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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그대 앞의 꽃바구니, 복음> 머리에
예수와 동시대 동지역에 살면서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김안옥 언니(이 책의 메시지를 전해주신 분)가 장애자이고 고등학교 졸업장 정도를 가진 사람이라는 시각으로 비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언니는 누구보다도 더 생생하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고 가르친 분입니다.
언니를 처음 만난 때를 기억합니다. 그 때는 망월동 5.18 구 묘역에 김천배 선생님이 안치되던 봄볕인 따스했던 1988년 3월이었습니다. 그 이전 김천배 선생님을 통해 언니 이야기를 가끔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언니의 얘기를 하면 왠지 존경하는 빛을 비추셨습니다.
그리고 친구 S와 나는 언니가 사는 봉선동 무등파크 아파트를 방문했습니다. 언니는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사건 두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첫째는 고등학교 시절 교통사고로 인한 하반신 마비, 둘째는 부모님의 타계였습니다. 하반신이 마비되었을 때 절망감이 몰려왔고 자살을 결심하였으나 부모님 때문에 차마 죽지 못하고 돌아 왔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하반신 마비는 자신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냐는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일부의 문제 때문에 자신의 전부를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자각을 얻으셨다고 합니다.
두 번째 사건은 자신을 돌보시던 부모님께서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왠지 큰아버지 댁에는 신세를 지기가 싫고 혼자 독립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셨습니다. 주위 사람이 모두 미쳤냐고 죽을려고 그러느냐고 말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혼자 독립하여 살아보겠다는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고, 독립해서 밥을 지어 식탁에 올려놓았을 때 감사기도를 올렸습니다.
언니는 불편한 몸으로 하스피스 케어 강습을 서울까지 받으러 다닌 적도 있었습니다. 고속버스에 누가 실어 주면 광주에 올 때까지 꼼짝을 할 수 없습니다. 한 번은 버스를 타고 광주로 내려오다가 바지에 실례를 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언니는 세탁기에 바지를 돌리면서 ‘그래, 빨아 입으면서 다니자’고 생각을 했습니다.
언니의 일본 여행, 싸이판 여행, 세 번의 미국 여행은 모두 아픔과 불편을 무릅쓰고 이루어 낸 도전의 삶의 기록이었습니다. 저는 언니와 대화, 그리고 언니 집에서 예배 볼 적에 해주신 말씀들을 늘 기록하면서 지냈습니다.
운명이 언니의 허리를 부러뜨려, 걸을 수도,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움직이는 것도 혼자 힘으로 불가능한 상황, 다만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극복한 언니의 저력은 믿음이었습니다. 지친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절망한 사람에게 생명의 활력을 주며, 넘쳐나게 하며, 이 세상의 가장 작은 사람을 향하여서도 ‘형제여’라고 부르는 진리. 감촉할 수 있는 진리의 세계를 언니와의 만남을 통해서 접하였습니다.
이화여대 교목이셨던 김흥호 목사님의 설교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마태나 요한의 복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국은 나의 고통으로부터 나의 복음이 중요하다라는. 교회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두서넛만 모여도 진리와 같이 하면 성소가 될 수 있습니다.
<책 제목 “그대 앞의 꽃 바구니, 복음”에 관하여>
내가 단골로 다니는 꽃집 이모의 카톡방에는 갖은 다채로운 색상의 다양한 종류의 꽃 바구니들이 있습니다. 붉은 장미, 분홍 카네이션, 청색 아네모네, 주홍 장미, 작은 안개꽃, 분홍 소담스런 수국꽃, 노랑 장미, 흰 백합화, 노을빛 장미, 진분홍 장미, 이 풍진 세상을 꽃집 주인은 이 화사한 꽃처럼 환한 미소를 가지고 살아가십니다. 해바라기 꽃, 흰 소국꽃, 흰 목화꽃, 푸른 장미꽃, 쪽빛 수국꽃, 장밋빛 키 큰 글라디올러스 꽃....
둘째 언니의 칠순 모임에 가는 겨울 날 아침도 그렇게 썩 좋은 몸 컨디션은 아니었습니다. 별 기대도 없이 꽃 가게 안 들어갔을 때, 뜻하지 않는 곳에서 고요하게 힐링되는 30분을 가졌습니다. 그 날 아침의 시작은 운이 참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꽃집 포트에 끓인 물로 봉지 커피 마시면서 언니의 칠순 꽃 바구니가 완성되기를 기다렸습니다. 30분의 시간이 내게 고요함 속에서 싱싱한 꽃과 초록이 뿜어내는 사랑의 향기에 흠씬 취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주었습니다.
꽃집에서의 고요한 시간처럼 안옥 언니의 집을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가뿐하였습니다. “내가 사는 그곳이 기도하는 곳이고, 공부하는 곳이고... 그렇게 되기를 원하였다”고 안옥언니는 자신의 집에서 예배 모임을 한 까닭을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집 예배 모임에서 나는 수 백 번 위로와 용기와 기쁨과 힘과 빛을 얻어왔습니다. 안옥언니는 "평신도 목자"였습니다. 말씀의 꿀을 먹여주시고, 기도로 나의 영혼을 안심시키고, 커피를 끓여주시고, 반찬을 만들어 식사를 대접하곤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그러하셨듯이,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기운을 고취시키시고, 매사에 도와주셨습니다.
언니는 공황장애, 세 차례에 걸친 골절, 발의 화상 등 몸의 수난이 좀 있기도 했습니다. 정신적 영웅으로 언니를 추앙하였던 내게 언니가 약한 모습을 보일 때는 실망도 하고 때로는 화가 난 적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공황장애가 극복되면서 언니는 다시금 이전의 강인한 내면을 회복하시는 모습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린 적도 있었습니다. “Glad Tidings in a Flower Basket" 꽃바구니가 우리에게 쾌활한 웃음을 전해주듯이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일종의 증언 문학을 써보겠다고 다짐하여 펜을 잡았습니다. 행여 세파에 지친 마음이 위로받고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1)책
나(안옥언니를 지칭)의 모든 삶이 하나의 모험입니다. 보통 사람한테는 보통으로 하는 일도 나에게는 모험이 됩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힘껏 사랑합니다. 그 사랑이 곧 나의 힘입니다.
자신의 운명과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워 본 적이 있습니까? 누구든지 자신의 운명과 싸워야 합니다. 나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삶의 열정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나자렛 예수에게로 돌아갑니다.
