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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역학원/입춘(立春)
정의
입춘날 봄이 온 것을 기리어 축하하거나 기원하는 내용을 적은 글. 입춘(立春)은 새해를 상징하는 절기이자 봄을 맞는 날이므로 이날 봄의 형상에 적합한 축하·기원·경계 등의 글을 쓰는데, 이를 입춘축(立春祝)·춘축(春祝)이라 한다. 그리고 종이를 잘라 좋은 글을 쓰고 입춘일에 각 집마다 대문이나 기둥 등에 붙인다고 하여, 입춘첩·춘첩·춘첩자(春帖子)·입춘방(立春榜)·춘방(春榜)·문첩(門帖)이라 하며, 또는 입춘(立春)붙인다고 한다. 그리고 문이나 기둥마다 대구의 글을 지어 붙인다고 하여, 춘련(春聯)·대련(對聯)·문대(門對)라고도 한다.
유래
문첩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중국 황제(黃帝) 때 흉악한 귀신을 쫓기 위해 설날 도부(桃符)에 신도(神荼)와 울루(鬱壘)의 형상을 그려 문에다 걸었다는 것에서, ‘신도울루(神荼鬱壘)’ 넉 자를 써서 붙인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춘련은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입춘에 봄을 맞이하여 봄의 행운을 부른다는 ‘의춘(宜春)’ 두 자를 써서 문에 붙인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편 진운첨(陳雲瞻)의 『잠운루잡화(簪雲樓雜話)』에 의하면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섣달 그믐날 하루 전에 공경대부와 일반 서민들로 하여금 대문 위에 춘련(春聯) 한 폭씩을 붙이라고 한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서 춘첩자는 고려시대부터 보이는데, 『동문선(東文選)』에는 김부식(金富軾)이 쓴 내전(內殿) 춘첩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송나라 서긍(徐兢)이 개경 광화문(廣化門)에 붙여져 있는 “눈 자취 아직도 삼운폐에 있는데(雪痕尙在三雲陛) 햇살이 비로소 오봉루에 오르네(日脚初升五鳳樓) 제후들 잔 올려 축수하니(百辟稱觴千萬壽) 곤룡포 자락에 서광이 어리네(袞龍衣上瑞光浮)”라는 춘첩자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도 어전(御殿)과 태후전(太后殿)의 춘첩자가 있는데, 대체로 장수를 기원하는 5언 또는 7언시이다.
조선시대에도 춘축 또는 춘첩자라고 하여 봄을 축하하는 시를 적고 있으며, 이를 선물로 주고받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지제교(知製敎)로 하여금 5언 절구(絶句)로 짓게 하고, 그 가운데 뛰어난 1수(首)를 택하여 궁문(宮門)에 붙이게 하였으며, 세종 13년에는 춘첩자는 연상시(延祥詩)로 된 입춘을 축하하는 글이라 하여 문소전(文昭殿) 등의 묘문(廟門)에는 붙이지 않게 하였다. 성종대 이후로는 문신(文臣)을 대궐 뜰에 모아 놓고 운(韻)을 나누어 5언·7언 율시(律詩)를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영조 39년에는 춘첩자를 지어 올릴 인원수를 8명으로 정하여, 일년에 세 번 첩자(帖子)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정조 5년에는 입춘 첩자는 송도(頌禱)뿐만 아니라 잠규(箴規)하는 뜻이 깃들어 있다고 하여, 규장각의 제학·직제학·직각·대교는 첩사(帖詞) 두 편씩을 뽑아서 직접 써서 올리게 하였다. 현재 규장각 도서에는 정조대부터 순조대까지 규장각 대신들이 써왔던 춘첩자를 모아 편찬한 3권의 『춘첩자』가 있다.
