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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벽 앞에서
장지에서 집으로 와, 잠자고 깨었을 때 꿈도 흔적도 없는 아침이 돌아와 있었다. 이곳 너머의 그 어느 곳, 어느 것도 믿지 않음도 않음이려니와 종결, 종지, 종언 흰 벽을 마주한다. “어디에 계세요, 아버지?”라고 물을 수 있는 붉은 심장이 있다면 ―(흰 벽) 김소영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손은 차가웠고, 검지와 중지는 구부러져 있었다. 내 손의 온기를 그 손에 보내며 나는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을 한순간 바라기도 했다. 차마 이불을 벗겨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살굿빛 이불은 낯설었다, 아버지가 ……. 한 시간가량이 흐르고 나서 동생들이 도착했다. 막내 동생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이불을 걷어 얼굴을 보고 앰뷸런스에 아버지를 모셨다. 나는 아버지의 뺨에 손을 얹었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남해, 소나무, 대나무 우거진 송천리로 귀향한 이십여 년의 세월과 그 이전, 그리고 부녀의 연이 영면의 시간, 그 시간 없는 시간 속으로 접혀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앰뷸런스가 떠난 후 , 나는 대나무에 바람 지나는 소리를 들으려 했다. 집 앞, 건기의 작은 개울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추석 무렵, 경상대 병실의 아버지를 뵌 것이 마지막이었다. 세 번째 항암치료 직후였다. 백발의 머리카락 몇 가닥, 그러나 아버지는 유쾌하셨다. 반드시 암을 이겨내시겠다는 결의도 결의지만, 위중한 병을 얻고 보니 여든이 넘은 삶에도 배울 것이 있다고 “내가 몇 년간 ‘까불고’ 살았다.”고 말씀하셨다. 병중임에도 보름달같이 밝은 화색이 돌아, 나는 별 노력 없이도 고승처럼 보이신다며, ‘고승 룩(Look)이시네요. “라고 버릇없는 농담을 했고, 아버지는 하하하 웃으셨다. 2인실인데 옆 병상이 비어 한가로웠고, 창 너머로 푸른 남강이 보여 더욱더 안심이었다. “아버지, 병실에서 강이 보여 좋아요.”
그 이전 병문안은 좋지 않았다. 집에서 경상대 암 병동까지 아버지 차를 몰아 함께 갔다. 송천리에서 진주로 난 새 길에는 통행이 드믈어서인지 감시 카메라가 많았다. 아버지는 정확히 어떤 카메라가 작동하고 어떤 카메라가 작동하지 않는지 알고 계신 듯했다. 빨간불인데도 여기 카메라는 가짜이니 서지 말고 가라고 하시고 또 어떤 곳에서는 꼭 멈추라고 당부하셨다. 이건 내가 아는 아버지다. 아버지와 나는 불법과 준법을 오가며 40여분을 달려가 병원에 도착했다. 혈액 검사 등이 끝난 후에는 휠체어를 가져오라고 하시더니 거기에 앉으셨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병동의 복도를 걷게 되었다. 아버지의 휠체어를 밀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이가 드신 후에도 어디 외출을 함께 할 때 내가 운전을 한다고 열쇠를 주십사 해도 굳이 당신이 운전을 하셨기 때문이다.
민망해진 나는 암 병동으로 가기 위해 외부로 나갈 때, 이제 그만 휠체어를 돌려주고 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지럽다고 계속 타고 가시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8월 한 여름, 암 병동으로 가는 짧은 길, 그 불볕더위 속에서 나는 내가 알고 있던 아버지의 이름이 휘발되는 것을 느꼈다. 아찔했다. 그러나 암 병동의 간호사에게 내가 김 자, 열 자, 규 자라고 아버지 이름을 말하자 아버지는 김은 성이기 때문에 열자, 규 자라고만 하는 것이라고 수정하셨다. 아버지의 이름은 다시 돌아왔다. 암 진단 직전의 6월 무렵, 평상시와 다름없는 내 안부 전화에 아버지는 “소영아,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세대의 다른 어른들처럼 엄격한 분이셨던 당신이 쉰이 넘은 딸에게 평생 처음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신 것이다, 물론 좋았지만 순간 근심도 했다. 왜 안 하시던 말씀을…….
