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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징적 교회인 이스라엘에 마침내 십계명이 주어지다 2
/ 십계명을 더 깊이 알아야..
순정기독교 282-331항 / 스베덴보리
282
겉뜻과 속뜻의 의미로 설명된 교리문답 또는 십계명
살인이나 간음을 저지르고, 도둑질을 하고, 거짓 증언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모르는 국민은 전 세계에 아무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악에 대항하는 법이 없다면
어떤 나라, 정부, 사회도 종말에 이르리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것들이 나쁘다는 것을 모를 만큼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더 우둔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 법들이
시내산으로부터 여호와 자신에 의해 그처럼 기적적인 방식으로
선포되었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목해야할 것은
이러한 법들이 기적적인 방식으로 선포된 이유는
그 법들이 단지 시민과 도덕적인 법일 뿐만 아니라
‘신성한 법들’이라는 것,
따라서 그 법들에 반하는 행위는
이웃, 즉 한 사람의 동료 시민과 사회에 잘못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법들은 시내 산에서 여호와에 의해 선포됨으로
종교적인 율법이 되었고
여호와에 의해 주어진 계명은 무엇이든
그것이 종교적인 명령이 되도록,
즉 만일 사람이 구원받고자 한다면 필히 그것이 행해지도록
의도되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계명을 설명하기 전에
그들이 종교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나는 먼저 그들의 거룩함에 대해 말해야겠다.
283
십계명은 이스라엘 교회에서 신성 그 자체였다.
십계명은 말씀의 가장 중요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에 세워진 교회의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종교에 속한 모든 것들이 간결하게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이로써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의 결합이 주어졌고
그 이상 더 거룩한 것이 없을 정도로 거룩했다.
십계명이 가장 거룩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씀들로 분명하다.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서 천사들과 함께 강림하셨고
살아있는 음성으로 선포하셨으며
그 산은 누구도 접근하여 죽지 않도록 둘러싸여졌고
제사장과 장로들도 접근하지 못하였으며 모세만이 허용되었다.
이러한 계명들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두 개의 돌판 위에 새겨졌고
모세가 두 번째 돌판을 가지고 있을 땐 그의 얼굴은 빛나 있었다.
두 돌판은 후에 궤 속에 안치되었고
궤는 성막의 가장 깊숙한 곳에 놓여졌으며
그 위에 속죄소가 있었고 그 위로 금 그룹이 놓여졌으며
궤가 있는 성막의 가장 안쪽을 지성소라 하였다.
궤가 들어있는 휘장 밖의 다른 것들은
천국과 교회의 거룩한 것을 표상하였으며
탁자는 금으로 칠해졌고 그 위에 제사떡이 있었으며
금 재단 위엔 향이 피워졌고 일곱 개의 금 촛대가 있었으며
휘장은 고운 천과 자색과 진홍색 천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모든 성막의 거룩함은
궤 속에 있는 율법 이외에 다른 것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다.
궤 안에 있는 율법에서 나온 성막의 거룩함 때문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은
성막 주변에 지파별로 계명에 주어진 질서를 따라 진을 쳤고
그 후 질서를 따라 진행하였으며
낮에는 궤 위에 구름이 덮였고 밤에는 불이 있었다.
이러한 율법과 그 안에 계신 여호와의 현존의 거룩함 때문에
여호와께선 그룹 사이의 보좌 위에서 모세와 말씀하셨고
궤는 그 곳에서 여호와라 하였으며
아론은 죽지 않도록
희생과 분향이 없이는 휘장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율법 안과 그 주변에 계신 여호와의 현존 때문에
율법이 들어 있는 궤에서 기적들이 일어났다.
요단강이 갈라졌고
궤가 그 중앙에 놓여있는 동안 백성들은 마른땅 위를 걸어갔고
여리고 성을 궤를 메고 돌게 함으로써 성이 무너졌고
블레셋 신상인 다곤이 궤 앞에 머리를 떨구었으며
후에 두 손바닥과 머리가 잘린 채 신전 모퉁이에 쓰러져 있었고
벧쎄메스 사람들이 그로 인해 수천 명이 죽었으며
웃사도 궤를 만짐으로 죽었고
궤는 솔로몬에 의해 희생과 기쁨으로 이온으로 인도되었고
후에 솔로몬에 의해 성지가 된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졌다.
