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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심 -
우리의 영은 직감과 교통 외에 또 하나의 큰 기능을 가지고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할 때에 불안하도록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고 우리를 책망하는 그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양심이다. 하나님의 성결이 죄를 미워하고 선을 좋아하듯이 믿는 이의 양심도 더러운 것을 책망하고 선한 것을 사모하고 추구한다. 믿는 이의 양심은 하나님의 성결이 표현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영을 좇아 행하고자 한다며 양심이 우리에게 한 말을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든 간에 잘못이 없을 수가 없고 잘못으로 기울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양심의 기능은 우리가 잘못을 범한 후에야 회개하도록 우리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된 양심의 기능은 완전치 않은 것이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 어떤 길을 고려하거나 성령께서 싫어하시는 방면을 생각할 때에, 양심은 즉시 직감과 더불어 항의를 제기하고 즉시 불안을 느끼게 한댜. 만일 믿는 이가 직감에 의해 양심의 음성을 듣는다면 믿는 이는 오늘날과 같은 실패는 하지 않게 될 것이다.
- 양심과 구원 -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의 영이 완전히 죽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양심도 죽고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양심이 아무 쓸모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죄인의 양심도 여전히 작용한다. 단지 그들의 양심은 잠자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양심이 깨어날 때에 그 양심은 사람을 정죄할 뿐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비록 사람의 양심이 하나님에 대해 죽어 있지만 그분은 양심이 여전히 사람의 마음속에서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죽은 영 안에서 양심이 다른 것보다 더 일하는 듯하다. 직감과 교통이 죽은 것은 양심보다 더 심각한 것 같다. 물론 이렇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음으로써 그의 직감과 교통이 완전히 죽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것인 반면에, 선악을 분별하는(양심) 능력은 강화되었다. 그러므로 오늘 죄인은 하나님에 대한 직감과 하나님과의 교통에 있어서 흔적을 찾아 보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죽었지만 사람의 양심은 여전히 약간 활동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양심이 살아 있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에 따르면 ‘살아 있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생명이 있게 됨을 말하므로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것은 다 죽은 것이다. 죄인의 양심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성경에서 볼 때 그 양심은 죽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느낌에 따라 말한다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이 양심의 활동은 직감이 죽은 죄인에게 배나 더 고통을 느끼게 한다.
양심이 여전히 활동하기 때문에 성령은 먼저 잠자고 있는 양심을 깨우는 일로 구원의 일을 시작한다. 그분은 시온산의 천둥과 번개로 그 양심을 감동시키고 진동케 하며, 그 어두워진 양심을 비추사 그가 이미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의 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 양심은 마땅히 정죄받고 멸망 당해야 한다. 만일 양심이 죄를 시인하고 믿지 아니하는 죄를 시인한다면 자신을 원망하며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게 될 것이다.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던 세리가 성령의 이런 일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의 첫 단계 일, 바로 사람으로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스스로 책망하게 하신다는 말씀(요 16:8)이다. 이러한 일을 거절하는 죄인은 영영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
성령은 하나님의 율법의 빛을 죄인의 양심에 비춤으로 그로 죄를 알게 하고, 또한 복음의 빛을 사람의 양심에 비춤으로 그로 구원을 받게 한다. 죄인이 죄를 깨닫고 하나님이 은혜의 복음을 들은 후에 그가 기꺼이 영접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영접할 믿음도 주신다. 그럴 때에 그는 주 예수님의 보혈이 양심의 모든 참소에 응하는 것을 보게 된다. 죄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주 예수님이 이미 피를 흘리심으로 죄로 인해 받아야 할 형벌을 다 감당 하셨는데 또 무슨 참소가 있는가? 주 예수님의 피는 믿는 이의 일생의 모든 죄를 속량했기 때문에 양심이 더 이상 믿는 이들을 참소 할 수 없게 되었다.
섬기는 자들이 한번 깨끗함을 받은 다음에야 다시 죄의식이 없게 된다(히 10:2). 주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우리의 양심에 뿌려졌다(히 9:14). 구원의 확신은 양심의 소리가 보혈에 의해 잠잠하게 된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만일 보혈을 믿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의 양심은 거듭나기 전에 우리가 범한 그 많은 죄들을 다시 참소할 것이다.
이로 보건대 율법의 엄격한 빛이든 복음의 사랑스런 빛이든지 이것들은 모두 양심 안에 비추는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에 사람들의 양심을 주의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우리의 목적이 사람의 생각을 이해시키고 감정에 자극을 주며, 의지에 결심을 낳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메시지는 사람의 양심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설사 그들이 우리가 전한 것을 이해하고 자극을 받으며 결심했다 하더라도, 양심 안에서 죄를 확실히 깨닫지 못했다면, 성령은 결코 그들이 보혈로 인해 사함받고 거듭나도록 더 깊은 일을 하지 못한다. 우리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반드시 보혈과 영심을 균형있게 주의해야 한다. 영심만 주의하고 보혈을 주의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회개하고 선을 행하며 이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어떤 사람은 보혈을 주의하고 양심에 대해 말하지 않으므로, 결국 사람의 생각이 무언가를 이해하고 자극을 받으며 결심한다 할지라도 그의 ‘믿음’은 뿌리가 없다. 왜냐하면 양심이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양자에 대해 균형잡힌 전파가 필요하다.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 사람은 보혈의 의미를 받아들여야 한다.