“아버지 사랑해요.” 라고 화답하는 대신 나는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사실 아버지는 성장기의 내게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 존경했지만, 어떤 질문이 그 관계를 맴돌곤 했다. ‘아버지, 왜 그러셨나요. 유년 시절의 아버지는 왜 그렇게 엄격하고 냉정하셨나요?’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길을 걷는 것이 소원이었다. 멀찌감치 빠른 걸음으로 가는 아버지, 잘못의 시시비비를 나 자신에게 거의 매일 가리게 하던 분, 유년을 지나 10대 후반이 되어 나는 아버지의 세계를 떠나고자 나만의 책, 영화의 세계로 들어갔다. 이른바 전형적인 문학소녀로 성장했음에도, 이후 연극과 영화 쪽으로 향했다. 내게 가장 익숙한 아버지의 모습은 물론 연구를 하시거나 책을 읽으시거나 글을 쓰시는 것이다. 한여름 거실의 앉은뱅이책상, 34도쯤의 열기, 그러나 아버지는 꼼짝도 않고 원고지를 채우셨고, 등 뒤로 땀이 쉼 없이 흘렀다. 내게 이 장면은 글짓기 노동의 원형처럼 새겨져 있다. 힘들 때마다 나는 이 장면을 슬며시 꺼내보곤 한다. 높은 온도, 흘러내리는 땀, 원고지 위 글짓기. 또 다른 모습은 냉정이다. 유년과 10대, 나는 아버지와 대화한 기억이 없다. 과제로 주어진 것에 대해 물어도 아버지는 모른다고 대답하시곤 당신의 일을 계속하셨다. 그 과제는 바리데기 신화에 관한 것이었고, 이후 나는 그 주제에 관한 아버지의 많은 글들을 당신 서재에서 발견했다. 이후 변영주 감독 등과 여성 영상 모임을 하면서 그 이름을 ‘바리터’로 지었다. 물론 이것이 다는 아니다. 아버지는 형식적으로는 완벽한 배려를 하시곤 했다. 중, 고등학교 시절 병약한 내가 아침마다 늦잠을 자면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주시고 주말에는 공기 좋은 곳으로 드라이브를 시켜주시곤 했다. 하지만 대화는 없었다. 아버지는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아, 아버지가 위암 진단을 받으셨을 때, 내게 당신을 가장 닮은 자식이라고 말한 적은 있으셨다. 이후 여러 해 지나 내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글 쓰는 사람이 되어 아버지처럼 정신없이 바빠지면서, 중,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내게 보여준 배려가 작은 몫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단아함과 배려, 이런 좋은 사례들마저 아버지 주변의 어떤 냉정한 기운에 의해 슬며시 사라지곤 했다. 나중에야 나는 아버지의 냉정함과 엄격함이 연좌제에 묶인 채 동생들과 홀어머니, 많은 친척들을 돌보기 위해 매진하면서 가난하게 국문학자로 성장해야 했던 ‘아버지 없이 자란 아버지’가 세상과 겨누기 위해 입어야 했던 피르소나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쓴 당신의 성장에 관한 글을 읽은 후의 이해다. 아버지가 할머니의 고향인 경남 고성으로 내려가시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시간을 내주는 일이 많이 너그러워지신 것이 사실이나 가족과 엄마에게는 그러지 않으셨다. 예외적인 대상은 당신의 첫 손자이며 내 아이인 준수, 아버지는 준수에게 자애로운 할아버지셨다. 다른 손자, 손녀들에게도 사랑을 쏟으셨다.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큰 변화는 엄마의 병이 깊어지시면서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최선을 대해 엄마 병구완을 하시기 시작했다. 병 때문에 한때 우울증 증세가 깊어져 외출을 하지 않으시려는 엄마를 대신해서 장을 보는 일은 물론이고 갖은 집안일을 하셨으며, 마음을 밝게 해주는 젊은 시절과 좋은 시절의 이야기를 엄마에게 끊임없이 들려주셨다. 