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목은 5세에 처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때 선친의 무릎에 앉아 『대학』을 구수(口受)받았는데, 듣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번 들으면 반드시 백번은 마치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12살이 되던 해 이미 사서삼경을 독파했고, 15세에 이황(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하였다. 이때 학문의 태도는 물론이고 행동함에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으므로 스승인 퇴계가 그를 매우 아꼈다.
부단한 학문에의 탐구과 교육
1552년(명종 7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있을 때 “과문(科文)이란 어버이를 위하여 공부하는 것이나 도학(道學)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며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학문에 더욱 정진하여 마침내 대유(大儒)가 되었다. 진리를 향한 부단한 탐구가 퇴계 이황의 고제이며 퇴계 학파의 큰 인물 월천 조목을 있게 했다. 과거공부를 그만 둔 후에는 자신의 학문과 교육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아 월천서당을 세우고 후학에 가르침으로써 퇴계 학파의 수많은 학자들이 그에게서 나왔다.
친구들과의 계모임
29세이던 해 11월 현사사(玄沙寺)에서 계(?)를 결성했다. 권대기, 김팔원, 구봉령, 금난수 등과 문서를 닦고 조목을 정했는데, “우리 벗들이 바쁘게 모이고 헤어지느라 서로 강론하며 절차탁마하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제 매 계절마다 혹은 산사에서 혹은 시골의 정사처럼 조용하고 가까운 곳을 찾아서 잡서를 제외하고 경사(經史) 서적 중의 하나를 택해 가지고 와서 통독하기로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일본과의 강화 반대
조목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동생 및 두 아들과 함께 망우당 곽재우와 합세하여 왜적을 물리치고 국난을 극복하는 데 공헌을 했다. 1594년(선조 27) 군자감 주부를 제수하자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일본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분통함을 참지 못하겠습니다. 백만의 군병을 이끌고 우리의 생명을 도륙하고 국조의 능침을 훼손하고 돌아가지 않는 왜놈들에게 강화가 웬 말입니까? 옛사람은 한 여단의 군인으로도 나라의 중흥을 이룬 바가 있습니다. 청컨대 덕을 닦아 하늘을 감격하게 하고 인을 베풀어 백성들을 위로함이 왜적을 물리치는 근본입니다.”고 하였다.
퇴계가 양식을 부쳐옴
40세 되던 해에 스승인 퇴계가 양식을 부쳐왔다. 이때에 조목의 집안에 양식이 떨어졌는데 퇴계가 이 소식을 듣고 부쳐온 것이다. 전후로 이러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가족사--
조
:
조경(趙瓊)
생부
:
조대춘(趙大春)
모
: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수익(權受益)의 딸
형제
:
조숙(趙肅)
가계의 이력
조목의 선대는 원래 강원도 횡성현에 살았는데, 5대조인 참판공이 경상도 문경현(聞慶縣) 천곡리(泉谷里)로 옮겨왔으며 4대조인 정자공(正字公)이 다시 예천군 금당곡(金堂谷)으로 옮겨왔다. 이후 조목의 아버지 참판공이 예안의 동지(同知) 권수익(權受益)의 딸과 결혼하면서 조목이 태어난 곳인 월천리로 옮겨왔다.
스승으로 하여금 모친상에 몸을 상할까 염려하게 함
1546년(명종 1) 조목이 23세 되던 해 어머니 권씨 부인의 상을 당했다. 이해 12월 용두산에 장사지내고 그 곁에서 여막을 지어 시묘살이를 했는데 애도하는 마음이 지나쳐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이에 스승인 퇴계 이황은 사람들에게 말하길 “조목은 대성(大成)할 그릇으로 약관의 나이에 어머니 상을 당했으니 스스로 슬픔을 누그러뜨리고 억제하지 않으면 몸을 상할까 걱정이다.”고 했다.
