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라는 이름은 ‘야훼께서 급히 던지시다’란 의미예요. 토라라는 말이 ‘야라’ 동사라는 말에서 파생 되었는데 ‘야라’는게 던지다, 쏘다, 적중시키다 라는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야라’ 동사가 들어있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름에 야훼께서 던지시다, 얼마나 급박하게 그를 투입하신지를 볼 수 있고요.
출신은 아나톳인데 아나톳은 예루살렘하고는 각을 이루었던, 상충했었던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이 귀족적이고 전통적인 부분이 강조된 신학을 했던 게 제1이사야라고 말씀 드렸는데요. 아나톳은 변방신학이 강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북쪽신학하고 더 가까웠던, 예를 들어 우리도 신학을 하거나 인문학을 할 때 광주의 인문학 풍토랑 서울의 인문학 풍토랑 좀 다르거든요. 신학하면서도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광주가 갖고 있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 있는 거죠. 이런 거처럼 아나톳이라는 곳은 예루살렘과는 조금 달랐던 곳이고요. 일종의 재야파 사제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유명한 것은 예레미야의 고독과 고통이죠. 고독한 예언자로 유명하신 분이신데 왜냐하면 아무도 이해하거나 동의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신탁을 전하시는 겁니다.
쉽게 말해 더 이상 남쪽 유다는 이런 패러다임으로 갈 수 없다. 그러니 망해야 된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자기 나라가 망해야 된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누가 봐도 이해받기 어려운 상황인거죠. 더군다나 바빌론에게 점령당해야 된다. 이러니까 오히려 이 사람이 매국하는 자가 아닌가, 친 바빌론적인 이런 것으로 오해를 사게 됩니다. 주변의 가족, 친지들도 아무도 그를 이해 못해요.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표현까지도 그분의 고백록에서 자주 볼 수 있어요. 아주 고통스러운 예언직을 수행하고요. 결국엔 남유다가 바빌론에게 망하게 되는데 그러면 지금까지 사람들이 오해한대로 그는 친 바빌론적인 노선이었으니 바빌론이 이스라엘을 점령한 뒤엔 좋은 대접을 받으며 살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본인은 친 바빌론도 아니고 친 이집트도 아니고 오로지 하느님과 유착되어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면 하느님과의 계약에 성실할 수 있을까 이걸 이야기 한 것뿐이다라고 하면서 바빌론의 좋은 대접을 다 거절 합니다.
오히려 자기한테는 힘든 길이죠. 이집트로 끌려가요.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보호받지 못하는 친 이집트쪽으로 가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요. 돌에 맞아서 죽었다는 것으로 돼 있어요. 그런 고통스런 예언직을 수행하신 분이죠. 그러면 당시에 어떤 상황이 있었길래 이분이 이런 고통 속에서 유다인들에게 그런 말씀을 주고, 오해를 받고 결국 망하고 망한 다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지 당시에 역사적 상황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소개해드린 예언자들은 강대국이 아시리아였었어요.
