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왓칭과 야생동물 관찰이 적합한 '다락방'
내가 세들어 살고 있는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집은 2층에 작은 다락방이 있다. 나는 이 작은 다락방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다락방으로 올라갈 때는 저절로 고개를 숙이고 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고 올라간다.
그렇지 않으면 천장에 머리를 찧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사를 와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를 찧곤 했는데 지금은 숙달이 되어서 아예 고개를 수그리고 다니기 때문에 머리를 찧을 일은 없다. 나는 다락방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르내리며 저절로 겸손을 배운다.
다락방은 나만의 성스러운 공간이자 놀이터다. 나는 다락방에 작은 서재를 만들어 놓고 거의 이 방에서 시간을 보낸다. 다락방에서 아침저녁으로 명상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음악도 감상한다.
"오직 나만이 아는, 나만을 위한 신성한 공간을 만들자 사는 일이 점점 성스러워졌다. 그 신성함과 경건함이 내가 만들고자 하는 영화의 창조성을 길어 올리는 원천이었다."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줄리아 카메론의 이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 한다. 그녀는 혼자서 묵상을 하고싶다면 자그마한 창틀도 멋진 공간이 될 수 있다고 격려한다. 작은 다락방에 앉아 나왕 케촉의 음악을 들으면 마음속에 평화의 문이 저절로 열리는 것 같다. 다락방은 내 영혼의 쉼터이다.
다락방에는 남쪽과 서쪽에 작은 들창문이 하나씩 나 있다. 나는 이 들창문을 통해서 임진강 위를 나는 새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 추운 겨울, 다락방은 밖에 나가지 않고도 버드와칭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남쪽 들창문을 통해서는 주로 버드와칭과 일출을 감상하고, 서쪽 들창문을 통해서는 일몰과 지는 달을 감상하기도 한다. 심심치 않게 나타나는 야생동물을 관찰도 한다. 때로는 누워서 별을 관찰하기도 하고, 재수가 좋은 날은 달빛에 비추이는 기러기들의 비행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기도 한다.
다락방 창문 앞에 나타난 간 큰 야생 고라니
다락방 서쪽에는 밀을 심어놓은 이장님의 밭이 있는데 고라니들이 심심치 않게 내려온다. 밀밭으로 내려오는 고라니들은 간이 어지간히 큰 녀석들이다. 나는 고라니를 찍으려고 몇 번을 시도해 보았는데 녀석들이 어찌나 의심이 많던지 카메라를 찾는 동안 '부스럭' 하고 작은 소리만 나도 곧 줄행랑을 치고 만다. 녀석들은 제 방귀소리에도 놀라 걸핏하면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소심한 놈들이다.
그래서 나는 아예 서쪽 들창 가에다가 삼각대를 받쳐놓고 셔터만 누르면 찍을 수 있도록 카메라의 포커스를 맞추어 놓았다. 그리고 수시로 서쪽 들창문을 관찰한다. 때로는 작은 망원경을 통해 녀석들을 찾아보기도 한다. 녀석들은 주로 해가 떨어질 무렵 주위가 어스름해지면 슬그머니 금굴산에서 밭으로 내려온다.
오늘도 혹시나 하고 들창문으로 조심스럽게 가보았더니 고라니 한 마리가 밀밭에서 슬금슬금 풀을 뜯어먹고 있지 않은가! 나는 재빨리 카메라의 앵글을 조정하며 셔터를 눌러댔다. 다락방에서 고라니가 있는 곳까지는 30미터는 족히 넘은 거리여서 선명하게 찍기는 어렵지만 하여튼 고라니를 찍는데 성공을 했다.
회색 털에 간혹 까만 점이 있는 녀석은 고라니치고는 꽤 큰 녀석이다. 녀석은 어찌나 의심이 많던지 한 번 풀을 뜯어먹고 주위를 살피기를 반복했다.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풀을 뜯던 고라니는 카메라의 셔터소리를 들었는지, 아니면 배가 불렀는지 슬금슬금 주위를 살피며 꽁무니를 빼면서 금굴산으로 사라져 버렸다.
농사를 망치는 고라니의 횡포
다음 날 마침 우리 집을 방문한 이장님에게 이 사진을 보여 주었더니 이장님은 고라니 치고는 너무 크다며 노루 같기도 하다고 했다. 이장님은 고라니 때문에 밭농사를 짓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고 한다. 산 밑으로 그물을 쳐 놓았지만 어떻게 뚫고 들어 왔는지 고라니들이 종종 밭으로 내려온다.
"아휴, 말도 말아요. 녀석들이 밤마다 내려와서 농사를 재다 망쳐놓고 말아요."
"망을 쳐 놓았는데도요?"
"어지간한 망은 소용이 없어요. 철조망도 뚫고 들어오는데요."
"아하, 그렇군요."
윗집 장 씨네 집 채소밭에도 고라니가 어찌나 극성을 부리던지 철조망을 이중 삼중으로 쳐놓고 있다. 아랫집 이 씨는 고라니 때문에 금년에는 야채 밭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씌울 예정이라고 한다. 모두가 고라니에 대한 피해의식이 상상외로 컸다.
얼핏 보면 고라니와 노루는 잘 구분이 안 간다. 인터넷을 뒤져 보았더니 몇 가지 구분 방법이 나왔다. 노루는 뿔이 있는데, 고라니는 뿔이 없다. 대신 수컷은 긴 송곳니가 길게 바깥으로 자라나 있다. 노루의 털은 황갈색인데 고라니는 회색이다. 노루의 몸집은 고라니보다 크다.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면 궁둥이가 보이기 마련인데, 노루의 궁둥이는 하얀 털이 나 있지만 고라니는 밋밋하고 회색이다.
