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말한다 | 토왕성 빙벽 초등 ＜상＞]

[김용기]

[산을 말한다 | 토왕성 빙벽 초등 <상>]

나를 가로막는 벽에서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 여기 왔다

• 글·사진 백인섭 산악인 요델산악회               

왜놈에게 초등 빼앗기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도전 결심

▲ 토왕성 상단 빙벽 등반. 촬영 백인섭.

나는 그때까지 빙벽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암벽에 매혹되어 바위만을 찾아 다녔다. 물론 외설악 자즌바위골의 50미폭과 100미폭 그리고 권금성 직등 시 상단의 빙벽과 내설악의 쌍폭 빙벽 등을 오르면서 빙벽의 매력을 어느 정도 맛보기는 했지만 매혹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항간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일본 등반가들이 우리 설악산의 토왕폭 빙벽에 군침을 흘리면서 설악산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의 소중한 등반 대상을 어찌 외국인에게 더더군다나 왜놈들한테 내어 준다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일단 토왕폭 빙벽 초등에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등반실력 비등한 최정예 3명으로 팀 구성

토왕폭 빙벽은 총 300m의 표고차를 이루는 수직절벽에 형성되어 있는 거대한 얼음 기둥이다. 자즌바위골의 100미폭보다 규모가 3배 정도나 된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3단계로 이루어져 있어 단계별로 등반하고 안전하게 비박하면서 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단 구간은 자즌바위골의 50미폭 정도이고 중간 구간은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내설악 쌍폭 정도의 빙벽이니 별 문제 없이 오를 수 있을 거라고 판단되었지만 문제는 수직으로 100m 이상 치솟은 상단부다.

당시 군용 자일의 길이가 고작 36m이니 20m 정도로 피치를 끊어서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자일을 연결해서 사용하면 그 매듭이 카라비너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는 1m 간격으로 아이스하켄을 설치하면서 인공등반 방식으로 오르는 것이다. 그럴 경우 20m를 한 피치로 해도 5피치 이상 된다. 매 피치에 하켄 20개 정도가 설치돼야 한다. 10분마다 선등자에 의해서 하켄 한 개가 설치되고 라스트에 의해서 하켄 한 개가 회수되는 경우 피치당 200분, 즉 3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그렇다면 상단부 등반에만 20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하루에 10시간 등반을 한다 해도 최소 2일이 소요되는 셈이다.

따라서 최소 한 번은 비박을 해야 하는데 빙벽에서 비박은 불가하고 그렇다고 밑으로 내려와서 비박하고 다시 오른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선 자일 하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확보물 설치가 불확실하고 또한 요즘처럼 등강기(주마)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기에 다시 오르려면 거의 처음 오를 때처럼 막대한 힘과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근처 암벽으로 빠져서 비박하고 다시 빙벽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다행히 상단의 암벽은 수직 벽이지만 잡목지대가 도처에 형성되어 있는 걸로 보아 최소한 앉아서 비박할 수 있는 장소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20시간 이상을 나 혼자 선등하면서 개척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점이었다. 해법은 그 동안 내가 해온 거의 모든 초등개척 등반과는 달리 누군가와 선등을 번갈아 가면서 하는 것이다. 그리하기 위해서는 대원 중 최소 한 명은 나와 동급으로 언제 어디서든 선등으로 개척등반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등반력을 갖춰야 하고, 한 명은 언제 어디서나 확실하게 앞뒤 확보를 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 토왕폭 하단.

따라서 해법은 등반실력이 비등한 최정예 3명으로 팀을 구성해서 매 피치마다 각자가 선등과 확보 그리고 라스트 역할을 번갈아 함으로써 등반 중 적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세컨드는 뒷줄 고정하고 앞줄, 즉 선등자 빌레이만 보아주고 그동안 라스트는 고정된 앞줄에 프루지크 매듭으로 자신을 스스로 확보하면서 하켄을 회수하면서 오르면 전체 등반속도가 선등속도로 유지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요델클럽 후배 중 최정예 2명을 물색했다. 마침 적절한 인물이 물색되었다. 최영준과 오세진이었다. 오세진은 용산고 필드하키 선수 출신으로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우리 클럽에서 등반의 걸음마부터 시작한 요델의 진골 정예 멤버로서 체력이 뛰어나고 차분한 성격이라 세컨드로서의 완벽한 조건을 갖춘 인물이고, 최영준은 자누 클럽 출신으로 뒤에 우리 요델과 같이한 인물로서 등반실력이 뛰어나 개척등반까지도 해낼 수 있는 능력의 소지자였다.