- 양심과 교통 -
여기서 우리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직감적인 교통과(예배)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4). 만일 믿는 이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을 섬기려 한다면 먼저 그의 양심이 보혈로 정결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믿는 이의 양심이 주님의 피로 정결케 되었다면 그가 거듭 났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따른다면 바로 정결케 됨과 영의 거듭남은 동시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믿는 이가 새 생명을 영접하고 직감이 살아나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우리 양심이 피의 씻음을 받을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또한 이 말씀을 우리가 영 안의 직감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능한 이유가 다름이 아닌 양심이 먼저 피의 씻음을 받았기 때문임을 말해 준다. 양심과 직감과의 관계는 나눌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22절은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말한다. 이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단어는 구약의 사람들처럼 몸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의 지성소(19절)가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생각과 감정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닌데, 이것은 바로 우리의 혼에 속한 부분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오직 거듭난 영만 할 수 있다. 믿는 이는 그의 살아난 직감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한다. 이에 대해 전에 우리가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이 성경 구절은 직감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의 기초가 양심의 악을 씻는 것에 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다름이 아닌 양심에 거리낌을 느낄 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양심에 거리낌이 있을 때에 믿는 이는 즉시 스스로 송사를 받고, 양심과 긴밀히 연결된 직감은 즉시 영향을 받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오지 못하게 된다. 또한 믿는 이가 하나님과 교통할 때에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은 불가결한 것이다. 양심에 거리낌이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도 억지로 나오게 되고 참 마음으로 나오지 못한다. 이로 인해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어떤 것도 자기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믿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자기 참소와 의심이 그를 억눌러서 하나님과 자유로운 교통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믿는 이는 자기 양심에 어떤 참소도 없어야 하고 자기 죄가 주의 피로 속량받았으며 어떤 것도 그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롬 8:33-34). 양심에 작은 거리낌도 직감의 교통을 억누르고 저지하며 멈추게 한다. 믿는 이가 죄의식이 있을 때에 영의 모든 능력은 그 죄를 배제하는 데 힘을 기울이기 때문에 다른 곳, 곧 하늘로 향할 힘이 없게 된다.
- 믿는 이의 양심 -
믿는 이의 영이 거듭난 후에 그의 양심은 살아나게 된다. 주 예수의 보혈은 양심을 씻어 정결케 하여, 성령의 뜻을 좇아 일할 수 있도록 가장 예민한 느낌을 갖게 한다. 사람 속에서 성령께서 행하신 거룩하게 하고 새롭게 하는 일과 양심에 하신 일은 서로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다. 믿는 이가 성령으로 충만하고 거룩하게 되며, 그의 생명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고 온전히 영을 좇아 행할 수 있으려면, 양심의 음성을 듣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믿는 이가 양심이 마땅히 얻어야 할 지위를 양심에게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녕 육체를 좇아 행하는 위치에 떨어지게 된다. 충실히 양심을 따라 처리하는 것이 거룩하게 되는 첫 단계의 일이다. 양심을 좇아 사는 것이 영적인 것의 참된 표시이다. 만일 육에 속한 믿는 이가 양심의 철저한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영적인 영역에 들어서지 못하게 된다. 사람들과 자기 자신이 영적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의 영성은 기초가 없는 영성이다. 죄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은 모든 것과 성도에게 합당치 않은 모든 것에 있어서 양심의 음성을 좇아 행하지 않았다면, 그 영성의 기초는 잘못 세워진 것이므로 그 위에 아무리 많은 영적인 사상을 세운다 해도 다 무너지게 마련이다.
양심의 작용은 우리가 사람과 하나님에 대해 합당한지, 우리가 행하고 생각하며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고 그리스도를 거스른 것이 아닌지를 물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진보할 때에 양심의 간증과 성령께서 하신 간증은 거의 일치된다. 양심이 온전히 성령의 통제를 받을 때에 양심은 날로 예민해져서 성령께서 발한 소리에 메아리치게 된다. 또한 성령은 양심을 통해 믿는 이에게 말씀하신다. 사도가 말한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롬 9:1)는 바로 이런 뜻이다.
만일 우리의 양심이 우리가 틀렸다고 말한다면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우리는 틀린 것이다. 만일 양심이 우리의 죄를 정했다면 우리는 즉시 회개해야 한다. 결코 어떤 것으로 가리거나 뇌물을 주고 양심을 사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요일 3:20). 양심의 책망은 우리에게 잘못이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 양심이 정죄한 것은 하나님도 반드시 우리를 정죄하신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우리의 양심의 기준보다 더 낮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양심이 우리에게 우리가 틀렸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틀린 것이다.
우리가 틀렸다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일 그 일을 아직 진행하지 않았다면 멈추면 된다. 만일 일이 이미 진행되었다면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며 보혈의 씻음을 구해야 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의 믿는 이들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심에 책망이 있을 때 사람들은 책망의 소리가 다시 나지 않게 하려고, 자기 양심을 뇌물로 매수하려 하고 양심과 화해하려 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믿는 이는 자주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첫째는 양심에 이유를 댐으로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시킨다. 그는 이유를 말해서 통과될 수 있는 일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기 때문에 양심을 진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양심은 직감과 같이 이유를 듣지 않고 직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임을 그는 모른다. 무릇 하나님의 뜻이 아닌 모든 것은 양심은 정죄한다. 양심은 이유를 묻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대표하여 말을 한다. 믿는 이가 좇아 행해야 할 것은 이유가 아니다. 일리가 있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믿는 이가 좇아 행해야 할 직감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다. 언제든지 양심이 직감의 감동을 거스를 때에 양심은 정죄의 소리를 발한다. 이유로 합리화시키는 것이 생각을 설득시킬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양심을 설득시킬 수는 없다. 양심이 정죄하는 것을 제하지 않는 한, 결코 합리적인 것으로 양심의 정죄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 초기에 양심은 옳고 그름에 대해 증언할 뿐이다. 그러나 믿는 이의 영적 생명이 자랄 때에 옳고 그름의 증언을 할 뿐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어떤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았는지를 증언한다. 사람의 시야에서 볼 때 아주 좋게 보이는 많은 일들이 있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계시가 하나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는 이의 능동적인 것에 의한 것이라면 양심은 여전히 책망한다.