그리고 평생 보지 않으시던 텔레비전 드라마를 엄마와 말동무하기 위해 함께 본다면서, “내가 드라마를 다 본다. 참 뜻밖이지? “하고 묻기도 하셨다.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된 것이 이 시점부터다. 엄마에게 헌신하고 몸을 낮추는 아버지는 내게는 작은 경이감의 대상이 되었다. 여든 가까이 되어 자신을 급진적으로 바꾸시는 노학자, 집에 가면 아버지는 차를 내오고, 주스를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시골 집채만 한 큰 파리를 잡는 등 여든이 넘은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 엄마 수발을 드셨다. 그러면서도 매년 몇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하셨다. 아버지의 책의 내용도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출판 기념 강의를 들어 보아도 삶에 대한 지극한 겸허와 존중을 느낄 수 있었다. 이후 자주 안부 전화를 드리곤 했다. 쉰으로 다가가는 나의 삶에도 개인적으로 또 공적으로 광풍이 몰아쳤는데, 아버지와의 짧은 대화를 나누고 나면 나는 맑은 기운을 얻곤 했다. 여든이 넘은 아버지와 지천명에 가까운 딸이 비로소 대화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부분 날씨 이야기거나 ― “서울은 추운데요.”(딸) “고성은 참 따뜻하다. 정말 내려오길 잘했다. 너도 내려오려 무나.”(아버지)― 뭐 필요한 것이 없으시냐는 딸의 물음에 그러면 빵이나 커피, 약 등을 이야기하시는 아버지. 아버지는 불면증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셨다. 나는 인터넷에서 불면증 예방에 효능이 있는 것들을 검색하여 아버지께 택배로 보내기도 하고, 운동 처방을 전달하기도 했다.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유품을 살펴보다가 수면용으로 보낸 허브 오일 병이 바닥난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수영을 좋아하시는 것이 생각나 수영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자 삼천포의 수영장에 가셨다. 어제 수영장에서 다녀와 잠은 좀 잤는데, 손과 팔에 힘이 빠져 예전처럼 할 수는 없었다고, 다시 가긴 어렵겠다고 이야기하셨다. 암 진단 받기 직전의 대화다.
대부분 전화대화는 “우리 각자 열심히 일하자.” 라는 아버지의 당부로 끝났는데, 나는 사실 이 대화의 끝에 슬며시 웃곤 했다. 당대의 문필가 중 한 분이실 아버지의 끝말로는 좀 평범한 까닭이었는데, 유고인<<아흔 즈음에>>를 읽고 그 말이 공명하는 곳을 알았다.
“언제나 오직 일하라! “ 조각 작품<생각하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는 로댕이 그를 섬기며 비서 노릇을 하고 있던 우리 시대 최상의 시인인 릴케에게, 사뭇 젊은 데다 무명이던 릴케에게 했다는 이 말이, 그래서 릴케가 평생 마음 속 깊이 간직했다는 이 말이, 내가 내게 다짐 두는 말이 된 지도 오래다.
글을 쓰는 오늘이 11월 19일, 아버지가 영면하신 날이 지난달 10월 22일. 화요일이었다. 월요일 저녁에 전화를 했더니 엄마는 아버지가 백혈구 주사를 맞은 후라 피곤하시다고 하셨고, 화요일 아침 9시 무렵 전화를 드리니 아직 주무신다고 하셨다. 이렇게 늦게까지 주무신 적이 없는데……. 난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숨을 쉬지 않는다고 엄마가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난 여섯 시간을 달려 경남 고성으로 갔고, 앞에서 말한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면을 했다.
