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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1938),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4권. 17세기, Le dix-septième siècle1-273
5절 정념들: 예속 Les passions : l’esclavage [E. 3; E. 4]
오류는 인간적 자연의 필연적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정념도 자연적이고 필연적이며, 스토아학자들이 받아들인 매우 일반적 견해들과 반대이다. 스토아학자들은 정념을 자연에 반대이라 말했고, 그것[자연] 위에 있는 의지에 절대적 권능을 일치시킨다. 그러한 이유로 한 존재이기 위하여 받아들이다(Pâtir, 겪다, 고생하다), 이것은 감화작용(une affection)을 겪는(éprouver, 체험하는) 것이다. 존재(un être)그 자체는 감화작용의 원인이 아니고, 또는 존재는 부분적으로 감화작용의 원인일 뿐이다. 반대로 존재가 작용하며, 그때는 존재가, 자기 속에 있는 감화작용들의 충만한 원인(cause complète), 즉 적합한 원인(cause adéquate)일 때이다. 자연의 일상적 과정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수동적(pâtit)인데, 왜냐하면 유한한 자기 신체에 의해 겪었던 감화작용 전체는, 자연의 전체 질서에서 가깝고 이웃하는 신체에서 자기의 기원을 갖는다. 그리고 영혼은 평행하게 부적합한 관념들을 갖는데, 그 영혼은 그 관념들의 총체적 원인이 아니다. 그러나 또한 인간도 작용하는데, 그 인간이 적합한 관념들을 갖는 한에서 그리고 그 인간이 이 관념들부터 다른 관념들을 연역하는 한에서이며, 이 때에 인간은 이 관념들의 총체적 원인이다. 따라서 수동적 감화작용들의 자연적 과정은 오성 안에 있는 관념들의 추리적 연쇄에 대립된다. 이는 마치 제1종류의 인식이 제2종류의 인긱에 대립되는 것과 같다. (158)
그러나 또한 어떻게 부적합한 관념이, 우리가 환희, 슬픔 등이라 부르는 이런수동적 감화들을 생산하는가? “모든 존재는 자기 존재 속에 끈질기게 존속하는(persévérer)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tour être)는 신적 권능의 표현(une expression), 즉 가깝거나 또는 먼 표현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존재도 다른 존재에 의해서만 파괴될 수 있다. 존재 속에서 존속하기 위한 이런 노력(effort, conatus), 즉 자기 자신에게 무매개적인 집착은 수동적 감화작용들 중의 첫째 것이다. 신체 속에서 노력은 인간의 본질 자체인 욕구(appétit, appetitus)이다. 그런데 영혼 속에서 노력은 욕망(le désir, cupiditas)이며, 욕망은 우리가 모든 관념에서 인정했던 것을 긍정[주장]하는 경향일 뿐이다. 왜냐하면 관념은 단지 이미지일 뿐만아니라, 자체로서 지위[입장]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어떤 점에서 욕망이 추구되었던 착한 관념 전체에 의존하는지를 안다. 그런데 욕망은 모든 다른 감화작용들의 원리이다. 외적 원인들은 우리들의 신체에 작용하는데, 존재 속에서 존속하기 위한 노력을 좋아하기 때문이든지 또는 그 반대 때문이든지 간에 작용한다. 이로부터 두 가지 감화작용들, 환희(la joie)와 슬픔(la tristesse)이 나온다. 환희는 신체의 완전성을 증가하는 작용의 (부적합한) 관념이고, 슬픔은 그것의 완성성의 축소의 관념이다. 사랑(l’amour)은 태어나는데, 그때는 환희의 관념에, 사람들이 환희를 생산했다고 믿는 원인의 (부적합한) 관념이 보태질 때이다. 미움(lahaine)도 동일한 조건에서 태어나는데, 그때는 슬픔에 그것의 원인의 관념이 보태질 때이다. 정념들의 변화된 놀이(le jeu varié)는, 자기의 작용하는 권능을 증가하게 하는 사물들을 상상하기 위하여 또한 그것을 가로막는 사물들의 이미지를 배제하기 위하여, 영혼의 노력에 의해 설명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정념들은 사랑과 미움의 뉘앙스들[미묘한 차이들]이다. 이리하여 상상작용의 법칙들 덕분에, 사랑과 증오는 이것들의 원초적 대상으로부터 다른 대상들 그 차체들에게로 퍼져 나간다. 그러나 사랑과 증오는 대상과 동시에 지각되거나 또는 대상과 어떤 유사성을 갖는다. 우리가 개체에서서 갖는 증오는 예를 들어 동일한 계층 또는 동일한 민족의 모든 개체들에 향하여 옮겨지게 될 것이다. 그 귀결로서 사랑과 환희를 자극한 대상은, 슬픔을 생산하는 대상들과 더불어 그 대상이 갖는 연합들의 덕분에, 슬픔과 증오를 동시에 자극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섭동(fluctuation, 요동)의 상태가 나오며, 이 섭동은 유일하고 동일한 사물을 우리에게 사랑하게도 하고 증오하게도 한다. 동일한 법칙들 덕분에, 사물들의 이미지들은 사물들 자체와 동일한 감화작용들을 생산한다. 여기서 희망(l’espoir)과 불안(la crainte)이 나오는데, 이때는 우리가 ‘다가올 사물’을 우리 스스로 표상할 때인데, 이 다가올 사물은 환희이든 슬픔이든 아마도 막 생산하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희망과 불안이 안전성과 절망이 되는데, 그 때는 우리가 다가올 환희와 슬픔에 관해 더 이상 의심하지 않을 때이다. 또한 만족과 후회가 나오는데, 말하자면 이는 우리가 희망했었거나 또는 몹시 두려워했었던 사물[사정]들에 의해서 생산된, 환희의 이미지와 슬픔의 이미지들이다. (159)
상상작용의 다른 효과가 있다. 어떤 감화작용을 겪는[체험하는] 우리와 비슷한 존재를 우리 스스로 표상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불가능하다. 이런 감화작용을 우리 자체가 겪지 않는다면 말이다. 여기에서 슬픔이라는 연민(la commisération)이 나온다. 우리와 비슷한 자이 우리에게 슬픔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경쟁심(l’émulation, 모방심)도 나온다. 이때는 우리와 비슷한 자들 중에 하나에게서 현존하는 욕망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동일한 욕망을 겪게[체험하게]하는 때이다. 따라서 우리는 환희 속에서 우리와 비슷한 자들을 보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그자들에 마음에 드는 것을 행하기를 욕망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닮은 자들이 마찬가지로 우리를 향해 작용[활동]한다고 우리 스스로 상상할 때, 우리는 그들을 칭찬한다. (159)