그밖에 여러 곳에서 기록된 대로
그에 관한 모든 것들로부터 십계명이
이스라엘 교회의 거룩함 그 자체였다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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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에 의해 주님과 인간, 인간과 주님의 결합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언약(covenant) 또는 증거(testimony)라 하였다.
이는 언약이 결합의 역할을 하고
증거는 언약의 항목들을 확고히 해주기 때문이다.
말씀 속에서 언약은 결합을 뜻하고
증거는 그 항목들의 확증과 증언을 뜻하기 때문에
하나는 하나님을 위하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위한 두 개의 돌판이 있었다.
비록 인간이 돌판에 새겨진 계명들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결합은 주님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 이유는 주님은
지속적으로 현존하시며 사람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만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자유로부터
주님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들기나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갈 것이고
그와 함께 먹을 것이며 그는 나와 함께 있을 것이라."
(요한계시록 3:20)라고 하셨다.
율법이 기록된 두 돌판을 언약의 판이라 하였으며
궤를 언약궤라 하였고
율법이 언약 그 자체인 것은
(민수기 10:33; 신명기 4:13 23; 5:2-3; 9:9; 여호수아 3:11;
열왕기상 8:21; 요한계시록 11:19)등에서 볼 수 있다.
언약이 결합을 뜻하기 때문에 주님에 관하여 말하기를
백성과 언약을 위해 계실 분이라고 하였고(이사야 42:6; 49:8-9)
언약의 사자라 하였으며(말라기 3:1)
그의 피, 언약의 피라 하였고
(마태복음 26:28; 스가랴 9:11; 출애굽기 24:4-10)
따라서 말씀을 구약과 신약이라 하였다.
이는 언약이 사랑과 친교와 연합과 결합을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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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처럼 크나큰 거룩함과 능력이 그 율법에 있었던 이유는
그 속에 종교의 모든 것들이 집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돌판 중 하나는 하나님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집합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인간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집합되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 율법의 계명들이
십성언(Ten Words, 십계명)으로 불리는 이유다.
(출애굽기 34:28; 신명기 4:13; 10:4)
열(10)은 모든 것을 뜻하고
성언(말씀)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이며
그 안에 열 가지 말씀들 이상의 것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열이 모두를 뜻하고
십일조가 그 상징성 때문에 제정되었다는 것은
요한계시록 풀이 101항에서 보여주었고
율법이 종교의 모든 것들을 집약시켜 놓은 것이라는 것은
다음에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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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의 글자의 뜻에는(문자적 의미에는)
교리와 삶에 관한 일반적인 가르침들이 내포되어 있으나
십계명의 영적, 천적 의미에는 전체적인 가르침들이 내포되어 있다.
말씀 속에서 십계명이
교리와 생활에 관한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빼어난(par excellence) 율법으로 불린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들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 관한 모든 것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개의 돌판에 기록된 율법은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고
나머지 하나는 인간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
교리와 생활에 관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관한 사랑과 이웃에 관한 사랑에 관련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 사랑들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십계명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말씀이 이것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으로 분명하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 39-40)
율법과 선지자들은 모든 말씀을 상징한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길 율법에 무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희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온 영과 온 마음과 온 힘과 온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이를 행하고 그 대로 살지어다."
(누가복음 10:25-28)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말씀의 모든 것이기 때문에
첫 번째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모든 것이 요약되어 있고
두 번째 돌판에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모든 것이 요약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십계명은
교리와 삶에 관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두 돌판을 마음속으로 그려볼 때
그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분명한데
그것은 하나님은 그분의 돌판으로부터 사람을 보고
사람은 그의 돌판으로부터 하나님을 봄으로
따라서 그 두 돌판들은 서로를 향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편으로 보면
그분은 사람을 바라보시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으시고
그의 구원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언제나 행하신다.
만일 사람이 자기 돌판에 기록된 율법들을 받아들여 순종한다면
그 연결은 상호적이 되고
그때 그에게 일어나는 것을
그는 주께서 율법사에게 하신 “네가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 라는 말씀으로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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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말씀 속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이제 제한된 의미의 율법, 좀 더 넓은 의미의 율법,
그리고 아주 넓은 의미의 율법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말하겠다.