그리하여 『동국세시기』에 “승정원(承政院)에서는 미리 뽑은 시종신(侍從臣)과 당하(堂下)의 문관들에게 10일 전부터 연상시를 지어 올리게 한다. 이때 홍문관, 예문관과 규장각의 제학에게 운자(韻字)를 내게 하여 5언·7언의 율시, 절구를 짓게 하고 채점하여 합격한 것은 대궐 안의 기둥이나 문설주에 붙이게 한다. 입춘의 춘첩자나 단오의 단오첩도 모두 이와 같다.”고 하여, 춘첩자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작성하여 붙인다고 하였다. 이것은 사마광(司馬光)의 『일록(日錄)』에 “한림원에서 춘사(春詞)를 청하는 명령을 기다려 써두었다가 입춘에 잘라내어 궁중의 문에 붙인다.”고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내용
입춘은 정월의 첫 번째 절기이고, 봄을 알리는 날이기 때문에 신년(新年)으로 여긴다. 그래서 해가 바뀌면 묵은해의 액(厄)을 멀리 보내고 새로운 봄을 맞이하는 입춘축을 써서 문이나 기둥에 붙인다. 입춘축은 태양의 황도(黃道)가 450도에 이르러 입춘점을 지나는 시각에 붙이는데, 사대부집에서는 궁중의 춘첩자와 같이, 새로 시(詩)나 사(詞)를 써서 축하하는 뜻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은 옛사람의 아름다운 글귀를 따다가 쓰기도 한다. 여러 가게에서는 명필가에게 글을 받아서 문 밖 기둥에 붙이기도 한다.
『동국세시기』나 『경도잡지(京都雜志)』 등에 전하는 춘첩으로, ‘문신호령(門神戶靈) 가금불상(呵噤不祥)’, ‘국태민안(國泰民安) 가급인족(家給人足)’, “우순풍조(雨順風調) 시화세풍(時和歲豊)‘ 등의 대구어(對句語)가 있으며, 여염집의 기둥이나 문설주에는 ’수여산(壽如山) 부여해(富如海), ‘거천재(去千災) 래백복(來百福)’,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요지일월(堯之日月) 순지건곤(舜之乾坤)’, ‘애군희도태(愛君希道泰) 우국원연풍(憂國願年豊)’, ‘부모천년수(父母千年壽) 자손만대영(子孫萬代榮)’,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 사방무일사(四方無一事)’, ‘국유풍운경(國有風雲慶) 가무계옥수(家無桂玉愁)’, ‘재종춘설소(災從春雪消) 복축하운흥(福逐夏雲興)’, ‘북당훤초록(北堂萱草綠) 남극수성명(南極壽星明)’, ‘천상삼양근(天上三陽近) 인간오복래(人間五福來)’, ‘계명신세덕(鷄鳴新歲德) 견폐구년재(犬吠舊年災)’,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개문백복래(開門百福來)’, ‘봉명남산월(鳳鳴南山月) 인유북악풍(麟遊北嶽風)’, ‘문영춘하추동복(門迎春夏秋冬福) 호납동서남북재(戶納東西南北財)’, ‘육오배헌남산수(六鰲拜獻南山壽) 구룡재수사해진(九龍載輸四海珍)’, ‘천증세월인증수(天增歲月人增壽) 춘만건곤복만가(春萬乾坤福滿家)’ 등의 대련(對聯)을 많이 쓴다고 하였다. 또한 문이나 문설주에 붙이는 단첩(單帖)에는 ‘춘도문전증부귀(春到門前增富貴)’, ‘춘광선도길인가(春光先到吉人家)’, ‘상유호조상화명(上有好鳥相和鳴)’, ‘일춘화기만문미(一春和氣滿門楣)’, ‘일진고명만제도(一振高名滿帝都)’ 등이 있다고 하였다.
오늘날에도 ‘입춘대길 건양다경’ 같은 입춘첩을 써두었다가 입춘에 책력(冊曆)에 나와 있는 시간에 맞추어 대문이나 기둥 등에 붙인다. 먼저 사당에 가서 입춘이 왔음을 고하는 ‘감고(敢告) ○○년(年) 입춘(立春) ○○월(月) ○○일(日) ○○시(時)’의 입춘축을 붙이고, 이어 집의 구조와 기능에 따라서, 대문에는 ‘입춘대길 건양다경’, 중문에는 ‘문신호령 가금불상’과 ‘신도울루’, 기둥에는 ‘천증세월인증수 춘만건곤복만가’, 아버지 방에는 ‘부주평안(父主平安)’, 어머니 방에는 ‘모주평안(母主平安)’, 곳간에는 ‘의이장지(義以藏之), 절이용지(節以用之)’ 등 각각의 기원문을 써서 붙인다. 상중(喪中)에 있는 집에서 입춘첩을 붙이지 않는다.