그러나 이로로부터, 존재들이 우리와 비슷하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말하자면 존재들이 우리의 증오들과 사랑들을 결합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가 노력[해야]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야망이라는 욕망은 우리들 각각에게서 동일한 것이며, 이 욕망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 이들 또한 자기들의 의향에 맞게 우리를 변형시키기를 원하는데 - 대신하여 장애물들을 만난다. 그리고 이 장애물은 수많은 증오의 원인이다. 상상작용의 이런 법칙은 우리에게 우리와 비슷한 자가 사랑하는 대상을 사랑하게 하고, 그리고 이 법칙은 또한 사람들이 갈망(l’envie, 욕심)이라고 부르는 증오 뉘앙스를 생산한다. 만일 유일한 개체에 의해 소유될 수 있는 대상이 문제거리라면 말이다.이리하여 인간은 불행에 대한 연민(la pitié)과 행복을 향한 갈망[탐욕]과 질투 사이에서 공유하고 있다. (160)
사람들은 어떻게 닮음(유사성)이 증오를 생겨나게 하는 지를 본다. 이 증오는 일단 태어나게 되면 그자체로부터 어느 종류[들]로 다수화 된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 증오없이 우리 비슷한 것에게서 우리를 향한 증오를 우리 스스로 표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증오는 분노 또는 잔인성에 의해 표시되는 파괴의 욕망 없이 갈 수 없다. 그러나 “사랑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 증오는 사랑이 된다. 그리고 이런 사랑은, 만일 그 사랑이 증오를 앞장서 있었지 못했던 경우보다 더 위대하다.”왜냐하면 만일 마치 나를 위해 사랑을 갖는 것처럼, 내가 증오하는 인간을 표상한다면, 나에게서 사랑은 환희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것[환희의 원인, 사랑]을 좋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사랑으로부터 다시 느낀 환희는 슬픔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하여 영혼이 행하는 노력을 부추긴다. 이 슬픔은 증오 속에서 감싸져 있었던 것이다. (160)
자유로부터 유래하는 사랑과 증오의 몇몇 미묘한 차이들(des nuances, 뉘앙스)을 설명해야하는 것이 남아있다. 사람들은 자유를 사랑받는 대상 또는 증오하는 대상 속에서 상상한다. 분명한 것은, 사랑과 증오는 필연성인 존재를 대해서보다 자유롭다고 믿는 존재를 대해 보다 강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마치 나의 환희 또는 나의 슬픔의 유일한 원인으로서 자유로운 존재처럼 나는 스스로 표상한다. 그러나 만일 환희 또는 슬픔의 원인이 다른 존재들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그 자체로서 생산되었다고 내가 안다면, 나의 사랑과 나의 증오가 모든 존재들에게 이전되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우리 감화작용의 뉘앙스들은 다르며[차이나며], 그 때 뉘앙스들은 단일한 대상에 연관이 있을 때이며, 그 대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들과 공통적인 아무것도 상상하지 못한다. 이 때에 찬양(l’admiration)이 생산되며, 만일 우리가 대상을 두려워하면 찬양은 경악(la consternation)이 되고, 만일 우리보다 상위인 어떤 인물을 상정한다면, 숭배(la vénération)가 되고, 만일 악행들이 일상적 수준을 넘어서 인간이 상정되면, 공포(l’horreur)가 되고, 우리가 우리에게 대상을 찬양하게 하는 성질들을 대상이 실재적으로 소유하지 못한다고 판단하면, 경멸(le mépris)이다. 결국에는 우리의 환희와 슬픔의 원인이 우리가 우리의 행동하는 권능 또는 우리의 무능을 상상하는 한에서 우리 자체이라면, 우리의 환희는 만족 자체(contentement de soi-meme)가 되며, 우리의 슬픔은 수치심(l’humilité)이 된다. (160)
사람들은 이 모든 수동적 감화작용들은, 자기 존재 안에서 끈질기게 존속하는(persévérer)하기 위하여, 영혼의 노력에 연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각 영혼(그리고 각 신체)는 불가분성(개체성)을 갖는다. 개체성은 영혼을 구별하고 또한 영혼을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하며, 개체성 그 자체는 시간과 더불어 변한다. 또한 여러 인격들과 동일한 인격은, 시간의 차이들이 있어서, 사랑하거나 또는 미워하는 대상들과 전혀 화합하지 못한다. 수동적 감화작용은 외적 사물들의 자연이라기보다 우리의 자연을 잘 표현한다. 그리고 헛되이 실재성 자체에 도달한다고 믿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잘(bien, 선)이라고, 우리가 증오하는 것을 잘못(mal, 악)이라고 부른다. (161)
그러한 것이 수동적 감화작용들의 기계적 움직임(la mécanique, 역학)이다. 이 역학은 우리에게 인간의 예속성(la servitude)을 제시한다. 영혼, 즉 유한한 존재는 영혼이 사랑했던 것을 증오하면서 또 영혼이 미워했던 것을 사랑하면서 받았던 것을 면서 모든 바람들을 나선형으로 돌게 하듯이, 외적 원인들의 영향아래있다. 왜냐하면 이런 감화작용들을 규정하는 것은 자연의 과정 전체(le cours entier, 온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인간적 자연에 관한 전능(toute puissance, 온권능)을 갖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 과정과 인간적 자연과의 관계는 마치 무한과 유한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161) (57WLE)
6절 자유와 영원한 삶 La liberté et la vie éternelle, 161. [E. 4; E 5.]
