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crazy Li 영화읽기 회장님의 모임 후기입니다.>
<다음 소희>의 감상을 끄적여 보았습니다.
<다음 소희>를 통해 확인한 자본의 세계,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불합리를 고발하고자 찾아가는 모든 공간에서, 사람은 사라지고 벽을 가득 채운 '성과의 정량 지표'들인 '숫자'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온도가 사라진 세상은, 당연하게 '취업률'이나 '콜수', '방어율'과 같이 정의되어야만 하는 숫자의 열기로 뜨겁다 못해 타버릴 지경입니다. 숫자의 온도는 붉은색이나 푸른색의 극단을 향해 있는데, 숫자 너머에서 살아 숨 쉬고 꿈을 꾸고, 울다 지쳐 쓰러져 버린 '인간'은 어느 누구에게도 온기를 전하지 못합니다. 2016년을 배경으로 정주리 감독이 작정하고 그려낸 <다음 소희>의 세상은, 너무도 현실적이라 눈물이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교육청과 경쟁해야 합니다. 다른 교육청과의 경쟁의 결과로 우리의 인센티브(성과급)가 결정되고, 인센티브의 규모에 따라 우리 지역에서 관리할 수 있는 학교의 숫자가 결정됩니다. 만약, 우리가 성과를 '정량적'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그로 인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면, 아래의 몇 개 학교는 그대로 문을 닫아야 해요.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당신이 책임자야. 아이들이 죽어나간 것에 대해,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난 그저 힘없는 일개 장학사일 뿐인걸요? 제가 책임을 질 수 있을까요?.... 자, 이제 어디로 가시려고요? 이제 교육부로 가시나요? 거기서 안 풀린다면, 그러면요?" - 교육청 장학사와 오유진 경사의 대사
오유진 경사 (배두나 역)가 소희의 죽음을 '산재'로 규정하고, 그 원인을 찾아 올라간 교육청에서 현장 실습 담당 장학사의 변명입니다. 사실, 오유진 경사가 교육청에 올라갈 때까지, 원인을 밝히기 위해 찾아갔던 모든 곳에서 거의 동일한 변명을 듣게 되었어요. 소희네 학교의 담임도, 교감도, 소희가 파견된 회사의 팀장도, 지역 사무소 소장도, 본사의 담당자도, 모두 똑같은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공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최고의 '성과'를 위해 역할을 수행했을 뿐, 소희라는 사람의 아픔에는 책임이 없다는 겁니다. 열여덟 살의 고등학생이 죽었는데, 그 책임이 아무에게도 없는 데다 그 원인이 '성과급 (인센티브)'이라니요! 갑자기 마르크스의 경고가 떠올랐습니다.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성과급제의 특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노동의 질에 대한 관리가 쉽습니다. (생산되는 제품의 품질을 유지하지 못하면, 성과급에 대한 삭감이 진행되므로, 노동자들이 알아서 생산 품질의 관리를 하게 되므로!)
둘째, 노동강도에 대한 관리가 쉽습니다. 시간당 생산량만 확인하면 되니까요. 이 양은 경험을 통해 대체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평균적인' 능력을 가진 노동자가 '평균적' 속도로 일할 경우 몇 개는 생산해야 한다는 게 있지요. 이것은 그 자체로 노동자들에 대한 평가 기준이 됩니다.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노동자는 임금이나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거나 해고되겠지요.
셋째, 노동의 질이나 강도에 큰 신경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감독 노동의 필요가 줄어들어 하청을 양산할 수 있게 되지요. 생산의 질과 양만 체크하면 되기 때문에 아예 일감을 하청 줄 수가 있습니다. 하청의 하청도 가능하고요. 본래는 노동자를 직접 고용해서 생산해야 하지만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양을 조달할 수 있다면 자본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 십장 내지 두목 노동자가 일감을 따온 뒤 휘하의 노동자들을 값싸게 부렸습니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지요.
