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울꿀 꾸울, 꾸울꿀 꾸울”
멧돼지가 돼지감자 밭을 마구 헤집습니다. 울퉁불퉁하게 생긴 돼지감자가 땅위로 툭툭 튀어나옵니다. 신이 난 멧돼지는 돼지감자를 보이는 대로 마구 우적우적 씹어 먹습니다. 한 개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이 주둥이로 땅을 샅샅이 뒤집습니다.
애기돼지감자는 무서워서 온몸을 벌벌 떨었습니다. 내년 봄이면 엄마와 함께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생각에 설레던 애기돼지감자입니다.
“엄마, 무서워요!”
애기돼지감자가 엄마 손을 더 세게 꼭 잡았습니다. 손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얘야, 너무 무서워 말거라. 너는 작아서 멧돼지 눈에 띄지 않아 살아남을 수 있을 게다.”
엄마돼지감자는 무서움에 떠는 애기돼지감자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습니다.
“그럼 엄마는?”
애기돼지감자는 엄마의 그 말이 더 무서웠습니다. 엄마가 멧돼지 먹이가 되고 말 것이라는 말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설령 엄마 말대로 혼자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엄마 없는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생각도 못할 끔찍한 일입니다.
“얘야, 너무 슬퍼 말거라. 엄마도 작년에 그렇게 살아남아서 너 같은 예쁜 애기를 낳았잖니?”
“엄마!”
애기돼지감자는 무섭고도 슬펐습니다.
“얘야, 엄마는 괜찮다. 너 같은 예쁜 애기가 있으니까 말이다. 봄이 되어 땅속에 따뜻한 기운이 돌거든 부지런히 싹을 틔워 세상으로 나가거라. 그리고는 예쁜 꽃을 피워라. 세상은 아름답기 그지없단다.”
“꾸울꿀 꾸울, 꾸울꿀 꾸울”
멧돼지가 더 가까이 왔습니다. 흙이 들썩들썩 합니다.
“엄마!”
엄마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우적우적 멧돼지가 돼지감자를 게걸스럽게 먹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애기돼지감자는 멧돼지가 파헤친 흙 속에 깊이 파묻혔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꿀꿀거리며 주둥이로 흙을 헤집는 소리도 우적우적 씹어 먹는 무서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애기돼지감자는 용케도 살아남은 겁니다. 애기돼지감자는 슬픔을 잊으려고 눈을 꼭 감았습니다.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떼를 쓰던 지난 가을이 떠올랐습니다.
“엄마, 나는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
애기돼지감자가 엄마 몸뚱이에 찰싹 달라붙어 응석을 부렸습니다.
“그렇지만 얘야, 너도 그만큼 컸으니 이제 엄마 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혼자서라도 내년 봄을 맞을 수 있단다.”
엄마 돼지감자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애기돼지감자를 밀쳐내고는 긴 손을 뻗어 애기돼지감자를 꼭 붙잡아 주었습니다.
“싫어! 싫어! 나는 엄마를 꼭 안고만 있을 거야.”
애기돼지감자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밀쳐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엄마가 내민 손을 꼭 잡았습니다.
“내 예쁜 애기야, 이 손도 언젠가는 놓아야할 때가 온 단다. 그때도 무서워하지 말거라.”
애기 돼지감자는 엄마가 하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랬구나!’
봄이 왔습니다. 따뜻한 기운이 땅속 세상으로 스멀스멀 스며들었습니다. 돼지감자는 눈을 살포시 떴습니다. 땅속은 여전히 캄캄했습니다.
‘봄이 되어 땅속에 따뜻한 기운이 돌거든 부지런히 싹을 틔워 세상으로 나가거라. 그리고는 예쁜 꽃을 피워라. 세상은 아름답기 그지없단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하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엄마 알겠습니다.”
애기돼지감자는 슬픔을 꾹 참고 따뜻해진 땅속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뿌리가 길어지고 몸 여기저기서 뾰족한 새싹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애기돼지감자는 땅속 물기와 양분을 더 힘껏 빨아들였습니다.
“바작바작!”
단단하기만 하던 흙이 갈라졌습니다. 애기돼지감자는 아름다운 세상이 보고 싶어 고개를 살짝 땅밖으로 내밀었습니다.
“아이 눈 부셔!”
봄 햇빛이 너무 밝았습니다. 살며시 눈을 떠봤습니다. 파란 하늘이 보이고 눈부시게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습니다.
“이야, 정말 아름답다!”
따듯한 봄바람이 보드라운 애기돼지감자 새싹을 살살 간질이고 지나갔습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둘레를 둘러봤습니다. 여기서도 바작바작, 저기서도 바작바작 새싹 동무들이 땅을 헤집고 막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으쌰! 으쌰!”