내게 신앙의 한 계단을 제시해 주신 분은 백영흠 목사님이십니다. 내가 허리를 다쳤을 때 교회 신자들이 와서 전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네 허리를 다치게 하신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한 말에 나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안 믿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백영흠 목사님은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백영흠 목사님은 성서를 읽기 전에 이러저러한 책을 많이 보아야한다 하시면서 많은 책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어떤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면 꼭 마음속으로 핑계가 생깁니다. 이러이러해서 못해 하고.. . 그러나 우리가 핑계를 대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나는 불확실한 것, 더 위험한 것을 택합니다. 그리하여 어려움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해낼 때 거기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2)열정
사람의 삶은 30에 끝나나 50에 끝나나 70에 끝나나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열정을 갖고 살았느냐가 문제입니다. 난 이렇게 살다가 어느 날 불현듯 죽어도 괜찮습니다. 혹 내가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어 다른 사람들이 나를 가엾게 여기면, “살아보려고 애쓰더니 그리 죽는구나, 참 안되었다”고 말하면, 연성 씨가 그들에게 말해 주시오. 난 괜찮다고. 열정 속에 들어 있다가 죽었다고 말해주시오.
3) 사랑
* 예수님이 주신 제 1계명에 대해서
나와 남의 구분을 없애고, 남에게 내게 하듯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개방하고, 예수의 삶의 모델, 남을 사랑하는 일에 모든 힘을 다 바친 그 모델에 내 자신이 다가서는 것입니다. 그 완성된 인간의 모습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입니다.
사랑은 계명의 완성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사랑의 생활을 온 힘을 다하여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서에서 전후좌우의 맥락(context)를 배제하고 계명만 추려 내는 일은 사람의 몸에서 피를 모조리 빼내는 일과 같을 것입니다. 성서란 이스라엘인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agape)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의 증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4) 복숭아 명상
송광사 입구에 보면, 현판에 “부모미생전 본래 면목은 무엇이었을까? ”라는 화두가 있습니다. 아마 나 하나의 존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 1000년 동안 수십억 명의 생명이 있었을 것입니다. 깊은 명상에 들어가면, 나 자신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마주치는 일, 사물, 한 그루의 나무도 나와 동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사랑받을 만한 존재입니다.
내 인생 속에서 마지막으로 심혈을 기울여 야 한 부분이 있다면, 근원과 본질에 대한 명상입니다. 꽃이 진다고 해서 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뿌리 속에, 씨앗 속에서 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복숭아 하나가 열매 맺기 위해서 찬바람, 햇빛을 마주쳤고, 어두운 밤을 보낼 때도 있고, 부드러운 이슬비를 맞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복숭아 하나 속에 담긴 우주를 보면 행복을 가득히 느낄 수 있으며 하느님을 먼 분이 아니라 가깝게 느끼게 됩니다.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존재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5) 벼랑의 끝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아들 요한이 생깁니다. 그들이 다 포기했을 때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믿음까지도 버렸을 때, 희망하고 간구하면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까지도 버렸을 때, 벼랑의 끝에서 하나님이 내게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꿈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6) 폭포에서 떨어져 나온 물 한방울
우리의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대한 폭포에서 떨어져 나온 물 한 방울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나라는 존재 속에 인류가 시작된 이래의 모든 문화의 코드가 들어있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큰 생명 속에서 보면 내가 예수님 속에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배제하고 보면, 우리는 하나의 생명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독립된 것으로 보면 무지이며 착각인 것입니다. 내 안의 보혜사를 만납니다. 그 보혜사가 내게 평안을 줍니다. 내 안의 보혜사를 만나는 자리가 성령을 받는 자리이며, 깨닫는 자리이며 자유를 얻는 자리입니다. 내 안을 열고 비우며 그 분을 찾으면 그분은 내 안에 있습니다.
“전도서”에 보면 모든 것이 헛되다는 말이 나온다. 내 존재가 원래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사는 것이 즐거워집다.
“상”을 떠나는 것. 그럼으로써 삶의 기쁨을 알게 되며, 말할 수 없는 자유를 얻게 되고 비로소 참된 의미를 알게 됩니다. 자본주의의 폐해는 우리로 하여금 진상을 못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하고 찾는 도상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애써 마음을 두면서 매일매일 찾아야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몸으로 듣고 몸으로 실천해나갑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으로서의 향기를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작은 미소를 온 우주만물에게 보내보기로해요. 평안이 주위로 물결쳐나갑니다. 한사람이 회개하면 온 우주가 기뻐합니다.
로또 복권 당첨보다 좋은 것
우리는 미래를 잡기 위해 지금을 사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업적이나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 그 중압감이 인간을 억누릅니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아이를 갖으라, 나무를 심어라, 책을 써라”고 합니다.
자녀를 돌보고 청소하고 반찬을 만드는 것을 사소한 일로 간주하고 무가치한 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경어선사(길없는 길. 최인호 저)는 “일 없음이 나의 일이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인위적인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졸려서 잠을 자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무위로 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족쇄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려 오셨기에, 우리 스스로를 해방시켜야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안식일이 아니라 우리자신입니다. 우리의 고단한 욕망을 내려놓으면, 우리는“행위”(doing)가 아니라“존재함”(being)으로 살아나갑니다.
우리의 인생을 퍼즐 맞추기에 비유하자면, 우리는 전체의 퍼즐 속에서 한 조각입니다. 퍼즐이란 한 조각이라도 빠지면 미완성이 됩니다. 전체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생각하면, 자존감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고 삶이 너무나 감사하게 됩니다.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자기 존재에 의미가 생깁니다. 하나님을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본다면, 피콜로, 피리, 플롯 --- 그 어느 것 하나가 빠져도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의 갖고 있는 이상상(모범적인 남자, 여자, 딸, 아들 등)을 죽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아름답고 좋은날을 감사할 필요가 있고, 내가 갖고 있는 좋은 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7) 우리는 놀라운 존재로서 놀라운 순간을 살아간다.
“성실로 네 식물을 삼으라.”는 성구가 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모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인간의 과오입니다. 보여주어야만 믿는 과오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인간이란 하나님의 품안에 안기기까지는 평안이 없습니다. 이 몸은 내 것이 아니며 너무나 신비한 그 무엇입니다.
선승에게 누가 물었습니다. “스님 어떻게 지내십니까?” “숨쉬고 밥먹지”가 대답이었습니다. 밥 먹을 때는 밥만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밥이 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수고했고 대자연에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놀라운 세상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내가 농사를 지었는가요? 아닙니다. 내가 옷을 지었는가요? 아닙니다. 내가 집을 지었는가요? 아닙니다.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남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너대로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무슨 상관이냐?” 남의 일에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내가 너에게 말한 것이나 잘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놀라운 존재,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 자신이 확대되어 갈수록 하나님이라는 power를 느낍니다. 하나님은 power로서 내게 인식되어져옵니다.
무엇을 해야한다는 것 자체도 영적 유물론입니다. 아이들의 생각은 유연하고 진실에 가깝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은 고정화되고 고착화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놀라운 존재로서 놀라운 순간을 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 나 자신을 변화시키면,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욕심이나 악한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상을 넘어서서
우리들은 상에 사로잡힌다. 이것은 좋고 저것을 나쁘다는 상. 상에 사로잡혀 불행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는 “취사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분법의 논리에 갇혀있는 한 천국이 없습니다. 불완전 속에도 낙원이 있는 것이며, 고통 속에도 더러운 것 속에도 순간순간 하나님이 계십니다. 저는 순간 순간 속에서 충만해지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보잘 것 없고 하찮게 보이는 그 속에서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고통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 믿음 속에서 내가 변하며, 내가 강건하여지고 겸손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몰랐더라면, 나는 남에게 기대어서 내 인생을 저주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심을 받아들이면서 내가 변화를 받고 감사와 기쁨으로 생을 받아들입니다. 내가 내 삶에 있어서 힘이 있게 이 삶 속에 발을 딛습니다.