그러나 [한편] 인간에게서 모든 것은 자연의 과정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다: 그가 적합한 관념들을 갖는 한에서 그는 행동한다. 다른 한편 모든 감화작용이 필연적으로 수동적이지 않고 부적합한 관념에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환희는 우리의 완전성을 증가하게는 것[무엇]의 관념이다. 그런데 만일 증가의 원인이 우리 밖에 있다면, 환희는 수동적 감화작용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스스로 감화작용의 적합한 원인이라면, 그 환희는 수동성이 없는 감화작용이다. 마찬가지로 욕망은, 우리가 외적 원인들과 화합하는 덕분에 만이 존재 속에 죽 존속할 수 있다는 정도에서, 수동적 감화작용일 뿐이다: 만일 우리가 적합한 원인이 되는 우리-자신의 일부가 있다면, 욕망의 감화작용은 정념없이 남아 있다. 오직 슬픔만이, 슬픔에 의존하는 모든 감화작용들과 더불어, 수동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한 존재는 자기 자체로부터 자기 자신의 파괴[파멸[로 향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리고 슬픔은 외적 원인을 필연성 전체로 갖기 때문이다. (161)
존속하려는 존재의 근본적 경향을 자기 존재 속에 부여하면서, [한편] 인간이 이런 경향을 좋아하는 것을 마치 선(잘)인 것처럼, 그리고 반대되는 것을 악(잘못)인 것처럼 고려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므로 선은 고유한 관심과 동일하다. 덕목은 자기 자체를 스스로 사랑하데 있다. 분명한 것은, 덕성있는 행동(우리의 권능을 가장 높이 올리는 행동)이, 적합한 관념들에 의해 규정되는 행동 또는 이법을 따르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행동의 적합한 원이며, 우리가 원인이 된 행동은 모든 행동들 중에서 가장 완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다른 인간들에게서 우리 선에게 그만큼 덜 방해물들을 발견할 것이라는 것이고, 그들이 우리에게 보다 더 많이 비슷한 것일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아는데, 공통 용어들(notions communes)로 이루어진 이법에 의해서 모든 인간들은 비슷하며, 그리고 그들의 수동적 감화작용들에 의해 그들이 비슷하지 않고 서로들 간에 분쟁(conflit) 중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능한 한에서 이 분쟁을 막는 것이 이법에 부합한다. 그러한 것이 사회의 제도의 목표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사회적 권력은 교육하는 권력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교정적 권력이다. 그 권력은 사람들 사이에 분쟁을 막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인간들을 추론할 수 있게 하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한 감화작용은 보다 강한 감화작용에 의해서만 파괴될[지워질] 수 있다는 원리를 따르면서, 인격들의 상호 안전을 위하여 증오, 질투, 잔인성과 같은 수동적이고 위험한 감화작용들에 대해, 처벌받는 불안과 같은 보다 강한 감화작용을 대립시키면서 이다. 자연 상태에서 모든 인간은, 보편적 자연의 필연적 결과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구성에 따라서, 좋은 또는 나쁜 것에 대해 판단할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자기의 모욕들을 복수할 권리를 갖는다. 이 모욕들이란 사회적 상태에서, 칭찬과 죄과, 정의와 불의를 단독으로 정의할(définir) 수 있게 된 사회에 속한다. 따라서 사회가 비합적이라고 선언한 수동적 감화작용들을 나쁘다고 하면서, 그리고 인간들을 재통합하려는 경향이 있는 모든 감화작용들을 좋다고 고려하면서, 우리가 벌써 뒤따르는 것은 이법의 규칙들이다. (162)
일반적 방식으로 모든 감화작용들이, 심지어 우리를 보존하려는 경향이 있는 수동적인 감화작용들도, 좋다고 판단되어야만 한다. 환희와 명랑은 좋은 것일 수 있을 뿐이다. “절제되고 알맞은 영양에 의해서 자기의 신체를 고치는[회복하는] 것, 향수에 의해 자기의 감관들을 매력적이게 하는 것, 음악을, 경기들, 구경들을 즐기는 것은 현명한 인간의 것이다.”(E, IV, 45, 부명제) 반대로 정념들은 슬픔에 의존하기 때문에, 특히 증오, 그리고 또한 우울, 걱정, 연민(la pitié), 창피, 후회는 나쁘고, 연약하게 할 수 있고, 항상 이법에 반대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좋은 것일 수 없는 것이 환희에 의존하는 정념들도 있다. 이것들은 마치 사랑처럼 과도하게 허용할 수도 있는 것들이며, 마치 오만(l’orgueil, 자신감)처럼 그 자체로 과도한 것들도 있다. 자신감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와 무능을 표시하며, 이것들은 자기 경멸 속에서만 동등하다. (163)
사람들은 정념들에 관한 이런 판단들의 공통적 원리를 본다. 마치 진리가, 감각적 지각작용의 오류를 파괴하면서, 자기 속에서 있는 긍정적인 것을 파괴하지 않는 것처럼, 이법도 또한 정념들 속에서 있는 긍정적인 모든 것을 수집한다. “정념들을 생산하는 욕구(appétit)는 이법으로부터 파생된 욕구와 동일한 것(le même)이다.”(E, IV, 18, 부명제) 이해하기 위한 노력, 즉 이법의 특성은 근본적으로 존재 속에서 존속하려는 노력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영혼의 존재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존재를 증가하게 하는 수동적 감화작용들의 관념들에서는 오직 착한 것과 추론할 수 있는 것만이 있다. 지혜는 우리를 항상 우리 권능을 보존하고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것을 향하여 밀고 간다. 지혜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오히려 삶(생명)에 대한 성찰이다.”(E. IV, 67.) 현자는 위기들(les périls)를 모면하는 신중함을 경멸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그는 내재적 평화에, 우리의 작용하는 권능의 관조의 결과로서 환희에, 도달한다. 이런 내재적 평화는 고독의 평화가 아니다. 만일 현자가 무지한 자들의 선행들에서 피하고자 애쓴다면, 그는 재인식과 선의를 실천한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자유의 족쇄들처럼 도시국가의 법률들을 고려하기는커녕, “그는 고독에서보다 공통법률 아래 자기가 사는 도시국가에서 더욱 자유롭다.”(E. IV, 73.)고 한다. (163)
