때부터 나라의 기둥이 될 큰 인물이 나온다는 의미로 ‘出世樹’로, 서양에서는 대학자가 나오게 해 준다는 의미로 ‘學者樹’로 불렀다고 하니까요.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樹齡이 수백년이나 되는 회화나무가 유독 많고 그 회화나무를 지금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유를 찿을 수 있다. 잡신을 쫓고 마을을 지키는 守護木 역할을 하도록 회화나무를 마을 어귀에 정자나무로 많이 심었으니까요. 요즘도 다를게 없다. 거리 곳곳의 街路樹나 公園樹로 가장 많이 심는 樹種 중 하나가 회화나무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궁궐이나 오래된 양반 가옥 등에서 회화나무를 많이 보게 된다. 좋은 의미가 투영된 나무인데 당연히 지배계층이 독점하고 싶었겠지요. 또한 회화나무가 선비의 呱呱한 정신을 상징한다고 여긴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비나 양반이 사는 마을과 집에서 많이 심어졌고, 이들이 이사를 갈 때에는 種子를 챙겨서 새로 심거나 나무를 옮겨 심을 정도였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회초리로 사용했던 나뭇가지가 회화나무가지이며 임금이 壯元及第時 御史花를 하사하는데 어사화에 달린 꽃이 회화꽃이다. 천원짜리 지폐 뒷면의 나무가 회화나무이며 樹高가 25m이상 자라고 영하 30도이하에도 버틴다는 福스런 나무”로 공부해 보았다.
어느덧 시흥시가지를 지나 시화방조제 어구에 다다른다. 바다내음이 코를 찌른다. 갈매기의 悠悠한 날갯짓하며 어선의 정박해 있는 모습이 바다그림 그대로였다. 참 오랜만에 바다구경을 하는 우리들이었다. 시화조력발전소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멀리 인천대교가 보이고 한편으로 영흥도가 눈 안에 들어온다. 출렁이는 바닷물결을 건반삼아 갈매기가 반가이 和音을 불러 일으킨다. 물길 건너 섬자락에서는 몇 몇 낙시꾼들이 고독스런 낙시줄을 드리우고 있다. 세찬 바닷바람을 뒤로하고 차량에 탑승하여 가는 길을 이어갔다.
대부도를 접어드니 海松과 꽉 들어찬 음식점들이 가는 길을 멈추게 한다. 九折羊腸 섬 길을 돌고 돌아 이윽고 구봉산이 있는 구봉도 해솔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도착되었다. 시간이 11시 30분이니 1시간 30분을 달려온 셈이다.
가파른 언덕길을 시작으로 출발한 해솔길은 구봉산 중턱의 가로 지르는 산길을 주위의 진달래를 애인삼아 인사도 나누고 꽃말도 주고 받으며 발걸음을 옮겨갔다. 일석이와 정섭이는 보라색과 분홍색의 꽃색깔을 論題로 山中豪傑을 차지하려 하고 있다. 산길에 깔려 있는 짚으로 엮은 保護包가 인상적이다. 겨울에는 눈길과 빙판 미끄럼을 방지하고 여름에는 빗길의 散步를 보호해 주는 아주 고마운 산길 裝具임에 틀림 없었다. 미끄러 질 듯 말 듯 산비탈길을 가로질러 발아래 바다갯돌이 깔려있는 해변으로 내려갔다. 마침 深山에서 흐르는 藥水가 내려가는 길목에 있어 한모금씩 나누어 마셨다. 해변의 조개껍질과 갯돌을 징검다리로 밟으면서 걸음을 이어갔다.
이제는 산오름을 해야할 지점인가 보다. 매우 가파르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의지하며 겨우 겨우 산위로 올라갔다. 어라 산위의 바람은 무척 거세다. 지수가 묻는다. 걷는 걸음이 힘들어 보인다고 한다. 그래 힘들다고 했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와서인지 힘들었다. 산길에 설치된 나무계단길을 서너번 오르고 내리고 또 올라 밀물이 밀려오는 바닷물결이 관측되는 구봉도 낙조전망대에 도착했다. 세찬 바람에도 땀을 식히며 휴식을 취한 우리들은 다시 산아래길로 걸음을 옮겨갔다.
넉넉한 발걸음으로 발길이 다다른 곳은 구봉도 낙조 造型物이 설치되어있는 展望臺에 도착했다. 기념사진도 한 컷 찍은 뒤 전망대 의자에 앉아 지수가 준비한 소주와 버섯,소세지 볶음 안주로 시장기를 달랬다.
이제 해변길로 回歸하는 길목이다. 木橋를 지나려니 일석이가 해변기슭에 드리워진 멋진 나무의 이름을 작명하여 주었다. ‘바람을 지탱하는 나무’라 하여 ‘바지나무’라고 우스개 작명하였다.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나무이름이었다. 목교를 지나 자잘하게 바닷물이 고여있는 해변길을 잠시 걸으려니 오가는 행인들의 손길이 바쁜 모습을 목격한다. 숨어있는 굴을 채취하여 비닐봉지에 가득담은 행인들로 해변이 붐볐다. 종현이가 인기가 좋은 모양이다. 옆에서 계속 굴을 돌도끼질하는 아낙의 손길에서 생굴이 종현이한테만 주어진다.
얼마간 시간을 보낸 우리들은 해변경치를 조망하면서 해변도로를 계속 걷고 있다. 멀리 출발했던 곳이 눈안에 들어온다. 해변도로에 설치된 가로등의 태양열 집열판과 발전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지금시각이 오후 1시 30분이다. 점심을 먹을 시각이다.
구봉도 해솔길 트레킹을 마친 우리들은 오이도의 음식점으로 향했다. 이곳 저곳의 바다낚시터로 인한 복잡한 주차공간을 미로를 빠져 나오듯 헤져 나와 30여분을 달려 오이도 칼국수집에 도착했다. 과대표현을 하자면 어린아이 세수대야 크기의 그릇에 각종 조개가 듬뿍 들어간 칼국수와 미리 준비한 소주로 트레킹의 피로를 말끔히 풀면서 모임의 이 모습 저 모습을 새겨 나갔다.
왔던 길을 달려 지수의 風谷亭으로 길을 이어간다. 오늘은 이곳에서 after를 가질 모양이다. 오던길에 잠깐 닭다리 훈제를 구입했다. 풍곡정에 도착하니 얼마전에 왔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게 주변 밭이랑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發芽된 새싹이 빠끔히 우리를 반겨하고 있었다. 亭子안에서 닭다리를 안주로 우리 다섯은 인생 鼎談을 나누면서 親交를 돈독히 할 것을 다지면서 다음 모임을 기약하였다.
어제가 음력으로 3월 3일 삼월삼짓날이었다. 강남갔던 제비가 온다는 歲時風俗이다. 우리 친구들한테도 따뜻한 봄과함께 훈훈한 世俗들이 가득하길 기원해 보련다.
2013년 4월 13일 서남부지부 리포터 석대식이가
첫댓글 대부도 구봉산 들어가는 어귀에 "배터지게 먹는집"이라고
칼국수 무제한 리필 막걸리 공짜 집이 있는데 생각나는구먼...
나도 함께 했네 !
( 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