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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잠언 15강
말씀 / 잠언 27:1-27절
요절 / 잠언 27:9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아름다우니라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오늘 말씀은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관계에서 오는 다양한 신호, '저 사람이런 말을 했는데, 나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차라리 나 홀로 사는 것이 낫겠다', 마음 먹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올바른 관계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올바른 관계는 마치 식물이 자라는데 농부의 손길이 필요하듯이, 많은 지혜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통해 올바른 관계를 맺어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왜 오늘 일을자랑하지 않고 이루어지지 않은 내일 일을 자랑하는 것입니까! 이루어지지 않은 일인데도 마치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능력에 자부심 더 나아가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자는 사랑받기 어렵습니다. 어떤 후배 의사는 정말 똑똑한 친구입니다. 생리 병리 진단과 치료, 질문하면 두루두루 술술 막히지 않고 나옵니다. 그런데 개원하는 곳마다 썰렁한,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를 얻고 있습니다. 병원 위치나 경영 전략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뻣뻣함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랑과 정성을 드린다는 드림스피릿이 아니라 ‘나 같은 고수를 만난 당신들은 행운아’라는 스피릿이 배여 있습니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자부심 나아가 교만이 걸림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진짜 고수는 타인이 나를 칭찬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타인이 나를 칭찬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나는 어떤 사람을 칭찬하는지를 돌아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혹시 ‘내 주변에는 칭찬할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절대 칭찬받을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은 이미 한없이 높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겸손할수록 칭찬할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내게 칭찬받을 길을 보여주는 선생입니다. 내 주위에 칭찬할 사람들이 많다면, 나에게 배울만한 사람들이 많으니 더 많이 그리고 더 빨리 성장할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는 타인을 배우기보다 분노하고 시기 질투합니다. ‘이 인간은 이래서 마음이 안들고 저 인간은 저래서 마음이 안들어!’, 분은 잔인하고 투기는 창수처럼 강력하여 인간관계를 사정없이 파괴합니다.(4) 분노와 투기는 사극에서만 볼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세계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한의원 원장님들의 고민이 그러합니다. 3사람 간호사가 모여 있으면 2사람이 팀 먹고 1사람을 따돌리는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화해시키느라 많은 에너지를 쓴다고 했습니다. 분노와 시기는 돌처럼 무거워 스스로 버리지 못합니다. 책망이나 회개를 통해 깨뜨리고 들어내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면책이란 ‘open rebuke'로서 공개적인 책망입니다. 은근히 돌려 까지 아니하고 얼굴 보며 참교육하는 것입니다. 면책은 책상위에 남몰래 초코파이를 올려놓는 숨은 사랑보다 훨씬 유익합니다. 공개 책망을 당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면책은 고통스럽습니다. 책망받는 사람도 힘들지만 책망하는 사람도 힘들 수 있습니다. 아끼는 마음이 클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때로는 관계성이 무너지고 원수처럼 틀어질 수 있기에 이를 악물어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친구로부터 책망을 들을 때, 나를 위한 충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반면 원수의 잦은 입맞춤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잦은 입맞춤이란 입발린 말입니다. 속으로는 판단하고 ‘쯪쯪’거리면서도 겉으로는 찬사를 날리는 사람이 있다면, 나를 망치는 원수입니다. 누가 나의 친구인지, 누가 나의 원수인지,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엮이지 말아야 할 자들과 엮여 크나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친구의 충직한 책망 자체가 내 인생을 바꾸어주는 보증수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는 쓴 것이라도 달게 느껴지는 것처럼, 듣는 자,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자세가 중요합니다.