정말로 아름답고 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예배” 입니다.
8) 밥 한 그릇 속의 기적
밥과 나와의 상관성, 이 우주와 나와의 상관성을 생각해봅니다. 밥한 그릇을 먹을 때 주님이 나를 먹이는 그 의미를 절절히 느끼게 됩니다.
씨앗하나 심어 싹이 나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절절히 깨닫습니다. 이 경이로움을 경험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나는 기적같은 경이로움 속에 매일매일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매일 체험하게 됩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되는 것이 기적이 아닙니다. 행복은 깨달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9) 진리로 인해 자유로운 사람
오늘날 번쩍거리고 화려한 것들이 혹은 권력이 인간의 본능을 자극합니다. 인간은 끝없이 욕망하게 되며, 하나님의 형상에서 탈피하게 됩니다. 사람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임에도 불구하고 몸에 구멍을 뚫고, 문신을 하여 온몸에 상처를 냅니다. 갈수록 자본주의와 돈의 위력이 커집니다.
이 시대야말로 "보살"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뗏목이 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 말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때일수록 하나님의 성품이 필요합니다. 사회적인 구조 속에서 자본주의에 물들어 살아간다면, 신앙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물질로부터 떨어져본 사람,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신의 성품에 가까우며, 신의 성품에 참여함으로써 물건을 다룰 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 건강하고 인생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부나 학원에 보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사회적, 경제적 신분에 덜 휘둘리고, 진리로 인해 자유로운 사람이 되도록 키워야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 구조자체를 넘어서는 삶을 누리게 됩니다. 덜 먹고, 좀 가난해도 인생을 즐겁게 누리면서 살게 됩니다.
"아담을 기다리며"라는 책을 읽어본적이 있습니다. 두 전문가 부부가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병원측에서는 지우라고 하였지만, 그 둘은 태아에게 "아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지극 정성으로 그 아이를 기다리는 이야기 입니다. 남들은 장애아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신의 축복으로 알고 그 아이를 키웁니다. 고통 속에서도 범사에 대해서 감사하는 생활... 그것이야말로 우리안의 신의 성품을 간직하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0) 아골 골짜기를 희망의 문이 되게 하리라
호세아서 본문에 "아골 골짜기를 희망의 문이 되게 하리라"는 말이 나와 있습니다. 아골골짜기의 상황은 현재 팔레스타인의 분쟁에서 두드러집니다. 이스라엘을 죽도록 증오하는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은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살 테러단에 가입한다고 합니다. 또한 소록도의 한센병에 걸려 눈이 멀거나 관절을 못 쓰게 된 사람들은 섬 건너편의 사람들을 동경하며, 오늘도 고단하고 가난하고 외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내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 건강한 사람들은 한 번 이곳에 와 보아야한다. 당신들이 얼마나 행복하다는 것을 나의 몸을 통해 보여주고 싶다 "고. 그들의 신앙은 뜨겁고 절실하며, 기도는 피에 사무치는 기도입니다.
비록 팔레스타인이나 소록도 뿐 아니라, 지구에는 하루 1달라 미만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7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교육의 혜택도 최고 수준으로 누렸지만은 마음 속은 복수심, 오만, 절망 속에 가득 찬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세상이 언제나 고통이나 전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정체성을 찾고, 복수심이 아니라 나와 너를 함께 살릴 수 있는 마음을 찾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은 남녀간의 사랑에 빗대어 하나님의 사랑을 약속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사막에서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고, 우리에게 포도원을 주시며, 우리를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향기나게 하리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한편으로는 먼저 깨달은 우리가 그러한 역할을 해야 된다는 얘기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작은 예수로서 살아가야합니다. 우리가 몸소 아골 골짜기로 내려가서 희망의 문을 열어 주어야합니다. 내가 아골 골짜기에 있는 사람들과 혼인한 심정으로, 아니 내 사랑을 그들에게 주는 심정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거친 들로, 광야로, 아골 골짜기로 내려가서 사람들을 위로하고 소망의 문을 열어주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11) 물댄 동산/ 마르지 않는 샘
오늘 읽은 성경말씀 이사야 58장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율법, 규율,
제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데 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온가운데서 오늘 하루를 살면,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이루는 업적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70년의 삶이 길게 느껴지던 때도 있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의 삶인데
말입니다. 이사야 6-10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주린 자에게 내 심정이 동하고, 유리하는 자를
집에 들이고, 괴로워하는 자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성숙해져서 나와 너를 다르게 보지 않는 데까지 이르면, 우리는 물댄
동산"같고 "마르지 않는 샘"처럼 될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주택에서 살았습니다. 그 때 미역이나 김을 바구니에 이고 다니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파는 아주머니들이 있었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그들에게
"다 돌고 잘데가 없으면 우리집에 와서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언니들과 함께
한방에서 그들과 같이 잔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날, 아파트 사이의 10 Cm의 벽이 그리고 층과 층 사이가 10리도 100리도 되는
상황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privacy를 침입하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좋을 지 몰라도 그만큼
인간과 인간 사이가 멀어지고 고립된 상태가 됩니다. 우리의 생활수준은 높아졌지만,
인간간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습니다.
우리가 매번 만나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물댄 사람"이 되어 주며 삽시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늘 찾아다니셨습니다. 본연의 인간의 마음으로 우리는 돌아가야합니다. 오늘날
물질문명의 매력 속에 우리들이 빠져드는 것은 삶에서 기쁨과 경이로움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쇼핑, 자기과시, 호화로운 가구, 여행 이런데서 공허함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주는 기쁨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마음에 진정한 평화를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적게 가지고 풍요롭게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소비의 쳇바퀴 속에서 살아가며 매일
돈을 벌어야 하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종교의 역할은 고만 소비하라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인간답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12) 마리아의 노래
누가 1장은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그 노래에는 "하나님께서 권세있는 자를 내리치고 비천한 자를 올린다"는 시구가 나옵니다. 세상에서 비천한 자리에서 고단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러한 메시야를 이스라엘 사람은 기다렸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길다에서 나온 말 같습니다.
그리움 같은 것.
우리 마음속에 메시야를 기다리는 그러한 그리움이 있을까요?
