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규대사(靈圭大師)의 묘는 계룡면사무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면사무소에서 논산가는 길로 조금 내려가면 우측으로 대사의 묘소 안내판이 크게 서 있다.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유평리 마을회관이 있고 그 좌측으로 넓은 주차장이 나온다.
홍살문과 영규대사영정각(靈圭大師影幀閣)
주차장에서 바로 홍살문이 보인다.
홍살문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우측으로 대사(大師)의 순의실적비(殉義實跡碑)가 서 있다.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 순의실적비 (義僧將 騎虛堂 靈圭大師 殉義實跡碑)
순의실적비(殉義實跡碑) 왼편으로 언덕위에 영규대사(靈圭大師)의 묘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이야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나 역시 영규대사(靈圭大師)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관계로 공부도 할 겸
순의실적비(殉義實跡碑)에 써 있는 글을 아래와 같이 옮겨 보았다.
옛날 조선 조(朝鮮 朝) 선조(宣祖) 때 임진란(壬辰亂)의 참상을 어찌 차마 형연 하리오.
당사 왜구(倭寇)가 대거 침입하여 삼남(三南)이 연함(連陷)되매
어가(御駕)는 의주(義州)로 파천(播遷)되고 국가는 위태롭게 되었다.
이때에 불문(佛門)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킨 분들은 전국 사찰에 격문(檄文)을 돌려
승병을 규합하고 지휘한 청허(淸虛 : 休靜大師)와 그리고 관동(關東)의 유정(惟政 : 四溟堂)과
관서(關西)의 의엄(義嚴)과 호남(湖南)의 뇌묵(雷默 : 處英大師)이였으며 또 한 분이 있었으니
이 분이 바로 호남(湖南)에서 거의(擧義)한 기허 영규대사(騎虛 靈圭大師)이었다.
대사(大師)의 성은 밀양박씨요 이름은 영규(靈圭)이며 호는 기허(騎虛)이니
공주(公州) 판치(板峙)에서 출생하였는데
선세(先世)의 계보(系譜)와 사적(事蹟)은 모두 미상(未詳)이다.
대사(大師)는 일찍이 계룡산(鷄龍山)에 입산출가하였고 후에
청허(淸虛 : 休靜大師)의 문하에서 불교의 진체(眞諦)를 전수하였으며
또 서봉사(瑞鳳寺), 낙가사(落迦寺)등 제사(諸寺)에 머무른 바도 있었으나
갑사(甲寺)에서 가장 오래 주석(駐錫)하였다.
대사(大師)는 청허(淸虛)의 문도(門徒)로서 외모가 질박하고 노둔한듯하여
어질고 지혜로움을 드러내지 아니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에게 기략병법(奇略兵法)의 포부(抱負)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으나
무환(茂環)만은 홀로 그것을 알아 기중(器重)히 여겼다.
선장(禪杖)으로 무예를 익힌 대사(大師)는 왜구의 침보(侵報)를 듣자 분(憤)을 이기지 못하여
삼일간을 통곡하고 제승(諸僧)을 사문(寺門)에 회집(會集)하여
궐기 격적(蹶起擊賊)하기를 서약하였고 그들을 인솔(引率)하여 출정(出征)하였다.
때마침 청주(淸州)가 함락되매 즉시 방어사(防御使) 이옥(李沃)과 더불어 출전하자
이옥군(李沃軍)이 패하매 대사(大師)는 홀로 부하들을 거느리고 며칠 동안 분투하여
부딫치는 대로 적들이 다 쓰러질 때 마침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이 이어 도착하는지라
이에 그와 합세하여 공격할세 대사(大師)가 선등(先登)하여 드디어 청주성(淸州城)을 회복하였다.
이 싸움에서 불행하게도 무환(武環)은 전사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조정에서는
통정대부겸지중추부사정삼품(通政大夫 僉知中樞府使 正三品)의 벼슬을 제수(除授)하고
단의(緞衣)를 하사하였으나 이때 대사(大師)는 이미 금산(錦山)에서 사투(死鬪)하여
의용(義勇)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애초에 청주성(淸州城)을 수복한 후 대사(大師)는 문열공(文烈公)과 상의하여
급히 북상하려 하였으나 금산(錦山)이 또 함락되매 문열공(文烈公)이
금산(錦山)으로 먼저 가고자 하였다.