제한된 의미 속에서의 율법은 십계명을 뜻한다.
좀 더 넓은 의미로는
모세에 의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어진 규례들(statutes)을 뜻하며
가장 넓은 의미로는 모든 말씀을 뜻한다.
제한된 의미로의 율법이 십계명을 뜻한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의미로의 율법이
모세에 의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어진 규례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성구들로 나타내어진 레위기의 여러 규례들로 분명하다.
레 7:1 “속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레 7:11 “화목제 희생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
레 7:37 “이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제와 화목제의 규례니라.” ..
사실 모세의 모든 책들을 율법이라 하였고(신 31:9 11-12 26;
눅 2:22 24:44; 요 1:45; 7:22-23; 8:5 기타)
또 신약에서도 같은 표현이 있다.(눅 2:22, 24:44 ..)
이 문맥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사람은 율법에 의해 규정된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로마서 3:28)는 바울의 말에서
‘율법에 의해 규정된 행위’가 이 규례들을 의미했다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유대 사람처럼 행동한다고 베드로를 비난한 곳에서
율법에 의해 규정된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되지 못한다고
세 번이나 말한 것도 이와 같다.(갈 2:14, 16)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율법이
모든 말씀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 구절들로 분명하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는 신들이라고
너희 율법에 기록되지 않았느냐?"
(요한복음 10:34; 시편 82:6에도 이렇게 기록됨.)
"사람들이 대답하되
우리는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리라고 율법에서 들었나이다."
(요한복음 12:34; 시편 89:29; 110:4; 다니엘 7:14)
"그들이 이유없이 나를 싫어하였다는 율법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요한복음 15:25; 시편 35:19)
"바리세인들이 말하길 지도자들 중 누가 주를 믿겠나이까?
율법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무리는 저주를 받겠나이다."
(요한복음 7:48-49).
"율법의 하나를 없애는 것보다는 하늘과 땅을 없애는 것이 쉬우리라."
(누가복음 16:17)
율법이 모든 성경을 뜻한다는 것은 다윗의 시편에 수 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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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천적 의미에서의 십계명이
교리와 삶에 관한 모든 가르침들을 전체적으로 포함하며
따라서 인애와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이유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개개의 모든 세부적인 것들에 있어서,
또는 전체적이거나 개별적인 것들 모두에 있어서
그 안에 영적이고 천적이라 불리는 두 가지 내면적인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이러한 두 가지 의미에는
신성한 진리가 그 빛 안에 있고,
또 신성한 선이 그 볕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말씀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이렇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각각의 십계명은 이들 세 가지 자연적, 영적, 천적 의미로
풀이할 필요가 있다.
말씀의 본질이 이와 같다는 것은
성경 또는 말씀에 관한 단원 (193-208항)에서 보여준 것으로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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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말씀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그 말씀의 모든 부분에 무한한 것이 있다는 사실,
즉 천사조차도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것들을
그것이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말씀 속에 내포된 것들은 씨앗에 비할 수 있는데
그 씨앗이 땅에 떨어져 자라서 큰 나무로 될 수 있으며
많은 씨앗을 생산해낼 수 있고
그로부터 다시 유사한 나무들을 내어 동산을 이룰 수 있고
이들이 또 다른 동산을 만들어 무한히 뻗어 나아갈 수 있음과 같다.
주님의 말씀은 세세한 부분에서도 이와 같으며
무엇보다 십계명이 그러하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말씀을 가장 간단하게 요약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이 이러하다는 것은 주님께서 비유로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아서
사람이 밭에 뿌리울새 모든 씨보다 작지만
그 씨가 자라서 나물이 되고 나무가 되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 위에 와서 둥지를 트는 것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13:31-32; 마가복음 4:31-32; 누가복음 13:18-19; 에스겔 17:2-8)
말씀 속의 영적인 씨앗의 무한성 또는 진리의 무한성은
그 모든 것이 말씀으로부터 비롯된 것인,
영원히 성장하고 있는 천사들의 지혜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들이 더 현명해질수록
그들은 지혜가 끝이 없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본다.
그리고 그들은 단지 입구에 있을 뿐
주님의 신성한 지혜의 아주 작은 부분에조차
도달 할 수 없다는 것을 지각한다.