13) 매주 예배하는 까닭
우리는 돈, 지식, 가정 등에 집착하기 쉽다.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악기의 현도 거리를 두어야 아름다운 소리가 나고, 나무도 거리를 두어야 잘 자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마음 가라앉히는 묵상을 하고, 묵상 속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이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엄마는 아이를 그르치기 십상입니다. 거리를 두고 아이가 자연스럽게 클 수 있도록 오래 기다려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매일은 소중합니다. 천금보다 더 중요한 날들입니다. 오늘 시편 말씀에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해서 우리의 영혼을 소생(revive)시킨다고 합니다. 예배란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 올려드림으로서 우리가 다시 소생케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한 주간 살면서 지치고, 숨 막히게 될 때, 일요일이면 다시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 들어올리고, 소생하고, 눈이 밝아지고, 지혜롭 게되고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 삶에서 너무나 좋은 시간입니다. 그분께는 영광이고, 우리에게는 지친 몸과 영혼을 소생하게 하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14) 만남의 복
성경: 열왕기 하 5: 1-9
우리는 살아가면서 만남의 복을 갖습니다. 그것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지고지선의 만남은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만남은 우리의 성장에 방해가 되기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혹은 만나고 싶지 않은데, 만나보니 좋아서, 평생을 같이 가는 도반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지고지선의 만남이란 첫째는 하나님을 만남이요 둘째는 배우자를 만남이 아닐까합니다.
길가를 걸어가면서 모르는 사람은 스쳐지나가고, 아는 사람이면 반갑게 인사를 하게 됩니다. 우리, 즉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인 우리를 통해서, 거룩한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가 누군가의 문둥병을 낫게 하고, 그리스도의 유익을 가져다주는 통로가 된다면 또한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읽은 성경에서 시리아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 출신의 하녀를 통해서 엘리사를 소개받게 되고, 문둥병을 치료함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듯이.
설령 우리가 싸우게 되는 관계를 갖게 되더라도 인간세계와 동떨어져서 혼자지내는 것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유모인 어머니와 만남으로서 파라오가 되는 길에서 벗어져 나와서 추방되었지만, 결국은 고통당하는 민족의 지도자가 됩니다. 한편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남으로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혜택을 포기하고 천막을 꿰매는 중노동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그 길이 바로 구원의 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때로는 비틀린 관계를 갖게 되지만, 성령께서 지혜를 주셔서, 관계를 회복하게 되고 더 높은 것으로 채워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비록 불편하고 힘든 관계 속에 처했을 때라도, 우리에게 뛰어난 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그러한 선물을 못 받고 산다면, 우리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요, 성령을 구하기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혜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은 불변한 것입니다.
15) 세계의 중심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이란 고작해야 대양의 물 한방울 정도가 아닐까요? 법정스님은 화두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평생 갖고 간다고 합니다. 간단하고 단순하게 살아간다고 하십니다. 지구 상에는 그 무엇도 바랄 수 없는 가난하고 힘들고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 분에 넘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우리는 빚을 지고 사는 것입니다. "아시아 협력기구"에서 카불에 갔더니, 그곳에는 먹을 것이 너무나 없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의 보좌를 버리고 "인간"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나 자신에 갇혀 살면 상대방의 쓰라린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은 더 가지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을 착취합니다. 자기중심적이 되고 에고가 강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구조악과 어떻게 싸워야 할까요? 박노해 시인은 가정의 중심이 아이이듯이, 세상의 중심은 고통받는 이가 되어야한다고 했습니다. 가장 아픈 사람이 있는 곳이 세계의 중심입니다.
16) 우상은 자기를 떠받드는 사람을 반드시 파괴한다
일전에 TV에서 한 목사님의 말씀, "우상은 자기를 떠받드는 사람을 반드시 파괴한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우상이란 우리가 탐닉하고 집착하여 우리의 혼 전체를 주어버리는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알콜, 돈, 명예, 애인, 인기, 권력 등 갖가지 모양새로 사람을 유혹합니다.
우리가 맘을 다하여서 섬겨야할 대상이 있다면 하나님이여야 할 것입니다. 온전하고 신실한 마음을 그분께 바쳐야 하는데, 유한한 대상을 우상으로 떠받들 때, 그 우상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파괴하고 맙니다. 알콜중독은 알콜중독자를 파괴시키고 돈을 숭배하는 사람은 돈으로 인하여 파괴됩니다.
이사야 본문 말씀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의를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물이나 헌금 따위보다도 우리의 행실로 믿음을 보여주기를 종용하고 계십니다. 하루 해가 질 때 우리는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루 종일 우리는 무엇을 섬기며 무엇에 마음을 주며 살았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17) 부활
성경: 누가복음 24장 13절-34절
부활이란 영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성서의 증언은 한계 없는 것(영의 세계)을 한계가
있는 것(인간의 언어)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말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영의 생명이 육의 죽음을
삼키는 것입니다. 생명이 죽음을 삼키는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생명이 죽음을 삼키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고후 5:4) 우리가 눈을 감으면 햇빛을 받지 못합니다다. 우리가 그 분께서 우리에게 주는 것을 받을 때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우리가 영원한 것과 맞닿아 있을 때, 기쁨이 있습니다. 기가 뿜어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꼬는 가난한 사람 사이에 살지만
평화롭고 풍성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모든 것을 갖고도 부족해 보입니다.
우리는 모르고 사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감사해야 할 것이 많은데 잘 모릅니다. 비노바 바베의 경우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자리(브라만)에 태어났지만, 자신을 낮추어서 경이로운 삶의 자리에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돈을 버는 것이나 과장이나 부장자리로 승진하는 것은 부차적인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똥” 처럼
여겼습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처한 자리에서 사도바울적인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은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사도 서간에서 복음서로 성경을 역으로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이전에 십자가 처형이 있었고, 그 이전에
체포되셨고, 그 이전에 복음을 전하는 일, 갈릴리에서 제자를 부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매 삶이 십자가의
길이며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예수를 살리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서는
신앙고백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나자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은 유대교 율법 안에서는 미련하고 어리석고 실패한 것인지 모르지만, 자비로운 길이고 승리의
길이고 천지의 모든 지혜를 지닌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험한 십자가의 길이 모든 생명의 상징이 됩니다.
18) 나를 참 많이 닮았구나
성경: 야고보 5장
... The prayer of a good person has a powerful effect. (5:16)
야고보 5장의 메시지는 크게 세가지, 첫째 길이 참으라는 것, 둘째 마음을 굳게하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로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니고 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가면,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평화로 채워 주십니다. 그렇게 사노라면 우리들은 그분의 품성을 닮은 사람이 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그 분을 뵙게 될 때 어쩌면 그분은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너는 내 자식인데, 나를 참 많이 닮았구나.“
하나님의 품성을 닮은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살아갑시다.
19) 위기의 밤을 지나며
Psalms 42:1-3
As a deer longs for a stream of cool water,
so I long for you, O God.
I thirst for you, the living God.
When can I go and worship in your presence?
Day and night I cry,
and tears are my only food.
all the time my enemies ask me,
"Where is your God?"