또 한 가지는 믿는 이가 다른 많은 일을 하여 양심을 달래는 것이다. 한 면에서 믿는 이는 양심의 음성을 순종하지 않고, 양심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면에서 그는 그를 불안하게 하고 비참한 느낌이 들게 하는 양심의 정죄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많은 선한 일을 해서 부족함을 보완하려고 한다. 그는 선한 일로 하나님의 뜻을 대치하려고 한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현재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과 똑같이 좋은 것이고,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보다 더 좋고 선하며, 그 범위가 광대하고 그 이익은 더 많고, 용도와 영향력도 더 크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일이 아주 좋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그런 일을 임의로 행하고 평가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들은 조금도 영적인 가치가 없다. 문제는 기름진 것이 얼마나 있고 번제를 얼마나 드렸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얼마나 순종했느냐의 문제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 안에서 어떤 것을 제하라고 계시하셨다면 당신의 동기가 아무리 선하고 소와 양이 아무리 기름지며 금과 은이 아무리 무겁다 하더라도, 이것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에 당신의 일이 어떠하든 하나님은 당신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보다 몇 배나 더 나은 헌신도 양심의 소리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 양심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할 뿐 그 분을 굉장하게 섬기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속이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영을 좇아 행하려면 우리는 양심의 지시하심을 들어야 한다. 우리 '속의 책망'으로부터 도피하지 말고 그것을 유심히 들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항상 영을 좇아 행하려면 양심의 교정을 듣기 위해 겸손히 엎드리지 않을 수 없다. 믿는 이는 결코 자기 자신의 잘못이 명확하게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생각해서 일반적으로 자백해서는 안 된다. 희미하게 죄를 자백하는 것은 양심에게 온전히 일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믿는 이는 성령께 양심을 통해 자기 죄를 일일이 알려 달라고 구해야 한다. 믿는 이는 마땅히 겸손하고 잠잠하며 순종하여, 우리의 낱낱이 양심의 책망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며, 하나님에게서 어긋난 모든 것을 제해버려야 한다. 당신은 양심이 당신의 생명을 점검하게 할 담력이 있는가? 당신은 당신 일생의 모든 실제적인 상태에 대해 양심의 알려 주심을 받을 담력이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모든 생활과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양심이 당신 앞에 놓이기를 원하는가? 양심이 당신의 모든 죄를 해부하기를 원하는가? 만일 당신에게 담력이 없고 원함도 없고 오히려 당신 마음속에 뒷걸음질과 두려움이 있다면, 이것은 당신의 생명 안에 여전히 정죄받고 십자가에 맡겨야 할 많은 것들이 있으나 그것들을 준행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당신이 많은 일에서 완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온전히 영을 좇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당신과 당신의 하나님 사이에 아직 완전한 교통이 없고 많은 방해 요소가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므로 당신은 하나님께 “당신과 나 사이에는 아무 간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아무 조건과 제한 없이 당신이 양심의 책망을 받아들이고 온전히 그 계시를 행하기 원하는가는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헌신이 온전한지, 우리가 진심으로 죄를 미워하는지, 성실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는지를 나타낸다.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순종하고 영을 좇아 행하며 참되게 하나님을 가쁘게 해 드리려는 때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이 우리의 이러한 갈망이 진실이고 완전하며 결함이 없는지를 시험할 때이다. 만일 우리가 죄에 매이고 아직 완전히 죄에 대해 끊어버리지 않았다면 우리의 모든 신령함은 거의가 거짓일 것이다. 만일 믿는 이가 온전히 양심을 좇아 행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그가 온전히 영을 좇아 행할수 없음을 말해 준다. 양심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환상적인 영’의 인도를 받을 수 있을 뿐이고, 실재의 영은 여전히 그에게 양심의 소리를 들으라고 계속 요구할 것이다. 만일 믿는 이가 자신을 살필 때 거리낌이 있는데도,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심판을 받지 않고 회개하여 처리하지 않는다면, 그의 영적 생명은 참된 진보를 갖지 못할 것이다. 믿는 이의 헌신과 그의 일의 허실(虛實)은 그가 온전히 주께 순종하는가 - 주님의 명령과 책망을 순종하는가 - 를 보면 알 수 있댜.
양심의 작용을 받아 들인 후에 믿는 이는 결코 그 단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한 가지 죄를 처리했다면 다른 죄를 처리해야 한다. 한 단계씩 전진하여 모든 죄들을 깨끗이 처리해야 한다. 만일 믿는 이가 성실하게 자신의 죄를 처리하고 양심을 좇아 행한다면 하늘의 빛 비춤은 그의 양심 안에서 날이 갈수록 그를 더 드러내고, 전에 주의하지 못했던 죄를 발견하게 하며,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새기신 율법을 날이 갈수록 더 이해하고 그것을 읽고 알게 하신다. 이렇게 함으로써 믿는 이는 성결이 무엇이고 공의가 무엇이며, 청결함이 무엇이며 정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과거에 이것들에 대하여 아주 희미하였으나 이제는 마음 깊이 새기게 되었다. 이것은 직감에 큰 도움을 주고 직감의 예민도를 더하여 성령의 뜻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믿는 이는 양심의 책망이 있을 때 마땅히 하나님께 “제가 순종하기 원합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새롭게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삼아야 한다. 마땅히 가르침을 받으며 성령의 가르치심을 의지해야 한다. 만일 믿는 이가 성실하게 양심을 좇는다면 성령은 반드시 도울 것이다.