그들은 그것을 헤아릴 수 없는 깊음이라 부른다.
이것은 말씀이 주님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본질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이 모든 내용들에는 일종의 무한성이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291
첫째 계명 “내 앞에 다른 신을 있게 말라.”
이들은 말씀의 첫째 계명이다.(출 20:3; 신 5:7)
자연적, 즉 문자적 의미에 있어서 그들의 일반적 의미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계명 뒤에는 이렇게 말씀이 계속된다.
“너희는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의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말며
그것에 절하거나 그것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출 20:4-5)
이 계명의 일반적 의미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것인 이유는
이 계명이 주어지기 전이나 주어진 후 주님이 오시기까지
아시아의 모든 지역에는 우상숭배가 널리 행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는 주께서 세상에 오시기전의 모든 교회들은
표징적이고 상징적이어서
신성한 것들을 여러 모양과 형상으로 재현시켰던 바,
이 표징들의 의미가 잃어버려지게 되자
일반 사람들은 이러한 형상들을 신으로 섬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도 이집트에 있을 때 이런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광야에서 여호와 대신 금송아지를 숭배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이 결코 그 예배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서와 선지서인 말씀의 여러 구절들로 분명하다.
292
“내 앞에 다른 신을 있게 말라.”는 계명의 자연적 의미는 또
산 자 나 죽은 자나 어떠한 사람도
신으로 섬겨서는 인된다는 것을 뜻하며
이 또한 아시아와 그 주변 종교들 속에서 행해진 일들이다.
이교도들의 신들 중 많은 것들이 사람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바알, 아쉬타롯, 케모쉬, 밀곰, 바알세블 등이 그렇고
또 아테네와 로마에서는
새턴, 쥬피터, 넵튠, 플루토, 아폴로, 팔라스 등이 그러했다.
이것들은 처음에는 성인들로, 후엔 신성한 것으로,
나중엔 신으로 섬기기도 하였다.
이들이 살아있는 사람을 신들로 섬겼다는 것은
메데의 다리오왕의 법령으로 삼십일 동안
그 누구도 오직 왕만을 섬기고 하나님에게 기도해서는 안 되며
만약 이를 어기면 사자의 굴속으로 던져지리라는 것으로 분명하다.
(다니엘 6:8-28)
293
글자의 의미, 즉 자연적 의미로 이 계명은 또
하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이는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일치한다.(마 22:35-37; 눅 10:25-28)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사랑받는 사람이나 사물은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과 신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 또는 세상을
(주님에 속한)모든 것들보다 사랑하는 것은
자신 또는 세상이 그의 신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그들 마음속으로 어떤 신도 시인하지 않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 자신이나 세상을
무엇보다도 사랑한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지옥에서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과 결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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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명의 영적 의미는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하나님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분은 이 세상에 오셔서
속량(redemption)을 행하신 여호와이시고
그 속량 없이는 어떤 사람이나 천사도 구원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분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다음 구절들로 분명하다.
"그날에 말하리라. 보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라.
우리가 우리를 이끌어 주기 위한 그를 기다렸도다.
이는 여호와요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의 구원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자."(이사야 25:9)
"진실로 하나님은 당신 안에 있고 그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으니
진실로 당신은 가장 높으신 분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이라." (이사야 45:14-15)
"나는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으니
나 외에 참 하나님과 구원자는 없느니라."(이사야 45:21-22)
..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우리의 구주이신 주님께서는
여호와 자신, 곧 창조주이시고 속량주이시며, 중생케 하는
분이심이 분명하다.
이것이 첫째 계명의 영적 의미이다.
295
이 계명의 천적 의미는
여호와이신 주님은 무한이시고 측량할 수 없으시며
영원하시다는 뜻이다.
주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어디에나 계신 분이며
처음과 나중이시고 시작과 끝이신 분이고
과거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도 계실 분이시다.
그분이야말로 사랑 자체, 지혜 자체이신 분이시고
선 자체, 진리 자체이신 분이시며 따라서 생명이시며
모든 만물이 그분으로부터 있는 유일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296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형태로 오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주님 외에 다른 하나님을
시인하고 예배하는 모든 사람은 첫째 계명을 범하는 자들이다.