또 다른 문제는 수직 경사로 해서 빙벽의 얼음 두께가 아이스하켄을 박든지 스텝 커팅을 할 정도로 충분히 두껍지 않은 경우이다. 그런 구간은 옆으로 암벽등반을 해서 우회하고 빙벽이 두꺼워지는 구간에서 다시 빙벽으로 오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다. 이렇게 하면 토왕성 빙벽 초등이 가능할 걸로 생각되었다.

벽(壁)에의 항(抗)

산수 빼어난 고장 설악산
화채봉에서 설악동까지 내리 닫는 깊은 계곡 토왕성 계곡
계곡 상단은 어마어마한 바위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그 한복판을 가르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토왕성 폭포.
겨울에는 꽁꽁 얼어 거대한 얼음기둥이 되어  하늘로 치솟는다.
오늘 나는 그것을 찾아 오르고 있다.
양옆으로 깎아지른 바위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구비를 돌고 돌며
꽁꽁 얼어붙은 폭포와 소들을 타고 오른다.
바야흐로 속세의 온갖 잡티가 땀에 베어 내 몸 밖으로 내 뿜어져 몸과 마음이 깨끗해 질 때쯤 문득 길은 거대한 절벽에 가로 막힌다.
그 높이 수직으로 300미터 바위 절벽 그 가운데서 하늘로 치솟고 있는 얼음기둥, 바로 토왕성 빙폭이다.
나는 바로 그 단절된 길의 끝에서 그 단절을 의식 못 한 채
웅대하고 신비한 모습에 잠시 경탄을 넘어 경배의 마음에 젖는다.
그러나 내가 거기에 온 이유가 그걸 그저 바라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길 오르려함임을 깨닫자 토왕성의 그 거대하고 황홀한 웅자는 무섭도록 거대한 벽으로 그 의미를 바꾸어 차갑게 나를 가로 막는다.
그래 나는 바로 그런 무섭도록 거대한 모습으로 나를 가로막는 벽에서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서 여기 온 것이다.
이제 내 가슴 깊은 곳에서는 그 벽에 항하는 피가 끓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뜨거운 피로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나의 존재의미를 되찾을 것이다.
벽에 대한 나의 항이 그 벽을 무너뜨릴지 아니면 벽이 나의 항을 부숴버릴지는 하늘만이 안다.
따라서 결과는 염두에 두지 않고 끝까지 나의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무너뜨리지 못할 벽은 벽으로 느끼지도 않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신념을 뇌까려 보면서 나는 그 벽을 향해서 계속 걷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내가 덮어쓰고 있던 안식의 두꺼운 껍질을 벗어 던지고
다시 한 번 탈바꿈하기 위해서 나와의 피나는 투쟁을 시작하는 것이다.

  초등개척등반 시도
일시 1971년 1월  대원 백인섭, 최영준, 오세진

나는 우선 토왕폭 빙벽이 어떤 상태인지를 그리고 주변 암벽이 어떤 상태인지 정확하게 그 실체를 파악해야 했다. 그래서 일단 정찰등반을 해보기로 작정했다. 팀은 원래 구상대로 나와 오세진과 최영준 이렇게 3명으로 꾸려서 토왕폭을 향했다. 근접촬영은 내가 하지만 원격촬영을 위해 한 명을 동원했다. 우선은 정찰이 목적이었지만 여건이 좋은 경우 끝까지 해치울 생각도 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올랐다. 클럽에서 가지고 있는 아이스하켄을 모두 지참했다. 모두라야 일제 스크루 3개, 앵글형 4개, 파이프형 2개 정도 그리고 내 손으로 만들어 자즌바위골 100미폭 등반 때 유용하게 사용했던 파이프 하켄 20개 정도였다. 빙벽상태가 여의치 못한 구간은 암벽등반으로 대체하기 위해서 암벽용 하켄도 20개 정도 지참했다.