양심은 믿는 이의 영의 창문이다. 하늘의 빛이 바로 이곳을 통해 비친다. 그러므로 믿는 이의 영과 하늘의 빛을 보는 곳도 바로 이 부분에서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며 행하는 바라 잘못되고 성도의 체통에 합당히 행하지 않을 때, 하늘의 빛은 양심 안에서 빛을 비추사 우리의 과실을 드러내시고 우리의 실패를 정죄한다. 만일 우리가 양심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고 양심의 소리에 순종하며 양심이 정죄하는 바를 제해 버렸다면, 다음에는 하늘의 빛이 더욱 밝게 비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죄들을 제해 버리지 않는다면 죄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며 양심은 더럽혀질 것이다(딛 1:15). 이는 그가 하나님의 빛의 가르침대로 좇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루하루 죄가 희미하게 보인다. 믿는 이가 임의로 죄를 범하고도 괴로워하지 않고, 양심이 억압을 당하며 직감이 죄로 마비될 때에 이 빛은 우리를 비추기 어렵다. 믿는 이는 영적일수록 그 양심이 더욱 예민해진다. 결코 죄를 자복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영적인 믿는 이가 없다. 양심이 죄를 자복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영적인 믿는 이가 없다. 양심이 둔해져 아무런 감각이 없을 정도가 된 사람의 영성은 분명 타락한 것이다. 위대한 지식과 부지런한 수고와 감정적인 흥분과 의지의 강인함도 양심의 예민함을 대치할 수 없다. 만일 믿는 이가 자신의 양심을 주의하지 않고 생각과 감정의 진보를 추구한다면 영성의 노정에서 그는 뒤로 후퇴한 것이다.
예민도에 있어서 양심의 느낌은 증가할 수도 있고 감퇴할 수도 있다. 만일 믿는 이가 양심에게 일할 여지를 남겨 둔다면 그의 양심의 창문은 더욱더 밝아질 것이다. 만일 그가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거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여러 가지 이유와 다른 일로 양심이 요구하는 것을 대치한다면 여러 가지 이유와 다른 일로 양심이 요구하는 것을 대치한다면 양심은 계속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아마 열 번 정도 말을 한 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소리는 갈수록 적어지고 결국에는 아무 소리도 없게 된다. 믿는 이가 한번 자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을 때 그의 영적 생명은 한 번 상처를 입게 된다. 만일 항상 이렇게 영적 생명에 상처를 입힌다면 믿는 이는 완전히 육에 속한 위치에 떨어질 것이다. 전에 죄를 미워하고 승리하고자 했던 마음이 이제는 다 사라져 버렸다. 만일 우리가 양심의 책망에 얼굴을 돌린다면 우리는 영을 좇아 행하는 일에서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게 될 것이다.
- 거리낌이 없는 양심 -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 23:1) 고 말한다. 이것이 바울의 생명의 비결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양심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양심을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양심을 말한다. 사도가 담대히 전진하고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거듭난 양심이 그를 책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행위는 모두 양심을 따랐다. 그는 양심이 책망한 일을 한 적이 없고 또한 양심이 그의 몸에 정죄한 일을 한 가지도 남겨 둔 적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나 사람에게 그는 담대함이 있었다. 언제든지 양심에 거리낌이 있을 때 우리는 두려워하고 담대함을 잃을 것이다. 사도는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행 24:16) 고 말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1-22). 믿는 이는 자신의 양심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영을 좇아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에 거리낌이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지 못하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지 못할 때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통은 즉각 간격이 생기게 된다. 양심의 거리낌은 직감에서의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장 방해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명령을 좇지 않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위축되며 우리가 구하는 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오직 ‘청결한 마음’으로라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딤후 1:3).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이 구절은 양심의 증거에 대해 말한다. 오직 거리낌이 없는 양심만이 믿는 이를 위해 증언할 수 있다. 사람의 증언이 좋기는 좋으나 그 사람의 증언이 더욱 보배로운 것이다. 사도는 이것을 자랑한다고 말한다. 영을 좇아 행하는 노정에서 우리는 이 양심의 증언을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셨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틀릴 수 있다. 당시 사도가 믿는 이에게 오해받고 잘못 인식된 것같이 디른 사람들이 우리를 오해하고 잘못 볼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를 과대평가하여 우리를 자랑하고 사모할 것이다. 또 많은 때에 사람들은 우리가 주를 따르는 것으로 인해 우리가 실제로 주님께 순종하고 있을지라도 우리를 비평할 것이다. 어떤 때에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본 것으로 인해 우리를 과대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많은 때에 일시적인 감정이나 사상에 지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외부의 비평이나 칭찬은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 오직 우리 자신의 부활한 양심으로 한 증언만이 계수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양심이 어떻게 우리를 위해 증언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양심이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말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양심은 우리를 외식하는 사람으로 정죄하지는 않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성실함으로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가? 우리의 양심은 우리가 얻은 빛을 좇아 행하고 있다고 말하는가?
바울의 양심은 그를 위해 어떤 증언을 했는가? 그의 양심은 바울이 “세상에서 … 육체의 지혜로 행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는 것을 증거한다. 사실 양심의 증언은 오직 이 한가지이다. 양심이 다투고 견지하는 것은 믿는 이가 사람의 총명을 의지해 살지 않고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총명은 하나님의 뜻과 일에 있어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 믿는 이의 영적 생활에서도 인간의 총명은 아무 쓸모가 없다. 하나님과의 교통 방면에서도 사람의 생각은 아무런 용도가 없다. 사람이 믈질적인 세계와 왕래할 때에도 생각은 부수적인 위치에 처해 있다. 이 세상을 살 때에 믿는 이는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한다. 은혜란 바로 온전히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하고 사람이 일하지 않는 것이다(롬 11:6). 오직 믿는 이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해 살고 자신이 능동적으로 하지 않으며, 사람의 사상이 자기를 다스리게 하지 않을 때에 그의 양심은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성결과 성실로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을 증언할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양심은 직감과 연합하여 일한다. 양심은 믿는 이가 직감을 좇아 행한 것만을 옳다 증언한다. 무엇이든지 직감의 행위에 어긋난 것이라면 극히 인간의 총명에 부합된다 하더라도 양심은 반대한다. 어쨌든 양심은 직감의 계시 외에 어떤 것도 옳다 인정하지 않는다. 직감은 믿는 이를 인도하는 기능을 하고 양심은 - 믿는 이가 거스를 때에 - 믿는 이가 직감을 듣도록 재촉한다.