또한 ‘영원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세 인격들의 실존’을
스스로 확신하는 자들 역시 이 계명을 범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거짓 속에 스스로 굳어 있는 자들은
점점 더 자연적이고 육적으로 되며
그땐 신성한 진리의 어떤 것도 내면적으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만일 그들이 신성한 진리를 듣게 되어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것을 오염시키고 오류 속에 끌어넣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집의 맨 아래 층 또는 지하실에 살고 있어서
2층에서나 3층에서 말하는 것을 천정이 가로 막고 있는 까닭에
전혀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비할 수 있겠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3층으로 된 건물과 같기 때문이다.
즉, 맨 아래 층에는 영원부터 계시는
세 신들을(three Gods) 스스로 확신한 사람들로 점유되고
반면 2층, 3층에서는 ‘보이는 사람의 형상으로 계신 하나님’을,
그리고 그분을 주 하나님 구주로
시인하고 믿는 사람들로 점유된 건물과 같다.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사람은
단지 자연적이고 자신만을 보기 때문에
실로 동물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동물들과 다른 점이라고는
말할 수 있고 논쟁할 수 있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마치 야생동물원 안에 살고 있는 사람 같아서
거기에는 사자, 곰, 호랑이, 표범 또는 이리들, 각종의 야수들이
행동하듯 하게 된다.
물론 그 역시 양처럼 행동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그는 마음속으로 비웃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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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계명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헛되이 취하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는 것의
자연적인 의미, 즉 문자적인 의미는
모든 유형의 대화에 있는 이름 자체의 오용(abuse, 남용)을 뜻한다.
특히 거짓 진술이나 거짓말,
또는 악한 의도나 책임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선에서 비롯되지 않은 맹세나 선서,
또는 주술과 마법 주문 등에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대관식이나 성직의 서품에,
또는 책임이 무거운 요직의 취임 등에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함, 말씀이나 복음서에 의해 맹세하는 것은
만일 그 선서를 한 사람이
자신의 소중한 약속을 부질없는 것으로 파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함 그 자체이기 때문에
기도와 찬양, 예배의 모든 형태에, 교회의 성스러운 사업에,
그리고 종교적인 주제에 관한 설교나 저술 등에
끊임없이 사용되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종교에 속한 모든 것들에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의식에 따라 그분의 이름으로 불리워질 때
현존하셔서 들으신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올바르게 축복을 간구할 때
그분은 현존하시고 모든 간구를 들어주시기 때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은 신성한 것으로 예배된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그 자체가 거룩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 이름이 처음 불리어질 때부터
감히 “여호와”라고 말하지 않았고
복음서 기자들이나 사도들도 그 이름을 언급하지 못하였다.
이는 구약의 여러 구절들을 인용한 신약에서
“여호와” 대신 주님이라고 한 것으로부터 잘 알 수 있다.
(마태22:37, 누가10:27, 신명기 6:5을 비교)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라는 이름도 거룩하다.
이러한 사실은 천국에서나 지상에서 그 이름이 호칭될 때
누구나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한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더욱이 지옥에 있는 악마는 그 이름을 전혀 부를 수 없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하나님에게 속한 이름들은 여럿 있는데
그것들도 헛되이 사용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이 이름들을 보면 여호와, 여호와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예수, 예수 그리스도, 성령 등등이 되겠다.
298
영적인 뜻으로 하나님의 이름은
성경말씀에서 얻은 교회의 모든 가르침을 뜻하는데
그 가르침을 통해 교회는 주님께 간구와 예배를 드린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요약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는 것은
헛된 이야기나 거짓 진술과 거짓말, 악담, 그리고 마법이나 주문에
이 근원에서 비롯된 것을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 하나님을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구절들에서 여러분은
말씀과 말씀으로부터 교회가 가진 모든 것, 따라서 모든 예배가
하나님의 이름임을 알 수 있다.
"해 돋는 곳으로부터 내 이름을 부르리라." (이사야 41:25)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다.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리라.
내 이름을 모독하는 이가 말하길,
여호와의 상이 더렵혔다고 하고, 찟긴 것과 저는 것과
병든 것을 가져와 내 이름을 더렵혔도다." (말라기 1:11-13)
"모든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의 이름 안에서 행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 안에서 행하리라." (미가 4:5)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실 곳에서
여호와를 예배하리라." (신명기 12:5, 11, 13-14, 18; 16:2, 6, 11, 15-16)
이는 그분이 계신 곳에 예배를 두실 것이라는 것이다. ..