여식의 혼례에 고례를 씀
조목이 47세 되던 해에 딸을 시집보내게 되어 친영(親迎)의 예를 행하게 되었다. 당시에 혼인을 하는 집안에서는 모두 속례(俗禮)를 썼는데 조목은 과감하게 옛날의 예를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스승인 퇴계 이황에게 물어서 정한 후에 한결같이 『주자가례』의 절목에 따라 실천하였다. 이후 원근의 마을 사람들이 앞 다투어 따라하게 되었다.
-학문-
스승
:
이황(李滉)
향사
:
도산서원(陶山書院), 정산서원(鼎山書院), 창해서원(昌海書院)
학파
:
퇴계 학파
교유인물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배움에 애씀
다섯 살부터 책을 읽는 데 열심이었고 특히 경사(經史)에 능통했다. 성장해서는 도학을 익혀 퇴계에게서 수업하여 문인이 되었다. 1152년 생원시에 합격한 뒤로는 과거시험을 그만두고 부용산 아래에서 은거하며 학문에 몰두했다. 간간이 벼슬이 제수되었지만 대부분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가르침으로 생애를 보냈다.
풍기군수 이황을 찾아 학문의 방법을 논함
26세 되던 해인 1549년(명종 4년) 당시 풍기군수로 있던 퇴계 이황을 찾아뵈었고 백운동서원에 머물며 공부를 했다. 당시 영천에서 향시가 있어서 기일이 다가오는데도 가려고 하지 않자 퇴계가 왜 과거에 응시하러 가지 않는지를 물었다.
이에 “본래 독서를 하고자 공부를 한 것이지 문장을 지으려는 게 아니었습니다.”고 했다. 이에 퇴계가 독서가 근본임을 말하자 “학문함에 독서에 전념하지 않으면 마땅히 사우(師友)와 더불어 견문을 통한 배움을 넓혀야 할 것입니다.”고 했다. 이에 퇴계가 “의리(義理)는 마음으로 추구할 수 있지만 세상의 사물은 많고도 많으니 혼자만의 견해로써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도 젊은 시절 공부할 때에 널리 보고 들은 것이 없어서 지금에 이르러서 모르고 막히는 것이 많다.”고 했다.
조목은 다시 말하기를 “타고난 머리가 총명한 것은 제가 감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 생각으로는 비록 의리가 혼자만의 견해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마땅히 점차적으로 노력함에 도움이 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퇴계가 “참으로 옳은 말이로다.”고 했다.
유연하고 주체적인 경서의 해석
27세 되던 해인 1450년(명종 5) 퇴계에게 경서에 관해 질의했다. 『맹자』「양혜왕」편에 “두려워 벌벌 떤다.[??]”는 문장 바로 다음의 ‘약(若)’자를 모두 학자들이 “죄가 없으면서도 …… 한다.[無罪 ……]”는 구절과 연결해 7글자로 읽었는데, 조목은 위의 “두려워 벌벌 떤다.[??]”는 구절과 연결해 3자를 한 구절로 여겼다. 퇴계가 “대단히 옳다.”고 칭찬했다. 이처럼 경서의 구두와 의미 해석에 있어서 자신의 타고난 자질에 따라 바로 잡은 것 역시 많았다. 퇴계는 문인들이 경서의 의미를 물을 경우 항상 “조목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고 했다.
-저술-
문집명
『월천선생문집』(1666년, 6권 3책)
유성룡에 대한 평가와 문집 발간의 진통
월천 조목의 문집에는 허목(許穆)의 서문이 실려 문집 간행의 과정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집에 실린 허목의 기사와 허목의 글을 모은 별도의 저작「미수기언(眉?記言)」에 실린 ‘월천집서(月川集序)’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즉 「미수기언」에 수록된 서문 말미에 “우이언행기신도비문부언(又以言行記神道碑文附焉)”의 11자가 있는데 그것이 월천 문집에 수록된 서문에는 빠져 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 월천문집 부록에는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지은 ‘신도비문’은 수록되어 있으나 ‘언행기’는 빠져 있다. 따라서 초고본에 수록되어 있던 언행기가 간행 과정에서 삭제되고 그와 함께 허목의 관련 서문에서도 관계기사가 삭제된 것이다. 이처럼 ‘언행기’가 삭제되고 서문의 관련 기사도 빠진 것은 월천 조목의 서애 유성룡에 대한 평가와 관련이 있다.
