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29> 고영섭
“깨달음은 ‘느낌’…‘느낌’으로만 전이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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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부처님이 다섯 비구를 상대로 깨달음이라는 느낌을 처음으로 전하는 초전법륜을 조각한 것. 파키스탄 탁실라박물관 소장. |
깨달음은 ‘
느낌’이다. 진리에 눈뜸이자 지혜의 체득이다. 온갖 경계들을 다 넘어서서 내면에서 일어나는 환한 빛이다. 그 느낌의 빛은 너무나도 미묘하고 그윽해서 말로는 표현하기가 어렵다. 저마다 체득한 그 느낌이 다르기에 일률적으로 그려낼 수도 없다. 때문에 우리는
깨달음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드러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말로 다가갈 수 없다면 우리는 깨달음을 어떻게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은 어떻게 전달될 수 있는가. 깨달음이 우리에게 전달될 길이 없다면 우리는 그 깨달음을 무시해도 좋은 것인가.
깨달음의 느낌을 새롭게 연 부처님의 깨달음은 어떠했을까. ‘무명’(無明)의 경계를 넘어서 ‘명’(明)으로 나아간 부처님은 그것을 전하기를 주저했다. 부처님이 주저했던 것도 깨달음이 ‘느낌’이기 때문이었다. 그 느낌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부터 이미 왜곡되어버린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전달될 길이 없는 것인가. 길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직 ‘느낌’에서 ‘느낌’으로의 전이로만 가능할 것이다. 즉 깨달은 이와 깨달을 준비를 마친 이의 느낌으로 옮겨지는 것일 것이다. 꽃봉오리와 꽃봉오리가 툭툭 터지듯, 어미닭과 새끼닭이 부리를 함께 쪼듯 말이다.
그렇다면 그 느낌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인가. 언어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지 못하고 왜곡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여기에 불립(不立)문자와 불리(不離)문자의 역설이 자리한다. 그것에 눈뜨고 체득하는 느낌의 빛은 과연 어떤 것일까.
시인은 사물을 보면서 어떠한 이미지로 형상화해 낸다. 꽃을 보는 순간 그 영상(피사체)이 자신의 의식에 던져지는 것을 느낌으로 인식한다. 그 느낌은 일상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시인은 일상에 절은 언어의 때를 탈각시켜 새로운 언어로 형상화한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때 묻은 언어에서 때를 벗겨낼 때 그 느낌은 있는 그대로 전달될 수 있다. 하여 깨달은 이의 느낌의 언어는 깨달을 준비가 된 이의 느낌의 언어로 전이될 수 있다. 그렇게 다가오는 것이 ‘감’(感)이고 그것을 받아들인 이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동’(動)이다. 이처럼 감동의 언어는 주체와 객체(사물) 사이의 느낌의 상호작용에서 태어난다. 부처님과 가섭 사이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던 그 느낌의 전이과정(三處傳心)에서 우리는 깨달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깨달음은 나와 대상과의 느낌이 하나로 일치될 때 일어난다. 주객의 분별이 사라지고 느낌만이 충만할 때 드러나게 된다. 그러면 부처님의 깨달음은 여타의 깨달음과 어떻게 변별되는가. 싯다르타 수행자는 알라라 깔라마의 무소유처 선정과 웃다까 라마풋따의 비상비비상처 선정 체험에서 모두 사라졌던 생사의 고통이 일상으로 되돌아오면 그대로 되살아남을 느꼈다. 그는 요가 명상이 지향하는 궁극적 경계가 생사의 고통을 완전히 뿌리 뽑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고 서슴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보리수 아래 앉은 그는 십이 연기를 통해 생사의 경계를 돌파한다. 그는 먼저 무명에서부터 노사에 이르기까지 각 지(支)와 지(支) 사이를 투과하는 느낌을 깊이 체득했다.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이 생겨났고, ‘행’으로 말미암아 식이 생겨났고, ‘식’으로 말미암아 명색이 생겨났고, ‘명색’으로 말미암아 육입이 생겨났고, ‘육입’으로 말미암아 촉이 생겨났고, ‘촉’으로 말미암아 수가 생겨났고, ‘수’로 말미암아 애가 생겨났고, ‘애’로 말미암아 취가 생겨났고, ‘취’로 말미암아 유가 생겨났고, ‘유’로 말미암아 생이 생겨났고, ‘생’으로 말미암아 ‘노사’가 생겨났음을 느꼈다.
다시 그는 ‘노사’를 멸함으로 말미암아 생을 멸하고, ‘생’을 멸함으로 말미암아 유를 멸하고, ‘유’를 멸함으로 말미암아 취를 멸하고, ‘취’를 멸함으로 말미암아 애를 멸하고, ‘애’를 멸함으로 말미암아 수를 멸하고, ‘수’를 멸함으로 말미암아 촉을 멸하고, ‘촉’을 멸함으로 말미암아 육입을 멸하고, ‘육입’을 멸함으로 말미암아 명색을 멸하고, ‘명색’을 멸함으로 말미암아 식을 멸하고, ‘식’을 멸함으로 말미암아 행을 멸하고, ‘행’을 멸함으로 말미암아 무명을 멸하고, ‘무명’을 멸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고통이 소멸되고 밝은 빛(明)이 현현하는 것을 느꼈다.