시편42편은 고라자손의 노래로 되어있습니다. 고라 자손은 성전에서 음식을 담당하는 일을 맡았다고 하는데, 시편 중에서도 특히 그들의 노래는 심금을 울립니다. 우리는 고통 중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계신다고 생각하니까 울부짖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우리가 그 분안에 있다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 우리믿음이 어떤지 볼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도 그분 안에 있다는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한번이라도 밤을 새워서 죽음과 사투를 하고 난후 입원실에 누워서 동터오는 푸른 하늘을 보면서 "내가 다시 살겠구나"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지요?
목요일 밤 이웃과 밤 9시경까지 즐겁게 얘기하고 침대에 누워있는데 갑작스레 맥박이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재보니 1분에 120번까지 뛰는 것이었어요. 부정맥이 있는 사람은 그 순간에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는 것이 좋다 하여, 119와 연결되어있는 버턴을 눌렀습니다. "김안옥씨죠?" 저쪽에서 내 이름을 무었고, "앰뷸런스를 보내 드릴까요?""묻더군요. 3분내에 도착한 앰뷸런스 직원은 나를 들것에 태우기 전 맥박과 혈압을 재었습니다. 200까지 올라갔습니다. 앰뷸런스를 타고 가는데 가슴에 풍선이 금방이라도 터져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응급실에는 도착하지마자 모든 것이 척척 준비되었습니다. 병원에서 하는 처치를 받고, 조형제를 먹고 가슴 CT촬영을 하였습니다. 바로 옆에는 자다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붙들고 처녀한분이 슬프게 울었습니다. 60대의 할머니는 병원의 모든 처치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돌아가셨습니다.
아침이 다가올 무렵, 나는 소아과 입원실로 옮겨졌고, 차창밖에 푸른 하늘이 동터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고독하게는 죽게 하지 마세요. 내게 사랑을 베푼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죽게 해주세요."하는 기도가 가슴에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위기"가 지나면 삶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을 하게됩니다. 나는 이번 경험을 통해서 이제는 내주변의 모든 것을 정리하면서 언제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죽음에 대비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진실한 인간관계를 통해서 참된 사랑의 의미를 배우게됩니다. 나는 큰 우정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엿봅니다.
오늘 읽은 시편 본문은 눈물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다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침묵도 역시 그분의 응답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놀라운 관계 속에서 경이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Energy가 올 때, 나는 경이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하늘의 사랑을 받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전해오는 사랑,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랑, 그런 사랑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20) 자발적인 고난
다음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따라서 고난, 수난, 고통에 대해 생각해볼까 합니다. 현대인으로서 "대신 고난을 당했다는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뿐 아니라 대부분의 성인, 비노바 바베, 석가, 간디, 슈바이처, 유관순, 이순신, 마더 데레사 등은 일신의 안위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자발적으로 고난을 짊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한편 불가항력적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질병, 사고, 실수에 의해서 말입니다. Y교회 사람들이 아프라카 케냐에 의료선교를 나갔는데, 현지민들이 에이즈에 의해 고통받고, 수탈당하여, 무지하기 때문에 독재자들에게 항거하지 조차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한편 자발적인 고통을 짊어진 사람들은 끝에 "영광"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말할 수 없는 존경을 받게되었습니다.
점점 부익부 빈익빈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예수의 고난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사회가 점점 비인간적으로 되어가서 자원봉사자를 얻기도 힘이 들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고통을 짊어지셨던 분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은 고통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해방의 말씀입니다.고통이 있지만, 진리가 있기 때문에, 진리를 고통 중에도 껴안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고통속에 있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준다는 것이 아닐까요?고통이 아니고서는 "영광"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깊은 뿌리까지 보는 통찰이 필요합니다.
21. 퀼트
5대 독자를 잃은 어머니에게 틱낱한은 "저 산,저 들, 태양을 보라. 그러면 아들이 없어지지 않고 살아있음을 알게 될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아들을 살려달라고 부처님께 조르자, "아무 슬픔도 없는 집에서 쌀을 한 됫박 얻어오면 살려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집은 없지 않은가요! 크고 작던 우리는 쓸쓸하고 외롭고 슬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무나 큰 슬픔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위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비 오고 바람 부는 날. 한없이 외롭고 쓸쓸해집니다. 인생의 충만한 날. 그날은 계속되지만은 않습니다. 슬플 때 피하지 말고 그 안에 잠겨서 슬프고, 외로운 날 그 외로움에 잠겨서 그 외로움의 왼통을 살아보시기를 빕니다. 퀼트처럼 사랑, 환희, 고독, 쓸쓸함, 분노 ----그런 것들로 우리의 인생이란 퀼트가 짜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신비롭고 경이한 것으로 가득합니다. 연어의 알록달록함.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밥"이란 "선물". 마틴 부버는 말하기를 “만남은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동이 없이 인생을 살아나갑니다. 우리는 평범함 속에서 신성을 발견하며 경이로움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22) 수 브로치
When I design this broach, I have a plan in my mind. This place is for green stitch; that is for the blue; that is for the yellow and etc. Who designs your life? God does. In coming year, your life will be 100 % freer. There only remain the life of creativity. You’re God’s workmanship. (2018. Nov.)
23) 조각보 설교
(patchwork wrapping cloth)
This is a gift for you. Some patch is pink; some is indigo; some is purple; some is black, and etc. In our life there is raining days; sunny days; or windy. All together they make a life which is beautiful.
24) 형통하는 삶 Life which is a success(prosperous)
Let us look at the life of Joseph. He underwent misfortunes such as being hated by his brothers, and being put into a prison. He eventually became the prime minister of Egypt. He interpreted his life a success. Living each day with God is
a success.
25) 환한 얼굴빛
우리의 얼굴은 그분의 얼굴빛을 받아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들어오시고 우리가 그 분을 닮아갈 때, 우리는 메시아를 꼭 닮은 형상으로 변화되고 우리 삶은 점점 더 밝아져서 보다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점점 하나님을 닮아 가게 됩니다.
· Yourselves are Lord's letter.(Lord's messenger)
선생님한테는 달콤한 향기가 납니다. 점점 얼굴빛이 빛납니다. 그분을 의지하고 살면 그분을 알게 됩니다. 예수의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밝고 환하여서 아름다워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6) 말에 생명을 불어넣기
생명의 빵, 생명의 밥이 얼마나 피부에 느껴지는가요? 말씀이 얼마나 내 삶과 버물려지는가요? 젊은 아이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에서는 그들의 삶과 친밀한 얘기를 해야하겠습니다. 그들과 많은 얘기를 하고, 지지와 위로를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먹고 사는 일이 당면한 시급한 문제입니다. 그들은 위로를 받고 싶고, 인생에 필요한 얘기를 듣고 싶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눈물은 과학적으로는 소금과 물이지만, 그 이상인 것입니다. 종교는 과학으로 검증안되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 안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허기가 채워지고 갈증이 가십니다. 인생이라든지, 생명이라든지 하는 얘기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지금 돈, 취직, 성공이라는 말이 가장 살아있는 말로 행세를 하는 세상입니다. 여태까지 죽어있었던 언어를 되살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죄라든지, 십자가라든지 하는 말이 죽어있는 말이 되어있습니다. 점점 죽어있던 뼈들이 달그락거리고, 숨결을 불어넣고,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더 큰 것을 바라보고, 더 깊은 것을 바라보고, 조금 우리는 느긋하게 갈 수 있습니다.