(7) 배부른 자, 소원 없는 사람은 대치동 일타강사를 일대일 과외로 붙여주어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충직한 책망을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를 아껴주는 고향을 버리고 유리하는 사람과 같습니다.(8) 하늘에 새가 떠돌아다니잖아요, 겉으로는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나 실은 정처없이 떠돌며 방랑하는 영혼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친구의 충성된 권고를 받아들이는 것은 기름과 향을 갖추는 것처럼 좋은 것입니다. 기름이 있어야 맛있는 요리를 먹을 수 있습니다. 향이 있어야 악취로부터 멀어집니다. 기름과 향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에는 지장은 없습니다. 맛이 없으면 어때, 악취가 나면 어때! 무시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삶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하는데 필수적입니다.(9) 기름의 중요성은 알겠는데, 향이 중요한 줄 얼마 전까지 몰랐습니다. 향이 중요함을 느끼는 시기는 크게 두가지입니다. 연애할 때와 나이 먹을 때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언제부터인가 이틀 정도 샤워하지 않으면 방에서 홀아비 냄새가 난다는 민원이 생겼습니다. 우연히 아들이 쓰는 향낭을 방에 달아 보았는데, 방에 들어가는 것이 즐거워졌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향이 필요한 것처럼, 세상을 오래 살아갈수록 세상의 악취를 제압할 향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안좋은 냄새로 가득합니다. 사나운 냄새, 교만하고 음란한 냄새, 탐욕의 냄새,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냄새가 가득합니다. 세상에 오래 있으면 내 안에 들어옵니다. 내 안에 자리잡기도 하고 나에게서 풍겨 나오기도 합니다.
기름과 향이 맛을 내고 향내를 풍기듯이, 충성된 권고를 배척하지 말아야 삶이 풍성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10절에서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라는 말씀이 그러합니다. '나에게 이렇게 심한 말을 했어? 내 존심을 건드리네, 이제 넌 내 친구 아니야, 당신은 이제 아버지의 친구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는 시간을 통해 나를 아끼는 사람으로 검증된 사람을 말합니다. 거듭난 성도의 공동체는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형제요 자매요 친구입니다. 우리 모임은 부모의 신앙동료를 삼촌, 이모로 부릅니다. 십년 전 2세들의 삼촌, 이모였던 분들이 이제는 동료 목자가 되었습니다. 친구의 마음으로, 삼촌목자, 이모목자의 마음으로 권고했는데 듣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도움이 안되는 권고라고 생각할 때입니다. 혹은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권고처럼 다가올 때입니다. 그런데 나를 아끼는 사람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인줄 알면서도 권고했다면, 그만큼 내게 꼭 필요한 충언일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도움이 안되는 것처럼 보일 뿐, 실은 가장 고상하고 아름답게 살도록 이끄는 충언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을 각오하고 권고했다면, 그만큼 충분한 이유를 담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점에서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습니다. 멀리 있는 형제는 가까이 있는 이웃보다 나를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심과 애정을 담고 있는 충고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마음을 열고 귀를 열어야 합니다. 입 발린 칭찬에만 귀를 열 것이 아니라 쓰디쓴 권고에도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받아들인다면 그 권고는 살이 되고 피가 됩니다.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우리안에 받아들일 때, 그 말씀 또한 우리 삶에 기름과 향이 되어 우리 인생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물론 자녀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은 부모입니다.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으리라” 인생은 점이 아니라 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혼자로 끝나는 점이 아니라 선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지혜로운 권고를 받아들이고 의인의 길을 간다면, 자신만의 기쁨이 아니라 부모의 기쁨이요 자랑이 됩니다. 양이 지혜를 얻어 의인의 길을 간다면, 자신만의 기쁨이 아니라 목자의 기쁨이요 자랑이 됩니다. 모임이 작아 힘들어하는 어떤 형제에게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모임이 작아 힘든 것보다 사람이 달라지지 않을 때 힘들다. 몇 사람이라도 여기에 있음으로 달라졌다면, 그로인해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너가 십년이 되고 이십년이 지나 목자가 된다면, 우리에게는 큰 자랑과 기쁨이 되겠지만, 십년이 되고 이십년이 되어도 지금 그대로라면 그때 우리는 정말 수치스러울 것이다” 한 사람이 달라지고 변화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자랑입니다.