하나님을 향한 거리낌 없는 양심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믿는 이들을 기뻐하시고 하나님과 믿는 이들 사이에 아무런 간격이 없다는 것을 깊이 아는 그것이다. 이러한 양심의 증언은 영을 좇아 행하는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이것이 믿는 이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 목적에 이르지 못했을 때 믿는 이는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믿는 이의 삶의 정상적인 상태이다. 그때에 사도들이 이러했으므로 오늘날 믿는 이도 이렇게 해야 한다. 에녹은 바로 이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진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이러한 증언은 우리의 전진을 돕는다. 그러나 이 점에서 우리는 또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아’를 높이게 되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모든 영광은 다 그분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거리낌 없는 양심으로 지켜지도록 ‘스스로 노력해야’한다. 만일 우리의 양심에 참으로 아무 거리낌이 없다면 우리는 마땅히 육체가 몰래 들어오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만일 우리 양심에 자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증언을 가지고 있다면 어쩌다가 실패할 때에 우리는 더욱 담대하게 다시 새롭게 우리를 씻어 주는 주 예수님의 피를 바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갖기를 바란다면 한순간도 우리는 영원하고 항구적으로 우리를 씻어 주는 보혈을 떠나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가 큰 일에서나 작은 일에서 양심을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자백하는 것과 보혈을 의지하는 것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우리 안에 죄의 본성이 아직 남아 있고 아직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양심의 은밀한 일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우리의 영적 생명이 자랄 때라야 알게 될 것이다(이것이 바로 전에 우리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 일들을 틀렸다고 여기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보혈로 우리의 모든 것을 덮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평강이 없게 된다. 보혈이 우리 양심에 한 번 뿌려질 때부터 주 예수님의 중보기도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영생은 항구적으로 일하게 된다.
사도는 우리에게, 그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구한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하는 면이나 사람에게 향하는 면과 깊은 관계가 있다. 만일 우리가 사람에게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지려면 먼저 하나님을 행해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양심이 거리낌이 있을 때 사람을 향한 양심도 거리낌이 있게 되기 때문에, 영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믿는 이들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 없는 양심을 구해야 한다(벧전 3:21). 그러나 이것은 사람을 향한 양심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사람을 향해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갖기를 구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할 수 있으나 사람 앞에서 해서는 안 될 많은 일들이 있다. 우리 양심에 사람에게 거리낌이 없어야만 사람 앞에서 좋은 간증을 가질 수 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을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6, 원문 참조). 양심에 거리낌이 있을 때 외적인 행위가 좋을지라도 이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양심에 거리낌이 있다는 것은 마음속에 자기를 비방하고 송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거리낌 없는 양심은 사람 앞에서 우리를 위해 증언해줄 뿐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한다. 오늘날 믿는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자신의 믿음이 너무 적다고 원망하므로 온전한 영적 생활을 하지 못한다. 그에 대한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원인을 양심에 거리낌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거리낌 없는 양심과 위대한 믿음은 분리할 수 없다. 양심에 거리낌이 있다면 믿음은 즉시 쇠약해진다. 성경은 이 두가지를 어떻게 연결하여 보는지를 살펴보자.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딤전 1:5).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19). 양심은 우리의 믿는 기관이다. 하나님은 죄를 가장 미워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극치는 바로 그분의 무한한 성결이다. 그분의 성결은 한순간도 죄를 용납할 수 없다. 만일 믿는 이가 양심의 지시하심을 좇아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은 모든 것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믿는 이는 즉시 교통을 잃게 된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믿는 이에게 주신 모든 영적인 약속은 다 조건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중 하나도 믿는 이의 육체의 만족을 위한 것이 없다. 죄와 육체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성령이든 하나님과의 교통이든 기도의 응답이든 모두 얻을 수 없다. 만일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참소한다면 우리가 어찌 두려움 없이 담대히 하나님의 약속을 구할 수 있겠는가? 믿는 이의 양심이 그를 위해 그가 하나님의 성결과 공의에 따라 이 세상에 살았다는 것을 증거할 수 없다면, 그가 어떻게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 무한한 상급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손을 들고 기도할 때에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책망한다면 우리의 그러한 기도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죄가 먼저 처리되고 정결케 되어야만 믿음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양심은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전보다 선하게 되었거나 악행을 많이 제거했다는 뜻이 아니다. 거리낌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담대한 것은 양심이 가져야 할 정상적인 상태이다. 만일 우리가 기꺼이 양심 앞에 엎드려 양심의 책망을 받고 우리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며, 그분의 모든 뜻을 좇아 행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담대함은 증가하고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담대히, 이제 우리에게는 그분께 열지 않은 것이 없고 감춰진 것이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영을 좇아 행하는 길에서 믿는 이는 자기의 양심이 어떤 작은 일에서도 거리낌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 양심은 모든 책망을 마땅히 즉각적으로 처리하고 죄를 자백하며, 보혈의 씻음을 구하며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 매일 매일 우리는 마땅히 한시도 양심에 거리낌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짧은 시간의 양심의 거리낌일지라도 영에 막대한 손상을 주기 때문이다. 사도의 본은 “항상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지라”이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통이 끊어지지 않음을 볼 것이다.