현자의 이런 자유는 데카르트가 자유를 믿었던 것처럼, 소위 말하는 임의자유(libre arbitre)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 임의 자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제국 속에 제국”을 형성할 것이다. 데카르트에게서는 신체와 영혼 사이에 개입이 있다. 영혼 속에 정념이라는 것은 신체의 행동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반대로 영혼은 송과샘을 변형할 능력을 가지고 있고, 정신의 운동에 이렇게 작용하면서, 자기 정념들을 극복하는 절대적 제국을 획득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만일 신체와 영혼 사이에 완전한 소통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것의 어떠한 것도 가능하지 않다. 영혼 속에 정념 이라는 것이 신체 속의 정념이라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에서, 정념(passion)이라는 단어는 오로지 존재 속에서 그것이 적합한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지칭한다. 따라서 신체 위에 직접적으로 작용하기 위해 헛된 규범들을 부여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정념 속에서 부적합한 원인인 감화작용들로부터 적합한 원인을 생성하도록 인간에게 허락하는 조건들을 연역할 수 있는지를, 동일한 방법으로 실천하면서 찾아야만 한다. 이 감화작용들은 그때에는 정념들이 전혀 아니고 오히려 덕있는 작동들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야망(ambition)이라 불린 수동적 감화작용을 인식한다. 이 수동적 감화작용에 따라서, 각 인간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수동적 감화작용이 기회에 맞게 일으킨 중대한 충돌들을, 자기와 비슷한 것들이 되게 욕망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가 자연의 과정에 의해 이런 감화작용에 밀고 나갔던 것이다. 우리들이 추론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들이 인간들을 우리-자신들과 비슷하게 만들기를 원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이 되는 이 동일한 감화작용은 그때에는 연민(la pitié)이라는 덕목이 된다. 그 연민의 덕목은 인간들 사이에 평화를 제공한다. (164)
여기서 이것이 바로, 그러한 변형작용이 필연적인지 하는 이유이다. 따라서 정념 속에서 사랑 받거나 또는 증오 받는 어떠한 대상도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슬픔의 진실한 원인이 아니며, 그 대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원인이다. 그런데 이런 환희와 슬픔이 이것들의 겉보기 원인으로 분리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들은 분간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이법에 의해서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슬픔이 자연의 보편적 과정의 결과물들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우리는 우리의 상상작용이 우리에게 마치 그것들의 원인들처럼 소개했던 사물들을 사랑하기를 또는 미워하기를 그친다. 마치 선(un bien)의 상실로부터 태어난 슬픔은 특이하게 달콤해지는 것과 같은데, 그 때는 우리가 그 상실을 회피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이다. 정념을 정복하는 것, 그것은 그것을 인식하는 것, 말하자면 정념이 전개한 감화작용의 적합한 관념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적합한 관념들로부터 태어난 감화작용들은 잔존과 의연함(constance, 확고부동)이라는 특이한 운수들을 갖는다. 만일 하나의 감화작용이 훨씬 더 많은 수의 원인들에 의해 이 감화작용이 각성되었던 것보다 그 수만큼이나 더 강한 것이라면, 어떠한 감화작용도 적합한 관념들에 연결된 감화작용보다 더 강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부적합한 관념들의 대상들은 유한하고 변하며 덧없는 것인 반면에, 적합한 관념들의 대상들은 확고부동하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념들의 대상들은 변할 수 있고 다양한 반면에 정념들이 내포하는 감화작용들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항상 동일한 자연의 영원한 법칙들을 재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화작용의 적합한 인식은, 그 인식이 적합한 인식인 한에서, 우리 존재의 완전성과 권능을 표현한다. 따라서 이런 인식은 환희를 동반한다. 게다가 이런 환희는 마치 진실한 원인에 연관되어 있듯이, 신에게, 즉 영원한 법칙들의 원리에 연관되어 있다. 신의 관념을 동반하는 이런 환희가 신의 사랑이다. 적합한 관념들에 근거한 신의 사랑을, 스피노자는 신학자들이 말하는 사랑과 얼마나 다른지를, 힘차게 지적했다. 그 사랑은 확고부동하고, 마치 타락한 천사의 신화에 일어나는 것처럼, 증오로 변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사랑은 반대급부로서 인간들을 향한 신의 사랑일 수는 전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감화작용 전체로부터 제외되기 때문이다. 결국 신비가(le mystique)의 일대일로 사랑에 닮기는커녕, 신은 인간들을 그들 사이에 접근하게 한다. 왜냐하면 신은 이법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165)
따라서 공통용어들의 사용 또는 둘째 종류의 인식은 인간을 어느 정도에서는 자기 정념의 주인이 되게 한다. 우리가 그 자체로서 우리의 유한한 개체성으로부터 갖는 관념은 부적합한 관념들이었다. 우리가 신으로부터 또한 자연의 원리들로부터 갖는 관념은 적합한 관념이며, 우리는 그 관념으로부터 모든 사물들이 우리자신과 우리의 정념들을 포함하여 필연적으로 연역된다는 것을 안다. 이런 관념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만들었던 관념을 변형시킨다. 우리는 우리를 마치 우주의 법칙들에 의해 규정된 것처럼 인식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개체성에서 있었던 긍정적인 것에 대해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우리 존재 속에 존속하게 하는 경향을 지닌 노력(le conatus)을 제거하기는커녕, 우리는 우리 존재를 우주의 노력에 근거하여 어느 정도 지탱하게 한다.(E. V, 명제 1에서 20까지.)