유사사례
입춘첩과 유사한 사례로 관상감에서 주사(朱砂)로 벽사문을 써서 대궐 문설주에 붙이거나, 『은중경(恩重經)』의 진언(眞言)을 인쇄하여 문에 붙이기도 하였으며, 공고(公告)의 의미로서 국왕이 내린 별유(別諭)를 입춘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인접국가사례
중국에서는 춘첩으로 제석(除夕)에 ‘하도낙서(河圖洛書)’, ‘신도울루’, ‘인봉구학(麟鳳龜鶴)’ 등의 글을 써서 붙이거나, 정월 초하루에 붉은 종이에다 글을 써서 붙이기도 하며, 상원(上元)에는 춘첩을 훔치는 풍속도 있었다.
참고문헌
東國歲時記, 東文選, 宣和奉使高麗圖經, 成宗實錄, 世宗實錄, 洌陽歲時記, 英祖實錄, 正祖實錄
한국세시풍속자료집성-삼국·고려시대 편 (국립민속박물관, 2003)
한국세시풍속자료집성-신문·잡지 편 1876~1945년 (국립민속박물관, 2003)
입춘굿
정의
제주도에서 입춘에 베풀어지던 굿놀이. 입춘굿을 ‘춘경(春耕)’ 또는 ‘입춘춘경(立春春耕)’이라고 하며, 이 굿을 노는 것을 “춘경(春耕)친다”고 한다.
역사
이 굿은 탐라국 시대부터 탐라왕이 백성들 앞에서 밭을 가는 친경적전(親耕耤田)의 유습(遺習)이 조선조에 왕을 대신하여 호장이 나무소[木牛]를 끌며 농경의 모의적 행위를 실연하고 풍농을 비는 거리굿을 중심으로 한 관민합동의 축제이자, 신년의 풍농굿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이원조(李源祚, 1792~1871)의 『탐라록(耽羅錄)』에 입춘굿에 대한 기록이 있다. 입춘굿은 이원조가 방어사로 제주도에 부임한 헌종 7년(1841)부터 활발하게 전승되다가 미신타파라는 이름 아래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탄압으로 1914년 전승이 단절된 이후에도 입춘굿이 간신히 전승돼 왔다. 20세기 초의 역사서인 김석익(金錫翼, 1885~1956)의 『심재집(心齋集)』에 수록된 「해상일사(海上逸史) 춘경조(春耕條)」에는 이원조의 기록과 거의 유사하게 입춘의 춘경(春耕)에 대한 풍속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쓴 『일본주변민족(日本周邊民族)의 원시종교(原始宗敎)』 「민족학상(民族學上)에서 본 제주도(濟州道)」에 의하면 조선총독부에 부탁하여 이것을 실연시켜 참관하고 그 모습을 보고하고 있다. 이 굿은 춘경(春耕)이라는 무답(舞踏)으로 무당 100여 명이 모여서 했으며, 무언극으로 대사가 없는 일종의 드라마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1914년 외국인 선교사가 촬영한 사진이 현재 남아 있다. 1924년 일제하에서 제주도청(濟州島廳)에서 간행한 『미개(未開)의 보고(寶庫) 제주도(濟州島)』를 살펴보면 “매년(每年) 입춘일(立春日) 목사청(牧使廳)에 모여 동리마다 흑우(黑牛) 한 마리를 바쳐 목사와 도민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함과 동시에 농작물의 풍요를 산신과 해신에게 빌고, 여흥으로 가면극 형태의 고대극과 흡사한 것을 연출한다”라고 하였다. 1936년 김두봉(金斗奉)이 쓴 『제주도실기(濟州島實記)』의 「권농(勸農)하는 춘경풍속(春耕風俗)」이란 글은 『심재집』의 글을 발췌하고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장면을 첨가하여 좀 더 자세하게 입춘굿을 설명하고 있다.
입춘굿은 1914년 축제로서의 전승은 끊겼지만 기록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1998년 탐라국입춘굿놀이란 이름으로 복원돼 전승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입춘굿놀이는 입춘굿의 원형을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둬 전통민속놀이이며 고대부터 전승되는 축제라는 데 무게를 실었다.