"믿으라, 그의 이름 안에서 생명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20:31)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니,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선포하였도다." (요한복음 17:6, 26)
"주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사데에 (더럽히지 않은)
몇 이름들을 가지리라."(요한계시록 3:4)
이 구절들에서처럼 다른 많은 구절들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으로부터 발하는 신성을 의미하고
그분은 그것을 통해 예배되신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라는 이름은
그분이 인류를 속량하는 것에 관련된 모든 것,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관련된 모든 것,
따라서 그것을 통해 그분이 구원하시는 모든 것을 뜻한다.
'예수'는 속량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모든 노력을 의미하고
'그리스도'는 가르침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모든 노력을 의미한다.
299
천적인 뜻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이 말씀을 뜻한다. 즉,
“사람의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마 12:31,32)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주님의 인성은 신성이시라는 것’(the divinity of the Lord's Human),
그리고 ‘성언의 거룩함’에 대한 모독을 의미한다.
천적인 의미, 즉 최고의 뜻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주님의 신성한 인성’을 뜻한다는 것은
다음 구절들에서 명백하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한 12:28)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한14:13,14)
이것은 또한 주기도문(마태6:9)에 있는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의 천적인 의미이고
출 23장 21절과 사 63장 16절에 있는 “이름”도 같은 뜻이다.
마태12:31,32절에 언급된 것처럼
성령에 대한 모독은 어느 누구도 용서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이 천적인 의미 안에 있는 뜻이기 때문에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않으신다.”는 구절이
계명에 첨가되었다.
300
영계에서 사용되는 이름들이 단지 누군가의 이름이 아닌
그의 전 성품을 의미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세계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가 세례 때 받거나
세상의 아버지나 가족에게서 받은 이름을 간직하지 않는다.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만 그의 성품에 맞게 이름 지어지고
천사들은 그들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삶에 맞게 이름 지어진다.
주님의 이 말씀에서 의미하는 자들이 바로 이들이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한10:3)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몇 이름)이 있나니..
이기는 자는 새 예루살렘 성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의 위에 기록하리라”(묵3:4, 12)
‘가브리엘’과 ‘미가엘’은
천국에 있는 두 천사들의 이름이 아니라
천국에서 주님에 관한 지혜를 흠모하고 주님을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을 뜻한다.
성언에서 인명과 지명의 이름들은
사람들과 장소들의 명칭들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것들’을 뜻한다.
자연계에서도 이름은 이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한 사람의 전체 성품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것이 이름과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
301
셋째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다.”
이 세 번째 계명은 출 20:8-10절과 신5:12-14절에 기술되어 있다.
자연적 의미로 엿새는 사람과 그 수고를 위해서 있고
제 칠일은 주님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람의 휴식을 위해서 있다.
히브리말로 솨바트(Sabbath)는 안식(휴식)이라는 뜻의 말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안식은 신성한 것 중에서도 신성한 것이니
그 까닭은 그것이 주님을 표징하기 때문이다.
엿새는 지옥에 대한 주님의 노고(labor)와 쟁투(battles)를 표징하고
제 칠일은 지옥들 위에서 거두신 주님의 승리요
따라서 온 안식을 표징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에 들어오실 때
그분의 표징들은 모두 끝나고
안식일은 신성한 것들을 교육하는 날이 되었고
노동에서 쉬고 구원과 영생에 대한 명상의 날이 되었다.
그렇다. 안식일이 신성한 것들을 교육하는 날이 되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안식일에 성전과 회장에서
가르치신 사실에서 확실하고(마가6:2, 누가4:16,31,32, 13:10)
또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셨고
바리새인들에게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신
사실에서 확인된다.(마12:1-9, 막2:23-28, 눅6:1-6, 요5:9-19)
이 모든 세부적인 것들은 영적인 의미로
교리의 문제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 것을 뜻한다.
안식일은 또한 이웃사랑의 실천을 위한 날이기도 하다는 것이
주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바에 의해서 명백하다.
