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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망교회[상왕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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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류영모 스크랩 다석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기상)
조해강 추천 0 조회 30 15.07.28 14: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진리의 벗이 되어」 2001년 11월(성천문화재단)


다석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이 기 상  |  한국외국어대 교수



21세기 우리는 <세계가 하나>가 된 지구촌 시대를 살고 있다. 지구촌 시대에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를 종말로 치닫게 하는 생태계 파괴 문제와 64억 인구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더불어 삶의 문제다.


생태문제는 기술과 과학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발생했다. 서양문명에서 유래한 기술과 과학은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바꿔버렸다. 우리의 옷, 음식, 음악 등 모든 것이 서구화되었다. 서구화는 존재, 소유, 생산, 소모 등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끝없이 키우면서, 무한 경쟁, 무한 소비, 무한 욕망 등 소비를 위한 소비를 부추기고 있다.


어느 학자는 지구상에 인간이 생물로서 살아 갈 때의 적절한 수를 400만 명으로 보았다. 그런데 현재 인류는 64억이다. 이중 20%의 인류만이 인간다운 삶을 살고 나머지 80%는 생존을 위해 허덕이거나 죽음의 그늘 아래 방치되어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 기술과 과학이 발달한 지금, 아이러니컬하게도 기아로 굶어 죽는 사람이 그 어느 시대보다 많은 것이다.


과연 21세기 인류를 옥죄고 있는 생태계의 문제와 인간의 문제를 풀 해법은 있는가? 몇몇 세계적인 지성인들은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한다.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하이데거), 종교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다(한스 큉), 나눔 없이 평화 없다(마더 데레사). 한 마디로 지금까지의 생활 방식, 사유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는 경종이다.


서양의 물질 문명이 지구를 파괴하고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있다는 것을 경고한 하이데거는 이성 중심, 존재자 중심, 인간 중심의 삶과 사유의 방식이 퍼뜨리고 있는 지구적, 아니 우주적 지배의 논리와 그 폐해를 간파하고 새로운 사유에 의한 새로운 시작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성이 몰아낸 다양한 형태의 <무無>와의 새로운 관계맺음과 경험만이 인류에게 구원의 희망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서양의 많은 지성인들은 21세기가 새로운 영성, 새로운 종교성, 새로운 정신성의 시대가 될 것이며,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까지는 인간이 있는 것[존재자]과 이성理性으로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없는 것[무, 공, 허]과는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영성>으로써 이다.


서양철학의 시작은 존재자에 대한 놀라움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철학은 무無에 대한 두려움, 경외심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이러한 무無에 대한 인간의 능력이 영성이다. 우주 안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은 무無, 공空, 허虛다. 우리는 하늘을 하늘님(하느님)이라 한다. 하늘의 텅 빔, 그것을 하느님이라 이름한 것이다. 텅 빈 하느님은 물체처럼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지는 않다. 이렇게 ‘없이 있는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감성을 만들어 나갈 때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이런 영성을 강조한 사람이 류영모다. 바로 여기에 20세기 한국이 낳은 위대한 영성가 다석 류영모의 사상이 희망의 불꽃으로 피어오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우리말로 사색한 최초의 우리 사상가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한다. 언어 속에 존재가 와 있고 인간은 존재가 와 있는 그 언어 속에 거처한다는 뜻이다. 다석은 “인간의 언어 속에 하느님이 말씀하고 계신다”고 했다.


언어를 잃으면 세계를 잃는 것이다. 근대 정신의 바탕은 언어다. 서양의 근대화를 살펴보면 지난 천년 동안 일어난 인류사 중 가장 큰 사건이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에서 일어난 언어혁명이 중요하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언어는 특정계급의 독점물이었다. 라틴어가 유일한 언어였고, 라틴어를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들은 성직자, 귀족, 지식인, 통치자들이었다. 바로 이것을 깬 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이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자기네 말로 하느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종교개혁은 1517년에 일어났다. 그보다 70년 앞서 이 땅에서도 근대화의 불씨가 일었었다. 1443년 한글 창제가 그것이다. 세종대왕은 우리 민족을 한자에서 해방시켜 민중들에게 그 혀를 돌려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양반, 세력가들, 소위 배운 자들이라는 선비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친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언어를 구사하면 자기들의 특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400-500년이 지난 지금 한글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그런데 일부 식자들이 세계화 시대라고 하면서 영어공용을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말을 잃게 될 때 우리는 세계를 잃게 된다. 이제라도 우리가 우리말을 살리지 못한다면, 21세기 우리는 다시 한 번 미국의 속국이 될 것이다.