이런 식별 방법을 인지하고 사진을 다시 보니 녀석은 고라니임에 틀림없다. 녀석의 털은 거의 회색이다. 돌아서서 사라지는 궁둥이 뒷모습에는 하얀 털이 없다. 사진을 확대하여 살펴보았으나 송곳니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암컷 고라니인 모양이다.
고라니들의 천국 DMZ
노루는 이 땅에 거의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지만 고라니는 번창을 하고 있다. 더욱이 DMZ 부근 임지강변은 고라니들의 천국이나 다름없다. 최전방 철책선 GOP인 태풍전망대나 열쇠전망대를 가다가 보면 고라니들이 도로에서도 가로질러 뛰어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될 정도다.
고라니는 영어로 'water deer'라고 부르는데 물을 좋아해서 생긴 이름이다. 평생 초식만 하는 온순한 동물로 수백만 년 동안 한반도의 생태계를 지켜온 터줏대감이다. 고라니는 전 세계에서 중국과 한반도에서만 사는 이 지역 고유동물이다. 중국계는 거의 멸종위기에 놓여 있지만 한국계는 개체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백두산사슴, 노루, 대륙사슴 등 다른 사슴과 동물들은 이미 자취를 감췄거나 개체수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고라니만큼은 여전히 꿋꿋하게 이 땅에 번식을 하고 있다. 이는 천적인 호랑이, 표범, 한국늑대가 멸종되면서 멧돼지, 청설모, 너구리와 더불어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학자들은 고라니를 한반도 생태계의 최후 생존자라고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만큼 강인한 고라니의 유전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람의 인기척이 거의 없는 이곳 동이리 임진강변과 금굴산은 고라니들이 아직은 많이 번식을 하고 있다. 해질 무렵 임진강 물가 갈대밭이나 금굴산에서 고라니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처음에는 "케에엥 케에엥"마치 가래 뱉는 소리가 매우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와 고양이 소리도 아니고 무슨 짐승 소리가 저리도 괴상하게 들리나 하고 의아해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소리는 고라니 소리였다. 어떨 때는 "웨에엑! 웨에엑!" 비명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여 섬뜩해 질 때도 있다. 어쨌거나 사람이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소리에 가까워 듣기에 편한 소리는 아니다.
이 땅에 고라니들은 점점 수난을 당하고 있다. 개발 붐을 타고 여기저기 온통 도로가 뚫리다 보니 로드 킬(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는 것) 건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더구나 고라니가 수렵 가능한 동물로 지정되어 있어 겨울철이면 고라니들은 수렵 마니아들의 먹이 감으로 포획되고 있다.
수난 당하는 고라니들
해마다 사냥꾼들이 늘어나고 있는데다가 농민들이 고라니들로 인한 농사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고라니 한 마리당 얼마의 포상금까지 지급하는 곳도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고라니들은 이 땅에 설 땅을 잃고 점점 위기를 맞고 있다.
인간과 야생동물이 공존 할 때에 생태계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개발과 무자비한 살육으로 이 땅에 야생동물들은 점점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져가고 있다. 그만큼 우리의 산야는 오염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야생동물이 살 수 없는 땅은 그만큼 자연도 건강함을 잃어간다. 또한 야생동물이 살 수 없는 땅은 그만큼 우리 인간들도 살기가 힘들어진다. 이 땅은 인간만이 살아가는 전유물이 아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의 공유물이다. 모든 생명체들이 균형을 이루며 공존할 때 토질은 건강해지고 인간도 건강해진다.
고라니들이 농사에 피해를 준다고 해서 고라니를 무작정 죽이는 권리가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을까? 인간은 더 많은 재산, 더 많은 먹이를 저장하기 위해 언제나 과욕을 부린다. 그러나 고라니는 절대로 먹이를 욕심내어 저장을 하지 않는다. 배가 고프면 그저 배를 채울 만큼만 풀을 뜯어 먹을 뿐이다.
"으헤엑! 으헤엑!" 나는 다락방에서 고라니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인간과 고라니의 공존관계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곳 동이리도 이제 더 이상 고라니들의 낙원이 아니다. 주상절리 변에는 평화누리길을 만들어 인간이 점유해 버렸고, 금굴산 밑으로는 전원주택 개발로 고라니들이 점점 발을 붙이기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
그래도 이곳은 아직 사람의 발길이 뜸하다. 주변에 전원주택이 몇 채 있기는 하지만 주말에만 가끔 찾아온다. 이 근처에 상주를 하는 사람은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이장님 집이 있고, 이쪽에는 우리 집 뿐이다. 아직은 다락방의 들창문을 통해 야생 고라니를 바라 볼 수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첫댓글 도명선생님과 찰라님께서는 향운사의 명조스님과 지상스님께
저를 맡겨두시고 신선이 되셔서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시는군요...
참으로 원망스럽습니다...!!
예전엔 비무장지역 내에만 고라니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비무장 지대에서 3인 1조로 매복스고 있다고 고라니 소리에
식은땀 흘린적 한두번이 아니라서 그 소리 지금도 기억납니다.
제가 사는 곳 가까운 송추쪽에서 가끔 볼 수있는 고라니들
먹거리를 찾아 점점 우리들 곁으로 다가오는 녀석들이 그저 신기하고 보기좋지만은 않네요
정말이에요.... 그만큼 산에 먹을 것이 없고 그들의 공간이 작아진다는 이야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