‘언행기’는 조목의 문인인 김택룡(金澤龍, 1547~1627)이 지은 ‘월천언행록(月川言行錄)’을 말하는데, 이 기사 중에는 조목이 유성룡을 “왜구와의 화의를 주장해서 나라를 오도한다.[主和誤國]”는 내용의 정유년(1597) 편지 내용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 내용은 조목과 유성룡의 문인들 사이에 논쟁을 불러 일으켰는데, 유성룡의 문인 학사(?沙) 김응조(金應祖)의 ‘서애변무록(西厓辨誣錄)’은 유성룡 문인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다룬 것이다. 조목의 고제(高弟)인 김택룡과 유성룡의 고제인 김응조를 대표로 해 야기된 분쟁은 당시에 파문이 적지 않았다.
조목의 문집을 간행할 당시 조목 문도의 세가 약화되었고 재정적인 역량이 부족하여 유성룡 문도 쪽에서의 도움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조목 문집의 발문을 김응조가 지은 사실에서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유성룡 문도 측에서는 자신들의 스승에 관한 비난의 내용은 삭제하거나 완화하는 조건으로 문집 간행에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당초의 초고 4권은 허목의 산정(刪定)을 거치고 이어 유성룡 비판 관련 기록이 정리된 후에 1666년경 예안(禮安)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던 것이다.
-월천서당-
주향자
- 조목(趙穆, 1524~1606)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이다. 아버지 대춘(大椿) 대에 예안에 정착하였다. 그는 예안현의 월천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별호가 ‘월천’이 된 것도 그가 나서 자란 곳일 뿐 아니라 일생의 생활 근거지였던 이곳의 지명을 취한 것이다. 이곳이 퇴계의 향리인 온계와 가까웠기 때문에 조목은 자연히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그는 결국 퇴계의 수제자로 도산서원 사당인 상덕사에 퇴계의 제자 중 유일하게 종향되었다.
연보(年譜)에 의하면 조목은 5세부터 책을 읽어 12세에 벌써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두 읽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갖춘 인물이었다고 한다. 15세에 퇴계를 처음으로 찾아뵙고 학업을 청하였다. 이 때 맺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 넘게 계속되었으며 퇴계의 학문적 성취에 따라 월천 또한 성장함으로써 퇴계의 많은 문인들 가운데 그 의발을 전해 받은 으뜸가는 제자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29세 되던 해(1552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 즈음에도 그는 퇴계를 찾아뵙고 경서와 성리학에 대해 질의하고 공부하였다. 32세 때에 두 번째로 상경하여 성균관에 유학하였던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는 학문과 과거 사이에서 마음고생을 겪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후 조목은 과거 시험을 그만두고 부용산 아래에서 은거하며 위기지학(爲己之學)에만 힘썼다.
도학에 대한 월천의 연구가 본격화한 것은 아마도 퇴계와 고봉 기대승 사이에 1560년(명종 15)부터 비롯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辯)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39세 때인 1562년(명종 17) 심경(心經)에 관한 질의가 처음 나온 이래 4~5년간 퇴계와의 사이에 심경부주(心經附註), 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 정민정의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등 심학 관련 질문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때 단순히 퇴계에게 질문을 아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조목은 도학자로서의 기반을 굳히고 이후 독실한 수행으로 덕성을 쌓았다.
과거를 거치지 않은 월천에게 처음으로 벼슬이 내린 것은 그의 나이 43세 때인 1566년(명종 21)이었다. 그 즈음 사림의 진출이 두드러지며 사림의 영수로서 신망이 두터웠던 퇴계에게 연이어 소명이 내렸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퇴계 문인에 대한 등용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월천에게는 처음으로 이조의 천거로 공릉참봉이 제수되었고, 뒤이어 선조 원년 성균관의 천거로 집경전참봉이 되었으나 사은 후 곧 물러났다.
