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6:1-25, 다시 사울을 살려주는 다윗, 24.8.28, 박홍섭 목사
사무엘서는 계속 사울과 다윗을 통해 하나님 없는 인생과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 이스라엘이 원하는 왕과 하나님이 원하는 왕을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이 원한 왕으로 사람이 꿈꾸는 힘과 권력을 가진 인생을 대변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워졌지만, 그의 관심은 백성과 나라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자기 자신과 왕이라는 자리와 힘과 권력이며 사람들의 인정과 박수와 칭찬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보다 유능하고 인정받는 사람이 등장하면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분노로 그를 제거하려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자리와 힘과 권력이 지켜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을 대변합니다. 사울에게 쫓기는 억울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연단되고 있습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주어져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를 자신이 해할 수 없다며 하나님의 주권에 맡긴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번에도 다윗은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수 있음에도 사울과 그의 부하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와서 사울을 살려줍니다. 이유는 똑같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를 내가 해할 수 없다는 이유입니다.
사무엘서는 이런 대조를 유사한 구조를 반복하면서 이어나갑니다. 유다 지파며 다윗과는 친척관계인 십 사람들의 밀고가 반복되고, 그들이 밀고를 받고 다윗을 쫓는 사울의 추격도 반복되며, 그런 사울을 살려주는 다윗의 행동도 반복됩니다. 반복은 강조입니다. 끝없는 분노와 시기심으로 다윗을 추격하면서 회개 없는 헛된 뉘우침만 반복하는 사울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이런 불 신앙의 모습이 없는지 살펴보라는 강조입니다. 동시에 그런 사울을 용서하는 다윗을 보면서 하나님께 양육 받고 훈련받으면서 만들어져야 할 은혜의 모습들을 생각하라는 강조입니다.
그런 이해를 가지고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앞선 24장에서 다윗의 은혜를 입고 울면서 감격했던 사울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군사 삼천을 이끌고 다윗을 죽이려 나섭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은 그날 밤 아비새와 함께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사울의 진영으로 침투합니다(4, 7a). 상황만 살펴보려고 갔는데 가보니 외곽의 군사들부터 사울과 그의 호위무사들까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울과 그 군사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12b).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인 동시에 사울을 죽일 기회가 다시 주어졌을 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이기도 합니다.
왜 이런 시험이 필요합니까? 앞선 25장에서의 사건 때문입니다. 거기서 다윗은 자신의 요청을 거부한 나발에게 분노하여 복수의 칼을 휘두르려고 하여 자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사울과 똑같이 될 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발의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을 통해 다윗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나발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도록 간섭하시어 다윗의 살해극을 막아주셨습니다. 다윗을 그렇게 교훈하셨던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일 수있는 기회를 다시 제공하시고 그 교훈을 잘 받았으며 잘 적용하는지를 시험해보십니다.
여기에 다윗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다윗과 함께 사울의 진영으로 침투한 아비새는 모두가 정신없이 깊은 잠에 빠진 현장을 보고 하나님이 이런 기회를 주셨으니 사울을 죽이겠다고 합니다. 12절의 ‘깊이 잠들게 하셨다’라는 히브리 단어가 창 2:21의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실 때 그를 ‘깊이 잠들게 하셨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마치 환자가 큰 수술을 위해 마취 주사를 맞고 잠든 것과 방불하게 사울과 그 일행들이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다윗과 아비새는 그 현장을 보고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해석은 아비새와 달랐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아비새는 이런 좋은 기회는 하나님이 사울을 죽이라고 허락하신 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에서 눈앞의 현실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25장의 나발 사건을 겪고 다시 하나님께서 직접 원수를 갚아 주신다는 24장의 다윗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믿음으로 사울의 창과 물병만을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나 하나님의 시험을 잘 풀어냅니다.
사울을 살려준 다윗은 건너편 산꼭대기로 가서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을 부릅니다. 네가 이스라엘의 용사인데 왜 왕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느냐고 책망하면서 내가 너의 왕을 죽일 수 있었는데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왔으니 왕의 창과 머리 곁의 물병이 어디 있는지 보라고 합니다. 이는 아브넬을 향한 책망인 동시에 사울을 향한 호소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렇게 당신을 선대 하는데 당신은 왜 나를 그토록 죽이려고 하냐는 하소연입니다. 그러면서 만일 왕을 충동하여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자신이 죽어 마땅하지만, 사람이 당신을 충동한 것이라면 그 사람은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의 말을 들은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윗에게 돌아오라고 합니다(21a). 사울의 뉘우침이 참된 뉘우침이라면 다윗에게 돌아오라고 할 것이 아니라 사울 자신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말이 늘 헛된 뉘우침에 그치고 회개로 나아가지 않음을 알기에 가지 않습니다. 이전에도 늘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는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으시고 자신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의 삶과 목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삼천 명을 이끌고 다윗을 잡으려고 와 있지 않습니까? 사울에게 하나님의 뜻은 한쪽 귀로 들어왔다가 다른 귀로 흘러나가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고 자신의 삶은 삶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사울을 알았기에 물병과 창만 사람을 통해 돌려보내면서 자신의 생명은 사울의 손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사울에게 선포합니다. 24-25을 보십시오.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가니라”
지금 사울은 다윗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두 번이나 살려주었으니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시 기회를 주시고 은혜로 살려준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사울은 지금의 자신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기회를 주셔서 살아 있음을 알고 다윗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을 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감정적인 뉘우침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신을 돌이키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한 삶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숨을 가져가셔도 마땅하지만, 창과 물병만을 취함으로써 지금 우리의 삶이 존재합니다. 은혜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현재를 새롭게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석하고 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 앞에 자신을 드리는 겸손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겸손한 믿음이 있었기에 다윗은 사울을 살려줍니다. 아비새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날리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또 한 번의 기회를 살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한 번 더 돌이키고 회개할 기회를 얻었지만, 이번에도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만남은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윗과 사울이 돌아간 길은 물리적으로 광야와 궁전이라는 현격한 차이도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더 큰 차이가 있는 전혀 다른 길입니다. 비록 광야로 쫓겨 다녔지만, 다윗의 길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믿음의 길이었고, 사울의 길은 진정으로 부를 이름이 없는 불 신앙의 길입니다. 그렇게 각각 자기 길을 가서 결국 사울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길과 어떤 삶으로 훈련받고 양육되고 있는지를 다윗을 통하여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사람들은 어떤 길을 스스로 고집하며 걸어가는지를 사울을 통해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길을 가고 있으며 갈 것인지를 묻습니다. 다윗의 길인가? 사울의 길인가? 오늘 우리가 숨 쉬고 있음은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기회를 은혜받을 때 은혜를 받고 회개할만한 때에 회개하는 시간으로 만들어 다윗의 길을 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