다석은 이 점을 바로 보았다. 『다석일지』를 보면 그가 우리말을 만들어 표현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도 우리말로 철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스스로 우리 것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세계에서도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양한 문화의 세계에 살고 있다. 서양사람들이 장미를 좋아한다고 하여 모두 장미만 심는다면 장미는 더 이상 꽃이 아니라 독이다. 우리는 우리 산하에 있는 우리의 들꽃을 피워 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들꽃을 피운 류영모는 100년을 앞서 갔고, 이제 우리에게 너희는 우리말로 철학하라고 조용히 타이른다. 다석은 우리말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리 사건에 관심을 둔 유일한 사상가였다. 1700수의 우리말 시를 통해 우리말로 사유할 수 있음을 보여준 우리말 철학자다. 우리말 속에 녹아 있는 우리의 독특한 얼을 찾아 나선 우리말지기 우리얼지기다.


다석의 인간에 대한 이해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안에-있음>이라고 보았는데, 우리는 다석의 사상에 기대어 인간을 <사이에 있는 존재>로 규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  <사이>란 무엇인가?


빔-사이에-있음


<빔-사이>(공간)란 애초에 인간이 만들어내며 살아가는 공간이며, 삶의 터전을 말한다. 빔-사이와 인간이 관계를 맺고 있는 가장 전형적인 행위는 노동이다. 노동은 도구, 기술, 예술, 생산, 거주라는 방식으로 이어지면서 빔-사이를 채워나가고, 사이를 나름대로 인간적인 마당으로 만들어간다.


빔-사이에 있는 인간의 중심 축은 <몸-나>라고 할 수 있는데, 몸으로서의 나가 모든 것을 동원해 땅이라는 공간을 일구어 나간다. 몸-나가 경험하는 것은 감각적, 미학적 차원이며 그 활동은 제작이라는 형태를 띈다. 이런 몸-나가 살기 위해 쉬는 숨을 목숨이라 한다.


사람-사이에-있음


인간은 즉 <사람-사이에-있음>이다. 여기서 가장 전형적인 행위는 말이며, 관계맺음의 방식으로는 실천을 들 수 있다. 말함과 실천에서 관습, 윤리, 도덕, 사회, 국가 등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사이에-있음으로서의 행위는 윤리적인 행위, 만남, 인격적인 체험 같은 것이며, 이를 통해 사람들 사이의 사이를 메꿈이 가능하다.


사람-사이에-있음을 이어나가는 중심 축은 <맘-나>다. 맘-나는 마음씀이다. 그 사이에 숨을 불어넣어 주는 숨은 <말숨>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사이에 간격을 없애려는 것이 평등이며, 인권을 중시한다. 사람-사이에-있음이 무너지면 도덕 윤리가 무너지게 된다.


때-사이에-있음


때-사이의 가장 전형적인 행위를 <생각>이라 말하며, 거기에서 반성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때-사이는 역사, 학문, 지평, 엄격한 의미의 역사의식이 생겨나는 곳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 때, 역사, 문명이다.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로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과거의 전통을 세우고 현재가 과거에 의해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고, 나아가 미래에 대한 시각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때-사이로서의 인간에 관한 것을 보면, 사람은 제각기의 나, 곧<제-나>인데 이 제-나는 맘-나와 몸-나가 통합된 개념이다. 여기에는 주체의 의미가 들어간다. 때-사이의 숨은 차원은, 말로서는 때를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글숨>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땅-사이에-있음


인간은 천지간天地間, <하늘과-땅-사이>에 있는데, 이때 하늘은 우주적이라기보다는 신적인 하늘을 말한다. 인간은 우주적인 사이에 있음을 책임져야할 뿐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도 책임을 져야한다. 여기서는 기도, 감사, 초월, 성스러움의 차원으로서의 영성과 얼로서의 나인 <얼-나>가 말해진다. 이 얼-나가 나의 참 모습이며 얼-나가 모든 것을 통합하면서 우주와 하나가 된다. 이 통합된 숨을 쉬는 것이 <얼숨>이며, 우주의 숨이라 해서 <우숨>이라고도 한다. 우숨이 우주와 조화될 때, 우주와 하나가 될 때 <참숨>이 된다.