지혜의 말씀은 대부분 마음을 찢는 회개와 믿음을 담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사람만 의식하고 보이는 현실만 계산하는 사람은 지혜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머리가 나빠서 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계산이 빨라, 머리가 좋아 거부합니다. 이해력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밭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람,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가르침을 받았는데, 한 사람은 지혜를 기뻐하고 한 사람은 지혜를 배척합니다. 한 사람이 지혜를 받아들이고 의인의 길에 서게 되었다면, 그것은 정말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늘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예정을 말하는 이유입니다. 자녀가 자기의 힘으로만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의 노력 이전에 위로부터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지혜를 얻고 의인의 길을 가게 되었다면, 그것은 생명이 탄생한 것처럼 신비로운 일입니다.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놀랍고 기뻐하고 찬양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
12절을 보십시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한다고 했습니다. 재앙의 대부분은 예기치 못한 시간,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닥칩니다. LA 산불은 50여명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최첨단 소방시설을 갖춘 미국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죽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이 말하는 재앙은 그런 재앙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인한 재앙, 엮이지 말아야 할 사람들로 인한 재앙을 말합니다. '저 사람과 함께 하면 분명히 재앙이 올 터인데...', 그것을 알고 피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데이트 폭력, 보증, 사기, 반역... 그런 것들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엮이지 말아야 할 사람을 알아보고 손절합니다. 위험한 사람인데도 알아보지 못하거나 알아도 멀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가 가진 부나 권력, 소위 말하는 스펙에 속는 것입니다.
13-15절에서는 재앙을 불러오는 세 사람을 샘플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타인을 위하여 보증을 선 자입니다.(13) 잠언에서 누차 언급했으니 다시 언급하면 잔소리입니다. 둘째는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는 자입니다.(14) ‘이른 아침의 큰소리’는 상황에 맞지 않습니다. 겉은 축복이라는 포장지를 휘감았지만 실은 자기를 드러내는 도구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말에 속지 말고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셋째는 다투는 여자입니다.(15) 고대세계에서 남편은 갑, 아내는 을이었습니다. 남편과 다투는 여인이 있다면,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집안이나 외모가 배우자의 능력보다 우월할 때 발생했을 것입니다. ‘다투는 여자’는 “가진 것을 근거로 배우자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비 오는 날에 연이어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습니다. 비가 새는 것은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지만, 평안과 안식을 빼앗아 버립니다. 스펙을 중심으로 배우자를 대하는 사람과는 가정을 이루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일생의 축복입니다. 그것이 복된 가정의 출발이며 하나님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충돌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첫째는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철은 철과 부딪히며 날카롭게 단련됩니다. 그와 같이 갈등과 충돌은 마이너스만 되는 것이 아니라 발전의 동력으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스포츠 세계에서 라이벌이 있는 것은 힘든 일이겠지만, 그것은 굉장히 발전하는 계기가 됩니다. 철과 철이 부딪히는 부부싸움 또한 성장과 성찰의 계기가 된다면 좋습니다. 둘째, 열매는 거두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수고롭게 일하는 농부를 말합니다. 농부는 일 년 내내 양분을 주고 김을 매고 물을 주며 무화과나무를 지킵니다. 올바른 관계의 열매도 그러합니다. 농부처럼 시간속에서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때로는 책망하며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베풀고 져주며 은혜를 나누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시중드는 자가 주인의 영화를 함께 누리듯이, 기본적으로 낮아져 섬김으로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을 얻습니다. 셋째, 자기발견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당시에는 오늘날의 거울 혹은 카메라가 없었습니다. 물이 그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물이 외모를 비추어주는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는 마음을 비추어줍니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내 마음 어떠한지’, 나 자신도 모르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요즘 MBTI가 유행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검사결과가 항상 같으면 좋은데, 검사 방법이나 시기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오는 경우가 많아 아쉽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자기발견의 좋은 통로입니다. 때로는 사랑의 관계을 통해, 때로는 긴장 관계에 통해 나의 어떤 모습을 보게 합니다. 물론 모든 것을 상대방의 문제로만 던져버리면 관계를 통해서도 자기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갈등이나 충돌이 있을 때, 상대방의 문제를 볼 수도 있지만 나의 문제를 볼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 들이미는 칼은 흉기이지만, 나에게 들이미는 칼은 메스가 된다는 말이 그러합니다.
