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환(權煥, 1903년 1월 6일 ~ 1954년 7월 30일)은 1930년대 초 프로문학의 볼세비키화를 주도한 대표적인 카프시인이자 비평가이다.
본명은 권경완(權景完)․윤환(允煥)이며, 1903년 1월 6일 경남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에서 태어났다. 일본 야마카다 고교를 거쳐 교토제국대학 독문과를 졸업했다. 학부 재학시 독서회 사건으로 구금 투옥된 바 있다.
1925년 일본 유학생잡지 『학조(學潮)』에 작품을 발표하였고, 1929년 『학조』필화사건으로 또 다시 구속되었다. 이 시기 일본 유학중인 김남천, 안막, 임화 등과 친교를 맺으며 카프동경지부인 무신자사에서 활약하는 등 진보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였다.
1930년 임화 등과 함께 귀국, 이른바 카프의 소장파로서 구카프계인 박영희, 김기진 등을 따돌리고 카프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가랴거든 가거라」(조선지광, 1930. 3),「머리를 땅까지 숙일 때까지」(음악과 시, 1930. 8) 등 목적일변도의 시와 「무산예술운동의 별고와 장래의 전개책」,「조선예술운동의 당면한 구체적 과정」등 강경 계급문학적 비평을 발표하여 등단하는 한편 『카프시인집』(1931)에도 참여함으로써 1930년대 볼세비키 예술운동의 주도적인 인물로 부상하였다.
1931년 카프 1차 검거 때 피체되어 불기소처분을 받았고, 1935년 제 3차 검거 때는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이 시기 중외일보, 조선일보 등의 기자와 조선여자의 학강습소 강사, 김해농장원, 경성제대 도서관 사서 등을 전전하다가 해방직전에 첫시집 『자화상(自畫像)』(조선출판사, 1943)과 『윤리(倫理)』(성문당서점, 1944)를 발간하였다.
해방 후에 그는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 및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을 맡는 등 프로측 문인으로 활약하면서, 시집 『동결(凍結)』(1946)을 펴냈다.
6․25직전까지 마산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프로문인들의 대거 월북에도 편승하지 못하고 있다가 1954년 7월 30일 마산 요양소에서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남로당계 가운데서 북쪽 문학사에서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카프출신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주요 작품
이 꼴이 되다니(무산자, 1929. 5)
가려거든 가거라(조선지광, 1930. 3)
머리를 땅까지 숙일 때까지(음악과 시, 1930. 8)
소년공의 노래(『카프시인집』, 집단사, 1931)
그대(『카프시인집』, 1931),
자화상(시집 『자화상』, 조선출판사, 1943. 8)
한역(시집 『자화상』, 1943. 8)
윤리(시집 『윤리』, 성문당서점, 1944. 12)
고향(『횃불』, 우리문핛, 1946. 4)
천상병의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아침 이슬 더불어 손에 손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1950. 마산고등학교 졸업
1951.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수학,
<처녀지>동인 활동
1952. <문예>에 <갈매기>추천 완료
1964. 부산시장 공보비서로 근무
1967.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겪음
1971. 유고시집이라는 제목으로 <새>가 발간됨
1988. 춘천의료원 입원
1993. 사망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출생했으며, 1949년 마산중학교 5학년 때, 《죽순(竹筍)》 11집에 시 《공상(空想)》 외 1편을 발표했으며, 여러 문예지에 시와 평론 등을 발표했다.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했으며, 중앙정보부에 의해 과장된 사건으로 판명된 소위 '동백림사건'(1967년)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친구 강빈구에게 막걸리값으로 5백원,1천원씩 받아 썼던 돈은 공작금으로 과장되었으며, 천상병 시인 자신도 전기고문으로 몸과 정신이 멍들었다. 그때의 처참한 수난을 천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고문)당한 그날은...//이젠 몇 년이었는가/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네 사과 뼈는 알고 있다./진실과 고통/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이후 천시인은 여러 일화들을 남기는데, 1970년에는 무연고자로 오해받아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는 일도 있었다. 당시 지인들은 갑자기 사라진 천시인이 죽었다고 생각, 유고시집《새》를 발표하였다.
