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비열전 16-2
제16대 인조(이종)의 여자들
장렬왕후 조씨!
인조의 계비다.
1635년(인조13년)에 첫부인
인렬왕후 한씨를 잃고 3년 후인
1638년(인조 16년)에 장렬왕후를 맞는다.
조씨는 1624년(인조 2년) 11월에 양주 조씨
조창원과 어머니 전주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왕비로 책봉되었을 때 나이가 15살 이었다.
인조는 44살이니 무려 29살 차이가 난다.
참 나 원!
후비들은 왜 그렇게 나이 차가 많은겨~?
하긴 선조와 인목왕후는 32살 차이다.
할전손전(그 할배에 그 손자다)
장렬왕후가 국모이지만 나이가 15살이니
내명부를 다스리기는 매우 어려웠다.
당시에 가장 큰 장애는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소용 조씨였다.
소용 조씨!
대단한 여자였다.
대단히.머리가. 단단한. 여자...^^
소용 조씨는 인조 성은으로 승선군을 낳았다.
권력에 대한 욕심과 질투가 보통이 아니었다.
반정공신인 김자점의 세력을 등에 업고
지가 마치 중전처럼 행세를 했다.
지 분수를 모르고 날뛴 것이다.
결과가 뻔한데...
지분ᆞ수분ᆞ안분이다!
인조가 이쁘고 맘씨 고운 장렬왕후 조씨의
방에 좀 가려고 하면 소용 조씨가 방해했다.
같은 조씨끼리 의리(?)도 없이..
장렬왕후 조씨!
님을 봐야 뽕을 따는데
허구헌날 독수공방 신세였다.
그러니 어찌 후사를 만들 수 있겠는가?
같은 조씨 소용 때문에 홧병을 앓게 된다.
질투의 희생양이 되었다. ㅠㅠ
그래도 성품이 후덕하여 후궁들을 잘 보살펴
주었고 넓으신 아량으로 덕망이 높았다.
1647년 (인조 25) 소용 조씨의 농간으로
세상을 떠난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이들의 죽음을 안타까워
한 사람은 오직 장렬왕후 조씨였다.
그러나..
선한 행위는 선하게 보답을 받는 법이다.
이런 장렬왕후를 세자인
봉림대군이 지극히 잘 섬겼다는 것이다.
인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침 문안인사도
착실히 하고 예의를 갖춰 공경했다고 한다.
비록 세자가 왕비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1649년(인조 29년) 5월 8일 인조가
저 세상으로 떠날 때,
장렬왕후는 고작 스물 여섯이었다.
이 나이에 대비가 된 것이다. ㅠㅠ
인조가 세상을 떠나는 날,
장렬왕후가 인조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게
소용 조씨가 방해하자, 세자인 봉림대군이
소용 조씨를 쫓아내고 왕후를 모셔 오게했다.
왕후, 남편과 마지막 면담(?)이다.
인조,
열다섯 살의 왕비를 떠올렸다.
매우 깜찍하고 이뻤던 왕비였다.
사람은 원래 죽을 때 제 정신이 돌아온다고
인조도 왕비에게 진심어린 참회 눈물을 흘렸다.
"주.. 중전.. 미.. 미안하오!" 하믄서...
ㅉㅉ ㅉㅉ
그럴려면 진즉 철 좀 들지..
하긴 남자는 나이가 칠십이 되어도
철(Fe)이 안 든다고 한다..
남자는 철들자 망녕이 든다잖유..
여자는 철들어도 소갈머리가 없다고 하고..ㅋㅋ
버스 지난 뒤에 손 흔들어봐야 뭐 하나?
괜히 팔만 아프지..
그러니 이 말이 진리다.
"있을 때 잘해!"
1651년(효종 2년)소용 조씨는 자신의 아들,
승선군을 왕으로 만들려고 김자점들과
모의를 하다가 발각되어 사약을 받는다.
인과응보이고 사필귀정이다.
우리의 장렬왕후,
아니, 이제 대비님은 효종의 극진한 효성으로
권위를 찾고 품위 있게 사시다가 1688년
(숙종 14년) 8월 창경궁에서 무자식 상팔자로
소생없이 65세로 지구별 여행을 마치셨다.
돌아가셨어도 인조 곁에 묻히지 못하고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휘능에 홀로 묻혔다.
살아서도 독수공방 많이 했는데
죽어서도 독수공방 신세가 되셨다.
차라리 잘 되셨다!!!
저 세상에서 저런 인조와 함께 하느니
그냥 혼자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인조 왕후들도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저 구중궁궐에 살았어도.. 그런데..
요즘 저 궁궐에 들어가겠다고 오만짓거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쓰럽고 불쌍하기도 하다.
"꼭 거기 가야 행복한가?" 안 그럴껄..
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걱정 붙들어 메고 왕비열전이나 잘 읽자.
일단 저 장렬왕후님 이름대로 장렬하게..
내일 또 계속 됩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