그러나 이런[둘째] 인식은 보편적이다. 이것은 우리를 우주에 결속하게 하는 것과 같은 우리 개체가 아니며, 다른 모든 부분들과 공통적이라는 점에서 우주의 일부분인 한에서 개체이다. 따라서 둘째 종류의 인식은 수동적 감화작용들의 충돌에서, 그리고 지속하는 삶에서, 완전히 빠져나지 못한다. 그런데 충돌과 삶은 필연적으로 연결된 두 가지 사물이다. 이 둘째 종류의 인식에 셋째 종류의 인식이 중첩된다. 이 셋째는 직관적으로 필연적 의존성을 파악한다. 이 필연적 의존성은 그 자체로서 우리 개체성을 신의 자연에 또 신의 속성들의 자연에 결속시킨다. 이는 사람들이 1, 2, 3이라는 단순한 세 가지 수에 비례적인 넷째 수가 정확하게 6이라고 파악한다는 동일한 명증성에서와 같다. 첫째 종류의 인식에서, 우리는 우리를 마치 유한한 개체로서, 또 따로 떨어져서는 설명할 수 없는 개체로서, 극복할 수 없고 설명될 수 없는 힘들로 사방에서 포위당한 개체로서 생각된다. 둘째 종류의 인식에 의해서, 그러나 우리는 보편적 법칙들을 알며, 우리는 그 법칙들의 표현(l’expression)이다. 그러나 셋째 종류의 인식에 의해서, 우리가, 개체가 특이자인(de singulier) 한에서,신의 자연으로부터 개체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는 것은 우리 개체를 고려하면서 이다. (165)
이런 방식으로부터 인식되는 것, 그것은 모든 지속으로부터 영원하고 독립적인 삶에 이른다. 영원한 삶은 신체 이후에 영혼의 잔존이, 즉 불멸성이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신체의 관념이기에, 신체 자체가 지속에서 현존하는 그만큼 오랫동안만 지속에서 현존할 수 있다. 그러면 영혼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사람들은 인간이 자기의 고유한 자연으로부터 이루어진 관념의 세 가지 찰나들을 재현하리다: 즉 우선 유한하고 특이한 존재이다(첫째 종류), 이어서 이 존재는 마치 보편적 필연 속에 흡수되는 것처럼 보인다(둘째 종류), 그리고 존재는 마치 특이한 존재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영원한 존재처럼 새로이 나타난다. 따라서윤리학이 우리에게 참석하게 하는 것은특이한 존재의 일종의 변모(transfiguration)에서, 즉 지속으로부터 영원으로 존재의 이행 속에 이다. 거기에 데카르트의 정신과는 완전히 낯선 어떤 것이 있으며, 데카르트가 신학자들에게 이런 종류의 문제들 넘겨준 것이며, 그 어떤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 사유에서 발견했던 모든 난점들은 이런 근본적 분화(la divergence)로부터 온다. 데카르트가 신과 유한한 존재들과 연관에서 신의 속성을 제1평면으로 놓았다. 그 신의 속성은 창조적 의지이자 섭리적인 의지이다. 신은 영원한 진리들의 창조자 자체이며, 그의 진실성에 의해 명증성의 기준의 보증자이다. 신은 운동의 항구성(constance)을 보장하고, 새로운 작동에 의해 매 순간에 세계를 창조한다. 신은 인간의 선을 위하여 영혼과 신체의 통합을 설립한다(instituer). 그 만큼의 특징들(traits)이 있으며, 이 특징들을 통해서 신로부터 유한하고 특이한 존재의 자연을 연역하는 것이 불가능성이라고 주장되었고, 그리고 따라서 영혼과 신의 통합에 관한 모든 것을, 마치 초자연적인 숙명인 것처럼, 신앙에게 남겨두는 것이 필연성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또한 그만큼 특징들은 스피노자에 의해 매우 생생하게 비판받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결론을 내기에 서두르지 않아는다. 데카르트의 신학과 형이상학은 고찰하는 대신에, 사람들은 그의 방법을 생각하고 또한 그가 자기의 기하학과 자기의 물리학에서 이 방법으로부터 만들었던 응용방식들을 생각한다. 이 방법의 본질적인 것은, 보편자를 한쪽에 젖혀두고서, 특이한 사물들로부터 특이한 사물들로 직관과 연역에 의해 오로지 [절차에 따라] 진행하는 것이었다. 특히 물리학에서, 적어도 이론적으로 그의 설명이, 즉 자연, 천체들, 인간의 특이한 물체들에 대한 설명이, 어떠한 알 수 없는 잔재로도 남지 않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감각적인 것에서 어떠한 출발점도 갖지 않는 물리학에 의해서, 이렇게 다루어지고 취급되는 이런 물체적 개체가 마치 전적으로 알 수 있는 관계들의 그물망처럼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 (166)
따라서 이런 표지판들(ces indications, 지시들)을 따라가 보자. 사람들은 어떻게 스피노자가 시간으로부터 영원성으로 이행할 수 있는지를 자문한다. 그러나 이런 이행은, 이행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행이 둘째 종류의 인식과 공통 용어들의 인식을 사용하기 사작하는 찰나에 이미 만들어진 사물이다.왜냐하면 이법(raison)을 사용하는 것, 그것은 이미 사물들을 영원성의 어떤 형식 하에서(une certaine forme d’éternité, sub quadam aeternitatis specie)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말하자면, 시간에서 영원성으로 “이행”은 전혀 없다. 스피노자는 그것을 형식적으로 말한다. “사물들을 셋째 종류의 인식으로 인식하려는 욕망은 첫째 종류의 인식으로 생겨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오성개선론의 특징은, 추리적 인식이 마치 출발점인 것처럼 제시한다. 그 출발점에 영혼은, 거기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까 걱정함이 없이, 단번에 자리를 차지해야만 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덧붙인다. “그러나 그것[출발점]은 둘째 종류의 인식으로부터 태어나게 할 수 있다.”(V, 28) 반대로 이것은 그가,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용어들에 의해 영원성의 어떤 형식 하에서인식[개념작업]과 영원한 삶 또는 영원의 관점 아래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우리 자신의 인식[직관]사이에, 완전한 연속성을 인정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지적한 것을 다시 읽어야 하는데, 정신적 삶은 스피노자에 의해 마치 잃어버린 기원의 상태로 회귀처럼 생각해서 안 되고, 오히려 마치 방법적 진행처럼 읽어야 한다. 이 방법적 진행은 우리를 불완전한 인식에서 완전한 인식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한 인식에서 이로부터 연역된 다른 인식으로 우리를 이행하게 하는 것이다. 이법의 공통 용어들은 연역의 근원들이다. 신의 관념으로부터 무한한 속성들의 무한성이 연역된다. 각각의 속성으로부터 무한한 양태들이 연역되며, 이는 사유 속에서 무한한 예지(l’intellect)와 너비 속에서 항구적 운동과 같다. 특이한 사물들을 향해 각 발자국으로 나가가는 것은 진행으로부터이지, 이법이 만들어 놓은 무기력한 공통용어들로부터가 아니다. 그리고 우선 연역은 여기서 멈추는 것 같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지속 속에서 현존하는 유한한 양태들을 속성들의 절재적 자연으로부터 연역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처럼 영혼과 신체로 되어 있는 특이한 존재가 거주하는 것은 이런 유한 양태들에서 이다. 