27) 자유
말씀 한 번 깨닫는 깨달음이 어떤 보배를 갖는 것보다도 큽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의 세계 속에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탐욕부리지 않고 우리는 갑니다. 돈, 자식, 권력이든 집착하면 올가미가 됩니다. 자유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 예수를 믿느냐구요? 자유하기 위해서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진리가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시지 않으셨던가요?
믿음이란 우리의 모든 것을 건 최고의 모험입니다. 생명인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인가 사이의 일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을 얻을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입니다. 초대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합니다. 예속되고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자유로운 사람, 생명의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미움으로부터 벗어나서 참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믿는다 하면서도 “삶” 따로 “신앙” 따로 인 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여 인간의 탐욕이나 거짓으로부터 놓여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28) 버린 돌도 모퉁이 돌로
악은 풀처럼 흥성합니다. 의인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버린 돌을 모퉁이 돌로 쓰십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
☆시편 118편 22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는 기이한 바로다.”
29) 비올라는 콘트라베이스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이러니까 좋고 저러니까 나쁘다는 분별심을 버려야합니다. 비올라는 콘트라베이스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분별심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일도 하나님이 동행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알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 . 애오라지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그 일을 즐기며 하는 것입니다.
30) 거절당하는 축복
누가 2장 1절(예수님)
예수님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거절당했습니다. 마리아가 만삭으로 돌아다니지만, 맞아들이는 집이 없었고, 아기를 낳아도 뜨거운 미역국을 끓여다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가 집을 가지지 않은 곳에, 거기에 우리는 집을 가졌습니다. 바로 그가 우리의 집이 되는 곳입니다.
힘이 없거나, 돈이 없으면 무시당하고 멸시받으며 사회 구조적으로 거절당하게 됩니다. 보이는 곳에서도 거절을 당합니다. 그러나 거절당한 것이 축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거절당한 것이 감사하게 되는 상황으로 어느 순간 변화됩니다.
거절을 당함으로써 우리 마음이 낮고 낮아져서 구유처럼 낮아지셔서, 낡고 천하고 작고 여리고 보잘 것 없이 되는 것입니다. 거절의 끝에서 피어나는 꽃이 아름답다 그러하니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우리가 당한 거절을 복으로 알고 사십시다.
삶의 벼랑 끝에서 <타고르의 시> 죽음이 당신 문을 두들길 때에 당신의 어떤 삶의 열매를 가지고 그분을 맞이할 것입니까?
31) 사브라
‘사브라’는 선인장 꽃의 열매입니다. 아침에 맺히는 이슬 몇 방울 빨아들이면서 생존합니다. 열매맺을 때까지 인고의 세월을 사는 것이죠. 우리도 주님의 사브라일 것입니다..
32) 언젠가 나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다
골다공증으로 뼈가 조그마한 충격에도 골절이 잘됩니다. 3 개월동안 다리에 기브스를 대고 지내야합니다. 불편하지만 언젠가 기브스 풀고 나을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33) 우리의 궁극적 관심사
누가 10: 41-42
-----많은 일/ 몇가지 일/ 한가지
마르다(언니) 는 많은 일 속에서 분주합니다. 마리아(동생)는 궁극적인 한가지 일에 힘씁니다. “Mary has chosen what is better.”
왜 마리아를 칭찬했을까요? 마리아는 인간에게 유일한 관심사를 택했습니다. 관심이란 관심사에 개입하고 마음을 다해 힘과 열정을 다해 참여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빼앗겨 버릴 수 있는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끝장나고 유한하고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것에 집착해서 그렇습니다. 일· 문화 · 일용할 양식에 대한 관심 · 재산 증식에 대한 관심 등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울한 무상의 법칙이 지배합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관심을 궁극적인 것인 양 지키려 합니다.
궁극의 무한한 관심의 대상은 아무도 궁극적 관심을 뺏을 수는 없습니다.
34) 모든 고통스런 일들 속에 성숙과 해방의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누가 24 : 26
악과의 싸움에서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하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고통이나 고난에 대해서 묵상이 필요합니다. 고통이나 고난은 우리에게 성숙이나 해방을 가져다줍니다. 깨달은 만큼 고난이 헛되지 않게 됩니다. 고통이 우리를 방문하면 잠잠히 고통을 직시해보기로 해요.
35) 생명을 우선순위에 두라
“돈에 좌지우지 되지 않게 너 자신을 지켜가라.” 이러한 가르침이 정신적인 “유산”이 되게 아이들을 교육시키십시오. 공부가 내 삶에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치게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자녀에 대하여 깨달음의 칼로 애착을 끊어야 합니다. 애착을 끊고 “사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녀에게 처음부터 100%를 겪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실패를 거듭하고 눈물의 과정을 겪더라도 아이들을 믿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엄마는 너를 믿는다”라고 말하고, 저를 어른으로 대우해주기 바랍니다.
아이들 손에 쥐어주기보다는, 쓰라림을 경험하더라도 힘들더라도 스스로 겪어내게 해야 합니다. “엄마도 그런 길을 걸어왔다.”고 말해주고, 아이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생력”을 기르게 됩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하고 활기한 아이, 제 인생을 야무지게 쌓아갈 수 있는 아이가 됩니다.
아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주시오.
“엄마는 너를 믿는다. 네가 힘들면 엄마가 도와준다. 잘 하리라고 믿는다. 아주 아름다운, 자기만의 인생을 잘 살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36.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대한 단상
자녀를 길러보면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됩니다. 선하고 참사람 되는 것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Christian love compels us”.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면, 우리도 그러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주인공은 동생과 앵벌이를 전전합니다. 알콜 중독자 아버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얕고 초보적 단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를 바라면서 그 사랑이 깊어집니다. 그 사랑이 깊어지면, 우리의 삶이 확대됩니다. 더 나은 예술적 표현으로 되게 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더 적나라하게 경험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서 24시간 매 순간 우리를 주님 앞에 몰아갑니다. 엉뚱한 생각하고 엉뚱한 것을 바라다가 다시 고개를 내리고 나 자신을 주님 앞에 몰아갑니다.
사랑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내가 더 인간적인 사람이 됩니다. 사도바울은 내 목숨을 불사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nothing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가치 중에서 최고의 가치는 “사랑”입니다.
37. 시인이란 거룩한 바보들이다.
-----P 교수의 수필에 대한 단상.
희망은 시인이 일구는 포도밭입니다. 악인의 열정이 너무나 열렬합니다.