- 양심과 지식 -
우리가 영을 좇아 행하고 양심의 소리를 들을 때에 우리는 또한 양심이 지식의 제한을 받는 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은 선악을 구별하는 기관이다. ‘분별’이라는 단어는 ‘아는 것’ 혹은 ‘지식’으로 번역할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은 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은 지식이 많고 어떤 사람은 적다. 이것은 모두 개인의 환경이 다르거나 그들이 받은 가르침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수준에 따라 행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빛 비춤을 따라 살도록 요구할 수 없다. 믿는 이와 하나님 사이의 교통에서 ‘모르는 죄’는 교통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만일 믿는 이가 자기의 지식에 따라, 즉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것을 좇아 행하고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것을 거절한다면, 그는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어린 믿는 이는 자신의 지식이 부족하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비록 한 면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영적 지식의 가치가 매우 중요하지만, 다른 면에서 우리는 지식의 결핍이 하나님과의 교통을 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통에서 하나님께서 주의하시는 것은 그분의 뜻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지, 결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많은 가에 있지 않다. 만일 우리의 태도가 성실히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고 전심으로 준행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죄들’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들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통 혹은 그 교통의 일부분도 잃게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성결에 근거하여 교통이 결정된다면 동서고금의 가장 거룩한 믿는 이 중에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을 한순간이라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또한 점점 그들은 주님의 낯과 그분의 권능의 영광을 떠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 죄들은 다 보혈의 덮음 아래 있게 된다. 그 반대로 만일 우리가 알고 있고 양심이 책망하는 약간의 죄를 허락한다면 우리는 즉시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을 가질 수 없다. 눈 속에 들어간 작은 모래알이 눈 앞에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하게 하고 고통을 느끼게 하듯이 우리가 아는 미미한 죄도 하나님의 웃는 얼굴을 보는 데 장애를 준다. 양심에 거리낌이 있을 때 교통에도 거리낌이 있게 된다.
믿는 이에게 수년간 감춰진 어떤 죄일지라도 그것을 모를 때에 그 죄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로막지 않는다. 그러나 빛 비춤(지식)이 임할 때에 양심은 정죄하게 된다. 만일 그런 상황에서 그 죄를 하루라도 더 남길 때에 그 하루는 교통을 잃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의 정도에 따라 우리와 교통하신다. 만일 우리가 수년 동안 보류해 둔 것이 우리에게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이후로도 우리에게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극히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은 양심이 최근에 가진 빛 비춤을 따라 책망하기 때문이다. 양심은 알지 못하는 진보하게 되고, 믿는 이의 지식이 많을 수록 양심이 책망하는 것도 이에 따라 많아진다. 믿는 이는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근심할 필요가 없다. 다만 자기가 아는 것을 온전히 순종하면 된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즉 우리가 소유한 가운데 거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그 아들 에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그중 많은 죄를 아직 모를지라도)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하나님에게는 무한한 빛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무한한 빛을 따라 행하신다. 우리의 모든 빛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빛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빛을 좇아 행해야만 하나님과 교통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다.
오늘 어쩌면 우리에게 아직 제거되지 않은 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그것들을 아직 모르고 빛이 아직 비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통올 여전히 가질 수 있다. 우리는 비록 양심이 가장 중요하나 양심이 우리의 지식과 관계되기 때문에, 양심이 곧 우리의 성결의 수준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통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가 거리낌 없는 양심을 보존했는가를 우리와 교통하는 조건으로 삼으신다. 그러므로 아무 제한없이 양심의 지침을 순종한 후에 우리는 결코 우리가 이미 ’온전하였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댜. 거리낌 없는 양심은 다만 우리가 아는 것에 따라 우리가 이미 완전하였고, 현재 우리가 도달해야 할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해 줄 뿐이다. 이로 보건대 성경 지식이 증가하고 영적 체험이 많을수록 우리의 행동하는 수준도 이에 따라 높아지는 것이다. 빛이 점차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행위가 더욱 거룩해져야만 우리의 양심이 거리낌 없는 상태로 보존된다. 우리가 현재의 지식과 체험을 수요하게 되었지만, 우리의 행위가 여전히 과거와 같을 때 우리의 양심이 참소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과거 우리가 모르는 과실로 인해 그분과 우리의 교통을 끊지는 않으시겠지만, 현재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을 갖고도 그 죄를 거절하지 않는다면 현재 하나님과의 교통은 잃게 된다. 양심은 현재 하나님께서 믿는 이에게 주신 성결의 표준이다. 믿는 이가 이것을 거스르는 것이 곧 죄를 범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많지만 우리의 영적 이해력이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상태에 따라 그분의 자녀를 다루신다. 어떤 믿는 이에게는 극히 큰 죄르 여겨지는 것아 다른 사람은 그것을 조금도 죄로 느끼지 않는다. 아것은 그들의 양심이 아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판단하지 말자. 오직 그분의 갓난아이가 청년의 힘을 갖기를 원치 않으신다. 혹은 청년들이 아비들의 체험을 갖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의 모든 자녀들이 그들이 이미 아는 것대로 그분께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만일 우리가 확실히 하나님께서 어느 형제의 양심에 어떤 일을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가 듣지 않는다면 그를 권면할 수 있다. 이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우리의 양심의 느낌을 그 형제가 억지로 따르게 해서는 안 된다. 온전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과거 우리가 모르던 과실로 인해 우리를 버리지 않는데, 어찌 현재 우리의 수준으로 우리가 아는 그 형제의 상태를 판단할 수 있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면 결코 작은 일에서 무엇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댜. 그에게 양심의 지시를 온전히 따르도록 권하라. 이는 만일 그의 의지가 하나님께 순종되었다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된 많은 일들을 성령께서 깨우치실 때에 그는 순종하게 될 것이다. 만일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언제든지 양심에 빛 비춤이 있을 때에 믿는 이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게 된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결코 자기 혼의 힘으로 모르는 진리를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우리가 현재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족하다. 만일 성령께서 직감 안에서 우리에게 어떤 진리를 상고해 보라는 느낌을 주셨을 때 우리는 결코 가만히 있음으로 자신의 거룩함의 수준을 낮춰서는 안 된다. 어쨋든 믿는 이가 자기 영을 좇아 행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질 것이다.