내용
입춘은 새 철이 드는 날로 봄의 시작이며, 농부들에게는 한 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날로써 이 날 한 해 농사의 풍등을 기원하는 풍농굿이 행해졌다는 것은 세시풍속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원조의 『탐라록』 「입춘일념운(立春日拈韻)」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二十四日 立春 戶長具官服 執耒耟以木爲牛 兩兒妓左右執扇 謂之退牛 熱羣巫擊鼓前導 先自客舍次入營庭 作耕田樣 其日自本府設饌以饋 是耽羅王籍田遺俗云(12월 24일 입춘날이다. 관복을 갖춰 입을 호장이 나무로 만든 소가 끄는 쟁기를 잡고 가면 양쪽 좌우에 어린 기생이 부채를 흔들며 따른다. 이를 ‘쇠몰이(退牛)’라 한다. 심방들은 신명나게 북을 치며 앞에서 인도하며, 먼저 객사에서 시작하여 차례로 관덕정 마당으로 들어와 밭을 가는 흉내를 내었다. 이날은 본 관아에서 음식을 차려 모두에게 대접하였다. 이것은 탐라왕이 적전하는 풍속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이 기록에 나타난 입춘굿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입춘굿은 탐라왕 때부터 친경적전하던 유풍이며 관아에서 주관한다. 입춘굿놀이의 중요 배역은 목사와 관원, 도황수, 호장, 무격배, 농부, 처, 첩, 동기(童妓)들, 새, 낭쉐[木牛] 등이다. 한 해 농사의 풍등을 점친다(보리 낟가리점). 호장과 심방들이 객사에 나타나 문안 인사를 한다. 모의적 파종의례를 통해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알린다. 새가 날아와 훼방을 놓으면 ‘사바치(사냥꾼)’가 등장해 새[邪]를 쫓는 대목에서부터 입춘탈놀이가 시작된다. 모의적인 농경의례를 행한다. 씨앗싸움(씨할아비가 밭할미를 조정하여 농부는 땅을 고른다)을 한다. 마당굿을 끝내고 관아의 문전제(門前祭)로 들어간다. 문굿을 하여 각 창고의 부정을 막고 풍요를 기원한다. 한 해의 농사를 기원하는 비념을 하면서 굿을 마친다.
그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입춘굿은 하늘에서 내려온 농경신 세경할망을 모셔서 풍년을 기원하는 입춘굿을 하고, 칠성동 송씨 집안의 조상신이 되었다가 관아에 들어와 옥할망(감옥을 수호하는 신)·관청할망(동헌을 수호하는 신)·창할망(창고를 수호하는 신)·과원할망(과수원을 수호하는 신) 등과 제주시 각 집안의 안칠성(고방을 수호하는 신)·밧칠성(뒤뜰을 수호하는 신)이 된 뱀신 부군칠성을 위한 칠성제와 관아 각 건물의 액을 막고 문굿인 문전제를 겸하는 한편 한 해 농사의 풍요를 빌고 제주목 관아의 액을 막는 관민합동의 굿이다. 칠성제에는 반드시 뱀신을 위한 토산당굿과 각 관청지기가 된 뱀신을 대접하고 청마다 액을 막기 위한 액막이굿으로 전상놀이를 하였다.
풍농굿은 농경신 자청비를 맞이하여 세경본풀이를 한 다음 농사가 잘되게 해주십사 기원을 하고, 농사의 전 과정을 연극적으로 보여주는 세경놀이를 하였다. 세경놀이는 모의적인 풍농굿으로서 성적 상징성이 짙은 놀이굿이며, 보리뿌리점을 통하여 한 해의 농사를 점치는 주술성을 지니고 있는 가운데 이 보리뿌리점이 입춘굿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세경놀이가 끝나면 다시 이 모의적인 농경의례를 탈굿놀이로 보여주는 입춘탈굿놀이를 한다. 이 굿놀이에서 사용되는 탈은 영감놀이·전상놀이 등에 쓰는 원초적인 종이탈의 발전적인 형태라 볼 수 있다. 탈놀이의 내용은 세경놀이가 발전한 탈굿으로서 육지부 탈춤의 영향인지 아니면 육지부 탈놀이의 원형인 굿놀이인지 알 수 없지만 탈춤에 등장하는 꿩과 포수, 호장(양반), 할망(처), 기생(첩)의 삼각관계 등이 나타난다.