그런데 이제 시대가 바뀌면서 아시리아는 점차 쇠락하게 되고 결국 아시리아가 바빌론에게 점령당하는 시기에 활동합니다.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대인 걸 볼 수 있는데요. 기원전 626년 신생 바빌론이 창건이 되고요. 612년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멸망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609년에 아시리아는 완전히 멸망당해요. 이제 고대근동의 최강대국은 신생 바빌론이 차지하게 됩니다. 제가 이사야를 설명 드리면서 아하즈왕과 히즈키아라는 왕을 설명 드렸습니다. 히즈키야때 독립운동을 시도하다가 투옥되고 좌절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왕권을 이어받은 사람이 므나세, 암몬 이런 사람들이예요. 그런데 므나세나 암몬은 아시리아가 워낙 강대했었기 때문에 자청해서 봉신국으로서의 모습을 보인 인물들이었고 그래서 예루살렘에서도 야훼제사가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아시리아의 신에 대한 제사가 드려지고 이런 때고요. 그래서 그 시기를 예언자들의 암흑시기라고 까지 합니다. 예언자들이 활동조차 못하는 거예요. 워낙 강하게 하느님을 잊은 시대가 되기 때문에요. 그런데 므나세, 암몬 이후에 등장하는 인물이 유명한 요시야라는 왕입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하고 그 이후에 활동했던 시기는 이후의 시대예요. 요시야, 여호아하즈, 여호야킴, 여호야킨, 치드키야-남유다의 마지막 왕입니다-. 이때 아주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이떄 예언자들이 활동을 했던 건데요. 므나세, 암몬 시대는 자기네 할아버지 아버지가 그만큼 친아시리아적인 정책을 선택했다는 건 뭐냐하면 너무나 강대해서 꼼짝도 못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요시야가 등극하면서 점차적으로 쇠락시기로 들어가는 거죠. 그러니 다른 나라에 신경을 못 쓰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신생 바빌론은 아직 큰 힘을 확보하기 이전이고요. 그러니 요시아는 유명한 신명기 개혁을 시도하게 됩니다.
제가 신명기 신학에 대한 강조점을 이 강좌 내내 강조했었는데요. 이 신명기 신학을 나름대로 개화시킨, 이스라엘 안에서 정착시킨 유명한 왕이죠. 근데 그가 609년에 모히토에서 전사하게 되요. 이때가 어떤 시기냐하면 아시리아는 점차적으로 망하는 추세이고 신생바빌론이 등장하는데 이 시기에 가장 남쪽에 있던 이집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죠. 그러니 그들은 자꾸 북진하려고 하는 겁니다. 강대국들이 워낙 쇠락한 상태에서 빨리 북진을 해야지만 이집트가 세력을 확보하게 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길목에 뭐가 있냐면 남 유다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치고 올라오는 이집트와 싸움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죽어요. 그래서 어린 아들 여호아하즈가 등극하게 되는데 이때 무슨 일이 벌어지냐 하면 이 아기를 느코라는 이집트 왕이 있는데 이 왕의 진지에 초대하는 겁니다. 초대를 했는데 단순한 초대가 아니라 거기서 여호아하즈를 폐위시킵니다. 폐위시키고 친 이집트적인 사람으로 여호야 킴을 등극을 시켜요. 이 여호야 킴때 예레미야와의 관계가 심각한 대립을 이루는 걸 볼 수 있는데요. 여호야킴은 친 이집트에 의해 등극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바빌론하고는 사이가 안 좋은 상황일 수밖에 없던 거죠. 그런데 이때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이집트가 유다의 왕까지 암살하고 처형하면서 자꾸 올라오는 거죠. 그러니 아시리아를 멸망시킨 신생 바빌론은 내려올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결국 바빌론과 이집트가 싸우게 되고 그게 605년에 있었던 카르크미스 전투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누가 이기냐하면 바빌론이 이겨요. 그래서 친이집트적인 배경을 가진 여호야킴은 이제 바빌론을 섬겨야 되는 상황이 오는 거죠. 그런데 끊임없이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아니다, 이집트와 손을 잡아야한다 이런 움직임에 현혹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결국 그런 대립이 시작 되는데 601년에도 또 한 번 다시 이집트와 바빌론이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에는 바빌론이 이미 많은 부분 점령한 상태엿기 때문에 이집트가 가까운 지역에서 싸우게 되는 거예요. 근데 본진이 이집트가 가까우니까 사람들이 이집트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서 바빌론적인 성향으로 가야만 했던 여호야킴이 다시 친 이집트적인노선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네부카드네자르라는 사람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침공 되죠.