조목의 존재가 중앙 정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573년(선조 6) 삼공과 이조가 같이 논의하여 당대의 은일(隱逸)로서 학행이 뛰어난 인물이라 하여 이지함(李之함), 정인홍(鄭仁弘), 최영경(崔永慶),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그가 천거되면서부터 였다. 그는 다섯 인물 가운데 첫 번째로 꼽혔으며 단번에 참상의 벼슬에 올랐다. 이후 81세 때 종2품인 가선대부 공조참판의 직을 받기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품계가 오르고 관직이 제수되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를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벼슬살이를 한 것은 53세 때인 1576년(선조 9) 봉화현감으로 2년 남짓 재직한 것과, 65세 때인 1588년(선조 21) 2년간 합천군수를 지낸 것이 전부였다. 지방관 시절에는 향교를 중수하고 유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반 행정과 정치적 능력은 크게 평가받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생은 의병을 모집하여, 동생 및 두 아들과 더불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합세하여 국난 극복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퇴계가 돌아가신 뒤 도산서원을 건립하여 퇴계의 향화를 받들고 이곳을 중심으로 활발한 강학 활동을 벌려 퇴계의 학풍을 계승, 확대시키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던 조목은 『퇴계문집』의 간행을 통하여 기라성 같은 퇴계의 문인들 가운데 단연 퇴계의 의발을 받은 적통 제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80세 이후 강학을 할 수 없는 형편에서도 도산서원에 머물며 숙식을 하거나 그마저도 할 수 없으면 매년 정초마다 도산의 묘당을 배알하였다. 퇴계의 가르침으로 출발한 그는 세상을 떠나기까지 퇴계를 숭모하는 자세로 일관하였다.
행장에 의하면 월천은 저술하기를 즐기지 않아 많은 글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 60년이 지나서야 겨우 간행을 보게 된 문집마저도 서애와의 갈등 관계를 담은 내용 때문에 문인 김택용이 지은 「월천언행록」 등의 기록을 제외시켜버려서 조목 학문의 전모를 밝힐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학문의 성격은 퇴계 이상으로 주자설을 받들어 주자설에 대한 비판이나 다른 학설을 이단을 물리치는 차원에서 극력 배척하는 성향을 보였다. 그래서 조목 성리학의 핵심은 심경과 그 부주의 비판으로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는 심학도의 비판과 인심도심도의 비판적 고찰에 집중된 것이다.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인심도심정일집중도(人心道心精一執中圖)를 그려 그의 학문을 정리하였다.
그의 학문은 심경을 발판으로 한 주자학적 심학이었다. 심학에 매진하는 목적은 올바른 행위를 위한 ‘바른 심성 수양’을 하려는 데에 있다. 엄정한 마음가짐과 행위를 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조목의 남달리 뛰어난 마음가짐과 성실한 실천 행위는 치밀하고 명철하게 정확한 태도로 탐구한 그의 심학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목의 이러한 정통 주자학적 자세는 그의 정치론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그는 관직 생활에 미련을 두지 않고 또 벼슬다운 벼슬을 하지 않아 좀처럼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1584년(선조 17) 영덕현령의 자리를 사양하면서 올린 갑신사직소(甲申辭職疏)와 강화에 반대하여 올린 갑오진정소(甲午陣情疏) 등을 보면 그는 향촌사회에 대한 중앙이나 지방관의 통제를 완화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향촌활동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는 당시 향촌 사림의 여론을 대변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며 성리학적 정치론의 근본 입장과도 맥을 같이한다.
스승을 기리는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있어서 항상 성의를 다하였던 그는 마침내 1613년(광해군 5)에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 배향되기에 이른다. 묘소는 서당 뒤편 부용산 남쪽 언덕에 있으며, 서당과 50여 보 거리에 있다.