- 양심의 약함 -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가 우리 생명의 거룩함의 표준이라고 말한 바 있다. 비록 양심이 중요하나 그것이 거룩함의 표준이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양심이 거룩의 표준은 아니지만 일상생활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의 표준임을 말한 바 있다. 바꾸어 말하면 양심은 현재 우리의 거룩함의 표준이다. 만일 우리가 매일 양심이 가르친 대로 생활한다면 우리는 이미 현재 우리가 도달해야 할 표준에 이른 것이다. 만일 우리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영적인 노정에서 우리는 뒤쳐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므로 양심은 매일 매일 영을 좇아 행하는 노정에서 하나의 중대한 요소이다. 우리의 양심이 지시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그것을 거스른다면, 우리는 양심의 책망을 받고 평강을 잃으며 하나님과의 교통이 일시적으로 끊어질 것이다. 우리가 온전히 양심으로 말미암아 영의 모든 지시하심을 좇아 행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양심의 지시만으로 충분한가?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우리는 양심이 지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양심은 오직 자신이 아는 것대로 사람을 인도한다. 사람이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 양심은 책망한다. 양심은 자신이 모르는 일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양심의 표준과 하나님의 성결의 표준과 비교해 볼 때에 양심의 표준은 하나님의 성결의 표준과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본다.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의 결함이 있음을 본다. 첫째는 우리가 전에 말했듯이 지식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잘못만을 비난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이 무지함으로 인해 우리 생명에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지 않은 것들이 남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실 뿐 아니라 우리보다 성숙한 성도까지도 우리의 결함이 얼마나 많은지를 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빛 비춤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전과 같이 행하는데 이것이 큰 결함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우리에게 결함이 많은 것이 사실이나 우리가 양심의 지시대로 행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와 교통하신다.
여기에 또 두 번째의 결함이 있다. 이는 믿는 이와 하나님과의 교통에 장애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적은 지식은 믿는 이가 정죄해야 할 것을 정죄하도록 할 뿐 아니라 정죄받지 않아야 할 것도 정죄하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양심이 잘못 인도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양심의 인도는 항상 문제가 없다. 그 인도는 모든 성도가 마땅히 따를 바이다. 그러나 지식은 많고 적음과 성숙한가 어린가에 차이가 있다.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많은 일이 믿는 이에게 발생되는데 믿는 이에게 지식이 있을 때에는 그런 일들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현재로는 많은 일이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지식이 있을 때 어떤 일을 하면 그의 양심이 그를 책망하고 그는 범죄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어린 믿는 이의 질병이다. 이것은 마치 많은 일들에 있어서 아비들은 지식과 경험이 있으므로 그 일들을 하는 것은 가(可)하다. 그러나 아이들이 아비들의 행한 것을 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어린 믿는 이의 지식과 경험과 위치는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표준이 다르다는 뜻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표준이 개인의 위치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육신의 일에서뿐 아니라 영적인 일에서도 똑같은 것이다. 많은 일에 있어서 성장한 사람들이 할 때는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지만, 어린 믿는 이가 그것을 본받아 행한다면 그에게 죄가 될 수 있다.
이것의 이유는 다름이 아닌 다만 양심의 지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믿는 이의 양심으로 볼 때 어떤 일들은 가한 일이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것이다. 다른 믿는 이의 양심으로 볼 때에 그런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일을 한다면 그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이것은 하나님의 최고의 뜻이 각 사람에게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각 사람이 처한 위치가 다름으로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다른 것뿐이다. 지식이 있는 사람은 더 강한 양심을 갖고 있으므로 결과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갖게 된다. 그러나 지식이 없는 사람은 더 약한 양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제한을 받게 된다.
이러한 일의 근본에 대해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는 분명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었다. 당시 그 지방의 믿는 이들에게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로 많은 오해가 일어났다. 어떤 믿는 이는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으며 다른 신이 없다고 생각했다(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이든 아니든 아무 차이가 없다 하여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믿은 이는 주님을 믿기 전 우상을 숭배했던 습관이 있어서 이제 자기들이 먹는 것이 우상의 제물인 것을 보고서는 과거를 회상하며 양심이 불안한 것이다. 그들이 먹을 때에 그들의 양심은 약하여지고 더렵혀진다(7절). 사도는 이러한 분별은 모두 지식의 유무(有無)의 문제로 여겼다(7절). 전자는 지식이 있으므로 양심에 아무런 책망이 없고 그것을 먹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다. 후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양심이 불안해져서 그것을 먿는 것이 그에게 죄가 된다. 이로 보건대 지식은 너무나 중요하다. 더 많은 지식은 때로 양심에게 더 많은 정죄를 줄 수가 있지만 때로는 더 적은 정죄를 가져다 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그림자 같은 일들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지식을 주시도록 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무고한 묶임을 당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반드시 겸손한 마음으로 보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고린도의 믿는 이들과 같이 육체에 떨어질 것이다. 만일 우리의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양심은 여전히 우리를 책망한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대가를 지불했었더라도 우리는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가장 높은 표준을 따라 볼 때 어떤 것이 좋게 여겨진다고 해서 양심의 음성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양심이 현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표준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양심에 순종해야 한다. 양심을 불순종하는 것은 죄이다. 양심이 정죄하는 것을 하나님도 필히 정죄하신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외면적인 음식에 관한 것이다. 더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지식의 많고 적음은 결코 우리에게 자유함과 속박함의 차이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외부적인 육신에 속한 일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를 대하시는 것은 그들의 연령을 따른 것이다. 어린 믿는 이에게 하나님께서 주의 하시는 것은 의식(衣食)등과 같은 외면적인 것들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몸의 악행을 죽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어린 믿는 이가 주를 좇을 갈망이 있다면 주님께서 늘 영의 양심을 통해 이러한 일들에 대해 자신을 통제하라고 하는 것을 볼 것이다. 주 안에 깊은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주님께 순종하는 길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양심은 남보다 더 자유스러운 것 같다.
