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을 만든 수응재상 문경공 허조 선생 이야기
아들아, 조선의 황금기는 언제였느냐? 맞다. 너도 알다시피 세종대왕의 시대였지.
그렇다면 오직 세종대왕의 힘만으로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었겠느냐? 아니지.
각 분야에서 빼어나고 기라성같은 수많은 명신들이 세종대왕의 곁에서 도우며
힘을 더했다는 걸 알아야지
세종대왕 어진
세종대왕과 함께하며 유명해진 일명..세종의 남자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정치계의 황희와 맹사성, 과학계의 장영실, 음악계의 박연
그리고 국방분야엔 최윤덕...잘 알려진 분들이지.
이분들만큼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분들 못지않게 세종대의 황금기를 여는데
큰 공헌을 했던 세종대왕의 숨은 조력자가 있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정절공 정갑손 선생과 더불어 살아서는 염근리, 죽어서는 청백리..
그 말에 정확히 들어맞는 분이기도 하지.
아들아, 그분은 바로 문경공 경암 허조 선생(文敬公 敬菴 許租,1369~1439)이시다.
문경공 허조(드라마 대왕세종 中)
문경공 허조 선생은 한마디로 말해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신하로 임금이란 존재에게는
상당히 성가시고 가까이 하기엔 힘든 사람이었지.
임금 앞에서도 조금도 굽히지않고 직언을 퍼부어대며 반대에 또 반대..
임금에게는 정말 피곤한 사람이었을거야.
그 카리스마 넘치는 태종대왕에게도 문경공 허조 선생은 상당히 까다로운 사람이었지.
하지만 태종대왕은 그의 강직함을 높이 사 아꼈단다.
그의 직언과 고언을 그래도 달게 여긴 것을 보면 역시 태종대왕도 보통 인물은 아니지.
태종대왕이 아들 세종대왕에게 양위할때 특별히 그를 앞으로 나오게 해서
세종대왕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해.
"주상, 이 사람이 바로 나의 주춧돌 같은 사람이라오."
태종대왕이 아들 세종대왕에게 그의 치세를 열어가는데 쓰라며 특별히 추천한 사람,
그가 바로 문경공 허조 선생이었단다.
허조, 허후 부자 정충비(경북 경산시)
아들아, 문경공 허조 선생은 깐깐하고 꼬장꼬장..최고로 강경한 원칙주의자.
세종대왕이 새롭게 펼치려는 정책에 가장 많이 그리고 치열하게 반대한 사람이
또 문경공 허조 선생이었지.
하지만 세종대왕은 그의 의견을 경청하며 정책을 그렇게 다듬어 가면서 완성도를 더했지.
그렇게 해서 문경공 허조 선생이 크게 반대하지 않으면 그대로 시행했는데 그렇게 해서
잘못된 예는 거의 없었다고 해.
무조건 반대하고 발목잡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런 자는 나라의 발전을 막고, 나라의 앞날을 막는 사람이지.
반대를 하려면 진정으로 할 것과 해서는 안될 것을 확실히 구분하고,
다듬어 쓸 수 있다면 다듬어 쓸 수 있도록 만드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반대하는 것..
그렇게 무언가 반대를 말하려면 문경공 허조 선생처럼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거란다.
문경공 경암 허조 선생
문경공 허조 선생의 매서운 비판은 심지어 상국이라는 명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단다.
명의 영락제가 조선에 군마 1만필을 보내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을때도 우리나라의
국방이 흔들린다며 끝까지 반대했고,
명의 영락제가 죽으며 조선인 출신 후비인 한씨를 순장하자,
"허수아비라도 순장하면 후손이 끊긴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아는데
황제의 장례식에 궁녀 15명을 순장했다니..대국의 것도 이런 것은 배울바가 못된다."고
당당하게 명나라 황제도 질타하셨지.
문경공 허조 선생을 단순히 최고로 보수적인 선비, 꽉막힌 유생..
그를 그렇게만 봤다면 다시 봐야 할거야.
