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un espace): 논리적 공간(Espace logique)
A. Soulez, Les Notions philosophique, Dictionnaire, PUF, 1992, pp. 844-845(P.3299)
- 술레즈(Antonia Soulez, 1943-) 철학자, 음악가, 시인, 파리 8대학 교수.
논리적 공간이란 항목을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작업에 할애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 Philosophicus, 1918, 출판 1922)는 사실들을 그림에 비유하여, 그림 속에 요소들이 있듯이, 세상을 표현하는 명제들이 있고 각 명제는 요소들에 대응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즉 명제는 원자이고 원자들의 결합들이 세상이 되듯이, 사태를 설명하는 문장들이 있고, 문장들의 총체적 조합이 책이 되고 이 책은 세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여긴다. 물론 러셀이 이런 설명에 파라독스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나중에 깨닫게 되었고, 비트겐슈타인도 후기에 철학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1953)(1945년 1부완성)을 출간 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두 번의 전쟁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관심을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될 것 같다. 1차대전에서 언어의 원자론적 그림이론, 2차 대전에서 언어의 활용론이 나온다. - 삶의 활용론이 나와야 할 것이다. 들뢰즈를?. ]
- 내가 보기에는 유럽의 두 차례의 전쟁은 관념론의 우화적 방식에서 나온 자가 당착(기계론의 관념론화)의 귀결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상징의 우화적 기능을 버리지 못한 것은 크리스교를 버리지 못하는 데 있다. 라깡도 마찬가지이다. 전후에는 크리스트교의 자가당착을 그대로 두고, 공산주의 배척이라는 배중율을 만들면서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21세기에는 악의 축이라는 개념을 만들면서 연장하고 있다. 배제, 악마화, 악의축, 빨갱이이라는 개념을 쓰는 자들이야 말로 니체가 말하는 사악한(méchant)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극성을 떨고 있다. 목잡힌 대법관이든 목잡은 검찰총장이든, 빤스 목사이든, 둥둥 서울시장이든 적대 관계에 반사적 이익자들이다. 일제 법관과 고등계 형사처럼 또는 맥카시처럼 배중율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를 통해서도 배중률과 같은 배제가 통하면 좋겠는데, 기계적적 신(deus ex macnina)을 끌어들인 관념론으로 바이러스를 배제, 악마화, 악의 축으로 만들면 좋겠는데, 이것은 기계론의 말을 듣지 않은 생명체라는 것이다. 걸리는 자가 악이라고 말하기에는 그 경계(페라스)를 명확하게 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상징 속에서 신이든 자본이든 deus ex machina 로서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고 여겼는데, 그게 일년 반이 지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인간을 숙주로 하는 다른 바이러스들이 주사위 놀이처럼 아자르(hasard)로 나오지 않는다고 보장하지 못한다. -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이익이 아니라,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가 아니라, 비트코인이 아니라, 곡식 한알 입안에 들어오기까지 일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목재로 쓰이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는 과정을 배워야 하며, 한 인간이 평균연령 78까지 살면 어떤 과정과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보톡스, 신장이식 등이 삶을 연장해 준다고 이식할 것이 아니라, 가진 방식을 즐겁고 유쾌하게 사는 것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니체가 왜 디오니소스를 이야기 하면서 저 매샹한 자들을 비난했겠는가. (54PLH)]
# 공간(un espace): 논리적 공간(Espace logique)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1889-1951)의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 Philosophicus, 1918, 출판 1922) 속에서 논리적 공간은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로부터 상속된 좌표 기하학과 유지에 의해 이해된다. P 명제는 이때 논리적 공간에서 지시점들 a, b, c – 이들은 자기 좌표들이 있다 - 에 의해서 규정된 논리적 장소(a, b, c)를 차지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논리적 공간은 명제적 분석이 도달하게 해주는 사실들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한 명제의 모든 원자적 가능성들의 체계를 구성한다. 이 원자적 가능성들은 체계 안에서 이 명제의 좌표들인 요소 명제들로부터 진열된다(펼쳐진다). 명제의 의미가 요소 명제들의 진리치를 기초로 하여 규정된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방식이다. 이때 명제는 진리치의 함수이다. 따라서 명제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주어진 명제를 거짓으로 또는 진리로 만드는 조합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마치 조합들이 진리표들 안에서 제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의 요소적가능성들을 위치 표하기에 귀착한다. 그리고 명제의 동어반복과 모순은 한정된 경우들을 형성한다(참조, 4.463, 4.464, 4.465, 4.466)
만일 한 명제가 논리적 공간에서 단지 자리를 규정한다면, 어떤 것이 자기 체계속에 현존한다는 가능성들의 체계는, 말하자면 체계가 지시하는 논리적 장소들의 총체는, 명제에 의해서 이미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이 남는다(3.42). 