애기돼지감자는 작은 몸을 살살 흔들며 응원을 보냈습니다.
세상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땅속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애기돼지감자는 쑥쑥 자랐습니다. 잎도 넓어지고 키도 훌쩍 자랐습니다. 어른돼지감자가 된 겁니다. 키가 높아지니 세상이 더 잘 보였습니다. 더 아름다웠습니다. 분홍색 진달래도 보이고, 노란 개나리도 보였습니다.
‘그래, 나도 예쁜 꽃을 피워야지.’
어른이 된 돼지감자 몸속에는 작은 꿈이 소복소복 담겼습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습니다. 돼지감자는 희망대로 노란 예쁜 꽃을 피웠습니다. 나비도 날아오고 벌들도 놀러왔습니다. 돼지감자는 너무너무 행복했습니다.
“흐흐흑 흐흐흑!”
어디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돼지감자는 고개를 쑥 빼고 이리저리 살폈습니다. 민지가 돼지감자 밭 옆에 있는 바위에 올라앉아 있습니다. 평소에 민지는 그 바위 위에 덩그러니 앉아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민지가 울고 있습니다. 양쪽 눈에 작은 눈물방울이 맺혀 있습니다. 두 손바닥을 가슴 앞에 모아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민지는 이 동네에서 딱 혼자뿐인 아이입니다. 민지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살았습니다. 엄마와 아빠 얼굴도 모릅니다. 얼굴도 모르니 그립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엄마와 아빠가 어떤 분인지 한 번만이라도 봤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도 더러 있기는 합니다.
“할머니 어서 무릎 나아서 오세요.”
돼지감자는 울음 섞인 민지의 자그마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돼지감자는 고개를 빼서 동구 밖을 살폈습니다. 병원에 간 민지 할머니를 기다리는 마음은 돼지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동구 밖은 아무것도 없어 휑하기만 합니다.
민지 할머니는 무릎 수술을 하려고 한 달 전에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돼지감자는 그날부터 기도를 했습니다. 어서 나아서 하루라도 빨리 외로운 민지에게 오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민지 할머니가 병원에 가기 전에는 불편한 무릎으로도 돼지감자가 있는 텃밭을 알뜰히 보살폈습니다. 민지도 할머니를 도와 일을 곧잘 했습니다.
‘민지야, 힘 내! 다 나아서 씩씩하게 걸어오시려고 늦어지는 거야. 아픈 무릎이 튼튼해지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리지 않겠어? 그러니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보자. 나는 어머니도 할머니도 없지만 이렇게 씩씩하게 자라서 꽃까지 피웠잖아. 민지야, 힘 내!’
돼지감자가 노란 꽃을 살래살래 흔들며 응원을 보냈습니다.
“부릉부르릉”
하루 두 번 다니는 마을버스가 왔습니다. 돼지감자는 고개를 빼서 얼른 마을버스 안은 살폈습니다. 민지 할머니는 없습니다. 큰 키를 더 늘여 마을버스 안 구석구석을 살폈습니다. 손님이 달랑 둘입니다. 며칠 전에 서울 아들네 집에 갔던 무섬 할아버지와 할머니입니다.
“삐이용 삐이용”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났습니다. 돼지감자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두 달 전에 119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삼동할머니가 생각나서입니다. 다행히 119구급차가 아니었습니다. 구급차와 비슷한 소리를 내면서 달려오는 오토바이였습니다.
“부웅부웅”
이번에는 택시입니다. 돼지감자는 긴장이 되었습니다. 민지도 바위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을 태우고 자주 오가는 택시입니다. 돼지감자는 고개를 더 길게 빼서 천천히 지나가는 택시 안을 살폈습니다. 민지 할머니가 타고 있었습니다. 돼지감자는 마음이 조마조마 했습니다. 정말 혼자서 씩씩하게 걸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할머니 조심해서 내리세요.”
택시 기사 아저씨가 차에서 내리는 할머니를 도왔습니다.
“괜찮아요.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민지 할머니가 택시 기사 아저씨 손을 살짝 밀어내면서 혼자서 택시에서 내렸습니다.
“할머니!”
민지가 달려가서 할머니 품에 안겼습니다.
“그래, 우리 강아지 혼자 힘들었제? 이제 할미는 괜찮다.”
할머니가 민지 등을 토닥여줬습니다.
‘얏호!’
돼지감자는 기뻤습니다. 때마침 지나가는 바람에 큰 키를 흔들며 흔들흔들 춤을 췄습니다. 돼지감자 노란 꽃에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살짝 웃음 짓는 민지 예쁜 얼굴이 돼지감자 꽃을 닮았습니다.
세상은 그지없이 아름다웠습니다. 뒷산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노랫소리도 아름다운 세상에 한 몫을 보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