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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7:36-50, 은혜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 24.9.15, 박홍섭 목사
예수님이 시몬이라 이름하는 한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습니다. 공식 만찬의 그 자리에 예수님은 당시의 풍습대로 한쪽으로 발을 빼고 비스듬히 앉아 있습니다. 그때 이름 없는 한 여자가 뒤로 와서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붓습니다. 누가는 이 여인을 ‘그 동네에 있는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소개합니다. 학자 중에 그녀를 창기로 보는 사람이 있지만, 성경이 설명하지 않으므로 확실하지 않습니다. 여하튼 그 동네에 사는 사람은 다 죄인으로 취급하는 이 여자는 부정하므로 다른 사람과 같이 식사할 수 없습니다. 시몬은 그토록 부정한 여자가 자신의 식탁에 난입하여 이런 행동을 벌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만약 예수가 참 선지자라면 이 여인의 부정함을 알고 물리쳐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있다고 불평합니다.
그의 생각을 아시는 주님은 빚진 자 둘을 비유로 말씀하면서 묻습니다. 40-42을 보십시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을 받은 자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44-46입니다.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당시 팔레스타인의 문화는 어떤 사람을 초대하면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물을 떠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본 예의입니다. 그리고 그를 초청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환영한다는 의미로 포옹을 하고 뺨에 입을 맞추며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초청한 시몬은 이런 정당한 손님 대접을 하지 않았습니다.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고, 입도 맞추지 아니하였으며 기름 가운데 가장 흔한 감람유 조차 붓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기본 예의조차 지키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그가 천하고 부정한 죄인이라 생각했던 여인은 주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했습니다. 시몬은 환영과 존경의 입맞춤도 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주님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고, 감람유도 붓지 않은 바리새인과 달리 가장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자신의 많은 죄를 용서받은 은혜가 너무 큼을 알기에 이렇게 하고 있다고 평가하십니다. 사실 씻지 않은 더러운 예수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닦고 입을 맞추는 행위는 노예도 하지 않는 일입니다. 주인의 발을 핥는 개나 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그렇게 합니다. 무엇이 이 여인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했으며 주님의 발에 입 맞추면서 값비싼 향유를 붓게 했습니까? 주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47절이죠.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녀는 자신의 많은 죄를 용서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고마웠고 그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너무나 커서 이렇게 했습니다.
통상 유대인의 만찬 초대는 존경과 친밀감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시몬이 예수를 초대한 이유는 예수를 정말 존경하고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그랬다면 발 씻을 물도 주고 존경의 입맞춤도 하고 머리에 기름도 부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의 초대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임을 암시합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면박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바리새인들과 손님들은 다 발 씻을 물도 주고 입 맞추며 환영의 표시를 하며 머리에 기름을 부어 기본 예의를 지켰지만, 주님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무시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공개적인 식사의 자리에서 주님을 무시하고 욕 보였습니다.
그것을 이 여인이 다 지켜봅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공식 식사 초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공개적인 자리에 가서 감히 곁에 가지는 못하고 멀리서 보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 여인이 언제 예수님에게 죄를 용서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본문에 나오는 동사의 시제를 보면 이 전에 그런 경험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시면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고 병자들과 세리들과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영접해주신 주님에게 이 여인은 어느 날 자신의 많은 죄를 용서받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그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삶의 공허와 죄책감과 분노를 안고 힘겹게 살고 있는 자신에게 어느 날 주의 은혜가 찾아왔고 무거운 죄를 씻음 받는 안식과 자유를 맛 보았습니다. 그날부터 이 여인은 주님의 은혜를 간직하며 살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자기 삶의 최고의 목적이 되었고 소망이 되었습니다. 가장 귀한 가치와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이 기본 예의조차 지키지 않은 바리새인의 집에서 모멸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여인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집에 있는 향유를 가지고 와서 주님의 발을 씻깁니다. 주님 발 앞에 엎드려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로 발을 씻기고 머리털로 닦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입 맟추고 향유를 붓습니다. 나의 죄를 사해주시고 나를 받아주시며 나에게 새로운 삶의 목적과 가치를 안겨주신 이분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할 분이 아니라고 자신의 행위를 통해 알립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향하여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48). 그러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이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들이 다 들으라는 듯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라고 선포하십니다(50). 이 사건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이 자신을 이렇게 푸대접할 줄 모르고 가셨을까요? 다 아십니다. 그 여인이 이렇게 할 줄 모르고 가셨을까요? 다 아십니다. 아시면서 가십니다. 목적이 있죠. 복음서에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그 발을 씻긴 기사는 두 번 나옵니다. 