요즘 일부 보수 정치인이란 사람들과는 달리.. 그분은 품격있는 진정한 보수정치인이야.
문경공 허조 선생이 이처럼 꼬장꼬장하게 소신을 굽히지 않고 살 수 있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들아, 문경공 허조 선생은 부정부패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자기관리가 철저했기
때문에 털어도 먼지도 안나올 사람..
그정도가 되니까 그렇게 당당하게 살 수 있었던 거란다.
송골매..문경공 허조의 인상이 딱 이랬을 것이다.
아들아, 문경공 허조 선생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느냐? 수응재상(瘦鷹宰相).
문경공 허조 선생은 기록에 의하면 척추가 굽은 장애인이었고, 식사도 딱 허기만
면할 정도로 하니..깡마른 체구에 매처럼 매서운 두 눈으로 쏘아보니 후임들이
마주 하기에 얼마나 힘들었겠느냐.
그래서 송골매, 굶주린 매 같다고 붙은 별명이 수응재상이 된거지.
어떤 사람들은 문경공 허조 선생이 털어도 먼지도 안나오고 바늘로 찔러도 피도
안나올 사람이라고, 남녀간의 일도 모를거라고 하자..
문경공 허조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남녀의 일도 모르면..두 아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웃으며 반박했지.
아들아, 문경공 허조 선생의 진면목은 이게 전부가 아니란다.
문경공 허조 선생이 세종대왕 때 이조판서로만 10여년을 있으면서 남겼던
최고의 유산은 조선의 인사제제를 확립시킨 것이었단다.
인재를 채용할 때 먼저 인사권을 담당한 관리가 간택하고 철저하게 검증을 하지.
경력과 자질부터 심지어 가족관계까지 모두 검증을 해.
다음은 그의 채용에 대해 인사부서 내부에서 치열하게 토론을 거치게 했으며
마지막은 인사부서 외부의 평론을 듣는 것.
간택-평론-중의. 3단계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인사검증 시스템을 만든 사람이
바로 문경공 허조 선생이며,
그렇게 어렵게 얻은 관료를 보호하는 것에도 세심하게 살폈지.
"일을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이 있거든 일을 맡기지 말라"
그의 말씀이다.
아들아, 사람을 제대로 쓰는 것은 나라의 기본을 세우는 것이니..세종대왕이
문경공 허조 선생을 각별히 아꼈던 것이 이해가지 않느냐.
그렇게 그분은 좌의정에 까지 역임하시고 나이 70에 천수를 누리고 운명하셨지.
아들아, 문경공 허조 선생의 유언이 또 대단한 걸작이다.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아도 부끄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 손자가 미칠 바가 아니다.
내 나이 일흔이 지났고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며
성상의 은총을 만나 간언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당 태종 이세민
아들아, 중국인들은 그들의 황금기를 당(唐)나라 때라 말하고 그중에서도 최고는
당 태종 이세민이 다스리던 때라고 말하지. 정관의 치(貞觀의 治)라고.
당 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 599~649)이란 걸출한 군주 옆에는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던 위징(魏徵, 580~643)이란 명신이 있었다.
위징
그렇다면, 조선의 황금기를 열었던 세종대왕에게 당 태종 때의 명신 위징에
해당하는 그런 명신이 누구였겠느냐?
아빠가 보기에 그는 바로 문경공 허조 선생이었다.
보수라는 정치인들이 그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역사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문경공 허조 선생을 보고 그대로 본받으면 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이 보수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모범이 될 사람을 엉뚱한데서 찾고
잘못 배워서 보수라는 가치를 스스로 더럽히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지.
아들아, 그래서 그분들은 정신 좀 차리고, 제대로 좀 보고 배우라고
우리 역사 속 진짜 보수정치인, 문경공 허조 선생의 이야기를 들고 온 것이란다.
보수의 가치도 멋지고 숭고하다.
단, 문경공 허조 선생만큼 능력있고 깨끗하고 품격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아직은..아니다.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