존재의 밑바닥까지 바꾸는 치열한 수행 통해 체득
때묻은 인간언어로는 표현 한계…일반화 시도 무리
깊은 몰입과 집중 속에서 오직 경계와 경계를 투과하는 순간의 느낌만이 전달되었다. 욕계에서 색계를 넘어 무색계에 이르렀다가 다시 욕계로 되돌아가 색계를 이르렀으며 제2선정에 이르자 깊은 느낌이 몰아치며 무명의 세계가 깨달음의 빛으로 전환되었다. 오직 그윽한 느낌만이 가득 찼다. 깊고 그윽한 느낌으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그 느낌은 잠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깊은 잠 속에서도 한결같이 유지되었다. 그 느낌이 일상에서도 유지되면서 법열로 빛이 났다. 그는 수행자 싯다르타에서 부처님으로 탈바꿈했다.
이렇게 삼칠일 동안의 십이 연기의 환멸과 유전의 관찰을 통해 느낌의 빛을 체험하고 깨달은 이(覺者)가 되었다. 때문에 오늘 우리가 모색하는 깨달음은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되비추어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진리에 눈뜸과 지혜의 체득의 근거는 부처님이라는 구심에 서서 원심으로 나아갈 때 설득의 힘과 감동의 힘을 얻게 된다. 그렇지 않고 단지 때 묻은 언어로 깨달음을 일상의 행복으로 그려낸다면 그것에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고 인식의 전회를 가져다주지도 못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중도’(自他/斷常/有無/一異/苦樂)이며 그것을 얻는 수행법은 중관(空觀/正觀)이다. 이것이 진리의 눈뜸이며 지혜의 터득이다. 석존이 제시한 ‘가장 올바른 길’은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언어로 변주되었다. 그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소통될 수 있는 언어이자 기호였다.
아함학의 사성제, 비담학의 이공(아공/법공), 중관학의 이제(진제/속제), 유식학의 삼성(진실성/의타성/분별성), 밀종의 법계체성지, 천태종의 삼제(가제/공제/중제), 화엄종의 이기(성기/연기), 정토종의 염불삼매(칭념/관념), 선종의 자성청정심(본래무일물) 등의 언어들은 모두 중도의 다른 표현들이다.
중도는 양 극단을 넘어서는 지혜의 길이다. 그것은 팔정도의 바른 견해(正見)로서 사성제로 통찰해 준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중관’으로 이어질 때 완성된다. 중관은 탐진치의 삼독을 끊는 수행이며, 팔정도를 실천하는 수행이다. 그리고 치우침이 없는 지혜의 체득이다. 그래서 중관은 ‘정관’이며 ‘공관’인 것이다.
여기서 ‘관’(觀)은 ‘제’(諦)를 바로 보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수행의 출발이다.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은 학연, 혈연, 지연, 이념, 계급, 계층의 ‘차별’하지 않고 ‘차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균형감각’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요청되는 필수적인 ‘균형 감각’이다. 그것은 곧 중도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려는 중관 수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은 몸과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몸의 변화를 통해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동시에 마음의 변화를 통해 몸을 바꾸는 것이다. 마음의 변화는 인식의 전회를 통해서 가능하다. 깨달음은 존재의 밑바닥까지 뿌리 뽑히는 전환의 과정을 통해 체득된다.
지혜는 지금까지의 선입견과 분별식을 뿌리까지 뽑아버림으로써 그 뿌리 자체가 실체가 없는(空性) 것이라는 근원적인 인식의 전환으로부터 체득되는 것이다. 중도의 지혜는 일상의 때 묻은 언어와 사유로는 도달할 수 없고 체득할 수 없는 느낌의 경험이다. 그 느낌이 석존의 경험과 겹쳐질 때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수행의 언어로 드러날 때 힘을 지닌다.
오랜 수행을 거쳐 대각을 성취한 부처님을 ‘인류사에서 유일하게 죽음을 경험한 이’라고 하는 것은 윤회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아직도 끊임없는 생을 윤회하여 환생하는 여타의 존재들과 달리 말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이 매년 사월 초파일에 그렇게 오는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일 부처님이 윤회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이라면 그렇게 자유롭게 우리에게 오지는 못할 것이다.
깨달음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그것을 너무 속화시키거나 일반화시키는 경향은 경계되어야 한다. 우리들의 때 묻은 언어로는 깨달음의 느낌을 다 드러낼 수 없다. 그 때를 벗겨내는 전환의 과정을 경험하지 않고 다시 때 묻은 언어로 정의하고 전달해도 청자에게 그것은 들려지지 않는다. 설득도 되지 않고 감동도 주지 못한다.
때문에 우리는 윤회의 언어로 깨달음을 규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찌하랴! 때 묻은 언어를 떠나 깨달음을 드러낼 수 없는 우리들의 도저한 한계를 말이다.
고영섭/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출처 : 불교신문 2080호/ 11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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