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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덕동에서 전임 전도사로 사역할 때입니다. 청년부를 인솔해서 여름 수련회를 하는 동안, 물놀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려고, 근처 개울가로 이동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청년들의 준비가 다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몇 청년들이 자신들은 준비하는 것이 늦으니 저에게 먼저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보면, 공손함 같은 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심증은 있는 데, 물증이 없었습니다. 그 때, 청년부 선배이고, 교사로 따라온 집사님이 “제가 데리고 갈 테니, 전도사님이 다른 청년들을 데리고 먼저 가세요. 곧, 따라가겠습니다.” 그러기에, 일단 믿고,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먼저 출발했습니다. 그러다 길을 잘못들어 돌아서 오다보니 본의 아니게 그들 뒤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저를 먼저 보내려고 했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집사님이 타고 온 탑 차 위에는, 물건을 싣기 위해, 가는 철근을 거치대식으로 용접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의지해서 청년 5명이 그 위에 앉아있었습니다. 이동거리는 15분정도였지만, 그것을 보고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어느 시대나 청년과 학생시절에는 호기심과 영웅심으로, 좀 튀고자 하는 심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랬던 터라, 심하게 야단치지는 못하고, 주의만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또 한 번은 ‘세계로 가는 아시아 헌터’에서, 스릴을 즐기며 열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나라를 본 적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피난민들이, 달리는 열차 위에 앉아 피난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았는데, 이들은 출퇴근을 이렇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객실에는 사람이 꽉 차서 들어가지도 못하지만, 들어간다 해도 답답하기에, 열차 위로 올라가거나 열차 뒷 칸에 매달려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라는 달라도 사람의 마음은 같은 가 봅니다.
참으로 아찔한 모습들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생각해 봤습니다. 교회가 크든 작든, 성도들이 많든 적든 어느 교회에서나 교인들이 신앙 생활하는 것을 보면, 어떤 이는, 교회의 제도 안으로 쑥 들어와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목회자가 인도하는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가하면, 어떤 이는 교회에 한 발,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곳에 한 발을 디디고 신앙생활 하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이 본문을 기록하던 초대교회당시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의 8절을 보시면,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열심으로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던 것을 회개한 뒤로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열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이 본문에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단에 대한 경계심을 주고 있습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사도들의 가르침도 받고, 주변에서 감언이설로 논리에 따라, 설득시키는 이단들의 가르침에도 귀를 기울이는 성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단의 미혹에 아주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달리는 열차에서라던가, 탑 차 위에 앉아 시원한 바람과 주변 경치를 스릴있게 즐기며 여행하는 자들과 똑같습니다. 이렇게 여행하는 것은, 갑작스런 돌발상황 때 안전에 위협받을 수 있고, 자칫하면, 생명까지 잃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는 말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문법상 “헛된 속임수인 철학” 또는, “철학의 헛된 속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철학”이라는 말은,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자기들의 가르침을 일컬어 ‘철학’ 또는 ‘지혜의 교훈’이라 한 것을 말합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단에 대해서는 본문이후인 18, 21~23에 다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대표적인 이단을 보면, 첫째는, 에비온파로, 율법준수를 강하게 주장하여, 율법과 유대인의 전통 위에 기독교를 이식시키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했고, 유대교를 배신한 배반자라고 불렀으며, 바울의 서신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했습니다. 둘째는, 영지주의로, 물질적 창조를 악한 것으로 간주하고, 구원은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특별하고 신비한 그노시스 즉, 영적지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이 지식은 특별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이단들의 헛된 속임수 철학에 대해, 사도바울은, 기독교인들의 삶과 지식의 든든한 토대는, 그들의 철학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특히, 사도바울이 본문에서 “사로잡을까”라는 표현은, ‘강도를 만나거나 유괴를 당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생활 속에, 강도를 만나거나 유괴를 당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강제로 빼앗기거나, 내 목숨이 볼모가 되는 일을 당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단들의 헛된 속임수 철학에 미혹되어 올바른 교회를 떠나, 이단에 빠진다는 것은 마치, 이렇게 강도를 만나거나, 유괴를 당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이러한 일을 겪는 것은, 그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좇는 믿음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좇는 성도” 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확실하게 거하는 성도”는 어떤 성도일까?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모두가 이러한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 확실하게 거하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충만함을 공급받습니다.