당시 시집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내 영혼의 빈터에/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내가 죽는 날/그 다음날.//산다는 것과/아름다운 것과/사랑한다는 것과의노래가/한창인 때에/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한 마리 새.//살아서/좋은 일도 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새)
1972년 친구의 여동생인 목순옥 여사와 결혼한 천상병 시인은 1979년 시집 《주막에서》를 민음사에서 펴냈고,《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1984년),《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1987년),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년),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년)도 발표하였다. 말년에 그리스도교에 입문한 천시인은 하느님에 대한 소박하고 순수한 신앙을 보여주는 작품활동도 하였다.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대우주의 정기(精氣)가 모여서/되신 분이 아니실까싶다.//대우주는 넓다./너무나 크다.//그 큰 우주의 정기가 결합하여/우리 하느님이/되신 것이 아니옵니까?"(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
1993년 천시인이 지병인 간경화증으로 별세한 후,유고시집《나 하늘로 돌아가네》,《천상병 전집》이 발표되었다.2007년 5월 1일에는 천상병시인을 기념하는 제4회 천상병 예술제가 천시인이 별세하기 전, 10여년간 거주한 의정부시에서 열리기도 했다.[1]
박재호
1945. 김천중학교 졸업
1947. 서울대학교 철학과 중퇴
1955. <문학예술>에 <작은 고동>추천
1959. <석화>동인
1960. 부산예총 초대 사무국장 지냄
1976. 마산에서 해조문화사 창설
1982. 경상남도 문화상 수상
1985. 사망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 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어울려 옛날 같이 살고지라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가곡은 여기까지 불리웁니다.
여기 물어보고 저기나 알아 보나 내 몫엣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되 안기자 되안겨
처자들 어미되고 동자들 아비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워라 아까워
일하여 시름없고 단잠들어 죄없은 몸에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 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동무 노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을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나 깨끗이도 깨끗이
1920년대 후반에 일어난 시조부흥운동에 참여한 뒤로 시조의 현대화에 힘썼고, 가고파〈봄처녀〉 등의 작사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본관은 전주(全州). 필명은 남천(南川). 두우성(斗牛星). 호는 노산(鷺山)·강상유인(江上遊人)·노산학인(鷺山學人).
1918년 아버지가 세운 마산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다니다가 1923년 그만두었다. 창신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사학과에서 공부했다. 일본에 잠시 머물며 〈신생〉의 편집일을 도왔고, 귀국한 뒤로는 1931~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뒤 〈동아일보〉·〈조선일보〉에서 근무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으며, 1945년에는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경찰서에 갇혀 있다가 8·15해방이 되어 풀려났다. 같은 해 호남신문사 사장을 지냈고, 1950년 이후 청구대학(지금의 영남대학교)·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9년부터 충무공이순신장군 기념사업회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등을 맡아보았다. 1967년 시조작가협회장, 한글학회 이사를 지냈고, 1969년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1972년 숙명여자대학교 재단이사장이 되었다. 1970년 경희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 1974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 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장, 총력안보국민협의회 의장, 시조작가협회 종신회장, 1978년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고, 1981년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76년부터 노산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노산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1918. 마산 창신학교 졸업
1923. 연희전문학교 문과 수학
1925. 일본 와세다대학 사학부 청강
1932. <동아일보> 기자 지냄
1945. <호남신문> 창간
1955. 이충무공 기념사업회장 지냄
1964. 예술원상 수상
1970.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서
1970. ‘노산문학상’제정
1982. 사망, 금관문화훈장 추서, 국립묘지 안장
갈대
정진업
모래밭에 묻어놓은
물새의 노래는
영영 몰라도 좋은 것이 있었다.
바람이 일면
바람 같은 심사
사색을 꽂고
스스로 시익시익
그이의 모시치마 여미는 소리로
울어야 하였다.
지금은 열다섯 소녀하나
울면서 항구로 간다고
사공의 넋두리에
열이 오르는데
낙동강은 돌아선 채
태고 그대로인 바다로 가는 것을
그는 잠자코 보고 있었다
정진업(1916~1983).