내려가면서 나는 아버지의 제자이며 내게는 언니 같은 시인 김승희 교수와 통화하고, 베네틱스 수도원의 김종필 신부님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아버지께 세례를 주신 사제이고 , 또 아버지와 친절한 사이기도 하셨기 때문이다. 신부님은 전화로 알겠다고 침착하게 말씀하셨다. 동생들이 아버지와 함께 앰뷸런스를 타고 서울로 떠난 후, 나는 엄마를 위로하다가 새벽 3시 30분경 서울 영안실로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집 앞 대나무 앞으로 나는 바람을 느끼며 나갔다. 숨을 깊이 들이켰다. 달빛이 제법 밝았다. 훅 하고 숨을 내뱉는데 개울을 건너는 작은 다리에 서 있는 차가 보였다. ‘이웃에 온 사람인가?’ 시동을 걸고 차를 후진시키는데 누군가가 내 차에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일단 후진을 한 후 차에서 내렸다. “신부님?” 새벽에 화순에서 고성까지 차를 몰아 도착하신 것이다. 신부님은 집 안으로 들어가 미사를 하셨다. 이후 우리는 화순과 서울을 향해 집을 떠났는데,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송천리에서 대가면으로 넘어가는 바다가 보이는 고개 위에서 신부님은 바다 쪽 사진을 찍고 계셨다. 달빛이 더 밝았다. 그 뒤 장지에서의 미사, 다시 집을 방문하셔서 엄마와 함께 드린 삼우제 미사까지 신부님은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성심성의로 지켜주셨다. 감사한 일이다. 김종필 신부님이라는 존재로 나는 아버지가 얼마나 철저하게 죽음, 영면의 길을 준비하셨는지 더 깊이 알 수 있었다.
이후<아흔 즈음에> 유고를 읽었다. 아버지의 노년의 시간.
시간을 지켜 할 일이 없다보니, 시간에서 놓여 마음이 편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할 일이 없다보니 시간관리가 난감하다. 그래서 시간이 말썽을 피운다. 시간이 무슨 구렁이처럼 온 마음을 휘감고는 죄여든다. 스물네 시간이 너무나 지루하다 못해 역겹기도 하다.
이런 구절에서는 아버지가 노년에 가 닿은 존재와 시간의 끝없는 심연이라는 비/장소, 비/시간에 대한 절감 때문에 울었다. 장례를 치른 이후 눈앞에 무엇인가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이물감에 안과에 갔더니 ‘비문 증’이라고 했다. 비, 문, 나비가 날아다닌다는 뜻이란다. “뜻이 좋네요.” 차료 후에도 여전히 눈앞에 무엇인가가 어른거렸으나 나는 의사의 언어구사를 칭찬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 증세가 나타났다고 하자,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지만 슬픔의 눈물이 눈을 급격히 건조하고 상하게 한다고 했다. 그는 안구 건조 증을 위한 인공 눈물을 처방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유고는 내게 슬픔의 눈물만 준 것이 아니다. 나는 사실 좀 웃기도 했다. <<아흔 즈음에>>에 담긴 아버지와 함께 수영한 물뱀, 오징어를 훔쳐간 족제비, 그리고 먼 바다로 돌려보내진 복어들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들은 마치 사자를 위해 새겨진 신전의 수호신들처럼 나를 즐겁게 했다.
그러나 내가 웃은 다른 이유는 물뱀, 족제비, 복어는 있지만 나를 포함한 아버지의 자식들, 삶의 마지막에 그토록 헌신하셨던 엄마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고향 포구나무로 시작해 당신의 어머니가 넘던 고개 ‘등산재’로 돌아온 자신의 이야기로 끝난다. 섭섭할 법도 하건만, 나는 아버지의 이러한 독존과 기개가 좋고 자랑스럽다. 그것을 공감하고 절감한다. 아버지로부터 은연중에 받은 유산 ― 죽어가는 것, 죽은 것을 살아나게 하고 활발하게 만드는 글쓰기 혹은 창작 노동에 대한 믿음 ― 이 내게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예컨대 아버지가 자주 인용하시는 윤동주의 시구,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유고에는 기울어가는 노년의 현존재와 고독하게 마주치고 대면했던 아버지의 단독자로서의 삶이 있다. 그러니 물론 이바지이기도 하셨지만, 당신은 학자요, 당신 말대로 글 짓는 노동을 평생 업으로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유고가 책으로 간행된 것을 독자들과 함께 빨리 보고 싶다. 책을 발간하는 휴머니스트에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글을 남기신 김열규 교수께 감사와 아버지 살아생전 표현하지 못했던 사모를 바친다. 아, 명랑한 전화 통화를 이어나가고 싶다. 네, 아버지 전대요…….