(마12:10-14, 막 3:1-9, 눅6:6-18, 14:1-7, 요5:9-19, 7:22,23, 9:14-16)
이 구절들과 위에서 제시한 성구들이 주님께서
왜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는지의 이유를
잘 증명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으니
안식일이 주님의 표징이었음도 확연해진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12:8, 막2:18, 눅6:5)
302
이 계명의 영적인 의미는
주님에 의해서 성취되는 개혁과 중생을 뜻한다.
육일간의 노동은
육체와 그 욕망들을 대적하는 싸움을 뜻하는 동시에
지옥에 의해 사람 안에 심겨진 악들과 거짓들과의 싸움을 뜻한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사람의 주님과의 결합,
그리고 그 결과인 중생을 뜻한다.
그러한 싸움이 계속되는 한
사람은 영적인 노동에 있게 되는데
그것은 나중에 개혁과 중생에 관한 장에서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중생되면 그는 휴식을 가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다.
1) 중생은 사람이 잉태되어 자궁 안에 있다가 출생되어
교육을 받는 것과 정확히 닮은꼴이다.
2) 중생의 첫 걸음은 개혁이라고 부르는데 이해에 속한다.
둘째 단계는 중생이라고 하며 의지에 속하고
또 거기서 이해에까지 진전한다.
3) 속사람이 먼저 개혁되고 그리고 속사람이 겉사람을 개혁한다.
4) 왜 그런가 하면 그때에 속사람과 겉사람 사이에 쟁투가 벌어지고
어느 편이 이기던 타자를 지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5) 중생한 사람은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된다.
이 계명이 영적인 의미로 사람의 개혁과 중생을 뜻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지옥과 대결하는 주님의 노동과 쟁투,
그리고 그것들에게서 얻는 승리와 그 후에 오는 휴식과
닮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주님께서 사람을 개혁하시고 중생시켜서
영적인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이
주님께서 당신의 인성을 영광화하시고 신성이 되게 하신 것과
동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신을 따르라’는 명령의 의미다.
주님의 쟁투가 노고라고 칭해지는 것은 이사야53, 63장에서,
그리고 사람의 애씀이 또한 노고라고 칭해지는 것은
이사야65:23과 묵시록 2:2,3에서 알 수 있다.
303
천적인 의미로 이 계명은 지옥으로부터 보호된 결과
평화로 이끌어주는 주님과의 결합을 의미한다.
안식일은 휴식을 의미하고 최고의 뜻으로는 평화를 뜻한다.
그래서 주님은 평화의 왕이라고 호칭되고
또 당신 자신도 평화라고 하셨음이 다음 성구들에서 확인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사야9:6)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한14:2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구원을 공포하며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이사야52:7)
..
더구나 이사야 55, 56장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상태를 다루고 있는데
이 상태에는 현재 주님께서 세우고 계신 새로운 교회 안에
받아들여진 자들이 들어간다.
천국의 천사와 주 안에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이 평화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내 책 천국과 지옥 284-290에서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언급들은 왜 주님께서 자신을 안식일의 주,
즉 안식과 평화의 주라고 부르지를 명백히 해준다.
304
지옥으로부터 일어나 우리를 공격하는 악과 거짓을
막아주는 천국의 평화는
많은 점에서 자연적인 평화와 비교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쟁 후에 오는 평화가 그러한데,
그때 모든 이들은 적으로부터 보호받아
그의 마을과 그의 집, 그의 소유지와 정원에서 안전하게 산다.
천국의 평화에 대해
예언자는 자연적인 방식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자기 포노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아무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마가4:4, 이사야65:21-23)
그것은 또 극심한 노동 후 오는
정신적인 여유와 휴식에도 비할 수 있겠고,
또 아이를 분만한 후 모성애가 기쁨들을 줄 때
어머니들이 경험하는 위로와
폭풍과 검은 구름, 그리고 번개가 지나가고 난 후의 화창한 날씨,
또 혹독한 겨울이 지나간 후의 봄,
그리고 들판에서 새로운 농작물의 번성과
정원, 목초지, 숲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과 같고
그것은 또 폭풍과 바다의 위험 뒤
항구에 이르러 그들이 바라던 땅에 발을 디딘 사람들의
마음 상태에도 비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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