본문 9 - 10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진 사람이지만, 그 분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즉, 그 분은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 그 모든 것을 소유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을 유혹하며, 그들의 신앙을 위협하던 이단들이, 여기에 가라지를 뿌립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른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고 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중보자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리는 천사라도 우리의 중보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토록 이단들의 미혹에 대해 철저하게, 간절하게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단사설에 빠진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오늘날에도 이단에 대해 가르치고, 홍보함에도 불구하고, 이단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단에 넘어가서, 그 곳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을 믿고, 건전하게 성장하는 교회들을 사탄의 집단으로 몰아, 교묘하게 침투하여, 교회를 통째로 삼키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또는 죄책감을 가지고 고민하였는데, 이단에 들어가서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목회자의 바른 가르침을 받으며, 교회 안에 있지않고, 왜? 이리저리로 기웃거리다가, 믿음에 대한 바른 잣대도 없이, 간교한 이단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그 곳에서 만족을 찾을까요? 그렇게 찾을 것이라면, 왜? 우리에게 성탄절이 소중하고, 부활절이 소중할까요? 이제는, 성탄절을 날짜에 결부시켜, 거부하는 단체도 생겼습니다. 성탄절 날짜계산이 잘못되었으니, 12월 25일은 성탄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날짜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의 바른 믿음을 위협하는 요소들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본문이 기록된 초대교회 당시에도, 구약이 기록된 이스라엘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을 보면, 이단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믿음의 긴장을 늦출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믿음의 재무장을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하였어도, 자신의 믿음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이 희미한 성도들은 마치,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처럼 “그 마음이 비어 있고 청소가 되어 있는 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것”이 전혀 없는 빈 방에, 그 무엇이 못 들어가겠습니까? 빈 방에 누가 못 들어갑니까? 먼저 들어가서 차지하면 그 자가 주인이잖습니까?
우리교회에는 이렇게,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고, 중개인을 필요로 하는 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분들은, 어디에 누가 ‘기도의 능력이 있다’는 소리만 들어도 귀가 번쩍하여 찾아갑니다. 예전에 빌립전도협회에서 몇몇 성도들과 전도훈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성도들만 보내려 했더니, 담당 교역자가 동행해야지, 성도들만은 접수를 받지 않겠답니다. 출석하는 교회의 교역자와는 무관하게 성도들만 대상으로 접수받고 교육시키는 곳도 있지만, 이렇게 출석하는 교회의 교역자의 확인을 받고, 성도들을 교육시키기에, 올바른 기관이라 생각하고, 제가 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등록해서 함께 받았는데, 전도훈련과정 중에, 무속인들을 전도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근처 무당집만 골라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귀신같이 알고 피했더군요. 나중에는, 어느 철학관을 들어갔습니다. 산삼을 못 봤으니, 무라도 뽑을 맘에 들어갔습니다. 마침, 사람이 있더군요. 그래서, 속으로 “당신은 날날이구나”하고 복음을 건네었더니, 자신은 왕십리에 있는 천주교인이며, 이 일은 자신의 직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옵니까?”라고 물었더니, 많이 오는 데, 기독교인들이 많이 온다고 합니다. 나중에 실습마치고, 전도협회로 모여 다른 교회팀들과 이야기를 나눠어 보니, 모두가 이구동성이었어요. 진짜 무당들은 어떻게 알고 피했는지 없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당 집에도 기독교인들이 찾아갑니다. 그러다가 진짜 귀신에 붙잡혀서 점 치는 자들은 “점궤가 안 나온다며, 교회다니는 사람이 여긴 왜? 왔냐?”며, 나가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이런 철학관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고, 확신함 속에서 다닐 텐데, 어찌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쉽게 찾아가는지...
여러분, 주변 사람 생각말고, 여기에 있는 우리부터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그 분은 조용하게 우리의 모든 대화를 들으시며, 우리의 생각을 아십니다. 그러니, 그러한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한 것,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것,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것 하나도 빠짐없이 다 털어놓으시길 바랍니다. 그 분께 말함에 있어서 미사려구로 포장하지 마세요. 그냥 속에 있는 것 그대로 풀어놓으시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이러한 만남이 있어야, 하나님에 대한 확신도 생기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생기고,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도 생기고, 하나님에 대한 열정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채워지지 않겠습니까?
딤전 2: 5을 보시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신성의 충만함을 소유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확실하게 거하며, 유일하신 중보자로 모시고 좇음으로, 우리의 확고부동한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 확실하게 거하는 성도는, 세례의 의미를 바로 알고, 진실한 신앙고백을 통해 성례에 참여하게 됩니다.