이에 문열공(文烈公)의 의사를 쫓아 금산(錦山)으로 와서
모일시(某日時)에 격적(擊賊)하기로 기약하였는데
우천(雨天)으로 인하여 약정한대로 적을 치지 못하였다.
문열공(文烈公)에게 관군의 원조를 기다리라 하고 또 루사(壘舍)세우기를 재촉하여
말하기를 대비가 없으면 적을 어떻게 대항할 수 있으리오 하니
문열공(文烈公)이 묵묵히 말이 없다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본래 우리의 병력으로는 적을 당할 수 없음을 알고 있으나
이제 우리가 속전(速戰)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충의의 분격으로 용맹스런 사기를 진기(振起)하여 공격하려 함이라 하였다.
왜구가 의병의 기세가 외롭고 노립(露立)한 것을 보고 곧바로 처들어오매
문열공(文烈公)이 크게 외치며 적을 격살하고 단병(短兵)으로 접전하니 적이 살상되었다.
그러나 적이 조금 후퇴하는듯 하다가 계속 반격해 오므로써 병기(兵器)가 탕진되었으나
오히려 맨손으로 용감히 싸워서 규보(跬步)도 물러나지 않으니 적들이 이에
문열공(文烈公)을 포위하매 대사(大師)가 돌입(突入)하여 문열공(文烈公)을 구하려 찾던 중
누가 소리쳐 말을 하되 조의장(趙義將)이 전사하였는데 왜 피하지 않느냐 하니
대사(大師)가 말하기를 "죽으면 함께 죽을 따름이라" 하고 격분하여 적을 무찌르고
싸우다가 날은 이미 저물고 적봉(敵鋒)에 맞았던 상처는 대단히 중하여
땅에 쓰러지나 모두 들 대사(大師)가 사망한 줄 알았다.
조금 있다 다시 소생(蘇生)하였으나 창자가 상처를 따라 나오니
대사(大師)는 한 손으로는 창자를 쥐고 또 한 손으로는 병기(兵器)를 잡고 일어나
공주(公州)로 가서 재거(再擧)할 뜻으로 60리를 걸어서 초포천(草浦川)을 건너 갈 때에
냇물이 창일(漲溢)하여 복부(腹部)의 상처까지 물이 스며들어 몸을 가눌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도 대사(大師)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서
천신만고로 불당리(佛堂里)까지 이르러 숨을 거두었다.
국사(國史)와 야록(野錄)에는 대사(大師)가 문열공(文烈公)과 함께 금산(錦山)땅에서
전몰(戰歿)했다 하였고 불교통사(佛敎通史)에는 대사(大師)가 의승장(義僧將)으로서
수백명의 승병들을 규합하여 청주(淸州)에서 왜적과 격전하다가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공주(公州)지방 사람들은 대사(大師)가 손으로 아픈 창자를 쥐고
공주의 초포 불당리(草浦 佛堂里)까지 왔었다고 하면서
그 곳을 가리키며 차탄(嗟嘆)함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현재 유평리(柳坪里)에 대사(大師)의 묘가 있으며
불당리(佛堂里)와 거리가 가까운 점으로 보아서 그 말이 진실인듯하다.
공손히 생각컨대 대사(大師)와 문열공(文烈公)이 한 불자(佛者)와 유자(儒者)로서
국가를 보위하기 위하여 마침내 함께 몸을 버렸으니
그 두 분의 충의(忠義)는 실로 혼연일치(渾然一致)된 것이다.
아! 슬프다.
대사(大師)가 본래 특이한 자품(資稟)으로 공적(空寂)한 산중에서
스스로 분기(奮起)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침범한 외적을
진멸소탕(殄滅掃蕩)하려는 곧은 결심으로 거사하여 전공(戰功)을 여러 번 세운 바도 있으나
완전히 왜적을 물리치지 못한 채 적의 흉봉(凶鋒)에 상처를 입어
처참하게 운명하였으니 참으로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마침내 수적(讐敵)이 쫓겨나고 국가가 다시 안정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선렬들의
묵우(默佑)와 충신,의사(義士)들의 진충(盡忠)한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리오.