제주 무속의 놀이굿에서 사용되는 원초적인 종이탈이 무형의 신격을 나타내고 이 종이탈이 발전하여 유형의 인물을 표현한 입춘탈로 변한 것이라면 진주·통영·고성 등지의 탈춤에 나오는 오광대탈은 종이탈이 발전되어 인물의 전형성을 획득하여 이루어진 완성형 탈이고, 이와는 달리 제주 입춘굿의 종이탈은 종이탈과 오광대탈의 과도기적 중간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耽羅錄
心齋集
제주도 실기 (김두봉, 1936)
탐라국 입춘굿놀이 (문무병, 제주전통문화연구소, 2002)
세시풍속立春
정의
24절기 중 첫째 절기로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있는 절기. 보통 양력 2월 4일경에 해당한다. 태양의 황경(黃經)이 315도일 때로 이날부터 봄이 시작된다. 입춘은 음력으로 주로 정월에 드는데, 어떤 해는 정월과 섣달에 거듭 드는 때가 있다. 이럴 경우 ‘재봉춘(再逢春)’이라 한다.
내용
입춘은 새해의 첫째 절기이기 때문에 농경의례와 관련된 행사가 많다. 입춘이 되면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각 가정에서는 기복적인 행사로 입춘축(立春祝)을 대문이나 문설주에 붙인다. 입춘축을 달리 춘축(春祝)·입춘서(立春書)·입춘방(立春榜)·춘방(春榜)이라고도 한다. 입춘축은 글씨를 쓸 줄 아는 사람은 자기가 붙이고, 글씨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은 남에게 부탁하여 써서 붙인다. 입춘이 드는 시각에 맞추어 붙이면 좋다고 하여 밤중에 붙이기도 하지만 상중(喪中)에 있는 집에서는 써 붙이지 않는다. 입춘축을 쓰는 종이는 글자 수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가로 15센티미터 내외, 세로 70센티미터 내외의 한지를 두 장 마련하여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외에 한지를 마름모꼴로 세워 ‘용(龍)’자와 ‘호(虎)’자를 크게 써서 대문에 붙이기도 한다.
입춘축은 대개 정해져 있으며 두루 쓰는 것은 다음과 같이 대구(對句)·대련(對聯)·단첩(單帖, 단구로 된 첩자)으로 되어 있다. 입춘날 붙이는 대구를 보면 ‘국태민안 가급인족(國泰民安 家給人足)’, ‘기주오복 화봉삼축(箕疇五福 華封三祝)’, ‘문신호령 가금불상(門神戶靈 呵噤不祥)’, ‘우순풍조 시화년풍(雨順風調 時和年豊)’ 등이며, 대련을 보면 ‘거천재 내백복(去千災 來百福)’, ‘수여산 부여해(壽如山 富如海)’, ‘요지일월 순지건곤(堯之日月 舜之乾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개문만복래 소지황금출(開門萬福來 掃地黃金出)’, ‘계명신세덕 견폐구년재(鷄鳴新歲德 犬吠舊年災)’ 등이다. 단첩으로는 ‘상유호조상화명(上有好鳥相和鳴)’, ‘일진고명만제도(一振高名滿帝都)’, ‘일춘화기만문미(一春和氣滿門楣)’, ‘춘광선도길인가(春光先到吉人家)’, ‘춘도문전증부귀(春到門前增富貴)’ 등을 붙인다. 입춘축은 붙이는 곳에 따라 내용이 다르다. 큰방 문 위의 벽, 마루의 양쪽 기둥, 부엌의 두 문짝, 곳간의 두 문짝, 외양간의 문짝에 붙이는 입춘축은 각기 다르다.