본문 11 - 12절을 보시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합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에게 주신 표식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할례가 목숨보다 중요합니다. 그들에게는 마음의 중심보다도, 육체에 있는 할례가 더 중요합니다. 마치, 예배에 있어서, 설교보다 다른 그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그토록 목숨보다도 더 중시 여기는 할례의 효력을 중지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육체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를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육의 몸을 벗는 것”이라며,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례”입니다. 세례는 물 속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 속에서 나의 옛 사람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변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세례가 상징하는 의미를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죄 씻음’이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그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는 것”이 됩니다. 즉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의 저주에 대해서, 완전히 죽어 장사 지낸 바 되었고, 반면에, 우리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되는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소중한 것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세례식에선 꼭, 여러 성도들 앞에서 개인의 신앙에 대해 문답을 합니다. 이는, 결혼식에 있어서 주례자의 주례사가 마치면, 결혼서약을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헌데, 이렇게 세례 받을 때에,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고백하고 서약하는 내용에 대해선, 몇 주만 지나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경우에는 세례를 받는 바로 그 순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를 봅니다.
여러분께선 혹시, 세례받을 때 했던, 그 서약의 내용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알며, 그 진노를 면치 못할 줄 알고, 오직 그의 크신 자비하심에서 구원얻을 것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죄인의 구주가 되심을 믿으며, 복음에 말한 바와 같이 구원하실 이는 오직 예수님뿐이라고 알고, 믿으며, 그에게만 의지할 것과 성령님의 은혜만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고, 모든 죄악을 버리고, 그의 가르침과 본을 따라 살 것과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며, 교인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바르게 행사하기를 서약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이러한 신앙고백과 서약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이단의 감언이설에 미혹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성도임을 기억하시고, 이단이든, 악한 사탄의 미혹에 흔들리지 말고, 강건함으로 믿음을 굳게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확실하게 거하는 성도는, 믿음의 확신 속에서 십자가의 승리를 믿습니다.
본문 13 - 15절을 보시면,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육체에 할례도 받지 않아, 육신으로는 살았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자이며, 또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단순히 용서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조문으로 우리를 죄인이라 선고하는 판결문을 아예 파기시켰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죄의 노예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로써,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하던 그 율법의 증서, 그 율법의 고발, 그 율법의 정죄 모두가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깨끗이 해결된 것의 증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은혜와 함께, 우리로 하여금 이단에 끌려가지 않게 만드는, 또 하나의 소중한 요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통해 얻게 되는 ‘삶의 체험’입니다. 즉 “정사와 권세를 완전히 벗기고 밝히 드러나게 하는” 십자가의 승리를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제적으로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확신’과 ‘지속적인 삶의 체험’가운데 살고 있는 성도가 어찌 이단의 감언이설에 넘어가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어떤 이단이 가지기에, 그리고, 그러한 교주가 어디에 있어서, 그들의 미혹에 넘어가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이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머리로만 아는 교인이나, 세례는 받았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확신이 없는 성도들은, 그야말로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이단의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에덴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하와가 왜? 넘어갔습니까? 하나님께선 분명히,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하시고,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는데, 하와는 이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로 말한다면, 확실하게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일평생했다해도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이단이 제시하는 간교한 물음에 간단하게 설득당하고 말 것입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삶 속에서 한 번도 겪지 않았다면, 이단이 하는 말에 우리는 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골로새 교회를 무너뜨리려 했던, 그 철학의 헛된 속임수로 우리에게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그 어디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확신’보다 더 큰 은혜는 없으며, 세상의 어떤 사람도 ‘십자가 안에서의 승리’보다 더 큰 승리를 우리에게 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함으로, 끝까지 요동치 않고 천국의 자리에 입성하실 때까지 달려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단의 감언이설에 넘어가거나, 주변 환경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우리의 믿음이 쉽게 무너지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또,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리스도 주변’에 있고, ‘교회 주변’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으로 확실하게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확실하게 자리 잡은 성도’들은 절대로 이단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만을 유일하신 중보자로 모시고, 그 분으로부터 충만함을 공급받으며, 진실한 신앙고백을 하며, 성실히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신다면, 믿음의 확신 속에서 십자가의 승리를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도는, 오늘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이단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노략’당하지 않으며, 더욱 철저하게 ‘그리스도만을 좇는’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성탄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서 출생하여, 죄 가운데서 죽어 영원한 지옥에 들어갈 우리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애 최고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잊지 못할 생애 최고의 선물을 받은 값지고, 고귀한 날임을 기억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