1934. 마산상업학교 졸업
1936. 이광래에게 연극 수업 받음
1939. <문장>에 단편소설 <캬츄사에게> 발표
1940.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 수학
1951. <부산일보> 문화부장 지냄
1958. 성지여자고등학교 근무
1963. 경남도문화상(연극) 수상
1967. 경남도문화상(문학) 수상,
문협 마산지부장 지냄
1983. 사망
오월이 오면 / 김용호
무언가 조용히 가슴속을 흐르는 게 있다
가느다란 여울이 되어 흐르는 것
이윽고 그것은 흐름을 멎고 모인다. 이내 호수가 된다
아담하고 정다웁고 부드러운 호수가 된다
푸르름의 그늘이 진다 잔 무늬가 물살에 아롱거린다
드디어 너, 아리따운 모습이 그 속에 비친다
오월이 오면 호수가 되는 가슴
그 속에 언제나 너는 한 송이 꽃이 되어 방긋 피어난다
1925. 마산상업학교 졸업
1935. <신인문학>에 <내 사랑하는 여인아> 발표
1938. <맥> 동인 활동
1942. 일본 명치대학 법과 졸업
1945. 선만경제통신사 기자 지냄
1946. <예술신문사> 주간
1951. <시문학사> 주간
1952. 남광문화사 주간 지냄
1955. 서라벌예술학교 근무
1958. 단국대학교 교수 지냄
1965. 문교부 국어교과서 편찬위원 지냄
1973. 사망
1912. 5. 26 경남 마산∼1973. 5. 14 서울.
시인.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어두운 시대상과 압박받는 민족의 현실을 읊다가 차츰 서민생활을 노래했다. 본관은 김해. 아명은 만석(萬石), 호는 학산(鶴山)·야돈(野豚)·추강(秋江).
아버지 치완(致琓)과 어머니 박경포(朴敬布) 사이의 3남매 가운데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928년 마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금성철공소·원동상회 등에서 일하다가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8년 〈맥〉 동인으로 활동했다. 1941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고, 다음해 신문고등연구과를 수료한 후 귀국했다. 선만(鮮滿)경제통신사 기자로 있으면서 시집 〈부동항〉을 펴내려 했으나 일제에 의해 압수되었다. 예술신문사 주간 등을 거쳐 건국대학교 강사, 단국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역임했다. 8·15해방 후 한때 좌익문학단체에 관계했으나, 그후 한국자유문학가협회에 가담해 기관지인 〈자유문학〉 주간을 맡아보았다. 1962년에는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을 지냈다. 〈동아일보〉에 시 〈선언〉(1935.10. 14)을 발표한 데 이어 노자영이 주재로 있는 〈신인문학〉에 〈첫여름밤 귀를 기울이다〉·〈쓸쓸하던 그날〉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1941년 도쿄에서 첫시집 〈향연〉을 펴냈다. 시는 재치로 쓰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1938년에 발표한 장시 〈낙동강〉(사해공론, 1938. 9)에서 낙동강을 배경으로 주민들의 생활상과 굴욕적인 민족사적 상황에 대한 분노를 노래했다.
시집 〈해마다 피는 꽃〉(1948)·〈푸른 별〉(1952)·〈남해찬가〉(1952)·〈날개〉(1956) 등을 통해 향수를 바탕으로 한 회고와 순수 서정을 노래하고, 6·25전쟁의 충격과 구국적 의지를 읊었다. 1960년대 이후로는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읊은 시집 〈의상세례 衣裳洗禮〉(1962) 등을 펴냈다. 1956년 아세아자유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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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봄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 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
1916. 창원의 서당에서 수학
1922. 마산에 이주하여 마산공립보통학교 입학
1926. 『어린이』지에 「고향의 봄」이 당선
1927. 마산상업학교 입학
1928. 『어린이』지의 집필동인
1936. 아동문학가 최순애와 혼인
1947. 10월에 박문출판사 편집국장
1952. 대구에서 오창근,김원룡과<소년세계>창간
1955. 아동 잡지 『어린이세계』 주간
1974.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
1981. 사망
1982. 금관문화훈장 추서
이원수/이원수
기존의 외형률 중심의 동요에서 벗어나 내재율 중심의 현실참여적인 동시를 썼고, 널리 알려진 동요 〈고향의 봄〉의 작사가이다. 한때 이동원(李冬原)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아버지 문술(文術)과 어머니 진순남(陳順南)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1927년 마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윤석중 등과 '기쁨사' 동인이 되었고, 1930년 마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함안금융조합에 다니다가 1935년 독서회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간 옥살이했다. 1937년 함안금융조합에 복직되어 8·15해방 때까지 근무했으며, 1945년 10월 경기공업학교 교사로 취직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이어 박문출판사 편집국장, 〈소년세계〉 주간,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 한국자유문학가협회 아동문학 분과위원장, 서울특별시 문화위원회 문학분과위원 등을 지냈다. 또한 1961~70년 삼화출판사 편집위원,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초대 회장 등 한국아동문단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968년 마산시 산호공원에 노래비와 1981년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문학비가 세워졌다.