옛날 대궐에서는 입춘이 되면 내전 기둥과 난관에 문신이 지은 연상시(延祥詩) 중에 좋은 것을 뽑아 연잎과 연꽃 무늬를 그린 종이에 써서 붙였는데, 이를 춘첩자(春帖子)라 하였다. 『경도잡지(京都雜志)』에 의하면, 입춘이 되기 열흘 전에 “승정원에서는 초계문신(抄啓文臣, 당하문관 중에서 문학에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서 다달이 강독·제술의 시험을 보게 하던 사람)과 시종신(侍從臣)에게 궁전의 춘첩자를 지어 올리게 하는데, 패(牌)로써 제학(提學)을 불러 운(韻)자를 내고 채점하도록 한다.” 하였다. 춘련을 써서 붙이게 된 유래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입춘날에는 의춘(宜春) 두 자를 써서 문에다 붙인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춘련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입춘날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주사(朱砂)로 벽사문(辟邪文)을 써서 대궐 안으로 올리면 대궐 안에서는 그것을 문설주에 붙이는데, 이를 입춘부(立春符)라 한다. 입춘부의 글 내용은 후한(後漢) 때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에 진자(侲子, 아이 초라니)가 화답하던 말이니, 곧 “갑작은 흉한 것을 잡아먹고 필위는 호랑이를 잡아먹고 웅백은 귀신을 잡아먹고 등간은 상서롭지 못한 것을 잡아먹고 남제는 재앙[咎]을 잡아먹고 백기는 꿈을 잡아먹고 강양과 조명은 함께 책사와 기생을 잡아먹고 위수는 관을 잡아먹고 착단은 큰 것을 잡아먹고 궁기와 등근은 함께 뱃속 벌레를 잡아먹는다. 대저 열두 신을 부려 흉악한 악귀들을 내쫓고 너의 몸을 으르고 너의 간과 뼈를 빼앗고 너의 살을 도려내고 너의 폐장을 꺼내게 할 것이니, 네가 빨리 달아나지 않으면 열두 신들의 밥이 되리라. 빨리 빨리 법대로 하렸다(甲作食凶 胇胃食虎 雄伯食魅 騰簡食不祥 覽諸食咎 伯奇食夢 强梁祖明共食磔死寄生 委隨食觀 錯斷食巨 窮奇騰根共食蠱 凡使十二神 追惡鬼凶 赫汝軀 拉汝肝節 解汝肌肉 抽汝肺腸 汝不急去 後者爲粮 急急如律令).”이다.
의례
입춘은 새해에 드는 첫 절후이므로 궁중과 지방에서 여러 의례를 베풀었다.
① 입춘하례(立春賀禮): 『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 입춘하의조(立春賀儀條)에 의하면, “인일(人日)의 축하 예식과 동일하나 다만 입춘에는 춘번자(春幡子)를 받는다.”고 하였다. 입춘날에 백관이 대전에 가서 입춘절을 축하하면 임금이 그들에게 춘번자를 주고, 이날 하루 관리에게는 휴가를 주었다.
② 토우를 내는 일(出土牛事): 『예기(禮記)』에 의하면 계동(季冬)에 궁중의 역귀를 쫓는 행사인 대나의(大儺儀) 때 “토우를 만들어 문 밖에 내놓아 겨울의 추운 기운을 보낸다(出土牛以送寒氣).”고 하였는데, 고려 때는 입춘에 토우를 내는 일이 시행되었다.
③ 목우(木牛): 함경도에서는 입춘날 나무로 만든 소를 관청으로부터 민가의 마을까지 끌고 나와 돌아다니는 의례를 갖는데, 이는 흙으로 소를 만들어 겨울의 추운 기운을 내보내는 중국의 옛 제도를 모방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행한다고 하였다.
④ 입춘굿: 제주도에서는 입춘날 굿놀이를 행하는데, 이 놀이는 농경의례에 속한다. 해마다 입춘 전날에 무당들이 주사(州司)에 모여 나무로 만든 소에게 제사를 지내고, 입춘날 아침에는머리에 월계수 꽃을 꽂고 흑단령 의복을 차려 입은 호장(戶長)이 나무소에 농기구를 갖추어 나와 무격들로 하여금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앞장서서 호위하여 대오를 인도하게 하며 큰 징과 북을 치며 행진하여 관덕정 앞마당에 이르면 호장은 무격들을 나누어 여염집에 들어가서 쌓아둔 보릿단을 뽑아오게 하여 뽑아온 보릿단으로 실(實)·부실(不實)을 판단하여 새해의 풍흉을 점친다. 또 돌아서 객사에 이르면 문 밖에 있던 호장은 쟁기를 잡고 밭을 간다. 또한 아주 크고 붉은 가면에 긴 수염을 달아 농부로 차린 한 사람이 등장하여 오곡의 씨를 뿌린다. 이어서 초라니 광대처럼 채색한 새 탈을 쓴 다른 한 사람이 등장하여 곡식을 주워 쪼아 먹는 시늉을 한다. 또 두 사람이 여자 배우의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처첩이 투기하여 서로 다투는 장면을 남편인 듯한 탈을 쓴 광대가 등장하여 거짓으로 서로 말리는 양하면 관중은 모두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이러한 장면은 꼭두각시놀음과 비슷하다. 이어 무격들이 한 떼를 이루어 어지럽게 춤을 추며 신을 놀리는 등 태평을 즐긴다. 동헌에 돌아와서도 그와 같이 한다. 이는 대개 탐라왕이 몸소 백성들 앞에서 밭을 갈아 풍년을 기원하던 유습이 전해 내려온 것이라 한다.