조목은 5세에 처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때 선친의 무릎에 앉아 『대학』을 구수(口受)받았는데, 듣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번 들으면 반드시 백번은 마치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12살이 되던 해 이미 사서삼경을 독파했고, 15세에 이황(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하였다. 이때 학문의 태도는 물론이고 행동함에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으므로 스승인 퇴계가 그를 매우 아꼈다.
부단한 학문에의 탐구과 교육
1552년(명종 7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있을 때 “과문(科文)이란 어버이를 위하여 공부하는 것이나 도학(道學)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며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학문에 더욱 정진하여 마침내 대유(大儒)가 되었다. 진리를 향한 부단한 탐구가 퇴계 이황의 고제이며 퇴계 학파의 큰 인물 월천 조목을 있게 했다. 과거공부를 그만 둔 후에는 자신의 학문과 교육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아 월천서당을 세우고 후학에 가르침으로써 퇴계 학파의 수많은 학자들이 그에게서 나왔다.
친구들과의 계모임
29세이던 해 11월 현사사(玄沙寺)에서 계(?)를 결성했다. 권대기, 김팔원, 구봉령, 금난수 등과 문서를 닦고 조목을 정했는데, “우리 벗들이 바쁘게 모이고 헤어지느라 서로 강론하며 절차탁마하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제 매 계절마다 혹은 산사에서 혹은 시골의 정사처럼 조용하고 가까운 곳을 찾아서 잡서를 제외하고 경사(經史) 서적 중의 하나를 택해 가지고 와서 통독하기로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일본과의 강화 반대
조목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동생 및 두 아들과 함께 망우당 곽재우와 합세하여 왜적을 물리치고 국난을 극복하는 데 공헌을 했다. 1594년(선조 27) 군자감 주부를 제수하자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일본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분통함을 참지 못하겠습니다. 백만의 군병을 이끌고 우리의 생명을 도륙하고 국조의 능침을 훼손하고 돌아가지 않는 왜놈들에게 강화가 웬 말입니까? 옛사람은 한 여단의 군인으로도 나라의 중흥을 이룬 바가 있습니다. 청컨대 덕을 닦아 하늘을 감격하게 하고 인을 베풀어 백성들을 위로함이 왜적을 물리치는 근본입니다.”고 하였다.
퇴계가 양식을 부쳐옴
40세 되던 해에 스승인 퇴계가 양식을 부쳐왔다. 이때에 조목의 집안에 양식이 떨어졌는데 퇴계가 이 소식을 듣고 부쳐온 것이다. 전후로 이러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가족사--
조
:
조경(趙瓊)
생부
:
조대춘(趙大春)
모
: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수익(權受益)의 딸
형제
:
조숙(趙肅)
가계의 이력
조목의 선대는 원래 강원도 횡성현에 살았는데, 5대조인 참판공이 경상도 문경현(聞慶縣) 천곡리(泉谷里)로 옮겨왔으며 4대조인 정자공(正字公)이 다시 예천군 금당곡(金堂谷)으로 옮겨왔다. 이후 조목의 아버지 참판공이 예안의 동지(同知) 권수익(權受益)의 딸과 결혼하면서 조목이 태어난 곳인 월천리로 옮겨왔다.
스승으로 하여금 모친상에 몸을 상할까 염려하게 함
1546년(명종 1) 조목이 23세 되던 해 어머니 권씨 부인의 상을 당했다. 이해 12월 용두산에 장사지내고 그 곁에서 여막을 지어 시묘살이를 했는데 애도하는 마음이 지나쳐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이에 스승인 퇴계 이황은 사람들에게 말하길 “조목은 대성(大成)할 그릇으로 약관의 나이에 어머니 상을 당했으니 스스로 슬픔을 누그러뜨리고 억제하지 않으면 몸을 상할까 걱정이다.”고 했다.