-김소영, 큰딸,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김열규 교수님의 유고집 “아흔즈음에”에서 딸 소영씨가 추모의 글.>
삶을 가르쳐주신 스승
이런 글을 언젠가 한번은 쓸 줄 알았지만, 그때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도 선생님이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 선생님은 언제 어디서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직도 가끔씩 찾아오는 아리고 시린 마음을 다잡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82년이었다. 서강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한 그 이듬해였다. 1981년 선생님은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계셨기 때문에 뵐 수가 없었다. 물론 선생님과의 인연은 부산대학교 학부 3학년 때 서강대학교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때부터 내 삶은 선생님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 현재 부산외국어대학교 최경환 교수와 함께 선생님 연구실의 조교를 했다. 그때는 엄격하게만 보이시던 선생님이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공부면 공부, 생활이면 생활 모든 면에서 그랬다. 아마 그 당시 다른 학생들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선생님의 엄격함 속에 감추어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당황스러운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은 선생님이 강의가 없는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최경환교수와 함께 선생님 연구실에서 느긋하게 바둑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선생님이 연구실로 들어오시는 게 아닌가. 서둘러 바둑판을 접으려는데 “아냐, 계속 둬!” 라고 말씀하시면서 옆 소파에 앉아 “이 친구, 거기 젖혀야지!” 하며 훈수를 두시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 사건은 사건 축에 끼지도 못한다. 어는 나른한 늦은 봄 날 오후, 그날도 선생님은 강의가 없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은 후 연구실 소파의 방석을 바닥에 깔고 누워 달콤한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또 선생님이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게 아닌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우리를 보시고 선생님은 “그냥 자!” 하시면서 되돌아 나가셨다. 이 사건 이후로 엄격함 뒤에 가려진 선생님의 따뜻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석사과정을 졸업할 무렵의 일이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선생님을 뵈러 댁으로 갔을 때 사모님이 졸업 축하의 뜻으로 옷감 한 벌을 주려고 하셨다. 그때 하신 선생님의 말씀, 두고두고 가슴에 담아두고 아직 직장이 없어 돈이 없을 테니 옷감은 박사 졸업할 때 주고, 이번에는 백화점에 가서 양복 한 벌 사주도록 해. “ 그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 이게 스승의 마음이구나. 아, 이런 게 스승의 제자 사랑이구나.’ 그 양복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소녀의 흙탕물 배인 분홍 스웨터가 되어 옷장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선생님의 제자 사랑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한번쯤은 있을 법한 일인데도 당신의 제자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로부터 3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기도 하고 길 다면 긴 시간이기도 할 법하다. 선생님이 1932년생이시니까 ‘32’라는 숫자가 지금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더욱 아름답고 지울 수 없는 인연은 선생님이 경남 고성군 하일면 송천마을에 정착하시면서 시작되었다. 거의 23년에 걸친 세월이다. 아무래도 부산에서 가까울 뿐만 아니라 2006년부터 2007년까지 선생님 댁 옆집에서 1년간 머물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 되고 말았으니……. 송천마을 뒷산은 자태가 꽤 아름답고 그다지 높지 않은 좌이산이다. 이 산에 오르면서 이건 구절초고 저건 쑥부쟁이고, 이건 화살나무고 저건 팽나무고, 이건 황조롱이고 저건 박새고, 이건 고란초고 저건 인동초고 하시며 온갖 야생화와 나무, 새, 풀의 이름을 줄줄이 외시던 선생님. 