바위벼랑에 매달려서 이틀 정도 비박할 생각으로 비박장비도 갖추었다. 장시간 얼음벽에 매달려 있을 경우 가장 심각한 문제는 추위일 것 같아 모두 두터운 솜옷을 입고 워커 위에 생선장수 장화를 신고 8발짜리 아이젠을 묶었다. 그리고 동계 자즌바위골 개척 때와는 달리 전 대원이 각자의 손에 피켈을 들었고, 특히 영준이는 비싼 일제 등산화 위에 외제 오버슈즈를 신었고 그리고 외제 아이젠과 아이스바일도 한 개 있었다. 나는 빙벽장비 외에 암벽장비까지도 갖춘 상태였다. 우리는 전에 없이 천하무적 용장의 모습이었다.

▲ 토왕성 상단 빙벽 등반. 촬영 백인섭.

창의적 발상과 실행력으로 지켜온 등반방식

토왕폭 빙벽 밑 계곡에서 하루 야영을 한 뒤 다음날 일찍부터 빙벽에 붙기로 하고 계곡에서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야영했다. 물론 비박이다. 계곡은 온통 얼음과 눈의 세계였다. 마침 비박지 앞에 마른 통나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폭우 때 급류에 휩쓸려 내려온 아름드리 통나무들이 계곡의 바위에 걸려서 생성된 것으로 고사목 형태로 바짝 말라 있었다. 거기에 불을 붙여서 거대한 모닥불을 피워보기로 마음먹고 나무 더미 밑에 불을 피웠다. 산이 온통 눈으로 덮여 있어서 산불이 날 염려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짝 마른 나무들에 불이 붙자 불길은 순식간에 번져 나무더미 전체에 불이 붙었다. 불길이 하늘로 치솟으면서 거대한 불덩이가 되었다. 마치 커다란 집 한 채가 송두리째 타는 듯했다. 우리는 계곡에 있을 수 없었다. 옆 능선으로 올라 피신했는데 열기가 거기까지 뜨겁게 올라왔다. 모닥불이 아니라 산불 수준이었다. 나는 로마를 송두리째 불태우면서 시를 읊어댄 네로 황제가 되어 초 대규모 모닥불을 밤새도록 즐겼다. 내 생애 최대의 모닥불을 최초이자 최후로 즐긴 잊지 못할 밤이었다. 요즘 같으면 중범죄에 해당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하단 빙폭에 이르렀다. 그런데 하단부 빙벽은 거대한 오버행 바위에 엉성하게 매달려 있는 고드름 덩어리였다. 그걸 피하려면 가장자리로 나가야 하는데 그것도 꽤 애를 먹게 생겼다. 잠시 주저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주목적은 상단의 긴 수직 직벽이기 때문에 지저분한 하단은 생략하고 옆의 잡목지대로 올라 상단 직벽을 직접 공략하기로 했다.

하단에서 상단에 이르는 중단 사면은 경사도로 보나 길이로 보나 내설악 쌍폭 정도의 빙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이 바위사면이었다면 연속등반 형식으로 올랐겠지만 위험한 빙사면이었기에 우리는 정식 등반형식을 갖추면서 올랐다.

선등자는 발걸음마다 매번 피켈로 발판을 까내야 했고, 적절한 거리마다 확보용 아이스하켄을 설치하면서 올랐고 피치가 끝날 때마다 확보용 아이스하켄을 단단히 박고 거기에 확보하면서 후등자 빌레이를 보아주고 후등자가 모두 오르면 다시 선등을 시작하는 방식으로 올라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꽤 걸렸다. 오후 늦게야 우리 모두는 중단을 끝내고 상단 직벽 발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거기서 첫 번째 비박을 해야 했다.