여기서 문제가 되는 “가능성”은 구문론에서 유래하지 경험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능성의 등록이 구성되는 것은 일어나는 사실들과 독립적으로 선천적(apriori)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 각각의 경험이 미리 표현의 범위 안에 있는지를 밝히기 위하여 규칙들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논리적 공간은 “명제들의 내적 구문으로부터 구별되는” 규칙들의 문법을 예고한다. 내적 구문에 관하여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 이후에 자신의 주의를 집중할 것이다. 마일 지시(체) 속에 논리적 자리들을 규정하는 것이 “어떤 요소적 명제들이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논리학의 적용(5.557)은, 사물들의 논리적 공간에 접근하게 하지 않고서, 사실들의 논리적 공간 한 가운데서 조작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리적 공간에 대한 원자성(l’atomicité)의 원리는 논리적 원자론의 기초가 된다. 사실들의 논리가 분절화되어 관계하는 사물들의 이런 논리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명제적 분석은 비결정론 속에 방식을 남긴다. 그 방식으로부터 대상들 복잡화의 논리적 형식이 논리-철학 논고의 “의미론적 길(la voie sémantique)”을 효과적으로 가능(possible)하게 한다. 때문에 세계의 “실체(substance)”에 대한 존재론적 길을 막다른 골목(une impasse)처럼 지시한다. (A. Soulez)
(54P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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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 분석기하학의 창시자.
1889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 논리학, 수학 철학, 심리 철학, 언어 철학을 다룬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철학자이다.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18, 출판 1922)
1943 술레즈(Antonia Soulez, 1943-) 철학자, 음악가, 시인, 파리 8대학 교수. 비트겐슈타인 전공. [벩송을 연구했던 술레즈(Philippe Soulez, 1943-1994)의 부인이 아닐까 한다. 프랑.위키에는 항목이 없고, 영.위키에도 항목이 있다.] Le projet d’une grammaire philosophique chez Platon : du Cratyle au Sophiste, 1991. Au fil du motif, autour de Wittgenstein et la musique, 2012
(3:08, 54PLH)
# 참조.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18, 출판 1922)
4.463
The truth-conditions determine the range, which is left to the facts by the proposition.
(The proposition, the picture, the modem, are in a negative sense like a solid body, which restricts the free movement of another: in a positive sense, like the space limited by solid substance, in which a body may be placed.)
Tautology leaves to reality the whole infinite logical space; contradiction fills the whole logical space and leaves no point to reality. Neither of them, therefore, can in any way determine reality.
4.464
The truth of tautology is certain, of propositions possible, of contradiction impossible.
(Certain, possible, impossible: here we have an indication of that gradation which we need in the theory of probability.)
4.465
The logical product of a tautology and a proposition says the same as the proposition. Therefore that product is identical with the proposition. For the essence of the symbol cannot be altered without altering its sense.
4.466
To a definite logical combination of signs corresponds a definite logical combination of their meanings; every arbitrary combination only corresponds to the unconnected signs.
That is, propositions which are true for every state of affairs cannot be combinations of signs at all, for otherwise there could only correspond to them definite combinations of objects.
(And to no logical combination corresponds no combination of the objects.)
Tautology and contradiction are the limiting cases of the combination of symbols, namely their dissolution.
3.42
Although a proposition may only determine one place in logical space, the whole logical space must already be given by it.
(Otherwise denial, the logical sum, the logical product, etc., would always introduce new elements -- in co-ordination.)
(The logical scaffolding round the picture determines the logical space. The proposition reaches through the whole logical space.)
5.557
The application of logic decides what elementary propositions there are.
What lies in its application logic cannot anticipate.
It is clear that logic may not conflict with its application.
But logic must have contact with its application.
Therefore logic and its application may not overlap one ano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