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상순(10수)
하루시조 305
11 01
어제런지 그제런지
무명씨(無名氏) 지음
어제런지 그제런지 밤이런지 낮이런지
어드러로 가다가 눌이런지 만났던지
오늘은 너를 만났으니 긔 네런가 하노라
눌이런지 – 누구인가를.
긔 네런가 – 그가 너이런가.
~런지 – ~던지. 요즘은 ‘~던지’와 ‘~든지’를 구별하여, 과거형시제 ‘던’과 선택형 ‘든’으로 구별하지만, ‘~런지’를 쓰던 때는 이런 구별이 없었군요.
조금은 언어유희 같이 ‘런지’의 반복이 운율을 살리고 있습니다.
부평초(浮萍草) 같은 인생, 누구를 만나든지 ‘그’요 또 ‘너’랍니다. 이런 망할. 노래하는 입장에서야 그가 그고 또 네가 네이니 구별할 필요도 없이 좋을는지 몰라도, 글쎄요 그 상대의 입장에서는 ‘나’는 ‘나’이고 싶지 않을까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06
11 02
가노라 하직 마라
무명씨(無名氏) 지음
가노라 하직(下直) 마라 일촌(一寸)간장(肝腸) 다 스노매
그대는 창기(娼妓)라 돌아서면 잊으려니
나는 필부(匹夫)인 탓으로 잊을 줄이 있으랴
하직(下直) - 하직 인사. 먼 길을 떠날 때 웃어른께 작별을 고하는 것.
스노매 – 쓰라리나니.
창기(娼妓) - 몸을 파는 천한 기생.
필부(匹夫) - 한 사람의 남자. 신분이 낮고 보잘것없는 사내.
한 보잘것없는 사내가 몸 파는 천한 기생을 향해 애간장이 쓰리다며 하소연이 너절합니다. 천하를 호령할 장부가 아니라고 자신을 낮추면서, 너야 돌아서면 잊겠지마는 나는야 잊지를 못할 것이다, 여느 작품 속 이야기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런데 상황을 조선시대로 돌려보면, 기생을 첩으로 앉히면 될 터인데 그럴 형편이 못 되는 사내이다 보니 막상 헤어지려니 속깨나 썩는구나 싶습니다. 별리를 통해 작품 속 사내의 인생은 분명 한 걸음 더 나아갔겠지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07
11 03
가더니 잊은 양하여
무명씨(無名氏) 지음
가더니 잊은 양하여 꿈에도 아니 뵈니
설마 님이야 그 덧에 잊었으랴
내 생각 아쉬운 전차로 님의 탓을 삼노라
덧 - 얼마 안 되는 퍽 짧은 시간.
전차 - 말이나 글에서의 짜인 차례나 조리. 까닭.
꿈에 뵈이다. 만날 수 없는 사이에 공간을 뛰어넘는 마법(魔法)입니다. 상대가 살았거나 혹은 죽었더라도 뵈인다죠. ‘보인다’고 하지 않고 슬쩍 비틀어서 ‘뵈인다’고 하는 우리말 매력인데, 저 어릴 적 할머니는 꿈에 그가 했다는 말까지도 주섬주섬 섬겼더랍니다. 저는 그동안 보고 싶은 사람 꿈은 여러 번 꾼 것 같은데, 기억나게 들은 말은 거의 없습니다.
한번 헤어진 님은 꿈에 안 뵈이는 게 더욱 좋을 것입니다. 깨어서 곁에 없으니 허탈하고, 오지도 않을 것이니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하니까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08
11 04
가뜩이 저는 나귀
무명씨(無名氏) 지음
가뜩이 저는 나귀 채 주어 몰지 마라
서산(西山)에 해 지다 달 아니 돋아오랴
가다가 주사(酒肆)에 들면 갈동말동 하여라
가뜩이 – 가뜩이나. 그러지 않아도 매우.
절다 - 한쪽 다리가 짧거나 다쳐서 걸을 때에 몸을 한쪽으로 기우뚱거리다.
나귀 – 당나귀. 말과의 포유류. 말과 비슷한데 몸은 작고 앞머리의 긴 털이 없으며 귀가 길다. 털빛은 대부분 누런 갈색 · 잿빛 황색 · 잿빛 흑색이며, 어깨 · 다리에 짙은 줄무늬가 있고 허리뼈가 다섯 개이다. 병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여 부리기에 적당하다. 아프리카의 야생종을 가축화한 것으로 전 세계에 분포한다.