시인은 시대에 환멸을 하고 매번 싸움에 지더라도 기쁨의 춤을 춥니다. Wounded Healer. 상처를 겪고 나면은 다른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됩니다. 나는 상처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상처로서 끝나면 악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능력이 됩니다. 그 능력이 다른 사람을 치유하게 됩니다.
실패를 노래할 수 있게 하세요. 카잔차키스의 소설에서 섬에서 태풍이 천막을 엎을 듯 부는데, “ 내 천막을 엎어? 그것은 안 되네.”
너는 너답게, 나는 나답게 살아가세요. 10년만 지나도 세상이 바뀝니다. 내가 행복하고 자유로워지고 즐거워하면 좋은 삶입니다.
더 좋은 때는 오고 있습니다. 연구를 멈추지 말고 하기 바랍니다. Loser란 생각속의 Loser일 뿐입니다. 지식으로 창의적 삶을 찾아나가라세요.
38.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에베소서 4장 2절 For we are God's workmanship
우리는 그의 작품(masterpiece)입니다. 포이에마(그리이스어). poema는 poem의 어원입니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은
우리를 그분의 걸작품을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5 : 12.
gift중의 excellent way는 사랑이다.
순종을 하나님께 열매로 드리세요. 사랑. 왜 그렇게 excellent way인가요?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비출 때 큰 기쁨이 옵니다. 참된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우리 안에 이미 있었던 사랑: 자궁 속에 있을 때 형질로서 들어있습니다. 열려지고 뭔가를 주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한다면 원래의 사랑을 회복한 것입니다.
주의 사랑이 비춥니다. 나의 형제. 나의 자매. 의식의 반경이 커지면서,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했지만 저 멀리 고통받는
사람에게까지 연대감이 생깁니다. 전 지구촌으로 circle이 확대되어갑니다.
Everything belongs...
연대감... 전 지구상의 모든 지렁이 , 새 한 마리까지 형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알수록 우리 의식이 확대됩니다.
전 지구적인 연대 안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깨어나게 하십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깨어나도록 하십니다. 살아서 관계되어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늘 그런 마음자세로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새롭게 우리를 만드십니다. 큰 의식에까지 이르는
걸작품으로 만드십니다. 늘 우리를 작품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께 나를 내어드림으로써 그 분이 늘 새로운 생명으로
만들어가십니다.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사랑이구나하는 자각이 생깁니다. 내 형질을 이룰 때있었던 사랑이구나하고 느끼게 됩니다. 아파지는 마음. 속상하고 가슴이 아픈 것.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비합니다. 일치감. 내가 없어도 이 세상이 있고, 이 세상 원래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감을 이루는 것 말이죠.
39) 버릴 것만 있어서 참 좋다.
Surprising greatness (예수 그리스도)
율법에서 난 의는 네가 그 영광을 챙기고 네가 잘났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우리는 아직도 율법에서 난 의를 주장한다. 나를 챙기고 내 가치를 드러내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면 세상의 가치가 뒤집어집니다.
<가치 전환>이 신앙입니다. 즐겁고 좋던 것들이 맥없고 값이 없게 됩니다. 의인의 자식이 걸식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부모가 옳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재물욕과 권력욕을 도끼로 나무 자르듯 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욕심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내 주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내 손 뻗어주고, 괴로운 것 있으면 도와주게 됩니다.
40) 우정이 기초가 되는 공동체
---복이 있도다. 가난한 사람들아!
우정이 기초가 되는 하나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내 보이고 그 상처를 치유합니다. 콩 한쪽도 나눠 먹습니다. 콩 한 말 있으면, 반 말 나눠먹기 어렵습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것. 가난한 사람들. 사실은 그들의 상태가 가장 부유한 상태입니다.
명예나 물질에 집착하거나 탐닉하지 않고 심드렁하고, ‘자리’가 오거나 가거나 해도 심드렁하고 자유롭기에 정말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 공동체에서는 하나님 그 분만의 만족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마당만 밟고, 전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지는 못한다.
넉넉하면 나누겠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콩이 서말이라도 나눠야 보배입니다. 하나님은 오랜 세월을 두고 새로운 패러다임가진 사람으로 바꿔주십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하늘의 은사를 들고 내 삶의 잔을 채우고 계십니다. 동참하면서 “삶의 조건”을 바꿔보려고 합니다. 분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들이 세워놓은 패러다임을 넘어섭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사랑이면서 평등하게 됩니다. 오래참고, 자비한 사람을 만들어 주십니다.
41) 자아숭배가 우상이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은 시베리아 유형 중 많은 글을 씁니다. 내가 신이 되려고 하는 것이 죄입니다. 공부, 직업, 자아실현으로부터 자유로워 져야 합니다. 돈에 내 영혼을 팔만큼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신이 되려고 하는 속성을 버려야 합니다. 사실 죄 밖에는 없는 인생들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 주님은 우리를 붙들고 지켜주십니다.
믿음의 유전(고통)이 그대를 통해 흘러나갈 수 있도록 하라
어머니의 믿음이 자녀에게 전하여 집니다. 20년 혹은 30년 지나서 아이들이 믿음의 기쁨과 감사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복이 집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것들은 사라지고 흙이 되고 허망해진다.”
Therefore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twardly we are wasting away, yet inwardly we are being renewed day by day.
2 Corinthians 4:16
나는 질그릇이며 내 안에 담긴 것이 있으니 그것은 믿음이라는 보배입니다. 영성이 있는 자는 여유롭습니다. 또한 부드럽고 (잘) 웃습니다.
42) 파도가 와도 다시 일어선다
예배 참석을 습관화 하십시오. 말씀이 삶 속에 들어옵니다. 상황에 파도가 와도 원칙에 따라 일어서게 됩니다.
43) 용서
“책”읽고 명상하고 기도하고 ... 그리고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자비심으로 대해야 합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나를 피폐하게 만듭니다. 따뜻하게 챙깁니다. 마음의 평화를 지니고 옆 사람을 배려합니다. junk food만 먹지마십시오. 살라고 돈을 버는 것이 아닌가요? “네 힘들 때 등을 도닥여주십시오.”
서로 격려해 주고 자비심을 주십시오.
용서도 수행의 과정입니다. 수많은 반복이 되어서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용서가 가장 큰 수행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어지러운 세상 속에 놓여졌습니다. 그런 것들 사이에서 어떻게 조화롭게 매몰되지 않고 인간다움을 지니고 살아갈 것인가요?
날마다 여인숙에 손님들이 도착합니다. ‘가다가’ 원하지 않은 손님도 만납니다. 미운 사람은 가슴으로 볼 때는 용서가 안됩니다. 내 가슴 안에 가슴에 미소 짓습니다. 내 안의 진짜 ‘나’와 합일을 합니다. 그 사람을 향해 미소 지을 때, 내 안의 깊은 나에게 미소 짓습니다. 지극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십시오. 성령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십시오.
배신감과 고통 속에서 어떻게 미소 지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복음입니다. “될 수 있기에 우리를 부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들을 용서하라.
