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8. 엘로라 석굴 ①
뛰어난 예술성…약동하는 환희심
|
<엘로라 석굴 제10굴 내부> |
2002년 3월4일 오후 7시10분.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은 인천공항에서 인도 뭄바이(봄베이)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 불교유적의 근원인, 인도 대륙에 산재한 불교유적(석굴포함)들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뭄바이 공항에 도착하니 3월5일 새벽 2시(현지 시간). 호텔이 들어가 잠깐 휴식을 취한 뒤 곧바로 칸헤리 석굴에 올라갔다.
석굴 70% 데칸고원 서부에 위치
현재까지 발견된 인도 불교석굴의 수는 대략 1,200여개. 데칸고원 서부를 남북으로 달리는 서(西)가츠 산맥의 고원 절벽에 900여개의 불교석굴이 있다. 대부분의 인도 석굴이 뭄바이가 속한 마하라쉬트라주(州)에 있는 셈. 900개의 석굴 중 취재팀이 본 최초의 석굴이 바로 칸헤리. 칸헤리는 취재팀에게 각별히 의미 있는 석굴이 된 것이다.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 인도에서의 석굴사원 개착은 기원전 2세기 말엽 혹은 기원전 1세기 초엽부터 시작됐다. 당시부터 시작된 석굴 개착의 역사는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기원후 9세기까지 계속됐다. 석굴 자체가 예술작품이지만, 석굴 내부엔 더 많은 조각들이 남아있다. 거대한 불·보살상, 아름다운 시녀, 근엄한 비구상 등 각양각색의 조각들이 굴 안에 즐비하다.
데칸 서부지역에 이렇게 많은 불교석굴들이 있다면, 이 지역엔 불교가 언제쯤 전파됐을까. 불교전파의 역사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 하지만 학자들은 아쇼카 왕 시대부터 스님들이 남 인도로 진출했고, 스님들의 진출이 시작되면서 데칸 고원 일대에도 가르침이 퍼지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그 옛날 스님들은 아마도 서 인도의 웃자이니·비디샤를 본거지로, 빈댜산맥을 넘어 남하(南下)를 계속해, 데칸 고원 서부에 들어왔으리라. 아쇼카 왕 시대 이후 수백 년 간 서방 로마와의 무역으로 인도엔 상공업이 발달했다. 때문에 교역을 위한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갔고, 스님들은 대상들과 함께 도로를 따라 전도여행을 했으리라.
BC 550~750년 조성
데칸 서부지역에 도착한 스님들은 처음엔 나무와 풀로 거처를 만들었다. 점차 언덕의 중턱과 정상에 석굴을 뚫기 시작했다. 언덕 위 암벽의 돌들은 파기 어려울 만큼 단단하지 않았다. 일단 개착된 석굴은 내부가 대단히 시원했다. 작업이 단순해 나무와 풀로 땅 위에 세우는 건물보다, 비용도 훨씬 덜 들고, 살기에도 편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엘로라 석굴 제4굴 입구> |
석굴이 개착될 즈음 데칸 고원 일대를 다스린 왕국은 사타바하나 왕조. 아쇼카 왕의 마우리아 왕조 쇠망 이후 급격히 세력을 넓혀, 기원후 3세기경까지 데칸 일대를 지배했다. 사타바하나 왕조는 불교에 우호적이었다. 수많은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데칸 서부지역 석굴사원 수는 점차 늘어갔다. 특히 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은 불교석굴 사원 증대에 왕권보다 더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개착된 석굴 대부분이 교역로 상에 있고, ‘도시로부터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이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먼 길을 가 교역해야 했던 여행 중의 상인들은 아마도 석굴사원에 들러 땀을 식히고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간혹 스님들의 설법을 듣고, 스투파에 예배하며 삶의 의의를 새롭게 다졌으리라. 스님들은 상인들이나 신자들에게 법(法)을 설하고, 신자나 상인들은 재물을 보시해 석굴개착에 도움을 주었으리라.
칸헤리 석굴사원을 답사한 취재팀은 이후 바자·베르사·까를라 석굴을 보고, 3월8일 오후3시 아우랑가바드에 도착했다. 온도는 40도를 오르내렸다. 땀으로 젖은 몸을 차에 싣고, 아우랑가바드에서 출발해 달리기 30분. 멀리 절벽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엘로라 석굴이 저기에 있겠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높이 40~50m나 돼 보이는 절벽이 병풍처럼 산허리에 둘러쳐져 있었다. 가다보니 절벽 바로 밑으로 가는 길과 돌아가는 길이 나왔다. 그제야 석굴 모습이 완연히 눈에 들어왔다. 돌아가는 길을 택하고 10분 정도 가니 입구가 나왔다.
