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내려앉을 무렵,
롯지 주인장은 강한 불빛의 랜턴을 들고 숲 곳곳을 비추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가끔 개들이 사납게 짖어대며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곰이 나타났단다."
트레킹 중 간간이 곰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맞닥뜨리니 묘한 기분이 든다.
밤새도록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에 몇 번이나 잠에서 깼다.
"혹시 곰이 롯지를 덮치려는 건 아닐까?"
설마 하다 하다 곰 체험까지 하게 되는 걸까?
다행히도 곰은 히든 엑스트라 역할을 조용히 수행하고 사라진 듯하다.
안나푸르나 지역에는 곰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특히 흰곰(Himalayan brown bear)은 이 지역을 비롯한 히말라야 산맥에 서식하는 대표적인 곰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곰은 보통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숲 속 깊은 곳에서 생활한다.
히말라야 지역의 고산민족들 사이에서는 곰과의 만남에 대한 전설도 많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 전설들 중에는 곰이 신성한 존재로 여겨져 보호자로 등장하기도 하며,
때때로 사람들이 곰을 존경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안나푸르나 지역을 트레킹하는 사람들이 곰을 목격다고 하는데,
대개 사람을 피해 숲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그래도 산 속에서 길을 잃거나 자연의 일부로서 곰을 마주친다면 조심해야 한다.
이제 일정의 마지막 구간이다.
배낭을 메는 얼굴들이 한결 밝다.
“가볍게 오늘의 목적지, 지누단다에 도착하겠다.”라며 여유를 부린다.
가볍게? 지누아의 통곡의 계단과 촘롱의 지옥의 계단은 어쩌고?
그리고 촘롱에서 지누단다로 내려가는 끝없는 계단은?
블랙봉님 표현대로 "말친구" 세 분과 후미를 맡았던 쌍계를 남겨 두고 출발했다.
호기롭게 “가볍게!”를 외치던 몇몇이 오래 지나지 않아 독립 그룹을 결성했다.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안나푸르나 계곡의 풍경을 즐기고, 무리하지 않도록 천천히 걸었다.
시누아의 통곡의 계단 중턱에 오르면, ABC 트레킹에서도 손꼽히는 뷰포인트가 펼쳐진다.
신기하게도 오를 때와는 다르게, 내려올 때 뒤돌아 보는 풍경은 저절로 탄성을 자아낸다.
아마도 몸이 본능적으로 아는 것 아닐까.
이제 마차푸차레를 가까이서 바라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통곡하며 오른다는 끝 없는 계단을 힘겹게 올라 어퍼 시누아와 로우 시누아를 지나면,
이젠 급격히 계곡 아래로 내려간다.
다리를 건너는 순간, 이번 일정의 최대 난제 촘롱 지옥의 계단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제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 것은 오롯이 자신과의 싸움이다.
극한의 무한지경 속에서 카타르시스가 터져 오른다.
“이 힘겨운 과정 뒤에는 잊지못할 추억이 기억속에 깊게 새겨질것이다.
그리고 그리워질 것이다.”
체력이 급속도로 고갈되고, 터질 듯한 허벅지의 통증이 밀려올 무렵, 촘롱 계단 중간에 자리한 사원이 눈앞에 나타난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숨을 돌리는데,
아래쪽에서 딸랑딸랑 종소리를 울리며 포니 서비스를 이용한 일행들이 유연하고, 한가롭고, 태연하게 올라온다.
"아~부럽다."
잘생긴 마부가 앞장선 말 유람단이 여유롭게 지나가고, 우리는 남은 힘을 짜내어 계단을 오른다.
일행들의 표정이 점점 사경을 헤맬 때,
허순자 선생님께서 고수의 경지로 깎아 구입했다는 사과와 포도가 응원품으로 나눠진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달콤한 사과 한 조각, 포도 몇 알을 먹고 다시 힘을 내어 마지막 계단을 오른다.
"허 선생님, 평생 먹어본 그 어떤 과일보다 맛있었어요."
며칠전 죽자사자 올라와서 일행을 두 시간이나 기달리며 허기를 참아야 했던 그 롯지에 다시 배낭을 내려 놓는다.