여식의 혼례에 고례를 씀
조목이 47세 되던 해에 딸을 시집보내게 되어 친영(親迎)의 예를 행하게 되었다. 당시에 혼인을 하는 집안에서는 모두 속례(俗禮)를 썼는데 조목은 과감하게 옛날의 예를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스승인 퇴계 이황에게 물어서 정한 후에 한결같이 『주자가례』의 절목에 따라 실천하였다. 이후 원근의 마을 사람들이 앞 다투어 따라하게 되었다.
-학문-
스승
:
이황(李滉)
향사
:
도산서원(陶山書院), 정산서원(鼎山書院), 창해서원(昌海書院)
학파
:
퇴계 학파
교유인물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배움에 애씀
다섯 살부터 책을 읽는 데 열심이었고 특히 경사(經史)에 능통했다. 성장해서는 도학을 익혀 퇴계에게서 수업하여 문인이 되었다. 1152년 생원시에 합격한 뒤로는 과거시험을 그만두고 부용산 아래에서 은거하며 학문에 몰두했다. 간간이 벼슬이 제수되었지만 대부분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가르침으로 생애를 보냈다.
풍기군수 이황을 찾아 학문의 방법을 논함
26세 되던 해인 1549년(명종 4년) 당시 풍기군수로 있던 퇴계 이황을 찾아뵈었고 백운동서원에 머물며 공부를 했다. 당시 영천에서 향시가 있어서 기일이 다가오는데도 가려고 하지 않자 퇴계가 왜 과거에 응시하러 가지 않는지를 물었다.
이에 “본래 독서를 하고자 공부를 한 것이지 문장을 지으려는 게 아니었습니다.”고 했다. 이에 퇴계가 독서가 근본임을 말하자 “학문함에 독서에 전념하지 않으면 마땅히 사우(師友)와 더불어 견문을 통한 배움을 넓혀야 할 것입니다.”고 했다. 이에 퇴계가 “의리(義理)는 마음으로 추구할 수 있지만 세상의 사물은 많고도 많으니 혼자만의 견해로써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도 젊은 시절 공부할 때에 널리 보고 들은 것이 없어서 지금에 이르러서 모르고 막히는 것이 많다.”고 했다.
조목은 다시 말하기를 “타고난 머리가 총명한 것은 제가 감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 생각으로는 비록 의리가 혼자만의 견해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마땅히 점차적으로 노력함에 도움이 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퇴계가 “참으로 옳은 말이로다.”고 했다.
유연하고 주체적인 경서의 해석
27세 되던 해인 1450년(명종 5) 퇴계에게 경서에 관해 질의했다. 『맹자』「양혜왕」편에 “두려워 벌벌 떤다.[??]”는 문장 바로 다음의 ‘약(若)’자를 모두 학자들이 “죄가 없으면서도 …… 한다.[無罪 ……]”는 구절과 연결해 7글자로 읽었는데, 조목은 위의 “두려워 벌벌 떤다.[??]”는 구절과 연결해 3자를 한 구절로 여겼다. 퇴계가 “대단히 옳다.”고 칭찬했다. 이처럼 경서의 구두와 의미 해석에 있어서 자신의 타고난 자질에 따라 바로 잡은 것 역시 많았다. 퇴계는 문인들이 경서의 의미를 물을 경우 항상 “조목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고 했다.
-저술-
문집명
『월천선생문집』(1666년, 6권 3책)
유성룡에 대한 평가와 문집 발간의 진통
월천 조목의 문집에는 허목(許穆)의 서문이 실려 문집 간행의 과정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집에 실린 허목의 기사와 허목의 글을 모은 별도의 저작「미수기언(眉?記言)」에 실린 ‘월천집서(月川集序)’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즉 「미수기언」에 수록된 서문 말미에 “우이언행기신도비문부언(又以言行記神道碑文附焉)”의 11자가 있는데 그것이 월천 문집에 수록된 서문에는 빠져 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 월천문집 부록에는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지은 ‘신도비문’은 수록되어 있으나 ‘언행기’는 빠져 있다. 따라서 초고본에 수록되어 있던 언행기가 간행 과정에서 삭제되고 그와 함께 허목의 관련 서문에서도 관계기사가 삭제된 것이다. 이처럼 ‘언행기’가 삭제되고 서문의 관련 기사도 빠진 것은 월천 조목의 서애 유성룡에 대한 평가와 관련이 있다.