그러나 연장한 믿는 이는 이 점에 큰 위험이 숨어 있다. 그 위험은 바로 그들의 양심이 너무 강건하므로 냉담함이나 강퍅함에 떨어지는 것이다. 전심으로 주님을 좇는 어린 믿는 이들은 많은 일들에서 양심의 직감이 에민하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을 받고 주님께 순종하게 된다. 반면 연장한 믿는 이는 지식이 너무 많은 고로 자기의 생각을 지나치게 발전시킴으로 양심을 냉담하게 하거나 강퍅하게 만든다. 결국 그는 예민한 직감을 잃어버리고 범사에 생각의 지식을 좇아 행하여 성령은 그를 감동시킬 수 없는 듯 하다. 이것은 영적 생명의 치명상이다. 이것은 믿는 이의 생활에 신선한 생기를 앗아 가고 낡은 것만 남게 한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가 좇아 행해야 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영의 직감(양심)인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직감을 통해 양심이 정죄한 것을 무시해 버리고 우리의 지식을 행동의 표준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이미 육체를 좇아 행한 것이다. 많은 때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에 의하면 어떤 일은 완전히 가한 것이나 그것을 했을 때에 양심의 불안을 체험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을 수 있다. 많은 때에 우리가 얻은 지식은 생각의 지혜로 추구한 것이며 직감에서 비롯된 계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양심의 인도하심은 지식과 충돌한다.
사도는 만일 믿는 이가 약한 양심의 책망을 무시하고 생각의 지식을 좇아 행한다면 그의 영적 생명은 큰 손상을 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고전 8:10-11). 여기서 말하는 믿는 이는 바로 지식이 있다 없다를 논의하는 믿는 이이다. 여기서 말한 뜻은 다음과 같다. 즉 지식이 없는 믿는 이가 지식 있는 사람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볼 때에 그는 만일 그가 먹을 수 있다면 나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양심의 소리를 주의하지 않고 그냥 그것을 먹는다. 이것은 믿는 이를 타락하게 만든다. 지식이 없는 믿는 이는 생각 속에서 그의 형제의 지식을 깨닫고서는 자기 양심을 좇아 행하지 않고 그 형제의 지식을 좇아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타락이다.
우리는 우리가 한순간도 자기가 얻은 지식을 좇아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믿는 이는 그의 지식이 어떻든간에 영의 직감과 양심을 좇아 행하는 것만이 합당한 것이다. 그의 지식은 혹 그의 양심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직접적으로 좇아야 할 것은 오직 양심뿐이다. 믿는 이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가 선한가의 여부보다는 그들이 그분의 뜻을 순종하는가를 주의하신다.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은 우리의 헌신과 순종이 확실함을 보증해준다. 하나님은 이 양심을 통해서 우리가 그분을 순종하는 것을 으뜸으로 여기는가 아니면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신다.
또 한가지 믿는 이가 마땅히 주의할 일이 있다. 즉 양심을 포위하고 있는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 많은 때에 믿는 이의 양심은 어떤 것에 의해 포위됨으로 정상적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많은 때에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의 양심이 무감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유와 대화와 가르침과 그들의 권면과 본보기의 영향으로 우리 양심은 그들과 같이 무감각하게 되어 버린다. 우리는 양심이 무감각한 교사를 경계해야 한다. 인위적인 양심을 경계해야 하고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 준 양심도 거절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은 모든 일에서 직접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책임지고 준행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양심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따른다면 곧 실패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믿는 이의 양심은 영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다. 믿는 이는 마땅히 양심의 지침을 완전히 따라야 한다. 비록 양심이 지식의 영향을 받지만 양심의 모든 소리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최고의 뜻을 나타내실 뿐이다. 우리는 오늘날 도달해야 할 극점에 이르는 것으로 족하다. 다른 일에 대햐여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양심을 건강한 상태로 보존해야 한다. 결코 조그마한 죄로 양심의 지각에 상처를 입히지 마라. 만일 언제든지 우리가 무감각하게 되고 어떤 감동도 받을 수 없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이미 깊이 육체에 떨어졌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성경 지식을 육체의 생각 안에 보존할 때에 살아 있는 능력을 잃게 될 것이다. 영의 직감을 좇아 행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우리 양심의 지각이 날로 예민해지고 하나님과 조금이라도 잘못된 부분이 있을 때에 즉시 그것을 알고 회개해야 한다. 생각만 사용하고 양심의 직감을 잊이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의 영적인 수준이 증가한 정도는 우리의 양심의 민감도를 말해 준다. 양심을 상관치 않으므로 오늘날 생기가 없고 머릿속에서만 죽은 지식을 소유한 믿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는 날마다 깨어서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감동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양심의 감동이 적은 것을 두려워해야 하며, 너무 감동이 많은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양심은 하나님의 제동장치이다. 양심은 우리의 어떤 부분에 문제가 생길 때 그것을 처리한 후에야 행동할 수 있음을 알려 준다. 만일 우리가 그 음성을 듣는다면 나중에 더 심한 파괴를 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