가까이 보이던 시누아의 롯지들이 아득히 멀게 느껴진다.
서둘러 점심을 먹고, 문 닫은 빵집 주인을 찾아 구해온 애플파이까지 먹고,
이제 지누단다를 향해 자비 없는 내리막 계단을 내려간다.
따뜻한 온천과 편안한 잠자리가 기다리는 에덴 동산으로.
사실, 지누단다의 롯지는 다른 곳의 롯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일정의 마지막 롯지로 고도가 많이 낮아졌다는 것과 긴 여정을 마친다는 점이
작용하여 특별하게 느껴진다.
시누아 계단에서 통곡하고, 촘롱 계단에서 지옥을 맛본 후,
내리막 계단 끝에 마주한 지누단다.
마을 초입부터 꽃들이 가득하고, 예쁘게 채색된 롯지들이 마치 포근한 낙원으로 돌아오는 느낌을 준다.
후미 도착 시간이 늦어져서 저녁 일정이 급해졌다.
롯지에서 20분 정도 걸어 내려가 ABC 트레킹의 완결인 온천을 즐겨야 하고, 어두워지기 전에 올라와 저녁 준비를 해야 한다.
시간이 정말 빠듯하다.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온천물 온도가 내려가 있었다.
살짝 아쉬운 온도.
온천에 출몰하는 원숭이는 어둑어둑해 지는데도 나타나질 않았다.
다시 30여분간 오르막을 올라 롯지에 도착하니 주방팀과 포터팀이 저녁준비에 한창이다.
번듯하게 새로 지은 4층 롯지건물 테라스에 바베큐용 모닥불을 지펴 놓았다.
오늘 저녁은 일정을 마친 일행을 위로하고
일정내내 우리를 도와줬던 가이드와 포터 그리고 주방팀에게 감사의 의미를 전하는 시간.
일명 쫑파티.
통크게 양 한마리를 내신 오영철대표 배를 내밀고 준비 상황을 보고 있다.
다이닝룸에는 모두가 함께 앉을 수 있도록 긴 식탁이 놓였다.
주방팀이 준비된 음식을 세팅하고, 네팔 스태프들은 자리에 앉는다.
여정 내내 수고한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번만큼은 팀원들이 배식과 잔심부름을 맡는다.
여정 내내 "꼴찌"를 면하기 위해 힘쓰셨던 박혜선 선생님의 사회로
간단한 인사와 감사의 말을 나눈다.
그리고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명랑한 저녁시간.
안타깝게도 "포터팀"이 준비했다는 "렛삼삐리리" 공연을 보지 못했다.
"식사시간 다 끝나고 말하면 어쩌자는 거야!"
아마도 네팔 스텝들이 흥겨운 여흥시간을 가고 싶었던 모양.
지누단다는 한국인 트래커들의 성지이다.
거의 모든 팀들이 여정의 종착지인 지누단다에 도착하면 염소(양) 한 마리씩 잡아
한국인의 "먹고죽자"의 정을 네팔 스텝들과 함께 나누고,
Trek을 끝냈다는 성취감으로 네팔스텝과 함께 음주가무로 밤을 새는 전통 아닌 전통을 만들었다.
한국팀이 묵는 롯지는 술이 부족해 옆 롯지에서 술을 빌려다 팔아야 할 정도고
일설에 어느팀은 지누단다 모든 롯지의 술을 동냈다는 얘기있을 정도이다.
안나푸르나 트래킹 열풍이 불던 시절에는 시즌 중엔
지누단다의 모든 롯지들은 거의 매일 번갈아 가며 잔치집 분위기였다고 한다.
지누단다 경제 부흥에 지대한 기여를 한 셈이다.
이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단층으로 된 큰 롯지가 있었다.
디귿(ㄷ) 자 모양의 롯지 건물이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설살과 어우러진 정원을 바라보면, 마치 동화 속 풍경처럼 황홀했다.
밤이면 정원에 나와 침낭을 뒤집어쓰고 은하수를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던,
그때의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곳이다.
지금은 그 롯지를 밀어내고 성채같은 4층 현대식 롯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많이 아쉽긴 하지만 어쩌랴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니.
마실정회동
첫댓글 솔직히 지누단다에서 조금은 아쉬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