이상하게도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엘로라 석굴에선 힌두교 석굴(카일라사)에 들어갈 때만 입장료를 받는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얼른 이해되지 않았지만, 석굴 쪽으로 갔다. 얼마나 참배하고 싶었던 곳인가. 구경 온 사람들도 많았다. 인도를 여행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인도인들은 호기심이 대단히 많다. 뭄바이(칸헤리) 로나블라(바자 베르사 까를라) 등에서 취재팀은 항상 인도인들의 질문공세에 시달렸다. 엘로라 석굴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온 이방인이 이상했던지, 아니면 물건을 팔 요량인지, 인도인들이 몰려왔다. 겨우 인도인들을 따돌리고 석굴에 다 달았다.
1굴~12굴이 불교 석굴
기원후 550~750년 사이에 조성된 엘로라 석굴엔 불교석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힌두교·자이나교 석굴들이 남북 2km에 걸쳐, 엘로라 언덕 서쪽 경사면에 나란히 조성돼 있다. 이 중 최남단에 줄지어 있는 제1굴~12굴이 불교, 13굴~29굴이 힌두교, 30굴~34굴이 자이나교 석굴이다. 불교와 힌두교 석굴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성됐다고 한다.
|
<엘로라 석굴 전경> |
12번 굴 앞에서 출발해 천천히 걸어 1번 굴로 갔다. 상당히 먼 거리였다. 암벽을 파들어간 정교한 입구를 들어서니 캄캄했다. 한참을 기다리니 사방이 눈에 들어왔다. ‘암벽을 어떻게 팠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인도미술사〉의 저자 벤자민 로울랜드 교수에 의하면 석굴 개착 작업은 굴의 천장이 될 부분의 높이에서 시작된다. 당연히 실내엔 비계를 세울 필요가 없다. 천장과 지붕이 완성된 뒤, 작업은 아래쪽을 진행된다. 파낸 돌은 입구로 반출되며, 기둥과 스투파가 될 돌은 남겨놓는다. 이렇게 시작된 개착 작업이 한 사람 일대(一代)에 끝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대 삼대에 걸쳐 이뤄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나의 석굴이 완성되려면 적어도 100년은 걸린다. 엘로라 석굴도 몇 백 년에 걸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굴을 나와 2굴로 들어갔다. 2굴은 1굴과 달랐다. 거대한 돌기둥들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데, 입구의 맞은편 한 가운데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좌우에 연화수보살과 문수보살이 시봉하고 있다. 우선 규모의 거대함에 놀랐다. 마음속으로 석굴암 크기와 비교해보니, 더욱 커 보였다. 예배하는 심정으로 굴을 돌아 10굴에 이르렀다. 대표적 차이탸굴인 10굴 1층에 들어가니 전면에 부처님이 모셔진 스투파가 있다. 부처님을 보는 순간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듯 했다. 설법하는 손 모양, 은은한 미소를 띤 상호, 정교한 조각을 자랑하는 좌우의 협시보살 등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된 불상이 거기 있었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지는 느낌이었다. 부처님 앞에 나아가 정중하게 삼배 드리고, 스투파를 시계방향으로 세 바퀴 돌았다.
감탄이 절로 나와
|
<엘로라 석굴 굴번호 및 위치도> |
계단을 따라 2층에 올라섰다.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는 관리인을 유혹(?)해 억지로 들어갔다. 2층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1층 부처님이 달라 보였다. 어디선가 한 줄기 빛이 부처님 전신에 비춰졌다. 2층 문을 열자 빛이 들어간 것이다. 빛에 비친 부처님과 스투파에 강한 인상을 받았는지 환희심이 일어났다.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내부에서 꿈틀거렸다. 벌려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천천히 뒷걸음 쳐 베란다 가장자리에서 다시 보았다. 빛에 환해진 불신(佛身)이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요, 부처님 뒤 스투파가 그대로 보리수처럼 보였다. “아 저런 종교적 예술품을 조성한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환희심이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듯했다. 불상에 밴 종교적 열정이 나에게 그대로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서 있기 힘들었다.
● 석굴의 종류
비하라굴·차이탸굴로 大別
석굴 사원은 통상 차이탸굴과 비하라굴로 대별(大別)된다. 스투파를 모셔놓은 예불당이 차이탸굴이며, 비하라굴은 스님들이 거주하는 곳을 말한다.
차이탸 굴의 구조는 목적과 기능에 의해 규정되는데, 기본적으로 예배대상인 스투파와 그것을 둘러싸는 통로가 있다. 스투파 앞쪽에는 예불이나 집회를 위한 공간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다른 모든 것처럼 차이탸굴 구조도 변화·발전했다. 규모가 작았던 차이탸굴은 점차 기둥에 의해 측랑(側廊)과 예배공간이 분리됐다. 후기에 조성된 차이탸굴은 전면이 사각형, 후면이 원형인 소위 전방후원(前方後圓) 형태가 되며, 스투파는 제일 안쪽에 봉안된다. 기둥과 천장이 맞닫는 부분엔 코끼리나 말을 탄 미트나상(한 쌍의 남녀 상)이 조각된 경우도 있다.
반면 비하라굴은 들어가는 입구 이외 3면에 스님들이 거주할 방이 만들어진 형태다. 방 안엔 돌 침대와 작은 감실, 사물함 등이 있다.
인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목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