그러나 윤리학의 제5부는 정확하게 그것인 전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연역은 계속하면서 우리를 특이한 동일 존재들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제시한다. 그러나 특이한 동일 존재들은 아주 다른 종류의 현존을 [천성적으로] 가지고 태어났으며, 지속 속에서가 아니라 영원의 관점 아래에서인식된다는 것이다. 개체는 일종의 암흑상태의 이것임(quiddité ténébreuse, 무지의 ‘이뭣꼬’)이 아니다. 사람들은, 신체적 개체가 알 수 있고 고정된 운동 연관에 의해 정의되었던 것을 보았다(II, 13 뒤에 정의).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지속 속에서 그의 현존을 생각함이 없이, 이 연관을 그 자체로 고려한다면, 사람들은 이 연관을 그것의 영원한 본질에서 파악하는데, 운동의 법칙들이라는 너비의 무한 양태로부턴 나온 필연적인 귀결의 자격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만일 영온 신체의 관념이라면, 따라서 현실적으로 현존하는 신체가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영혼의 어떤 것이, 즉 영원한 어떤 것이, 남아있어야”(V, 23)만 한다. 말하자면 무한한 예지 또는 신의 예지로부터 영원히 흘러나오는 영혼의 본질이 남아있어야 하며, 즉 마치 영혼의 신체가 너비 속에서 운동의 법칙들로부터 흘러나오듯이 사유의 무한한 양태가 남아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영원하다는 것을 느끼고 경험한다.”(V, 23, 부명제), 그러나 이러한 증명들이라는 것은 “영혼의 눈들”에 의해서 이다. (168)
영혼의 영원한 삶은 마치 본질의 원리로부터 이런 본질의 내적인 전개인 것과 같다. 이런 본질을 인식한다는 것, 그것은 이 원리를 더 잘 인식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들이 기하적 존재를, 정의로부터 더 많은 귀결들을 연역하는 것보다 더 많이 아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개별적 사물들을 더 많이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더 신을 이해해한다.”(V, 24) 따라서 이런 셋째 종류의 인식은 영혼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인식이다. 이 인식은 영혼에게 영원한 환희를 주며, 지복에 도달한다. 환희는 마치 신의 원인에 연관되듯이, 신에 연관되어 있다. 이 원인에서부터 영혼 속에서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이 태어난다. 영혼이 신에게서 체득한 사랑, 그리고 그것의 본질에 접속되어 있는 사랑은 그자체로 원인을 위하여 신을 갖는다. 이런 이유로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하며, 무하한 지적인 사랑으로 그 자체가 사랑 받는다. 영혼이 신을 위하여 갖는 사랑은 자기를 위한 신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사랑은 어떠 면에서는 신의 부분이다. 이런 환희와 이런 사랑은 수동성이 전혀 없는 감화작용들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자기의 자연에 의하여, 감화작용들의 적합한 원인이다. 그럼에도 이런 감화작용들의 토대는, 수동적 감화작용들이 생산한다고 우리가 보았던 코나투스(노력)와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존재의 본질을 구성하는 코나투스는, 지속의 어떠한 제한도 없이 존재를 제시하는 순수 긍정이다. 모든 규정작용은 부정적(omnis determinatio negatio)이라는 제2부의 정식에 대해, 개별적인 본질은 긍정적(essentia particularis affirmativa]이라는 제5부의 정식을 대립시킨다.규정성[규정작용]이 부정이라는 것은 존재에게 경계를 긋는 것인데, 그 존재의 경계는 그 속에 자기 이유(raison, 근거)를 갖지 않는데 말이다. 긍정적인 특이한 사물은 그 자체로 이해되는 사물이다. 왜냐하면 이기적으로 그 자체에 굴복하는 것을 그치게되면, 특이한 사물은 자기의 특이성 자체에서 자기가 우주(l’univers)[자연]에 의존함을 본다. (168) (57LKG)
7절 긍정(실증) 종교와 정치학 Religion positive et politique 169-172.
명석 판명한 인식들 위에 정초된 영원한 삶과 종교가 가르치는 구원의 길들사이에서 스피노자는 신학 정치론에서 대비를 고발했다. 구원의 길들에게, 그는 철학이 그에게 발견하게 했던 가치와 동등할 듯이 보이는 가치를 부여했다. 신념자는 마치 철학자들처럼 구출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부터 그 유명한 신학 정치론이 불러일으켰던, 이 작품의 출현에서부터, 아우성들(les clameurs, 소송행위들)이 나오게 된다. 종교들이 통합하고 있었던 이 두 가지 사실들을 스피노자는 엄격하게 각각 따로 떼어 놓았다. 두 가지란, 진리의 교육과 따라야 할 품행의 규칙들. 이런 이유로 종교들은 그들의 성스런 경전들을 마치 명령[계명들]의 일체인 것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마치 신의 자연에 관한, 그리고 신이 세계와 인간의 연관들에 관한 계시처럼, 그리고 또한 신 자체에서 오는 계시처럼 간주하였다. 이로부터 인간들 사이에 연민과 사랑을 권장하는 종교 이외에도, 신학이 태어난다. 이 신학은, 경전들에서 소위 말하는 신적 계시의 권위에 지지를 받아서, 모든 정념들이, 후회가, 질투가, 분노가, 연민이 신에 속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틀림없이 유대인 필론(Philon le Juif, 전20-후45)이 모델로 세웠던유비적 방법 덕분에, 신학자들은 매우 충격적인 표현들을 글자적 의미에서 다루지 않는데 오랜 이래로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 중의 절반 정도는 이미지와 관념 사이에(첫째 인식과 둘째 인식) 이행과 닮음의 연관 가정하였다. 그런데 이런 이행과 닮음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정신에 대각선적으로 대립되었다. 경전에 쓰여진 것들에 대한 스피노자가 행한 주석 속에서, 그가 해석에서 돋보이게 한 능력있는 이미지들이(영혼-숨결, 천사들의 신화, 신적 출현들), 그가 보기에는, 모세와 선각자들이 세속인을 능가하는 그들의 위신을 자신들의 상상작용에 힘입었다는 것을 증명하였으며, 그러나 이들[선각자들]이 감관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했고, 신적 사물들에 대한 최소한의 명석 판명한 인식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시간 속에 시작이 있고 또 전달되는 개별적인 법칙들을 한 인간에게만 또는 한 민족에게만 부여하는 것은 신의 자연에 직접적으로 반대이라는 것이다. 신의 자연으로부터는 영원한 귀결들이 연역될 수 있다. 아담에게 행한 과일을 먹는 것을 금지한 것은, “오직 아담에게 연관해서만, 그리고 그의 인식의 결함의 원인에 연관해서만 법률[율법]이었다.” 또한 이 때문에 신은 모세에게 군주로서 법률을 제정할 것을 자기 스스로 보여주었다. 만일 신이 그에게 무매개적으로 말했더라면, 그는 “십계명을 법률[율법]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진리로서 지각했을 것이다.”스피노자의 주석은, 시몽(Richard Simon, 1638–1712)의 시론보다 더 급진적이라 할지라도, 순수하게 경전의 문학적인 주석의 첫 시론이다.따라서 그는 규율들 그것들-자체인 내용에 전혀 도달하지 못하였으나, 이법들에 도달한다. 사람들은 이법들을 그것들[규율들] 덕분에 가치있게 한다. (170)