가온찍기( ㄴ․ㄱ  )로서의 인간


몸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이제’와 ‘여기’를 반성적으로 사유하며 살아간다.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한 <긋>을 찍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긋>을 찍으며 살아가는 인간을 다석은 땅(ㅡ)에서 인간(ㅅ)이 머리(ㄱ)를 들고 얼(정신)로서 한 얼과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으로 형상화했다. 인간은 한 점(․)과 같다. 이 한 점이 바로 생명줄인데, 생명줄은 인간이 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다만 이미 형성되어 있는 그물의 한 올을 차지할 뿐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한 가족이 혈연으로 이어지듯 삼라만상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지구의 딸들과 아들에게도 그대로 닥친다. 인간들이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단지 그 그물 속의 한 올일 뿐. 그물에 가하는 모든 일은 스스로에게 향한 것이니.


카프라에 의하면 우주전체는 생명의 그물망으로 짜여져 있다. 우리는 모두 인드라의 구슬처럼 그물망을 이루는 하나의 그물코인데, 이 그물코에 전체 생명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다석은 사이존재로서의 인간의 사명을 <가온찍기>로서 설명하고 있다. 나라는 것이 무한한 가치를 자각하고 날아가는 새를 맞추듯이 곧이 곧고 신성하고 영특한 영원한 나의 한 복판을 정확하게 명중시켜 진리의 나를 깨닫는 것이 가온찍기(․)이다.


가온찍기는 가고 오는 시간의 영원함을 여기서 만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시간 속에서 한 점임을 깨달을 수 있는 존재는 인간 뿐이다. 가온찍기는 우리가 몸을 가지고 ‘이제’ ‘여기’ 있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가온찍기로서의 인간은 때-사이(시간)와 빔-사이(공간) 속의 우주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위치를 말해주기도 한다.


다석의 하느님(神)관


다석이 없음, 텅빔, 빈탕과 하느님을 연결하여 논의한 것을 크게 네 가지로 구별하여 보았다.


첫째, 온통 하나로서의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다.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절대 가능성의 상태인 무극, 태극 그리고 영극靈極까지도 포함한, 텅빈 온통 속에, 가이없는 <빔-사이>와 끝없는 <때-사이> 안에서 생성 소멸 변화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하며 주관하시는 하느님이다.


둘째, 무한 공간과 무한 시간 속에서 생성 소멸 변화하는 그 모든 것을 다 포함한 절대 존재로서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변하지 않는 절대의 무와 변하는 상대의 유로 되어있다. 하느님은 허공인 하늘과 물질인 땅을 합한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 한 분 뿐이다. 다른 모든 것은 하느님의 부속이고 내용이다. 절대 존재인 하느님은 모든 개체를 포괄하는 전체로서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셋째, 무한 공간과 무한 시간을 태우고 있는 신령한 힘을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절대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얼나이기 때문에 절대 생명인 한 얼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숨을 안 쉬면 끊어지는 생명은 참 생명이 아니다. 하느님이 보내는 성령이 얼나인 참나다. 석가의 법신,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같은 얼나가 영원한 생명이다.


넷째, 구체적인 인간의 소통 속에서 나타나는 절대존재인 하느님이다. 역사 속에서 말씀의 형태로 자신을 내보인 하느님이다. 절대 생명으로서의 한 얼의 부름에 사람이 응답하였고, 이 응답 속에 이름을 받은 신이 하느님이다. 사람의 생각 속에, 말 속에, 이성 속에 파악된, 어느 정도는 이성의 대상이 된 하느님이다.


개체인 인간은 전체인 하느님을 잃어버렸다. 개체가 할 일은 전체를 회복하고 전체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삶에 드는 것이요 참된 삶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 중심의 시각으로는 이러한 성스러움을 예감할 수 없다. 시공간을 모두 포괄하는 온통 전체로서의 성스러움은 존재의 지평 속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로서의 성스러움은 존재의 지평을 가능하게 하는 끝이 없는 열려있음이고, 바닥 없는 심연, 가이없는 텅 비어있음이다. 있음이라는 것이 공간 안에서의 체재와 시간 안에서의 체류를 전제한 것임을 고려해 볼 때, 그것은 가이없는 시간과 끝없는 공간 전체를 통털은 것이다. 그래서 있음이라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배명희 객원기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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