물론 사람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온전하지 않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스올과 아바돈이 만족함을 모르는 것처럼, 사람의 눈은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시각으로 무한검색합니다.(20) 확증편향이라는 단어처럼,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려는 경향으로 무한 달려갑니다. 어떻게 하면 열린 대화, 진실한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늘 고민스러운 문제입니다. 잠언의 충고는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 성경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시련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고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잠언은 시련이 아닌 칭찬을 말씀합니다. 좀 더 보완하자면, ‘칭찬으로 사람과의 관계를 단련하느니라’는 말씀으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습니다. 칭찬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칭찬은 마음을 열고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게 함으로써 진실한 관계로 발전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줍니다. 물론 여기서의 칭찬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아부가 아닙니다. 칭찬을 제대로 하려면 사람을 제대로 알아야 하고 심정과 희망을 담아야 합니다. 전주교대 김양옥교수는 ‘칭찬은 귀로 먹는 보약’으로 정의하면서 몇가지 칭찬 스킬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확실하게, 둘째,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셋째 진실하게, 넷째는 간단 명료, 다섯째 타인과 비교하지 않기. 여섯째 본심을 담은 약간의 연기력이었습니다.
칭찬 없는 책망은 아무리 강하고 정확할지라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로 찧어도 미련함을 벗길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어봤습니까! 어마어마한 압박과 책망을 비유한 것입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한 강력한 책망이라도 달라지지 않을 사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안될 놈은 미리 포기하라는 말씀인가요? 내가 훈계를 잘하면, 내가 잘 가르치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와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미련한 자에서 간절한 자로 위치이동할 때까지 믿고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온전한 칭찬은 때마다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즐거움과 감사가 베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자생활은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돕기에 가장 좋은 실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23-27)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 양떼를 돕는 생활이나 지도자 생활이나 원리는 같습니다. 부지런함이 첫째 덕목입니다. 훌륭한 목자는 머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심장이 만듭니다. 양떼와 소떼를 부지런히 살피는 것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부지런히 찾는 것입니다. 유익한 것, 생명이 되는 것, 하나님의 사람으로 올바로 서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해보는 것입니다. 또한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깨어 지키는 생활입니다. 위험한 것, 생명을 위협하는 것을 깨닫게 하고 멀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말씀을 주는 이유도 그러하고 중보기도하는 목적도 거기에 있습니다. 대저 재물이나 면류관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24) 소멸되고 사라질 돈과 권력에 포커스를 둘 것이 아니라 사람을 돕고 살리는 것에 포커스를 두어야 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습니다. 그와 같이 목자가 양들을 먹이고자 부지런히 수고하면, 새로 움이 돋는 것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목자가 양들을 위해 수고하면 목자 자신을 살리는 삶으로 되돌아옵니다. 양을 살리는 것이 목자를 살리는 길입니다. 목자가 힘을 다해 양에게 말씀을 먹이면, 그 말씀이 목자에게 되돌아와서 목자를 힘있게 합니다. 목자가 양을 축복하고자 간절히 기도하면, 그 기도가 목자를 축복하는 응답으로 되돌아옵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디에든 적용 가능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 낮아져 섬기면, 그 수고는 자기를 살리는 축복으로 돌아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주는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기에 힘쓰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도 받고 연단도 받고 각종 복된 은혜를 누리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