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세상에 우연은 없어
“어? 민혁아!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엄마가 알려줬어. 형이 이곳에 출장 왔다고. 스탠퍼드가 여기서 가까워. 오늘 마침 중간고사도 끝났고 해서. 미리 와서 기다렸어.”
민혁이. 출장 전 엄마가 외숙모와 전화하다, 동생 민혁이 한번 꼭 만나보고 오라 했던. 와! 어제 호텔에 오자마자 엄마에게 전화했더니 이리 연결됐네.
“잘 됐다. 민혁아. 너무 오랜만이라 네 얼굴 못 알아 볼 뻔했다. 여기 옆에 앉아. 참, 이분은 함께 출장 온 정 팀장님이셔. 회사에서 아주 유능한 분이셔.”
“반가워요. 전 김민혁이고요. 스탠퍼드 경영학부에 유학중이에요. 1년 후면 졸업해요. 수고가 많으세요. 잘 부탁합니다.”
자연스레 합석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윤재와 민혁이가 이야기하는 중에 정 팀장이 민혁이한테 물었다.
“아, 전도가 유망한 친구네. 김민혁. 학교 졸업 후에는 어떤 계획이니?”
“아버지 사업하는데, 아래에서 일 좀 배워보려구요.”
“아버님이 어떤 사업을 하는 분인지 여쭤봐도 되나?”
윤재가 주춤했다. 민혁이도 좀 당황한 듯 보였다. 민혁이가 바로 표정을 고치며 답했다.
“네. 자동차요.”
“자동차? 부품업체나 정비업체?”
“아니요. 자동차 만드는 회사요.”
정 팀장 얼굴이 놀란 빛을 띠며 민혁이를 다시 봤다.
“회사가 커지다 보니 경영하는데, 어려움이 많나 봐요. 처음엔 크게 신경 안 썼는데요. 엄마나 할아버지 전화 받으면서 마음을 굳혔어요.”
“할아버지도 함께 일하시니?”
“네. 할아버지가 일궈놓은 회사라서요. 경영 중에 사람 관리가 가장 많이 신경이 쓰이나 봐요.”
정 팀장이 와인잔을 비우며, 바짝 긴장한 투로 다시 물었다.
“그럼. 할아버지가 회장님? 어느 회사니?”
“정 팀장님 말씀대로 할아버지는 회장님이고요. 회사는 기룡자동차예요.”
민혁이 말에 정 팀장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벌어졌다. 옆에 윤재를 바라보는 시선도 생소한 외계인 보는 표정이었다.
“야, 김윤재. 그럼 네가 회장님 손자네. 사장님 조카고. 뭐야, 그럼 난?”
“아이. 참. 정 팀장님도. 유능하신 정 팀장님도 곧 큰일 하시는데 합류하셔야지요. 민혁이나 저한테 힘 좀 실어주셔야지요. 놀라시기만 할 거예요?
안 그러니? 민혁아! 정 팀장님. 자 이런 좋은 인연에 건배 한번 해요. 세상에 우연은 없어요. 그러믄요.
구하려는 마음이 강한 사람에게 하늘이 놓아주는 인연의 다리. 그게 바로 우연이라잖아요. 우연을 소중하게 받들자고요.”
셋이서 건배를 마치자, 정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먼저 일어설게. 둘이 못다 한 이야기 엄청 많겠다. 난 부장님께 전화로 출장 업무 보고도 드려야 하니까.”
“감사합니다. 정 팀장님. 다음에 봬요.”
민혁이가 일어나 인사하자, 정 팀장이 민혁이 손을 꼭 잡았다.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윤재와 민혁이 둘만의 허심탄회한 세계로 들어갔다.
“민혁아. 유학 생활하느라 남다른 애로가 많았지. 그래도 이제 거의 다 왔다. 이제 네게 세상은 거친 광야를 달리는 말 속도처럼 휙휙 잘 지나갈 거야.”
“윤재 형. 아버지가 전화로 형 이야기 많이 하시데. 크게 역할 할 거래. 기대가 아주 크시더라고. 머잖아 회사에서 중추적인 역을 맡을 거래. 나도 학업 마치고 와서 빨리 일 배우라고 하셔.”
윤재가 민혁의 잔에 몬타나 레드와인을 따랐다. 민혁이도 윤재 잔에 가득 부었다. 둘이 다시 짠하고 건배를 외치며, 하던 이야기꽃을 피워갔다. 세상은 둘만을 위한 시간과 장소를 마련해 놓은 것 같았다.
“그래. 외삼촌 심정도 이해가 간다. 회사 경영에는 적재적소의 인재가 필요해. 민혁이 넌 유학 생활하며 동창들 인맥 관리 잘 해둬.