점복 및 속신
입춘날 입춘시에 입춘축을 붙이면 “굿 한 번 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여 입춘축이 벽사로 붙여짐을 알 수 있다. 전북에서는 입춘축 붙이는 것을 “춘련(春聯)붙인다.” 하고, 이를 붙이면 “봉사들이 독경하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또 써 붙이지 않고 그냥 글귀를 외워도 좋다고 한다. 전남 구례에서는 입춘축 붙이는 것을 ‘방악(防惡)한다.’ 또는 ‘잡귀야 달아나라.’고 써 붙인다고 한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보리뿌리점[麥根占]이라 하여 농가에서는 입춘날 보리뿌리를 캐어보아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데, 보리뿌리가 세 가닥 이상이면 풍년이고, 두 가닥이면 평년이고, 한 가닥이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입춘날 보리뿌리를 보아 뿌리가 많이 돋아나 있으면 풍년이 들고 적게 돋아나 있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경기도 시흥·여주, 인천에서는 입춘 때 보리뿌리를 캐어 보리의 중간뿌리[中根]가 다섯 뿌리 이상 내렸으면 풍년이 들고, 다섯 뿌리에 차지 못하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전남 구례군 마산면 마산리에서는 입춘 때 보리뿌리를 뽑아 살강 뒤에 놓아두면 보리뿌리가 자라는데, 보리뿌리가 많이 나면 길하고 적게 나면 그해 보리가 안 된다고 한다. 충남에서는 입춘날 오곡의 씨앗을 솥에 넣고 볶아, 맨 먼저 솥 밖으로 튀어나오는 곡식이 그해 풍작이 된다고 하고, 제주도에서는 입춘날 집안과 마룻바닥을 깨끗이 청소한 뒤 체를 엎어두었다가 몇 시간 뒤에 들어보면 어떤 곡식이 한 알 나오는데, 거기에서 나온 곡식이 그해에 풍년들 곡식이라 한다. 입춘날 날씨가 맑고 바람이 없으면, 그해 풍년이 들고 병이 없으며 생활이 안정되나, 눈이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입춘날에 눈보라가 치는 등 날씨가 나쁘면 ‘입춘치’라 한다. ‘치’는 접미사로 보름·그믐·조금 또는 일진의 진사(辰巳)·술해(戌亥) 같은 것에 붙여 그 날 무렵에 날씨의 나빠짐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뜻한 봄을 맞이하는 첫날인 입춘에 이러한 입춘치가 있는 것을 농사에는 나쁘다고 생각하였다. 전남 무안에서는 “입춘날 눈이 오면 그해 며루가 쓰인다.”고 하여, 그해 여름 벼농사에 며루(자방충)가 많이 생겨 해농(害農)한다 하고, 제주도에서는 입춘날 바람이 불면 그해 내내 바람이 많고 밭농사도 나쁘다고 한다. 또 입춘날 입춘축을 써서 사방에 붙이면 그해 만사가 대길하나, 이날 망치질을 하면 불운이 닥친다고 한다. 제주도에서는 입춘날 여인이 남의 집에 가면 그 집의 논밭에 잡초가 무성하게 된다는 믿음이 있어 특히 조심한다. 또 이날 집안 물건을 누구에게도 내주는 일이 없는데, 만일 집 밖으로 내보내면 그해 내내 재물이 밖으로 나가게만 된다고 한다. 전남 구례에서는 입춘날 절에 가서 삼재(三災)풀이를 하는데, 삼재를 당한 사람의 속옷에 ‘삼재팔난(三災八難)’이라 쓰고 부처님 앞에 빌고 난 후 속옷을 가져다가 불에 태운다. 경남 창녕군 영산에서는 이날 새알심을 넣지 않은 팥죽을 끓여 먹고 집안 곳곳에 뿌려 벽사(辟邪)를 한다. 충청도에서는 이날 보리뿌리가 내리기 때문에 보리밥을 먹어야 좋다고 하여 보리밥을 해 먹으며, 전남 무안에서는 입춘이 일년에 두 번 들면 소금 시세가 좋다고 한다. 함남 북청에서는 이날 무를 먹으면 늙지 않는다고 하여 무를 먹고, 잡곡밥은 먹지 않고 흰쌀밥을 먹으며, 이날은 나이 먹는 날이라 해서 명태순대를 해 먹는다. 함남 홍원에서는 이날 남자들이 명태를 통째로 쪄서 먹으면 등심이 난다고 해 먹는다.