산 정상에 올라 자란만의 아름다움에 취하시던 선생님, 가룡곶에서 바라보던 자란만이 좋다고 몇 번이고 차를 몰아가시던 선생님. 일몰이 아름답다고 그 추운 겨울에도 동화리 바닷가에 가시던 선생님. 봄이면 냉이며 쑥, 고들빼기를 캐고 두릅, 엄나무 잎을 따러 좌이산과 동산재를 수시로 오르시던 선생님. 가을이면 노랗게 익은 탱자와 유자를 따기 위해 뒷산에 오르시던 선생님. 글을 쓰시다가 허리가 아플라치면 정원에 나가 잔디 속에 숨어있는 잡초를 남김없이 뽑아내시던 선생님.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이나 하와이언 코나 커피 한 잔에 감탄사를 연발하시던 선생님. 말러 교향곡을 들으면서 심연으로 빠져들곤 하시던 선생님. 담양 순대, 통영 일식 등 이름난 맛 집이라면 한달음에 찾아가시던 선생님. 이럴 때면 으레 들려오든 목소리 “곽교수~”. 새삼 그립고 또 그립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자칭(自稱) 그리고 타칭(他稱)나는 선생님의 영원한 ‘운전병’이었다. 다른 차가 있어도 어김없이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셨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일로 서울, 대구, 경주, 청주, 강릉, 광주, 전주, 고창, 장수, 담양 등등 선생님을 모시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선생님은 늘 자랑하듯이 당신을 지리에 밝다고 ‘도사(道士)라고 하셨는데 , 이쯤 되면 나도 ’신도사(新道士)‘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특히 지리산 일대, 그러니까 산청이나 함양 일대를 누빌 때가 잊히지 않는다. 봄이면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을 들으면서 신록의 푸릇함에 청춘이 되고, 가을이면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면서 단풍의 쇠잔함에 노년이 되던 선생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제는 선생님의 그런 모습들을 뵐 수 없지만 , 돌이켜보면 그때 선생님의 그런 모습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이라든지 삶의 의미를 배웠던 것 같다. ‘아, 우리 주변의 자연이 이렇게도 아름답구나! 아, 이런 삶도 있구나!’ 남은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무언의 가르침을 받은 것 같다. 지금도 선생님과 함께 했던 곳을 지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지만, ‘삶의 진지함’이란 무엇인지, ‘삶의 성실한’이란 무엇인지 그때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공부에 대한 가르침도 빼놓을 수 없다. 선생님의 글쓰기는 크게 세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첫째는 학술적인 글쓰기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선생님은 ‘한국학의 대가’, 한국학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굳이 필요 없는 분이다. 일찍이 한국, 한국인, 한국문화의 원형질을 동서양의 철학, 문학, 미학, 민속학 등을 꿰뚫으면서 이렇게 정치 하에 펼쳐 보인 예는 없었다. <<한국민속과 문화연구>>(1971), <<한국 신화와 무속연구>>(1977), <<동북아시아 샤머니즘), <<기호로 읽는 한국 문화>>(2008),등을 통해 신화와 민속, 문학, 샤머니즘 등을 텍스트로 한 학술적인 글쓰기의 진수를 보여주셨다. 박사과정을 졸업할 무렵의 일이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이나 신화를 새롭게 공부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언젠가 통일이 되고, 그리고 참다운 데탕트 시대가 열리면 정신적 고향을 찾아 시베리아 일대를 방황하고 싶은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 “ 이것은 선생님의 버리지 못할 꿈이었다. 러시아어 공부를 시키신 것은, 당신이 미처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꿈 한 자락을 내게 떼어 주신 셈이다. 미력하지만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러시아 과학원 시베리아 지부 고고학, 민속학 연구소에 다녀오고, 볼품없는 책이지만 <<시베리아 만주 -퉁구스족 신화론>>(2011)이란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때 써주신 발문에 “곽 교수가 나를 두고 청람지미(靑藍之美)를 이룩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라는 글귀가 있다. 하지만 어리석고 둔하기 짝이 없어 그 꿈을 제대로 이루어드리지 못했다. 부끄럽고 죄송스런 맘 어디에 비길 수가 있을까. 