스탠퍼드의 세계 여러 수재는 글로벌 시대에 서로 도움 주고받을 큰 자산이니까.”
와인 두 병을 더 비우는 가운데, 윤재와 민혁의 대화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흘러갔다. 처음엔 졸졸 흐르는 골짜기 물로, 다음은 제법 물줄기 센 시냇물로.
힘을 받더니 포효하는 강물로, 급기야는 온 세상을 휩싸는 바다로 도도하게 진격해갔다. 늦은 시각,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리 불러둔 택시가 밖에 기다리고 있었다. 윤재가 동생 민혁을 꽉 껴안았다. 민혁의 눈자위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
“오. 윤재. 이제 오냐. 민혁이 동생 만나 회포 푸느라 감회가 새롭겠다.”
“부장님께서 뭐라셔요?”
“음. 좋은 출장 성과에 아주 흐뭇한 목소리더라. 그건 그렇고 앉아라.”
윤재가 냉장고에서 캔 맥주 두 캔을 꺼냈다. 소고기 훈제 육포도 안주로 꺼냈다. 버드와이저 맥주에 잭링크스 육포라. 구미가 도는 제품명이 눈에 갔다.
미래 세대 차량, 기룡자동차 SUV 레전드. 이렇게 이름만 들어도 젊음의 향연이 물씬 풍기겠다. 그냥 맥주에 육포가 아니다. 이름 없는 제품이 아니다.
제 이름이 붙어야 맛이 배가된다. 그냥 차가 아니다. 높은 명성의 스포츠카 이름, 기룡의 SUV 레전드를 생각하며 허심탄회한 이야기가 술술 풀렸다.
“야. 이 소고기 육포. 잭링크스. 잘 포장해 놨구먼. 딱 버드와이저 맥주에 제격이네. 좋다. 이제 출장 일도 잘 끝났고. 내일은 주말, 딱 하루 우리 시간이다.
아, 참. 내일 Peter 모친 장례식 있댔지. 미국에는 어떻게 치르나. 문화적 정서를 아는 것도 자동차 개발에 도움 될 거야.”
“부담 없이 참석해 보지요. 마침 내일이 주말이니까요. 오전에 장례식장 갔다가 오후 늦게 쇼핑도 좀 하고, 모레는 여유 있게 귀국하면 되겠어요.”
“윤재. 너. 그동안 남다른 행동에 능력이 좀 출중하다고만 생각했지. 알고 보니 엄청난데. 고민도 많았겠다. 보석 덩어리, 혼자 가슴에 품고 다니느라.”
정 팀장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큰 비밀이라도 알았다는 윤재를 놀렸다.
“보석 덩어리, 품고 있기만 하면 뭐해요. 연금술사가 되어야 제대로 빛을 발하지요.”
“우~와! 연금술사? 경영의 연금술사, 대단한 기대를 하게 하네. 그 연금술사의 비책은 뭐가 있을까. 한번 들어나 봤으면 좋겠는데.”
“팀장님 농담도 잘하시네요. 최고 경영자들이 이론으로는 다 알아도 실제 행동은 어렵잖아요.
이론과 행동을 어떻게 적재적소에 발휘하느냐가 관건이겠죠. 타이밍도 잘 맞춰야 하고요. 첫째, 실력. 둘째, 카리스마. 셋째, 인간미를 생각해 왔어요.“
“윤재. 너 벌써 경영자 다 됐구나. 직책이 사람을 만든다더니. 빈말이 아니었네. 네가 말한 대로 되려면 혹독한 시험들을 겪어야 할 거야.
무수한 경험들 속에서 빛을 보게 될 테니까. 실력, 카리스마, 인간미, 이 셋에 하나 더 있다. 하늘의 운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지만, 하늘이 항상 보고 있거든.“
“정 팀장님. 먼저 자동차 전문 실력자로 확실한 자리를 굳힐 겁니다. 연구소, 공장 일을 두루 섭렵해서 글로벌 전문 기술 경영자가 되려구요.
그 터 위에 영업, 무역, 자금, 중장기 경영 대책까지 컨트롤 해야지요. 핵심 부서 순환 근무를 통해 지형을 넓혀 갈 겁니다. 잘 도와주십시오.”
정 팀장과 윤재의 이야기는 자정이 다 돼서야 끝을 봤다. 정 팀장이 먼저 잠자리에 들어갔다. 바로 코 고는 소리가 났다. 노곤한 출장 여파였다.
윤재는 리셉션에 내려가 봉투와 메모지를 들고 올라왔다. 메모지에 한참이나 뭘 적고 뭔가를 쌌다. 재킷 안주머니에 봉투 두 개를 넣고서야 눈을 붙였다.*
29화 끝 (3,519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