대저(大抵) 석씨(釋氏)의 법을 살펴보면
살륙(殺戮)을 아니함으로 입교(立敎)되어 있으나 매양 국가가 위난한 시기에 다다라서는
자기의 생명을 홍모(鴻毛)같이 가볍게 여기어 거의순절(擧義殉節)한 분들이 많으니
이것은 처변(處變)의 대권도(大權道)이며 유석(儒釋)이 다를 바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일(前日) 조정(朝廷)에서 대사(大師)의 순의(殉義)한 사적(事蹟)을
포숭(褒崇)하여 종용사(從容祠)와 표충사(表忠祠)같은 곳에 대사를 향사(享祀)케 하였고
또 문암(文巖)에 정문(旌門)이 있으나 대사(大師) 정충(貞忠) 고절(高節)의
보시(報施)에는 너무나 미흡(未洽)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대사(大師)가 순의(殉義)한지 거연(居然) 사백여성상(四百餘星霜)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러 창상(滄桑)이 여러 번 변(變)하였다.
따라서 대사(大師)의 유적(遺蹟)은 점점 쓸쓸해지며
후인들의 추모하는 감회(感懷)는 더욱 간절해지고 있다.
이런 즈음에 공주군(公州郡)과 사암연합회(寺庵聯合會)및 현창회(顯彰會)가
서로 협력하여 그 유적(遺蹟)을 새로이 현창(顯彰)하기 위하여
공주군(公州郡) 계룡면(鷄龍面) 유평리(柳坪里) 후록(後麓)
정좌(丁坐)의 언덕에 안장(安葬)한 대사(大師)의 묘역을 말끔히 정화(淨化)하고
또 묘하로변(墓下路邊)에 순의실적비(殉義實蹟碑)를 세워서
대사(大師)의 열렬(烈烈)한 충의를 세상에 널리 알리어서
세교(世敎)가 쇠퇴(衰頹)하고 인륜(人倫)이 폐추(廢墜)된 이때에
온 국민의 귀감(龜鑑)이 되도록 하고자 하여
불녕(不佞)에게 그 비문(碑文)을 청하니
불녕(不佞) 또한 대사(大師)의 충의를 깊이 흠앙(欽仰)하므로
이에 문단사졸(文短辭拙)함을 불고(不顧)하고 삼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해동불조원류(海東佛祖源流)및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와
위당(爲堂) 정공(鄭公) 인보(寅普)의 소찬(所撰) 기적비문(紀蹟碑文)을 고거(考據)하여
이와 같이 대강 서술(敍述)하니 대사(大師)의 위국충정(爲國衷情)은
일월(日月)같이 빛날 것이며 혁혁(赫赫)한 명성(名聲)은 높이 솟은
계룡산(鷄龍山)과 유유(悠悠)히 흐르는 금강(錦江)물과
같이 천추(千秋)에 길이 전해질 것이다.
단기 4327년(서기 1994년) 甲戌仲夏.
긍암(兢庵) 경주(慶州) 김연뢰(金淵雷) 근찬(謹撰)
공주 대학교수(公州大學敎授) 한상각(韓相珏) 교열(校閱)
원효사 (元曉寺) 사문(沙門) 석일화(釋一華) 근서(謹書)
공주군수(公州郡守) 이병하(李秉夏) 근견(謹堅)
공주사암(公州寺庵) 연합회(聯合會) 근견(謹堅)
묘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이야기.
義僧將 騎虛堂 靈圭大禪師之墓(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선사지묘)
봉분 우측에는 비신(碑身) 높이 87cm, 너비 37cm, 두께 14cm의 소형비석이 있는데
비(碑) 전면에는 義兵僧將軍靈圭之墓(의병승장군영규지묘)라 새겼다.
상석 전면에는 義兵僧將騎虛堂 靈圭之墓 (의병승장기허당영규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뒤에는 崇禎後三庚午四月日立 七代傍孫 朴景震 景兌 封祀
(숭정후삼경오사월일립 칠대방손 박경진 경태 봉사)라 새겨져 있어
이 비석이 1810년(순조 10)에 건립된 것 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