44) 하느님이라는 이름의 연인
시편 Great wealth
그분은 인간의 사랑을 구애하십니다. 연인의 관계 (포도나무, 포도나무가지)와 같습니다. 신부는 교회입니다. 신명기서에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관계성 안에서 새롭게 깨어서, 그 안에 들어가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죽을거야.” 그런 희생적이고 크낙한 사랑 안으로 한걸음씩 더 나아갑니다.
우리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바닷물의 한 방울에 불과합니다.
시편 146편에 하나님은 한결 같이 자비로우신 분이 십니다. 어떤 처지에 있어도 위로하고 격려하고 선한 것을 베풀어주십니다. 우리드링 엎어지고 피가 나고 울부짖더라도, 인간이 갈 수 있는 최상의 삶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45) 완전한 세상
모든 순간의 선택이 답해져서 자기 삶의 결과물이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그 사랑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은 사랑자체이십니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 다음 세상은 완전한 세상일 것일 것입니다.
늙는 다는 것은 축복이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보고 편안히 세상을 떠납니다. 내 세상은 가지만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늙는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evil desire가 이빨 빠지듯 빠지고 순수한 것만 남아서 하나님만 바라다볼 수 있습니다. 시므온은 새로운 Age를 기다렸기 때문에 아기 예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입을 것이 넉넉하고 권세와 명예욕이 충족되면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46) 영원한 집
「죽음 - 장막집이 무너지며 하나님의 영원한 집을 예비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집으로 기쁨으로 갈 수 있으면 좋습니다. 어려움이 고통으로 끝나면 슬프고 외로운 것입니다. 산모는 고통을 통과하여 자식을 낳게 됩니다.
완벽한 귀향
삶을 공부하는 것이 죽음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완벽한 “귀향”입니다. 낯설지 않고 너무나 친근한 말할 수 없이 친근함이 느껴집니다.
47) 모세의 죽음
신명기 32장 는 모세의 “백조의 노래”입니다. 모세가 느보산에서 죽습니다.
태풍을 맞서서 가는 새가 독수리입니다. 돈이 많아도, 학식이 많아도 자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광야를 거치면서 영원한 가나안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사는 것은 텐트치고 사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48) 나를 섬기는 예수
주님은 나에게 숨을 쉬게 하시고, 밥을 먹게 하시고, 햇빛을 보게 하시고, 친구를 보고 미소를 짓게 하시고, 꽃 향기를 맡게 하시고, 빛나는 태양을 보게 하시고, 누워서 편히 자게 하십니다.
어느 사이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 머리에 서리가 내렸으나 나는 괜찮으니 내 속에서 일하시는 주님 때문입니다. 내게 공황장애가 왔을 때 긴장하면 숨도 안 쉬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숨을 안 쉬면 부정맥이 왔습니다. 숨 조차도 내가 쉬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은 자율 신경을 통해 내가 숨을 쉬게 하십니다.
태양이 오늘도 비추고 있고 그 안에서 나는 주님의 섬김을 받고 있습니다. 봄바람 불고 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진리를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날마다 감촉할 수 있는 진리를 체험하고 사니 이 세상에 다른 복이 어디 있겠는가요? “나는 반드시 너희와 함께 하겠다” 약속하셨고, “다시 와서 너희를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하셨으니 그 약속에 나를 맡깁니다.
우렁이 빈 껍데기 같은 냄새 나고 악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어린 양의 신부로, 교회로 만들어 주신다고 말씀하셨읍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리스도는 이 순간도 나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Even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to give His life a ransom for many" (Mark 10: 45)
49) 그리스도 안의 자유
우리가 고통스러운 것은 땅에 끌리기 때문입니다. 그 경계를 넘어서면 단순합니다. 인간은 돈과 명예를 원하지만, 돈과 명예로 삶을 풍성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행복을 주셨는데,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잣대로 재기 때문입니다. 내 중심의 행복을 찾기 때문이다. "습"에 눌리어서 내 중심의 행복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벽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믿고 늘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도가 일이고 일이 기도입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해야합니다. “언제나, 늘, 기뻐하라.”는 것이 주님의 뜻이십니다. 기도하면 욕심이 안 나고 늘 기쁩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감사가 넘치는지 모릅니다. 더 깨닫고 나를 더 버리고 더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입니다. 많은 소외된 사람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삶이란 큰 축복이고 은총이며 천사들도 우리를 부러워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 아들을 줄 정도로 완전한 행복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 속에서 우리는 궁궐에 거해도 자유롭고, 신분이 높아도 거기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빈한하지만, 아무것도 없지만, 어찌 보면 없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부분이며 죽음으로 삶은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름을 지을 수 없는 그분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만 불러도 충만한 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나님께서 선한 사람도 구원하는데, 악인도 구원하지 않으랴"고 하셨습니다. 선한 에너지의 영향을 받으면 우리는 이야기, 몸짓 속에서 우리는 에너지의 감화, 감흥을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으로 수억의 인구가 신앙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50) 기도
Mark 1:35
Very early nest morning. long before daylit, Jesus got up and left the house. He went out of town to a lonely place, where he prayed.
믿음으로 자신의 자녀를 또 키웁니다. 눈물의 씨를 뿌리고 갑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나 그 단을 거두어들일 때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커서 목사가 되었는데, 동네 할머니가 그를 위해서 25년 기도했습니다. 1-2년에 되어서 기도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도 있지만, 20년-30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소망은 은사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열랍이 됩니다. 성령께서 탄식하면서 기다리는 기도가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조급한 인생을 사는지 모릅니다. 가정, 부부, 친구 관계에 있어서 말이죠.
소유로서 존재의 목적을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바쁠수록 기도해야합니다. 기도란 낫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낫을 벼리면 더 많은 일을 낫이 할 수 있습니다.
세계가 장기 불황이라서 경제적으로 우리는 더 어려워질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영적인 것을 아이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습니다. 하늘의 빛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살리고 따뜻하게 하고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촉발시키고 사랑을 들추어내고 확인시키고 불을 붙이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시간입니다.
51)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
하나님 나라는 부귀귀천을 떠나 평등합니다. 그 안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인간적 가치가 배제된 세상입니다. 높낮이가 없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이 시대에 한국에서 태어나셨더라면 사람들은 “나사렛 사람? 몇 학번이여?”라고 예수님께 물었을 것입니다. 사회가 기존 기득권자들의 프레임에 속하지 않으면, 사람을 주변부에 머무르게 하려고 공모를 합니다.
에필로그
마하트마 간디의 후계자이며, 부단 운동으로 지주의 땅을 헌납받아 땅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운동을 하였던 비노바 바베의 자서전 『사랑에 의해 감동받아 (Moved by Love)의 마지막 말은 “나는 잊으십시오. 그러나 기타는 기억하십시오”(Forget me but remember Gita)였다. 안옥 언니와 나는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잊으십시오. 그러나 복음은 기억하십시오”(Forget us but remember Glad Tidings.)라고 말을 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