채 – 채찍.
해 지다 – 해 진다한들.
주사(酒肆) - 주루(酒樓). 술 파는 집.
뭐 그리 바삐 갈 것 있나, 더구나 타고 가는 나귀한테 채찍질 해가면서까지 서둘지 마시게나. 남에게 하는 말 같지 않고 스스로에게 권면하듯 하는 말 같아서 더욱 친근한 작품입니다. 해가 지면야 아쉬운 대로 달도 뜰 것이고, 여차하면 하룻밤 자고 갈 수도 있다는군요. 주루에 술맛이 좋다면 아주 좋은 핑계가 될 것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09
11 05
가을 다 거두어들인
무명씨(無名氏) 지음
가을 다 거두어들인 센 할아비 눈비 오다 배 곯으랴
지는 잎 거두쓸어 자는 구들 덮게 찟고
그 밖에 여남은 일이야 구할 줄이 있으랴
센 – 머리가 희어진.
눈비 오다 – 눈 비 온다 한들.
거두쓸어 – 쓸어 모아. 거두어.
찟고 – 찌고.
여남은 - 열이 조금 넘는 수의. 여기서는 ‘자잘한’ ‘자질구레한’의 뜻도 있다.
가을걷이를 마친 한 늙은이의 여유 있는 마음가짐이 읽힙니다. 눈비 온들 배 곯을 일 없고, 구들장 뜻뜻하니 등 따실 일만 남았습니다. 안분지족(安分知足) 따위의 거창한 표현은 한옹(閑翁)의 것이 아니요, 한겨울 거뜬히 나겠거니 안심(安心)하는. 그 곁에 가만히 있고 싶어집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10
11 06
간밤에 궂은비는
무명씨(無名氏) 지음
간밤에 궂은비는 상사(相思)로 단장(丹粧)하고
오늘날 낙엽성(落葉聲)에 출문망(出門望)이 몇 번인고
아마도 유정(有情) 가랑은 일시난망(一時難望)
상사(相思) - 서로 생각하고 그리워함.
단장(丹粧) - 얼굴, 머리, 옷차림 따위를 곱게 꾸밈.
낙엽성(落葉聲) - 낙엽 지는 소리.
출문망(出門望) - 문을 나가고자 하는 바람.
유정(有情) - 인정이나 동정심이 있음.
가랑(佳郞) - 아름다운 사내. 정들었던 님.
일시난망(一時難望) - 잠시 동안 바라기 어려움.
단장이며 가랑 등의 용어로 보아 지은이는 여성이 분명합니다.
초장에 가을에 꾸준히 오는 비 곧 궂은비를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곱게 꾸몄다는 표현이 절창(絶唱)입니다. 만나고 싶은 마음을 절절히 표현한 것이지요.
장절(章節)마다 등장하는 한자어가 먹물깨나 든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종장 끝구의 생략은 시조 창법(唱法)에 의한 것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11
11 07
간밤에 꿈도 좋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간밤에 꿈도 좋고 아침에 까지 일 울더니
반가운 자네를 보려하고 그렇다세
반갑다 반갑다밖에 하올 말이 없어라
간밤 - 바로 어젯밤. 지난밤.
까치 – 희작(喜鵲)이라 하여,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는 길조(吉鳥)로 여겼다.
일 – 일찍부터.
자네 - 듣는 이가 친구나 아랫사람인 경우, 그 사람을 대우하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하게할 자리에 쓴다. 사위를 부르거나 이를 때, 또는 아내의 남동생을 부르거나 이를 때도 쓸 수 있다.
그렇다세 – 그런 것 같구만.