‘언행기’는 조목의 문인인 김택룡(金澤龍, 1547~1627)이 지은 ‘월천언행록(月川言行錄)’을 말하는데, 이 기사 중에는 조목이 유성룡을 “왜구와의 화의를 주장해서 나라를 오도한다.[主和誤國]”는 내용의 정유년(1597) 편지 내용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 내용은 조목과 유성룡의 문인들 사이에 논쟁을 불러 일으켰는데, 유성룡의 문인 학사(?沙) 김응조(金應祖)의 ‘서애변무록(西厓辨誣錄)’은 유성룡 문인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다룬 것이다. 조목의 고제(高弟)인 김택룡과 유성룡의 고제인 김응조를 대표로 해 야기된 분쟁은 당시에 파문이 적지 않았다.
조목의 문집을 간행할 당시 조목 문도의 세가 약화되었고 재정적인 역량이 부족하여 유성룡 문도 쪽에서의 도움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조목 문집의 발문을 김응조가 지은 사실에서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유성룡 문도 측에서는 자신들의 스승에 관한 비난의 내용은 삭제하거나 완화하는 조건으로 문집 간행에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당초의 초고 4권은 허목의 산정(刪定)을 거치고 이어 유성룡 비판 관련 기록이 정리된 후에 1666년경 예안(禮安)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던 것이다.
-월천서당-
주향자
- 조목(趙穆, 1524~1606)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이다. 아버지 대춘(大椿) 대에 예안에 정착하였다. 그는 예안현의 월천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별호가 ‘월천’이 된 것도 그가 나서 자란 곳일 뿐 아니라 일생의 생활 근거지였던 이곳의 지명을 취한 것이다. 이곳이 퇴계의 향리인 온계와 가까웠기 때문에 조목은 자연히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그는 결국 퇴계의 수제자로 도산서원 사당인 상덕사에 퇴계의 제자 중 유일하게 종향되었다.
연보(年譜)에 의하면 조목은 5세부터 책을 읽어 12세에 벌써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두 읽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갖춘 인물이었다고 한다. 15세에 퇴계를 처음으로 찾아뵙고 학업을 청하였다. 이 때 맺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 넘게 계속되었으며 퇴계의 학문적 성취에 따라 월천 또한 성장함으로써 퇴계의 많은 문인들 가운데 그 의발을 전해 받은 으뜸가는 제자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29세 되던 해(1552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 즈음에도 그는 퇴계를 찾아뵙고 경서와 성리학에 대해 질의하고 공부하였다. 32세 때에 두 번째로 상경하여 성균관에 유학하였던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는 학문과 과거 사이에서 마음고생을 겪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후 조목은 과거 시험을 그만두고 부용산 아래에서 은거하며 위기지학(爲己之學)에만 힘썼다.
도학에 대한 월천의 연구가 본격화한 것은 아마도 퇴계와 고봉 기대승 사이에 1560년(명종 15)부터 비롯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辯)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39세 때인 1562년(명종 17) 심경(心經)에 관한 질의가 처음 나온 이래 4~5년간 퇴계와의 사이에 심경부주(心經附註), 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 정민정의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등 심학 관련 질문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때 단순히 퇴계에게 질문을 아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조목은 도학자로서의 기반을 굳히고 이후 독실한 수행으로 덕성을 쌓았다.
과거를 거치지 않은 월천에게 처음으로 벼슬이 내린 것은 그의 나이 43세 때인 1566년(명종 21)이었다. 그 즈음 사림의 진출이 두드러지며 사림의 영수로서 신망이 두터웠던 퇴계에게 연이어 소명이 내렸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퇴계 문인에 대한 등용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월천에게는 처음으로 이조의 천거로 공릉참봉이 제수되었고, 뒤이어 선조 원년 성균관의 천거로 집경전참봉이 되었으나 사은 후 곧 물러났다.