근처 바위벽(토왕폭 상단벽)으로 접근해서 암벽하켄을 설치하고, 아이젠을 풀고 줄 확보를 받으면서 비박지를 찾아 다녔다. 마침 근처에 두 사람 정도는 등을 붙일 수 있는 제법 큰 바위 턱이 있어 세진과 영준에게 거기서 비박하도록 하고 나는 또 다른 비박지를 찾아 주변 바위벼랑을 줄을 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내 등짝을 눕힐 만한 적당한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조그만 턱을 발견했는데 바닥이 울퉁불퉁한 것이 문제였다. 나는 바로 확보용 하켄을 설치하고 스스로 확보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마침 주변에 구들장 같은 바위가 있어 떼어내어 바닥에 깔고 평평하도록 밑에 돌들을 바치고 나니 비록 작지만 그래도 나의 등짝을 눕히기에는 충분했다. 됐다 싶어 손을 터는 순간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 구조가 구들처럼 밑에 공간이 있으니 거기에 불만 지펴 넣으면 1인용 구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손뼉을 친 후 다시 주변에서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아 와서 구들 밑에 조금씩 쑤셔 넣고 불을 지폈다. 마치 성냥 파는 소녀처럼 조그만 불을 몇 차례  지피니 얼마 후 구들장이 제법 뜨겁게 달구어졌다. 거기에 침낭을 깔고 등대고 누워 보니 추위에 얼어 죽기는커녕 등짝이 따끈해서 온 몸에 땀이 날 정도였다. 물론 바위에 하켄을 박고 내 몸을 거기에 고정시킴으로써 자다가 추락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은 기본사항이었다.

토왕성 상단 바위절벽 중간에 독수리 둥지만 한 터를 만들어 구들을 놓고 그리고 나뭇가지로 불까지 때고 따뜻한 밤을 보내게 되다니 내가 생각해도 기막힌 노릇이었다. 아마도 동서고금을 통해 세상에서 유례 없는 ‘온돌비박’이라고 생각된다.

바로 이런 창의적 발상과 실행력이 내가 지켜온 나만의 등반방식이었다. 바위벼랑 조그만 턱에 매달려 추위에 떨며 뜬 눈으로 밤을 새우는 비박이 아니라 정반대로 집 안방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자는 것처럼 포근하고 편안한 비박을 고안해서 실행했던 것이었다. 하늘에 총총하게 빛나는 별들을 헤아리면서 나는 신선이 되어 편안한 마음으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 토왕성 상단 빙벽을 오르는 오세진. 촬영 백인섭.

더 이상 오른다는 것은 바로 자살행위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상단부 등반을 시작했다. 우선 영준이 선등하고 세진이 확보를 보면서 1차 공격을 하도록 하고, 나는 비박지에서 다시 누워 달콤한 아침잠을 즐겼다. 나는 원래 아침체질이 아니라서 아침에는 언제나 늦잠을 자야 했기 때문이었다.

잠결에 별안간 후드득하는 요란한 소리에 놀라 깨어났다. 선등하던 영준이가 매달려 있던 하켄이 빠지는 바람에 10여 m 추락하면서 얼음을 긁어댄 소리였다. 영준의 추락은 출발점 턱에서 멈췄다. 다행히 맨 위 하켄만 빠져서 다음 하켄에 의해서 영준의 추락이 유동적으로 제동되면서(Dynamic Belay) 출발지점까지 미끄러져 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아무데도 다친 곳이 없었고 잃어버린 장비도 없었다.