1926년 방정환이 펴낸 〈어린이〉에 고향의봄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고향의 봄〉은 낭만적인 향토애를 자아내는 작품으로 뒤에 홍난파가 곡을 붙였다. 이어 초기에 발표한 동시인 〈잘가거라〉(어린이, 1930. 7)·〈비누풍선〉(어린이, 1927. 7)·〈헌 모자〉(학생, 1930. 3) 등은 감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40년 초기에는 현실을 외면한 작가들과는 달리 소극적이나마 현실에 저항하는 동시를 발표했는데, 〈어머니〉(아이생활, 1943. 2)·〈빨래〉(주간소학생, 1946. 2. 11) 등이 이에 속한다. 해방 후에는 동시보다 동화를 많이 썼으며, 1953년에 발표한 장편동화 〈숲속의 나라〉는 전래동화를 뛰어넘는 수준 높은 작품이다. 그밖에도 방송용 아동극이나 아동문학의 기초가 되는 글을 썼는데, 특히 1966년 〈교육자료〉에 연재한 〈아동문학입문〉은 아동문학의 여러 문제에 대한 개괄적인 해설을 시도한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동시집으로 〈종달새〉(1947)·〈빨간 열매〉(1964) 등과 동화집으로 〈어린이 나라〉(1949)·〈숲속 나라〉(1953)·〈파란 구슬〉(1960)·〈보리가 패면〉(1966) 등이 있고, 저서로 〈이원수아동문학독본〉(1961)·〈어린이문학독본〉(1962) 등이 있다. 1970년 고마우신 선생님상, 1973년 한국문학상, 197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78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80년 대한민국 문학상 등을 받았다.
이일래
1920. 마산창신학교 고등과 졸업,
서울 중동중학에 진학
1928. 창녕군 이방초등학교에 훈도교사
1936. 마산 문창교회 성가대 지휘
1937.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3년 중퇴
1940. 마산여자고등학원 설립하여 교장으로 취임
1947. 경북 초대 상공국장을 역임
1948. 일본대학 예술학원 음악과 수학
1978. 제2회 한국아동문학상 수상
1979. 사망
이 노래는 1928년 이일래가 창녕군 이방보통학교에 재직 중일 때 만들어진 곡이다. 그는 학교 뒷산인 고장산 기슭에 자주 올랐다고 하는데, 산토끼가 노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가락을 흥얼거리다 집으로 돌아와 곡을 만들고 가사를 붙였다고 한다. 이 노래는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나라를 잃은 한을 담아 여러 가지 가사로 개사 되어 불려졌다. 한 번은 당시 유치원 교사였던 공덕기(윤보선 대통령 영부인)가 발표회 때 산토끼 멜로디에 “내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 근화반도 그대 사랑 어디로 가느냐”라고 불러 감옥에 갇히는 일이 있었다. 일본 순사들은 노래의 출처를 알아내고 이일래를 찾아와 노랫말 중 ‘근화반도’란 무엇이냐고 따지고 들었다고 한다. 이일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기지를 발휘해 ‘근화’라는 술집 기생의 이름을 넣어 만든 노래라고 둘러대서 난을 면한 일이 있는데 근화의 참 뜻은 무궁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생전에 술회했다. 당시의 이일래가 작사한 노랫말은 “산토끼 토끼야 너 어디로 가나 / 깡충깡충 뛰어서 너 어디로 가나 / 산고개 고개를 나 넘어 가아서 / 토실토실 밤송이 주우러 간단다”로 훗날 부르기 쉽고 어감이 편리한 현재의 노랫말로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