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25 중앙선데이


울산시에 사는 4인 가족 가장 김모(55)씨는 지난해 6월 사무·관리직 동료 3000명과 함께 20년 넘게 다녔던 현대중공업을 나왔다. 울산 등에 불어닥친 조선업 구조조정 칼바람을 맞은 것이다. 그는 4주에 한 번 울산시 동구 미포복지회관 5층 울산조선희망센터를 찾아가 구직활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린다. 올 4월까지 지급 예정인 실업급여를 타기 위해서다. 지난 10일 이곳을 찾았다. 김씨는 센터의 이구건 상담사에게 “나이 탓인지 새 직장을 찾기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회사를 나오기 직전까지 인사·총무·교육 등 관리직에서 일했다. 퇴직 후 회사 20여 곳에 원서를 내고 문의를 했으나 구직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학부·대학원 모두 인문계열 전공(심리학)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기술 쪽으로 자격증이라도 따놓을 걸 그랬다”고 말했다. 김시태 한국산업인력공단 능력평가이사는 “요즘 울산 등에선 사무·관리직 사람들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기술을 배워 생산직으로 전환하려 한다”고 말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교육 안 바꾸면 미래 없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기준 울산 지역 정규직은 35만1000명. 한 해 전보다 2만8000명(7.8%) 줄어들었다. 현대중공업 등 대규모 조선업체가 일제히 인력 감축을 하면서 울산 지역의 정규직 감소폭은 전국 최다 규모였다. 대신 비정규직은 크게 늘어났다. 조선업 호황 시절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업의 대량 감원은 예측하기 쉽지 않았다. 한국고용정보원은 10년 전인 2007년 발표한 ‘향후 10년(2016년까지) 국가 인력 수급 전망’에서 “조선업은 향후 10년 동안 안정적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당시 예측치 가운데 취업자 수 예측(2631만 명)과 고용률 예측(62.3%)은 실제(취업자 수 2623만5000명, 고용률 62.7% 내외)와 거의 흡사했다. 당시 연구를 주도한 주무현 일자리사업모니터링팀장은 “2015년 불어닥친 조선업 불황은 예상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기업 역시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이 벌어진다면 근로자에 대한 전직(轉職) 지원은 어떻게 해야 할지 준비하지 못했다. 근로자 본인들도 대비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김강호 한국고용정보원 부연구위원은 “한국의 조선업이 세계 1위라는 입지를 오랫동안 유지한 때문인지 정작 퇴직한 사람 대부분이 재취업을 희망하고 있으나 재취업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4.0 이름 붙인 대책만 남발]
4차 산업혁명이 밀어닥치면 현존하는 일자리가 인공지능 등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이 있으나 어느 분야의 인력이 더 필요한지, 인력 수급이나 유망 직종은 무엇인지 예측은 쉽지 않다. 다만 조선업의 사례를 거울 삼아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이에 대비할 수는 있다. 김세움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인공지능 기술은 자동화 같은 과거 기술 진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며 “인공지능에 의해 일자리 양이 부족해지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는 걸 가정해 대비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급격하게 인력 수요가 줄어드는 사양 산업 분야의 재직자들을 보호하는 안전망 구축도 정부가 맡아야 할 주요 과제다.
정부부처나 산업계, 노동계가 통합적으로 대비하는 나라는 독일이다. 경제통상부와 교육과학부가 중심이 돼 산업협회, 노조, 연방직업교육훈련연구소 등을 포함하는 ‘플랫폼 인터스트리 4.0’을 만들었다. 플랫폼이란 벌집처럼 연결된 네트워크다. 업종을 뛰어넘어 집단지성이 동원된다. 김인숙 한국개발연구원(KDI) 초빙연구위원은 “모든 이해관계자가 모여 미래 변화의 본질은 무엇인지, 어떻게 변화하는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큰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은 “한국에선 각 정부 부처가 흩어져 제각각 계획을 짠다”며 “4차 산업혁명은 기존의 판을 뒤흔드는 혁명인데 각 부처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에다 ‘4.0’이란 버전만 붙인다”고 비판했다.
[평생직장 개념은 갈수록 희박]

학교도 노동시장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 정철영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장(산업인력개발학 전공)은 “무엇보다 학교가 졸업 후 학생들이 직업 세계로 진입해 안착할 수 있도록 일의 세계가 요구하는 내용을 학습시켜야 한다”고 주문했다. 지금까지 학교는 교과라는 칸막이 안에서 지식 교육을 했다. 학생이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 학교 밖의 일(work) 또는 직업의 세계와 연결돼 있지 않았다.
최근 들어 학교와 직업 세계 사이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학교 밖 직업체험 시설이 많아지면서다. 서울 잠실과 부산 해운대에 있는 직업체험 테마파크 ‘키자니아’는 유치원생·초등학생을, 경기도 성남에 있는 ‘한국잡월드’는 초·중학생을 끌어 모은다. 기초 지방자치단체와 시·도교육청이 만들어 운영하는 진로직업체험지원센터도 2013년부터 등장해 전국적으로 230개 시·군·구별로 하나씩 있다. 홍문화 동대문진로직업체험지원센터장은 “학교와 지역 사회 내 공공기관, 민간 기업 등 다양한 일터와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며 “센터는 각 학교에 있는 진로상담교사들과 협력해 학생들에게 생생한 진로나 직업 체험 기회를 준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전국 중학교에서 전면 실시 중인 자유학기제도 여기에 가세했다. 김승보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센터장은 “학교가 담을 낮추고 지역과 연계해 학생이 진로나 직업에 대한 체험 기회를 넓히는 토대를 마련한 게 자유학기제”라고 말했다. 부산의 대청중학교는 1학년 1학기 때 진로교육 집중학기를, 2학기엔 자유학기제를 시행한다. 진로·진학교육을 모든 교과에서 실시하는 것도 특징이다. 이 학교 김미영 교사(연구부장)는 “수학을 예로 들자면 학생에게 방정식을 가르칠 때 그리스 수학자 디오판토스 묘비에 적힌 글을 설명해주고 학생 각자가 진로를 생각하게 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묘비엔 ‘여기 디오판토스가 잠들다. 일생의 6분의 1을 소년으로 보냈고 그후 일생의 12분의 1이 지나서 수염을 길렀다…그는 몇 살에 죽었는가’라고 돼 있다. 김 교사는 “진로나 직업을 막연하게 생각하는 학생들이 확실히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는 앞으로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하면 정규직 일자리는 줄어들고, 비정규직 비중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근로자 개인에게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앞으로 더욱 희박해진다. 평생 여러 개의 직업을 갖거나 직장을 여러 벌 갈아타는 일은 지금보다 앞으로 더욱 자연스러워진다. 김인숙 위원은 “급변하는 노동시장 상황에 유연하고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재교육을 받고 빨라지는 변화 주기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