이 작품을 ‘반갑다’가 반복될 뿐 내용이 빈약하다고 태작(太作)으로 분류하는 우(愚)를 범하면 안 된다. 그건 작품 속 상대방 ‘자네’를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전적 풀이에서처럼 벗이나 친구로 볼 것이 아니다. 친근하기 짝이 없는 배우자나 짝이라고 보면 좋겠다. 상대를 ‘자기(自己)’라고 지칭 호칭하는 경우처럼 연인을 자네라 썼다면, 기실 반갑고 또 반갑다만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종장의 ‘하올 말’에 들어 있는 경어(敬語) 기운을 주장의 근거로 삼는 바이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12
11 08
갈건을 젓겨 쓰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갈건(葛巾)을 젓겨 쓰고 죽리(竹裏)에 혼자 앉아
냉랭(冷冷) 칠현금(七絃琴)을 한가(閑暇)히 짚었으니
산조(山鳥)도 지음(知音)하는지 오락가락 하더라
갈건(葛巾) - 갈포(葛布)로 만든 두건(頭巾).
젓겨 쓰다 – 비스듬하게 쓰다.
죽리(竹裏) - 대 속. 대숲 안 또는 대울타리 친 집.
냉랭(冷冷) - 차디차다. 여기서는 맑디맑다 곧 악기의 음을 말하는 의성어(擬聲語)이다.
칠현금(七絃琴) - 일곱 줄로 된 고대 현악기의 하나. 오현금에 두 줄을 더한 것이다.
스스로를 대울타리 안에 가두고, 누군가를 조상(弔喪)하는지 갈건을 썼습니다. 칠현금 맑은 소리 짚어가며 시간을 보냅니다. 대나무 바람 타는 소리는 냉랭하되 칠현금 짚을 때마다 제 자리를 내어줍니다. 산새가 알아듣는지 왔다갔다 합니다. 산중(山中)거사(居士)의 담백하 일상이려니 싶으면서도, 산조(山鳥)를 초야에 묻힌 야생성 짙은 처자로 치환(置換)해 봅니다. 무명씨의 시조를 읽는 재미가 배가(倍加)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13
11 09
그러하거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그러하거니 어이 아니 그러하리
이리도 그러그러 저리도 그러그러
아마도 그러그러하니 한숨겨워 하노라
겹다 - 정도나 양이 지나쳐 참거나 견뎌 내기 어렵다. 감정이나 정서가 거세게 일어나 누를 수 없다.
‘거시기 뭣이냐’로 시작해서 ‘쪼까 거시기허제이’로 끝나는 ‘니 알고 내 알고 남은 몰라도 되고’식의 대화가 있습니다. 이 작품도 그러하다 저러하다 그러저러하다가 반복되면서 어찌저찌 음수율도 맞추어 한 편의 시조가 되었거늘,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난해(難解)하기 짝이 없습니다.
누군가는 이 말도 옳다 저 말도 옳다 곧 양시론(兩是論)에 빠져서 종내는 ‘한숨 겨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그럴싸한 해석을 내놓습니다만, 양시(兩是)나 양비(兩非)의 구별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하고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다 보니 겉잡을 수 없게 되었다로 해석하면 좋을 듯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14
11 10
그리다 만났거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그리다 만났거니 기쁠 만도 하건마는
다시금 생각하면 도로혀 슬희어라
두어라 습속(習俗)에 병든 바니 할 리 없어
도로혀 — 도리어.
슬희어라 – 슬프구나.
습속(習俗) - 습관이 된 풍속.
할 리 없어 – 어찌할 도리가 없어.
여느 상황과도 같이 여기 남자와 여자가 있습니다. 둘은 ‘그리다가’ 만나곤 합니다. 정인(情人)이긴 하되, 내연(內緣)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나긴 만났거늘 꼭 기쁘지만은 않은 것이, 초장에서는 판단을 유보했습니다. 중장에서는 둘의 만남이 오히려 슬프답니다. 종장의 이유가 습속 탓이며, 그 습속은 자신들에게는 타인들의 잣대가 사뭇 잘못된 ‘병든 바’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세간의 눈총을 피해가야 하는 은밀한 사랑의 당사자의 하소연은 오늘날의 개방된 사회에서는 ‘별 것’ 아닐 수도 있으려니, 생각을 뒤집어 봅니다.
종장 끝구의 생략은 시조 창법(唱法)에 의한 것으로 ‘하노라’ 정도가 될 것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세상은 유명인들의 것이다. 아닙니다. 무명인의 몫도 분명히 있습니다. 문화계도 패거리가 있어 끼리끼리 나눠먹는 풍습이 있다고는 합디다만 무명씨에 속하는 저 또한 이런 일로 시간을 저축하고 있지 않습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