이때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상황에서 여호야킴은 의문의 죽음을 맞습니다. 그러고 여호야킨이 등극하게 되요. 그런데 여기에서 결국 597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여호야킨까지 다 포함한 1차유배가 597년에 단행됩니다. 그러면서 치드키야라는 친바빌론적인 왕을 세우게 되죠. 이렇게 뒤에 강대국이 배경에 있단 건 뭐냐 하면 그냥 꼭두각시같은 왕이라는 얘기거든요. 그런데 이 상황에서도 또 친이집트적인 민족주의자들이 그를 현혹 합니다. 1차침공 때 왕까지 끌려갔으면 조용히 있어야 되는데 반바빌론적인 반기를 들게 되고 그렇게 되면서 587년에 이집트에 지원을 요청하는 모습을 보이거든요. 그래서 597년에 2차유배가 이루어지면서 남유다는 이제 완전히 망하게 되고 유배를 가게 되는 겁니다. 이게 당시 국제정세, 남쪽 국내정세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활동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 혼란스런 상태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데요. 일단 예레미야서를 읽어 보시면 조금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마치 미로에 들어간 것처럼 체계적인 논리적 전개를 발견하기 어려운데요. 일단 산문도 있고 운문도 있고 이런 게 혼재 되어있습니다.
지금은 예언서 책이 너무 많은 데 1차적으로 여러분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강의시간에 전달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조금 더 본문의 문제도 알고 싶고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고 신학적 배경도 상세히 보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제 책 예언서를 보시면 좀 더 자세하게 샅샅이 보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편집의 문제점, 예레미야서를 공부하실 때 늘 다루어야 되는 모빈켈의 가설도 있고 등등 참 많습니다. 그걸 보시고 싶으면 이 책을 참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제가 쉽게 말씀 드리면요. 예레미야서 36장 보면 이런 장면이 나와요. 예레미야의 비서죠. 서기로 바룩이라는 인물이 등장해요. 바룩이 이제 신탁을 적고 당시의 상황을 적는데 여호야킨이 바룩에게 읽게 해요. 읽게 한 후 이걸 다 태워버려요. 그러니까 기록 작업이 당대에 있었던 것 같은데 완전히 소각해버리는 거고요. 그러고 나서 그걸 되살려서 책을 다시 쓰는 거죠. 그래서 이루어진 게 예레미야서 1장부터 25장이라 보여집니다. 그리고 여기에 다른 예레미야 고백록이라던가. 바룩이 예레미야를 보고 쓴 전기문도 있어요. 전기도 들어가 있고 이래서 복잡한 작업이 이루어졌어요. 일종의 선집이라고 보시면 되요. 여러 가지 독립적인 작품들이 연합이 되어 현재와 같은 대예언서를 이루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내용을 보겠습니다.
제1부
제2부
제3부
제4부
1-25장
26-45장
46-51장
52장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신탁
예레미야의 전기
이방민족에 대한 신탁
역사적 부록
1부가 바룩이 쓴 부분이라고 소개해 드린 부분입니다. 그 다음 2부 또한 바룩이 전기처럼 얘기하는 거죠. 이사야서에서도 역사적 부록이 있었고 예레미야서 또한 역사적 부록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신명기적 스타일이라고 보시면 되겠어요. 그래서 신명기 신학이 또한 후대에 들어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 강조되는 신학적 주제를 보죠. 첫 번째는 고독과 소외 고통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망해야 된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건데요.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준다.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으려는 것이다.(예레 1,10) 이 말이 굉장히 폭력적인 말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시면요. 무언가 세우고 심으려면 뽑고 부수고 허물어 놔야지 새롭게 심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호세아서도 마찬가지였고 아모스서도 마찬가지고 이사야서, 예레미야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곡된 구조들은 필연적으로 붕괴, 없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오해의 여지가 많은 거죠.