경전 또는 복음의 이야기들의 가치와 이것들이 포함하는 규율들의 가치 사이에서 분열현상은, 게다가 사람들 보았다 시피, 스피노자적인 공감을 가졌던 종교적 환경들 속에서 완전히 습관적이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소치니파의 정신으로부터 활성화되었다. 소치니파의 정신은 종교를 신학적 교육 전체로부터 불온한 부분을 몰아내고 또한 자연적 빛에 부합하는 규율들만을 받아들이는데 있다. 게다가 모든 사람들은 경전 자체 속에서 자기들의 견해들에게 보장해주는 많은 구절들을 발견했다. 따라서 여기서 스피노자는 아무 것도 구축하지 않고, 오히려 그는 자기 눈으로 본 구원의 종교를 가졌다. 그 종교에서 구원하는 신앙은 신의 관념과 신으로부터 연역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왕처럼 생각된 신, 그 신의 질서들에게 복종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신념에 있다. 그가 가치를 충만하게 인정한 것은 신앙이다. 윤리학의 마지막에서 그는 “종교”가, 그의 철학이 연대를 확립한 것과 같은, 영원한 삶의 인식과 연대적이 아니라고 증명했다. “우리 영혼이 영원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없을 것이라는 바로 그때, 우리는 종교심(piété)과종교 같은 것을, 한마디로 영혼의 끈질김(intrépidité, 대담)과 관대함(générositém, 용맹)에 연관되어 있는 모든 것을, 마치 인간적 삶의 초기 대상들처럼, 생각하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V, 41.) 신학정치론에서는 더 멀리 나갈 것인데, 왜냐하면, 둘째 종류의 인식이 없을 지라도, 복종의 실천적인 단순한 태도에 의해서, 그는 구원이 가능하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170)
구원하는 이런 신앙의 이론은, 스피노자가 자기 주변에서 보았던 것과 아주 잘 일치하는 신앙 이론은, 그의 철학의 일체와 동등하게 화해하게 되는가? 로(F. Rauh, 1861-1909)가 주목하기를, 인간오성을 신적 오성과 분리하는 무한한 거리 때문에, 인간오성은 그에게[인간에게] 이해할 수 없는 구원의 여러 길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주목했는데, 윤리학에서 조차 구원은 인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에 연결되어 있는 환희의 감화작용과 지복 속에 있다는 것이며, 그리고 사람들이 감화작용과 지복을 마치 다른 조건들에 연결된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스피노자는 자기의 주변에 철학과 독립적인 종교적 삶의 경험을 가졌다. 그런데 그가 이런 경험을 마치 불가지성(인식할 수 없는 것)의 근원처럼 비판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경험의 가치를 마치 확실성의 근원처럼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학 정치론 전체가 이런 경험 속에서 긍정이 있다는 것과, 인간적 오류들이 거기[경험]에 덧붙여졌다는 것을 따로 구별하는데 있다. 따로 구별이란, 철학이 신으로부터 받았던 적합한 관념들 덕분에 이루어진다. 스피노자주의는 종교적 경험의 가치와 완전하게 양립할 수 있다. (171)
사정이 어째든 간에, 본다는 이런 방식은, 네덜란드 공화국에 널리 퍼져있던 관용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왜냐하면 이 방식은 이론적 신념들로부터 또는 공동체들을 분리시키는 의례들로부터 종교를 독립적이게 한다. 그 자체로서 국가는 이런 또는 저런 신념을 위하여 편이 되지 않는다. 국가는 사유하는 자유의 보호자이다. 거기에 스피노자의 정치적 근본적인 관점이 있다. 우리기 저 위해서 보았듯이, 스피노자는 홉스의 방식으로 사회의 기원을 묘사했다. 그러나 홉스는 개인적 권리들의 무화로, 그리고 국가의 제한없는 지배권으로 결론을 내린 반면에, 스피노자는 정의와 불의의 협약적 개념작업에 근거하는 시민권을 제도화하면서, 개인의 자연권을 제거하지 않는 자유로운 국가에 이른다. 스피노자의 출발점은 겉보기에도 불구하고 홉스 것과 전혀 동일하지 않다. 정념에 의해 함축되어 있는 존재 안에서 보존하려는 노력은,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그 노력이 추리적인 되었을 때 이런 노력과 동일한 것이다. 또는 홉스의 언어를 말하기기 위한 노력은, 이법에 의해 인도된 인간들 사이에 일치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을 격분시키는 힘들과 동일한 힘들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국가는 폭력에 의해 이 힘들을 제거하지 않아야 한다. 국가의 모든 역할은, 정념들의 분쟁들이 파괴적이 되는 것을 말기 위하여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사용하는 데 있다. 그러나 국가는, 바로 그 때문에 이 분쟁들을 직접적으로 생산하지 않고서, 인간들을 통합하는 추론적인 감화작용들을 조장할 수 있다. 이로부터 다음에 이른다, 만일 국가가 폭력을 사용한다면, 또는 국가 시민들 사이에 증오를 자극한다면, 개체들은 이 국가를 판단하고 스스로 봉기할 권리를 갖는다.조국의 혁명을 막기으려는 구상을 가지고 썼던 홉스의 결론과 대각선적으로[모순관계로] 반대되는 결론이 나온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오렌지파에 의해 권력의 찬탈 이후에도, 장 드 비트(Jean de Witt, 1625-1672 [마흔일곱])의 자유로운 정부의 찬성자로 남을 것이다. (172) (57LKI)
8절 스피노자주의자들과 반스피노자주의자들 Spinozistes et Antispinozistes 172-173
스피노자주의는 홀란드에서 본질적으로 종교 운동으로서, 즉 종파 운동으로서 남아있었다.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인 반 렌호프(Van Leenhof, 1647–1715)와 반 하템(Van Hattem, 1641–1706)은 세속화한 저작들 속에서, 지복과 영원한 삶에 관한 스피노자의 생각들을 퍼트렸다. 반 렌호프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신의 영원한 질서 속에서 수고들의 필연을 생각할 때, 사람들이 자기 고뇌들의 적합합 관념을 얻을 수 있을 때, 수고들은 수고들이 더 이상 아니며, 오히려 자연의 질서에 대한 관조들이다. 이 관조들은 그 자체들 속에 항상 만족을 포함하고 있다.”스피노자의 종파는 신학자들에 의해 엄격하게 추구되었다.