넷째, 임금이 생산량에 따라 지급되기 때문에 노동자들로서는 임금을 더 받기 위해 노동강도를 스스로 높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전체적으로 노동의 표준강도가 올라갑니다. 노동강도만이 아닙니다. 노동일도 스스로 늘리겠지요. 그렇게 하면 임금이 또 오를 테니까요. 이처럼 노동강도와 노동일이 늘어난다는 것은 노동량의 공급이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시간급제에서 본 것처럼 노동의 가격이 떨어지지요. 다시 또 악순환이 일어나겠지요. 낮은 노동 가격 때문에 노동자들은 더욱 시간과 강도를 높이려 들 테니까요.
다섯째, 시간급제와 달리 성과급제에서는 노동자들의 개인적 차이가 부각됩니다. ... 평균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도 생기고, 더 적게 받는 노동자도 생깁니다. 노동자들의 경쟁 구도가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면 자본가에게는 이중으로 유리한 국면이 조성됩니다.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경쟁으로 생산량이 증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 경쟁 때문에 노동자들의 연대가 어려워지지요.
여섯째, 마르크스가 언급한 건 아니지만 '근로'를 조장하는 도덕적 효과가 생깁니다. 개인별로 생산량에 따라 임금 차이가 나기 때문에, 임금 차이가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노동자에 대한 도덕적 평판을 낳습니다. 저임금을 개인 노동자의 게으름 탓으로 돌리게 하지요.
일곱째, 자본가는 불확실한 시장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되지요. 시장 변동의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할 수 있지요.
이 모든 특징들을 종합하면 우리는 왜 자본가가 성과급제를 그토록 선호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임금에 관한 온갖 헛소리, 고병권 저>, pp. 190~193
100년 전의 마르크스는 초기 자본주의의 세상을 관찰한 후, 성과급제에 대한 경고를 했습니다. 성과급제를 통해 '평균적인 노동 생산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을 예측했고, 성과급제에 의한 조직관리가 결국은 노동자가 노동자들을 '알아서' 감시하게 하는 세상을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2023년의 대한민국은 <다음 소희>에서 보여주었듯이, '돈을 벌어야 하는 기업'을 넘어서서, 국가나 세계 전체가 자본의 통제에 의해 운영되는 지옥 같은 현실을 보여줍니다. 이런 세상 아래에서, 우리는 절대 '평균 이하'여서는 곤란하고, 우리들이 우리들을 더욱더 착취로 몰아넣는 지옥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내 옆의 동료나 이웃을, 더 이상 '돌봐야 하는' 존재로 여길 수 없게 되는 것이죠. 그 안에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꿈 많던 소희에게 모든 희망을 빼앗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에요.
"앞으로는 참지 마. 어떤 식의 불합리로 참아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누구한테든 얘기해. 나한테 얘기해도 돼! 꼭 얘기해." - 오유진 경사 (배두나 역)의 대사
극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전혀 다른 톤으로 펼쳐집니다. 전반부는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꿈 많은 소녀'였던 소희가, 세상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기대하지 못한 채 죽음을 택하는 이야기였다면, 후반부는 '경찰로서의 책임을 깨달아가는' 오유진 경사가,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며 다짐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거예요. 전사가 자세하게 그려지지는 않지만, 세상에 대해 무기력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오 경사는, 소희가 '버티고 견디던' 세상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조금씩 분노하기 시작합니다. 분노는 책임을 요구하고, 진실을 요구하지만, 성과급을 내세운 세상의 견고한 틀은, 결코 틈조차 보이지 않아요. 스크린의 인물들에 감정이입이 되어 바라보는 내내, 그 견고한 벽은 너무도 굳건하여 소리를 지르고 싶었습니다.
"제발, 들어줘! 네가 잘못했잖아!"