하지만 선생님의 이런 꿈과 기대가 몇 번이고 공부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나를 다잡아주었음은 분명하다. 둘째는 대중적인 글쓰기다. 선생님은 한국인의 원형과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조금은 쉬운 문체로 일반 독자에게 펼쳐 보이셨다.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1997),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2001), <<왜 사냐면, ....웃지요>>(2003), <<한국인의 화>>(2004), <<한국인의 신화>>(2005), <<한국인의 혼례>>(2006), <<한국인의 자서전>>(2006), <<한국인의 에로스>>(2011) 등에 이르러 한국인의 원형과 한국문화의 정체성이 정립되었다고 말할 만하다. <<신 삼국유사>>(2000), <<한국인의 돈>>(2009) 등을 공동 집필하면서 선생님의 이런 작업에 가끔 동참하기도 했다. 셋째는 자전적인 글쓰기다, 이 부분을 쓰자니 또 가슴이 아려온다. 자주 곁에서 뵈었던 선생님의 인간적인 모습과 맞닿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때인가 선생님은 자주 당신의 옛 추억을 반추하곤 하셨다. 댁에 계실 때든, 차를 타고 가실 때든 늘 그렇게 하셨다. 그럴라치면 웬일인지 선생님은 약간 상기된 표정을 짓기도 하셨다. 왜 그땐 그걸 몰랐을까. 그게 선생님의 삶의 갈무리였다는 것을……. 그래서 투병주이면서도 그토록 자전적 글쓰기에 매달렸다는 것을……. 이러고도 쉰 줄에 들어서고도 절반을 넘긴 제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선생님의 자전적 글쓰기는 선생님의 마지막과 함께했던 글쓰기다. 그러기에 더욱 애틋하게 다가온다. <<김열규의 휴먼드라마: 푸른 삶 맑은 글>>(2011), <<늙은 소년의 아코디언>>(2012) 등 은 그야말로 ‘한국인의 자서전’이 아니고 ‘선생님 당신의 자서전’이다. 유년 시절의 아련한 기억, 학창 시절의 추억, 교수 시절의 경험,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모님과의 만남 등이 사무친 그리움으로 그려져 있다. 물론 이런 내용은 지금껏 선생님과 함께하면서 익히 들었던 이야기다. 어쩌면 이것은 남들이 누리지 못한 나만의 호사 아니면 특전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 출판되는 유고집<<아흔 즈음에>>(2013)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이 책은 인생 아흔을 바라보며 저녁노을 같은 마무리로 여든 넘은 나이를 가다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마음속에 있던 갖가지 상념을 통해 당신이 그토록 원하셨던 삶을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을 듯하다. 선생님은 최근에 자주 입원을 하셨다. 그때 병실을 지키며 몇 번 밤을 지새운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으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다가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해, 또 외로움에 대해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천주교 세례를 받은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이런 것들이<<아흔 즈음에>>에 고스란히 담겨 있을 줄이야……. <나이 든다는 것>,<죽음을 생각하면서>,<글쓰기에 기대어>,<그리운 시절>,<함께 산다는 것>,<자연 품에서>가 이 책의 내용이다. 선생님은 ‘나이가 들면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외로움과 ‘죽음’에 대해 상심하신 듯하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예감하셨던 것일까? 하지만 선생님이 어떤 분이신가, 결코 거기에 굴복할 분이 아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나이 들면서’ 찾아오는 외로움을 이기고 또 ‘죽음’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 쉼 없이 ‘글쓰기’에 전념하셨던 것 같다. 오죽하면 병실에 계실 때도 새롭게 집필할 책을 구상하셨을까. 이와 함께 ‘자연 품에서’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을 염원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삶을 갈무리하시고 싶은 소망이 여기 오롯이 녹아 있는 것 같아 눈시울이 붉어진다. 하지만 이런 삶을 실제로 누리신 분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였으리라! 한없는 사랑과 가르침 베풀어 주신 선생님. 그 사랑과 가르침, 아직 다 보답해드리지 못했는데 서둘러 천국으로 떠나신 선생님. 지금 계신 곳은 따뜻한가요? 부디 천주(天主)의 품에서 시름과 회한 다 내려놓으시고 평안 하소서!
-곽진석, 제자,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