조목의 존재가 중앙 정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573년(선조 6) 삼공과 이조가 같이 논의하여 당대의 은일(隱逸)로서 학행이 뛰어난 인물이라 하여 이지함(李之함), 정인홍(鄭仁弘), 최영경(崔永慶),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그가 천거되면서부터 였다. 그는 다섯 인물 가운데 첫 번째로 꼽혔으며 단번에 참상의 벼슬에 올랐다. 이후 81세 때 종2품인 가선대부 공조참판의 직을 받기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품계가 오르고 관직이 제수되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를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벼슬살이를 한 것은 53세 때인 1576년(선조 9) 봉화현감으로 2년 남짓 재직한 것과, 65세 때인 1588년(선조 21) 2년간 합천군수를 지낸 것이 전부였다. 지방관 시절에는 향교를 중수하고 유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반 행정과 정치적 능력은 크게 평가받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생은 의병을 모집하여, 동생 및 두 아들과 더불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합세하여 국난 극복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퇴계가 돌아가신 뒤 도산서원을 건립하여 퇴계의 향화를 받들고 이곳을 중심으로 활발한 강학 활동을 벌려 퇴계의 학풍을 계승, 확대시키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던 조목은 『퇴계문집』의 간행을 통하여 기라성 같은 퇴계의 문인들 가운데 단연 퇴계의 의발을 받은 적통 제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80세 이후 강학을 할 수 없는 형편에서도 도산서원에 머물며 숙식을 하거나 그마저도 할 수 없으면 매년 정초마다 도산의 묘당을 배알하였다. 퇴계의 가르침으로 출발한 그는 세상을 떠나기까지 퇴계를 숭모하는 자세로 일관하였다.
행장에 의하면 월천은 저술하기를 즐기지 않아 많은 글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 60년이 지나서야 겨우 간행을 보게 된 문집마저도 서애와의 갈등 관계를 담은 내용 때문에 문인 김택용이 지은 「월천언행록」 등의 기록을 제외시켜버려서 조목 학문의 전모를 밝힐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학문의 성격은 퇴계 이상으로 주자설을 받들어 주자설에 대한 비판이나 다른 학설을 이단을 물리치는 차원에서 극력 배척하는 성향을 보였다. 그래서 조목 성리학의 핵심은 심경과 그 부주의 비판으로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는 심학도의 비판과 인심도심도의 비판적 고찰에 집중된 것이다.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인심도심정일집중도(人心道心精一執中圖)를 그려 그의 학문을 정리하였다.
그의 학문은 심경을 발판으로 한 주자학적 심학이었다. 심학에 매진하는 목적은 올바른 행위를 위한 ‘바른 심성 수양’을 하려는 데에 있다. 엄정한 마음가짐과 행위를 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조목의 남달리 뛰어난 마음가짐과 성실한 실천 행위는 치밀하고 명철하게 정확한 태도로 탐구한 그의 심학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목의 이러한 정통 주자학적 자세는 그의 정치론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그는 관직 생활에 미련을 두지 않고 또 벼슬다운 벼슬을 하지 않아 좀처럼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1584년(선조 17) 영덕현령의 자리를 사양하면서 올린 갑신사직소(甲申辭職疏)와 강화에 반대하여 올린 갑오진정소(甲午陣情疏) 등을 보면 그는 향촌사회에 대한 중앙이나 지방관의 통제를 완화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향촌활동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는 당시 향촌 사림의 여론을 대변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며 성리학적 정치론의 근본 입장과도 맥을 같이한다.
스승을 기리는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있어서 항상 성의를 다하였던 그는 마침내 1613년(광해군 5)에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 배향되기에 이른다. 묘소는 서당 뒤편 부용산 남쪽 언덕에 있으며, 서당과 50여 보 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