몇 번이나 소리를 지르고 싶었고, 몇 번이나 물병을 집어던지고 싶었습니다. 내 앞에 있었다면, 소희나 오 경사의 주먹처럼, 곧고 빠른 스트레이트를 꽂아 넣었을지도 모릅니다. 진심으로, 맞아도 싼, 때려주고 싶은 어른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었고, 어쩌면, 그런 어른들이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미안함이 가득했던 시간이었습니다. 혹시라도 나는 외면하지 않았을까요? 혹시라도, 나는 내가 할 일을 다 했다며, 스스로를 변명하고 말았던 것은 아닐까요? 영화 후반, 오 경사의 분노와 함께 흐르기 시작했던 눈물이, 멈추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런 '나는 책임이 없나'의 죄책감 때문이었던 듯합니다. 아... ㅠㅠ
<다음 소희>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합니다. 영어 제목인 Next Sohee는 소희의 옆, 일 수도 있고, 소희 다음의 누구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소희의 옆에서 소희의 마지막 눈물을 보아주었던 사람이 그녀의 담임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요? 누군가, 소희에게 '견디지 마.
괜찮아'라고 말해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리고, 우리 세상에서 소희 다음의 누군가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는 있을까요? 이미 많은 '소희'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대한민국이니까요. 많은 질문이 함께 남은 영화였습니다.
영화 내내 정주리 감독의 시선은 따스하고, 세심합니다. 절망에 빠진 소희에게 비친 햇살은 더 이상 세상에서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의 상징이었지만, 오 경사에게 비친 햇살은 '다음의 소희'가 생기지 않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는 결심의 상징으로 드러나던 장면은, 특히 좋았어요.
언제부터인가 '이런 세상을 만든 어른들이 책임져!'라는 불만의 대상은, '너도 그 어른이잖아'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세상에서 최선을 다했던 현재가 이런 모습이라니, 비참하기까지 해요. 내가 원했던 세상은, 결코 이런 모습이 아니었으니까요! ㅠㅠ
더 이상은 모르는 척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은 현실을 외면한 채, '내가 내 자리에서 해야 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어른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참함을 그들이 견뎌내지 않아도 괜찮은 세상을, 넘겨주고 싶어요. 소희의 절망이 반복되지 않는 세상을 기대합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춤추기를 좋아하는 소희가, 원하는 동작에 끝없이 실패하는 뒷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죽기로 결심하며 모든 기록을 지웠던 소희가, 끝내 지우지 못한 단 하나의 기록으로 마무리되어요. 남아있던 동영상에서 그 힘들었던 동작들을 끝내 성공해 내고는 환하게 웃는 소희의 모습이, 너무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 제발, 우리의 아이들을 더 이상 죽게 하지 말아요. 그리고, 우리 모두, 이 거지 같은 자본의 세상에서 더 이상 견디지 맙시다! 제발, 우리, 함께 '살아요'!!!
한참을 멍하니 생각했어요.
내가 얼마나 세상의 불합리에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면서 다른 사람이 해주겠지...
하는 생각을.
늘 나이가 들면 조금은 이해 한다고 말하지만 그 이해가 무관심이였다는걸..
지금 내 눈앞에서 또 다른 소희를 봤을 때 난 소리쳐 말 할 수 있을까?
나의 뇌리에 화두처럼 꽂혀 있네요.
<다음 소희>가 보여주는 모든 장면은 그 자체로 ‘현실의 소환’이었습니다. 함께 살고 있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외면했고, 눈 감았고, 결국은 이런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는 안타까움에 눈물이 났어요.
더 이상은 ‘나는 최선을 다 했다’고 변명하지 말고, 좀 더 진지하게 그들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한줄기 따스한 햇살‘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소희같은 아이가, 더 이상은 이 세상에 없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생명을 잃었네요. ㅜㅜ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자리에 같이 참석해 주셨던 모임 밖 분들과의 이야기도, 정말 소중했어요. 우리 곁의 소희에게, 적어도 우리는 오경사의 모습이길 기대합니다.
다음달 모임에서, 또 뵐께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