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본래 가진 ‘참얼굴’ 있다
<21> 증시랑에게 보내는 대혜선사의 답장 ②-6
[본문] 평소에 계교하고 안배하는 것도 식정(識情)이며, 생사를 따라 흘러 다니는 것도 또한 식정이�,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것 또한 식정인데 요즘 참선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병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 식정 속에서 출몰합니다. 교중에 이른 바 “식정(識情)을 따라 행하고 지혜를 따르지 않는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지풍광(本地風光)과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캄캄하게 해 버립니다.
[강설] 사람들의 삶이란 의식으로 현상을 느끼고 지각하며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여 취사선택을 하는 일의 연속이다. 이 모든 작용을 대혜 선사는 의식과 감정이라는 식정(識情)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식정을 초월한 해탈의 삶을 위한 길이다.
그러므로 참선을 통해서 해탈을 이루려는 입장에서 보면 식정속에서 사는 삶은 병이다. <화엄경>에서 지적한 “식정(識情)을 따라 행하고 지혜를 따르지 않는다”라는 말씀 그대로다. 그러므로 본지풍광(本地風光)과 본래면목(本來面目)에 대해서는 캄캄하여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본지풍광과 본래면목을 가장 중요시하는데 본지풍광이란 모든 번뇌가 사라진 자신의 본바탕(本地)에서 저절로 흘러넘치는 온갖 지혜의 작용(風光)을 말한다. 본래면목이란 역시 본지풍광과 같은 뜻으로서 사람사람이 누구나 본래 가지고 있는 참 얼굴이라는 뜻이다. 깨달음의 지혜가 있어야 본지풍광과 본래면목으로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대해탈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번뇌 내려놓고 생각 끊어진 경지
망상은 곧 깨달음의 지혜가 된다
[본문] 만약 혹 잠깐이라도 식정을 놓아 내려서 아무것도 생각하고 헤아리지 않게 된다면 홀연히 발을 헛디디어(失脚) 콧구멍을 밟아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식정이 곧 진공묘지(眞空妙智)입니다. 달리 다른 지혜를 얻을 것이 없습니다.
만약 달리 얻을 것이 있으며 달리 증득할 것이 있으면 그것은 또한 옳지 않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미혹할 때는 동쪽을 서쪽이라 하다가 알고 나서는 서쪽이 곧 동쪽인 것이지 따로 동쪽이 있는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강설] 분별심인 식정을 따르지 않고 깨달음을 이룬 자리에서 본지풍광을 드러낸 경지는 어떻게 가능한가? 망상을 내려놓고 생각이 끊어진 경지에서 본성(本性)을 보았을 때다. 즉 견성(見性)을 해야 한다. 대혜 선사는 견성의 방편으로 화두를 제시했다.
그래서 간화선이 태동한 것이다. 본성을 보게 되면 망상이 곧 깨달음의 지혜가 된다. 망상과 지혜는 둘이 아니다. 망상을 버리고 달리 지혜가 있지 않다.
[본문] 이 진공묘지(眞空妙智)는 저 큰 허공과 그 수명이 같습니다. 다만 이 허공중에 또한 한 물건이라도 허공을 장애하는 것이 있습니까? 비록 한 물건도 장애하지는 아니하나 모든 물건이 허공중에서 왕래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합니다.
이 진공묘지도 또한 그와 같아서 생사와 범성과 구염이 한 점도 붙지 아니합니다. 비록 한 점도 붙지 아니하나 그 가운데서 왕래하는 것을 장애하지도 아니합니다.
[강설] 깨달음의 지혜를 진공묘지라고도 부르는데 그 경지는 저 허공처럼 크고 영원하다. 모든 사물과 허공은 서로 장애가 없듯이 깨달음의 지혜에도 생사와 범부 성인이라는 차별적인 문제가 장애가 되지 않는다.
[본문] 이와 같이 믿고 보아서 사무치면 바야흐로 태어나고 죽는 것에 대자재를 얻은 사람입니다. 비로소 조주스님의 방하착과 운문스님의 수미산으로 더불어 조금 상응한다고 할 수 있지만, 만약 믿지 못하고 놓아버리지 못한다면 수미산 하나를 짊어지고 도처에 행각하면서 명안종사(明眼宗師)에게 분명하게 들어 보이기를 청합니다. 한번 웃습니다.
[강설] 깨달음의 지혜를 터득하고 나면 생사에 대자유를 얻은 사람이 된다. 그러면 온갖 화두가 모두 풀린다. 만약 화두가 풀리지 않으면 수미산의 무게와 같은 의문의 짐을 지고 도처로 행각하여 눈 밝은 종사를 찾아 해결해야 한다. 여기까지가 두 번째 답장의 끝이다.
[출처 : 불교신문 2012.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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