여기가 처음이고 십자가를 지시기 일주일 직전에 베다니에 있는 나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에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에 의해 한 번 더 나옵니다(마 26:2-16; 막 14:1-11; 요 12:1-8). 찬송가에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라는 가사가 있는데 잘못된 가사죠.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그냥 마리아입니다. 그 사건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를 드러내는 의미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어디에서나 기억해야 한다고 손수 주님이 말씀해 주신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그와는 전혀 다른 공생애 초기의 사건입니다. 장소도 베다니가 아니라 나인성의 바리새인 시몬의 집입니다. 여기 시몬은 베다니에 있었던 나병걸렸다가 나은 시몬이 아닙니다. 다른 시몬, 동명이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35절을 보십시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주님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을 자신들의 요구대로 바꾸어주기를 원하고 그 요구에 응하지 않는 요한과 예수님을 비난했던 이 세대의 완악함과 강퍅함을 장터에 노는 아이들의 비유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을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고 내렸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이 세대가 예수님을 그렇게 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자신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옮음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지혜는 예수님을 의인화한 표현이고 지혜의 자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한 주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본문의 여인은 지혜의 자녀들, 곧 예수 믿고 회개한 사람을 대표합니다. 시몬은 바리새인을 대표합니다. 누가 옳습니까? 누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른 삶입니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에게 자신들과 함께하자고 말하는 바리새인이 옳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무례한 인생들입니다. 반면에 이들이 상종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정죄하는 죄 많은 여인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의 발에 쏟아부음으로 자신이 드러낼 수 있는 최대의 사랑과 존중과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많은 죄를 용서받은 은혜가 그렇게 해도 갚을 수 없는 너무나 큰 은혜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의로움과 옮음이 나의 자녀들인 이들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예로 오늘 본문의 여인을 예로 드십니다. 그것을 위해 무시당할 줄 아시면서도 바리새인 시몬의 식사 초대에 응하시고 그들이 옳지 않음을 드러내십니다. 자신의 옮음을 이 여인의 사랑을 통해 입증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몬은 왜 이런 귀한 헌신과 사랑을 이해하지 못합니까? 왜 오늘 수많은 사람이 이렇게 향기 나는 헌신과 사랑을 주님께 드리지 못합니까? 주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죄를 용서받고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서 살아난 은혜의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은행에서 돈을 더 빌려주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대학에서 그냥 입학시켜주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취직을 그냥 시켜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손해 보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주님을 압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해야 그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빛 비추임이 우리의 무지한 지성을 밝히고 완악한 감정을 깨트려서 주님을 죽게 한 우리의 죄의 심각함과 그 죄가 우리에게 가져온 비참과 저주와 고난의 깊이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얼마나 귀한 죽음이며 그 죽음의 결과가 얼마나 복된 하나님의 용서를 나에게 가져다주었으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대신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주시는 통로가 되었는지를 깊이 깨달아 알게 될 때 우리도 사랑으로 이 여인처럼 헌신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눈이 열려서 내가 받은 은혜를 알고 이 여인처럼 예수님 앞에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깨트리는 자발적인 사랑과 경베로 주님의 옳으심을 드러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여인이 깨트린 향유와 비교가 안 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깨트림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부요한 우주의 왕이지만 우리의 구속을 위해 가장 가난한 자가 되셨습니다. 말 구우에 오셔서 머리 둘 곳 없는 이 땅의 삶을 사시다가 가장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에 자신을 내어주신 분입니다. 당신의 가장 귀한 생명을 깨트려 그 보배로운 피를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쏟아서 흘려주신 분입니다. 주님의 이런 헌신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이 은혜를 깨닫게 되면 자신의 귀한 것을 주님께 바칩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면서 자신의 옥합을 깨트렸습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만났을 때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를 따라감으로 자신의 옥합을 깨트렸습니다. 막 12장에 나오는 한 가난한 과부도 자신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의 전부인 동전 두 잎을 연보 궤에 넣어 자신의 옥합을 깨트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죄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된 모든 사람의 당연하고도 마땅한 반응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를 초대해놓고도 발 씻을 물도 주지 않고 입 맞추지도 않고 머리에 기름도 부어주지 않았지만, 죄 많은 이 여인은 힘을 다해 자기를 깨트려 주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평판과 관점과 멸시에 상처받지 말고 네가 나에게 발견한 그 사랑과 은혜를 가지고, 그 은혜가 주는 나의 평안을 가지고 너의 삶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힘을 다해 어디를 향하여 달려갑니까? 힘을 다해 무엇을 추구합니까? 힘을 다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예수님이 부당한 대접을 받을 때 견딜 수 없는 눈물로 표출되고 기꺼이 나의 가장 귀한 것을 깨트려 주님의 발에 부어 드리는 헌신으로 나타나는 한우리 식구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