절식
입춘날 입춘절식이라 하여 궁중에서는 오신반(五辛盤)을 수라상에 얹고, 민가에서는 세생채(細生菜)를 만들어 먹으며, 함경도에서는 민간에서 명태순대를 만들어 먹는다. 『경도잡지』와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경기도 산골지방(畿峽)의 육읍[양근(楊根), 지평(砥平), 포천(抱川), 가평(加平), 삭녕(朔寧), 연천(漣川)]에서는 총아(葱芽, 움파)·산개(山芥, 멧갓)·신감채(辛甘菜, 승검초) 등 햇나물을 눈 밑에서 캐내어 임금께 진상한다. 궁중에서는 이것으로 오신반(다섯 가지의 자극성이 있는 나물로 만든 음식)을 장만하여 수라상에 올렸다. 오신반은 겨자와 함께 무치는 생채요리로 엄동(嚴冬)을 지내는 동안 결핍되었던 신선한 채소의 맛을 보게 한 것이다. 또 이것을 본떠 민간에서는 입춘날 눈 밑에 돋아난 햇나물을 뜯어다가 무쳐서 입춘 절식으로 먹는 풍속이 생겨났으며, 춘일 춘반(春盤)의 세생채라 하여 파·겨자·당귀의 어린 싹으로 입춘채(立春菜)를 만들어 이웃간에 나눠먹는 풍속도 있었다.
구비전승
대한을 지나 입춘 무렵에 큰 추위가 있으면, “입춘에 오줌독(장독·김칫독) 깨진다.” 또는 “입춘 추위에 김칫독 얼어 터진다.”라 하고, 입춘이 지난 뒤에 날씨가 몹시 추워졌을 때에는 “입춘을 거꾸로 붙였나.”라고 말한다. 입춘 무렵에 추위가 반드시 있다는 뜻으로 “입춘 추위는 꿔다 해도 한다.”는 말이 생겼고, 격(格)에 맞지 않는 일을 엉뚱하게 하면 “가게 기둥에 입춘이랴(假家柱立春).”고 한다.
의의
입춘은 24절기 가운데 첫 절기로, 이날부터 새해의 봄이 시작된다. 따라서 이날을 기리고, 닥쳐오는 일년 동안 대길(大吉)·다경(多慶)하기를 기원하는 갖가지 의례를 베푸는 풍속이 옛날에는 있었으나, 근래에는 더러 입춘축만 붙이는 가정이 있을 뿐, 그 절일(節日)로서는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京都雜志, 高麗史, 東國歲時記, 歲時風謠, 呂氏春秋, 洌陽歲時記, 禮記
韓國民俗綜合調査報告書 (文化財管理局, 1969~1981)
韓國歲時風俗硏究 (任東權, 集文堂, 1985)
韓國의 歲時風俗Ⅰ (국립민속박물관, 1997)
韓國의 歲時風俗Ⅱ (국립민속박물관, 1998)
함경도의 민속 (전경욱,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9)
탐라국입춘굿놀이 (문무병, 제주전통문화연구소, 2000)
한국의 벽사의례와 연희문화 (황경숙, 月印,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