학설은 철학자들에게서 더 이상 우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데카르트주의자들은 데카르트에게서 “스피노자주의의 씨앗들”을 보는 라이프니츠 고발들[규탄]과 같은 규탄들을 퍼뜨리데 특히 핵심이었다. 사람들이 베르세(Noël Aubert de Versé, 1650–1714)의 저작, 확신하는 불경건, 스피노자에 반대하는 논문으로 그의 무신론의 토대들을 반박함(L'impie convaincu, ou Dissertation contre Spinosa. Dans laquelle on refute les fondemens de son athéisme, 1684)속에서 고발들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이 작품 속에서 스피노자의 불경건한 격률들뿐만 아니라, 스피노자주의의 기원이 될 법한 데카르트주의의 중요 가설들의 반박을 발견했다(1684). 이 가설들은 너비-실체와 연속된 창조의 가설들이다. 또한 데카르트주의자들의 반박들은 중단 없이 이어졌다. 반박문들로는, 비티키우스(Wittichius, 1625-1687)의 스피노자 반대(Anti-Spinoza. 1690), 쁘와레(Pierre Poiret, 1646-1719)의 신, 영혼, 악에 대한 추론적 사유들(Cogitationes rationales de Deo, anima et malo, 1685)의 제2판에 실린 전복된 무신론자의 기초(Fundamenta atheismi eversa)[1731], 레지스(Régis, 1632-1707)의 이법과 신앙의 용법(L'usage de la raison et de la foi)에 이어지는 스피노자 견해에 대한 반박: 신의 본성과 현존(Réfutation de l'opinion de Spinoza touchant l'existence et la nature de Dieu)[1704], 베네딕트 수도사인 라미(François Lamy, 1636-1711)의 전복된 새로운 무신론(Le Nouvel Athéisme renversé, ou réfutation du système de Spinoza, 1696)(이는 대부분 진리와 인간의 인식 부분에서 끌어낸 것이다) 등이 있다. (173)
그러나 비판과 관용의 정신의 예고자인 벨(Bayle)같은 이의 반스피노자주의는 라이프니츠, 말브랑쉬, 페늘롱과 반스피노자주의보다 덜한 것이 아니다. 벨의 역사적 비평 사전, 1697에서는 얼마나 많은 각주들이 있는가, 즉 주들에서는 “체계적인 무신론자”, “무신론을 체계적으로 환원했던 첫째 무신론자”, 신이 너비의 주체이며 따라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자, 모순의 원리를 부정한자로서 신은 반대되는 양태들의 주체이라고 말하는 자, 도덕을 부정하는 자이다(왜냐하면 독일인들이 수만 명의 터키인들을 죽였고 말하지 않고, 독일인으로 변모된 신이 수만 명의 터키인으로 변모된 신을 죽였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벨의 분개는 볼테르에게로 심지어는 백과전서파에로 이행되었도다! 스피노자에 관한 주의를 상기하기 위하여 독일의 낭만주의 운동이 필요했다. (173)
사실상 쁘와레는 자신의 「스피노자에 대항하여 전투하는 벨의 허구에 대하여(De fictoBaylii adversus Spinozam certamine[1715])」에서, 젠 체하는[가식된] 이런 분노를 고발했다. 사실상 그의 항목의 각주 0에서, 벨은 스피노자 체계의 기원을, 마니교도들이 원리의 통일성에 반대하여 악의 현존으로부터 끌어내었던 반대견해들에게 부여한다. 이런 반대들은, 마니교도들도 주목했듯이, 마치 스피노자에게서처럼, 만일 이 원리가 무한한 원리의 권능에 의해 작동하는 필연적 원인이라면, 가치 없는 것이다. 그 반대들이 그것들의 전체적 힘을 갖는 경우는, 만일 이 원리가 섭리 같은 자연(une nature providentielle)일 경우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주의 경우는, 특히 원리에게, 마니교에 대한 반대들의 힘을 가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소위 말해서 스피노자에 대해 다른 반박들, 즉 동료파(Collegiants)인 브레덴부르크(Bredenburg, 1643–1691)의 신학 정치론의 허약함(Enervatio tractatus theologica-politici, 1675)과 백작 불랑비이에(comte de Boulainvilliers, 1658-1722)의 스피노자 오류들에 대한 반박(Réfutation de erreurs de Benoît Spinoza)(1693)은 학설을 이해하게 하려고 숙명적으로 짜여진, 변장된 호교론[변신론]으로 이행할 수 있다. (173) (29:22, 57LKJ)
# 참고문헌 Bibliographie 173-175.
Editions et études d’ensmble.
Benedicti de Spinoza, Opera quotquot reperta sunt, recognoveruntJ. Van Vloten et J. P. N. Land (2 vol., La Haye, 1883, 1884), édition minor en 3 volumes, 1895, en 4 volumes, 1914.
Spinoza, Werke, éd. C. Hebhardt, 4 vol., Heidelberg, 1923.
Oeuvres de Spinoza, traduites et annotées par Ch. Appuhn, tome I (Cour traité: Réforme de l’entendement; Philosophie de Descartes, Pensées métaphysiques), tome II (l’Ethique avec le texte latin); tome III (Théologicopolitique), Paris, 1904; Traité politique et Correspondance, 1929.
Oeuvres, traduites par Roland Caillois, M. Francès, R. Misrahi, Paris,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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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WMI) (16:31, 57LLI)
첫댓글 # 8절의 2로서 후대의 영향에 대한 소견을 보탠다면.
브레이어의 이 글(4장)에서, 스피노자에게 플로티노스의 영향이 거의 없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다음 8장의 라이프니츠에서는 플로티노스의 영향을 여러 번 표현하고 잇다. 나로서는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의 강의록을 읽었을 때, 벩송이 설명하듯이, 스피노자의 연역적 체계와 달리 라이프니츠의 개체성에 대한 논의가 플로티누스에 더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왜 스티노자에게 플로티노스의 영향이라고 설명했을까? - 유일 신앙자와 크리스토스 신봉자들의 고의적 착오였을까? 아니면, 스피노자의 세파라드를 강조하기였을까? - 어쩌면 그리스철학의 우주발생론과 우주론의 차이가 있듯이, 스피노자에게는 우주론의 선전제 속에서 자연의 풀림을 설명했다면, 라이프니츠는 우주발생론의 측면에서 자연의 풀림과 감김 또는 생성과 소멸을 염두에 두고 전체 자연과 개별적 사물들의 관계를 설명했을 것이다.
(위를 이어서) 라이프니츠 시대까지도 생명의 유전과 진화를 몰랐지만, 자연에는 압축의 확장(ex-pression)과 긴장의 확장(ex-tension)과 달리, 개체들 각각에 힘(에너지)의 임의작[자율절] 활동이 있어서 접힘(plie)과 풀림의 이중적 활동성(생명성까지는 아니지만)과 같은 접힘의 풀림(ex-plication)이 있다고 여기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들뢰즈가 스피노자에 대해 단행본을 내면서 표현(expression, 압축의 풀어짐)에 주목했는데, 나중에 라이프니츠에 관한 단행본에서 접힘(주름)에 주목하면서 설명(explication, 주름의 풀림과 감)에 대해 서술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벩송이 스피노자보다 라이프니츠에게서 우주발생론을 보듯이,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에서 발명, 창안, 창발을 보았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는가? (57L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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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발생론은 동적인데 비해 우주론은 정적이다.
영원의 상하에서는 설명은 공시태적이고 지속의 상하에서는 통시태적이다.
우주론을 공시태적으로 파악하면, 프로이트와 라깡의 기나긴 이야기(파라독사)들이 풀어질 것이고
우주발생론을 통시태로 사유하면, 벩송과 들뢰즈의 생성과 과정, 그리고 자연회귀가 느껴질 것이다. (57LM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