우리나라, 우리민족인데 우리가 필연적으로 붕괴돼야 된다는 걸 어떻게 법아들이냐는 겁니다. 맨 처음에 예언자 개관 때도 설명드린 적 있는 거 같아요. 우리가 구원돼야 하는데 하느님이 우리 옆에 계시니까 끄떡없다. 그냥 어쨌든 우리는 살아남을 거다 라는게 아니라 제대로 살려면 지금 여기서 뽑히는 아픔을 겪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이해가 안 되는 거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아주 고통스럽게 소외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예언자가 마고르미싸빕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는데요. 보기만 해도 지겹다 이런 의미예요. 지겨운 사람이다 이런 의미였죠. 이럴 정도로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고백록의 유명한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언자가 겪는 감정이 뭐였냐 하면 두려움 입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누구도 공감하기 어렵다는 걸 스스로 아는 거예요. 그러니 대중을 두려워하게 되죠. 1장 17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예레 1,17)
즉 하느님은 정말 예언자가 두려워해야 되는 거, 이스라엘이 두려워해야 되는 것은 대중이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말씀 하시는 거죠. 주변의 평판이 두려운 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데 거기에 자꾸 약해지는 그런 걸 두려워해야 된단 겁니다. 이런 깨달음을 계속 주시면서 예언자들은 자기 소명을 계속 유지하게 되죠. 그러면서 나오는 또 다른 주제는 성전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당시 예레미야와 대립 했었던 기득권의 예언자들은 저거 다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전이 있기 때문에, 성전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절대로 이 땅이 무너질 리 없다 이런 얘길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전은 구원의 담보가 아니다. 구원의 담보가 성전일순 없단 거죠. 그래서 길과 행실을 고치는 거 이게 되지 않으면 아무리 성전이 굳건하게 있어도 너희들은 위험하다 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죠.
지금 우리는 교회가 건실하고 나름대로 사회적 지위도 있고, 하느님이 교회를 만드셨고 그러니 문제없다 이렇게 얘기하는 이들에게 교회도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강조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길과 행실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의 본질적인 회개가 이루어 지지 않는다면 그게 구원을 보장시켜줄 수는 없다는 부분을 이야기 합니다.이것과 함께 등장하는 주제는 새 계약과 새 법입니다. 이제 뽑히고 무너지고 없어져야지만 새롭게 지어질 수 있고 새롭게 심을 수 있다. 그래서 새 계약을 맺겠다는 거고요. 이 새 계약이 신약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신약이란 말이 등장하는 때가 예레미야서 31장31절부터 34절까지 입니다.
(예레,31,31-33)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은 내가 저희 남편인데도 내 계약을 깨뜨렸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예전의 시나이에서의 계약은 돌판에 새겼다는 거예요. 그런데 돌판에 새기니까 계속해서 하느님을 잊어버리니 이제 심장에 새기겠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새 계약이에요. 결국 풀어서 설명해드리면 새로운 심장 이식수술, 그러니까 우리가 심장을 바꾸지 않고서는 이스라엘이 유지될 수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회개해서 유지 될 것이다고, 이런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아니다, 죽었다가 새롭게 나야 된다는 거죠. 심장은 생명이잖아요. 근데 그 심장에 새로운 법을 씌어주겠다는 거는 뭐냐 하면 새로운 심장을 이식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기존의 패러다임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마음에 새긴 관계, 어떤 외적인 관계가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과 구체적으로 서로 알아보는 관계가 되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언자의 삶이 참으로 고단하고 힘든 길이었음을 깨달았네요. 구약의 하느님은 왠지 두렵고 무서운 하느님, 정답고 늘 의지하며 언제나 함께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서 그래서 전 지금이 좋아요. 많은 이해가 될 수 있도록 옮겨주신 마음지기님께 마음으로 감사의 박수를 보냅니다.^^
첫댓글 마음지기님! 감사합니다^^*
감사히 읽고 가져갑니다.^^
지기님~~~ 수고에 감사드려요^^*
통독에 많은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
새 계약과 새 법.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마음지기님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서 감사합니다.
예언자의 삶이 참으로 고단하고 힘든 길이었음을
깨달았네요. 구약의 하느님은
왠지 두렵고 무서운 하느님,
정답고 늘 의지하며 언제나
함께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서
그래서 전 지금이 좋아요.
많은 이해가 될 수 있도록
옮겨주신 마음지기님께 마음으로 감사의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