놀란 영준을 진정시킨 후  이번에는 내가 선등하고 세진이 세컨드 그리고 영준을 라스트로 해서 다시 등반을 시도했다. 영준이가 추락한 지점, 즉 마지막 하켄까지 올라보니 빙벽이 고드름의 집합체 또는 여러 겹의 얼음 막으로 변했다. 아이스하켄을 박기 위해서 겉의 고드름을 피켈로 깨어 제거해도 속이 또한 고드름이어서 그걸 까내면 결국엔 바위 면이 노출되었고, 여러 겹의 얼음 막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렵게 얼음 상태가 좋은 지점을 골라 아이스하켄 몇 개를 불확실한 상태로 겨우 박으면서 하켄마다 사다리를 걸어 온 체중을 실으면서 오를 수밖에 없었다. 피켈로 스텝 커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고드름을 깨는 경우는 고드름 전체가 송두리째 떨어져 버리기 때문에 현 위치보다 높은 곳에 전진용 스텝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다. 또한 여러 겹의 얼음 막일 경우엔 스텝을 만들어도 개별막이 약해서 체중을 실어 딛는 경우 모두 부서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빙벽을 피해 옆의 바위로 암벽등반을 시도하려 했지만 빙폭을 벗어나 바위로 접근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가장자리 부분이 얇은 청빙이라서 아이스하켄을 박을 수도 없었고 또한 스텝 커팅도 할 수 없었다. 까내면 금방 바위 면이 노출되어 발을 디딜 수 있을 정도의 스텝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몇 m 더 올라갔지만 더 이상 오른다는 것은 바로 자살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박힌 아이스하켄들이 모두 불확실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스텝 커팅이 불가해서 하켄에 사다리를 걸고 그것에 전 체중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토왕성 빙폭은 등반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면서 등반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나의 등반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등반대상이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하강을 결정한 후 대원에게 알리고 나는 하강 전에 근접 사진촬영 작업에 들어갔다. 선등자인 내 자신이 가장 확실한 하켄에 스스로 확보하면서 위로 아래로 옆으로 촬영 위치를 잡은 후 몸을 고정하고  세컨드로 하여금 선등하는 모습을 연출해 가면서 근접 사진 촬영을 했다. 어렵고 위험한 등반 중 근접 촬영을 한다는 것은 극도로 어렵고 또한 위험한 일이기에 내 스스로 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당시는 요즘처럼 주마 등 스스로 확보하는 장비가 없어 스스로 확보하기가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카메라 또한 요즘처럼 작고 간편한 것이 아니라 크고 무겁고 사용하기 불편한 카메라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한동안에 걸친 사진촬영 작업을 마치고 우리는 하산했다. 그래도 나의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다. 이제 토왕성 빙폭의 실체를 파악해 냈기 때문이었다. 토왕폭 빙벽은 등반대상이 될 수 없기에 일본 놈 아니라 그 할아비가 온다 해도 오를 수 없을 것이기에 적어도 그들에게 우리 산의 초등을 빼앗기는 비극만은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벽은 곧 길’이라는 나의 등반신념 자극받아

이로써 토왕빙벽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도전은 막을 내렸다. 토왕성 빙벽에 나의 피켈을 찍어 보고 나의 아이젠 발톱을 박아보고 그리고 그 벽에서 하룻밤 비박해 본 후 얻은 당시 나의 결론은 등반불가였다. 아니 토왕성 빙폭은 당초 등반대상이 될 수 없는 벽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에 대한 항(抗)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대 빙벽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도전이 승리가 아닌 좌절로 끝나면서 그것이 내게 오를 수 없는 벽으로 각인되는 바로 그 순간에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스스로 돋아난 항의 본능이었다고 생각된다. 벽은 곧 길이라는 나의 등반신념이 자극을 받은 것이었다. 그 이후 나는 토왕성 빙폭을 오르기 위한 해법 모색을 위해 골몰하게 되었다.

필자소개 백인섭 산악인(요델산악회)

학력경력 서울 출생, 경복고, 서울대 공대(전기공학), 한국과학기술연구소(선임연구원), 카이스트(전산학석사), 프랑스 IMAG(전산학박사), 데이콤(초대연구소장), 아주대 정보통신대(교수).
등반경력 개척초등 등반(도봉산 : 양지길, 허리길, 표범길 등.
설악산 : 범봉, 석주길, 칠형제봉, 자즌바위골 등)
등반외 취미활동 스키, 테니스, 윈드서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