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孫丑問曰夫子當路於齊하시면 管仲晏子之功을 可復許乎잇가
孟子曰子誠齊人也로다 知管仲晏子而已矣온여 或이 問乎曾西曰 吾子與子路孰賢고 曾西蹵然曰 吾先子之所畏也니라 曰然則吾子與管仲孰賢고 曾西艴然不悅曰 爾何曾比予於管仲고 管仲이 得君이 如彼其專也며 行乎國政이 如彼其久也로되 功烈이 如彼其卑也하니 爾何曾比予於是오하니라
曰管仲은 曾西之所不爲也어늘 而子爲我願之乎아
曰管仲은 以其君覇하고 晏子는 以其君顯하니 管仲晏子는 猶不足爲與잇가
曰以齊로 王이 由反手也니라
<家苑
譯>
공손추가 물어 가로대, “부자께서 제나라의 요직에 오르시면 관중과 안자의 공을 다시 기약할 수 있겠나이까?”
맹자 가라사대, “자네는 진실로 제나라 사람이로다. 관중과 안자만을 아는구나! 혹자가 증서에게 ‘우리 선생님과 자로 중에서 누가 어집니까?’하고 물었더니, 증서가 찡그리면서 ‘우리 선자(증자)께서도 (자로를) 두려워하신 바라.’고 했노라. (혹자가 다시) ‘그렇다면 우리 선생님과 관중 가운데 누가 어집니까?’했더니, 증서가 발끈하여 기뻐하지 아니하면서 말하기를, ‘네 어찌 이에 나를 관중에게 비교하는고? 관중이 인군을 얻어 저와 같이 그 전권을 쥐었으며, 국정을 행함이 저와 같이 오래했는데도 공렬은 저와 같이 그 낮으니, 네 어찌 이에 나를 이(관중)에 비유하는가?’ 하였느니라.”
(맹자) 가라사대, “관중은 증서도 위하지 않은 바이거늘 그대가 나를 위하여 원하는 것인가?”
(공손추) 가로대, “관중은 그 인군으로써 패자로 만들었고, 안자는 그 인군으로써 명성을 높였으니, 관중과 안자는 오히려 더불어 하기에 족하지 않나이까?”
(맹자) 가라사대, “제나라로써 왕 하는 것이 손을 뒤집는 것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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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苑
註>
公孫丑 : 孟子弟子, 齊人。 當路 요직에 거처함。 管仲 : 名은 夷吾. 齊桓公을 춘추시대 첫 번째 覇者로 만든 공신으로 40여년을 보좌함。 晏子 : 齊 莊公과 景公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나라의 번영을 가져온 인물。 양혜왕하편 제4장 해설 참조。 曾西 : 曾子의 손자。 蹵 찰 축, 蹴과 같음. 여기서는 蹙(찡그릴 축)과 같은 뜻。 先子 돌아가신 아버지나 스승으로, 여기서는 할아버지인 증자를 말함。 艴 발끈할 불(발) 曾 일찍 증, 이에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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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苑
說 1>
제선왕이 등극한 뒤에 맹자를 재상으로 삼으려고 했던 듯하다. 맹자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던 공손추는, 만약에 제나라 군주가 요직에 등용한다면 과거 관중과 안영이 각각 제환공과 제경공을 도와 제나라를 번영시켰던 것처럼 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제나라는 이미 위왕이 쌓아놓은 기반이 있었기에 훌륭한 재상만 있다면 당대 최고의 패자로 다시 한 번 발돋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합종연횡가(合縱連橫家)와 법가(法家)와 묵가(墨家) 무리들이 득세를 하는 시대인지라 공손추의 질문은 부국강병론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맹자는 제선왕이 제나라 환공과 진문공의 일에 대해 물었을 때 들은 바가 없다고 시침을 떼었듯이(양혜왕상편 제7장) 증자의 손자인 증서의 말을 빌려 자신의 입장을 대변했고, 관중과 안영과 같은 수준의 정치는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라(由反手也)고 잘라 말했다.
관중에 대해 맹자가 “得君 如彼其專也”라고 한 것은, 공자가 말한 “管氏 有三歸”와 “邦君이라야 樹塞門이어늘 管氏 亦樹塞門하며 邦君이라야 爲兩君之好에 有反坫이어늘 管氏 亦有反坫이라”(『논어』 팔일편 제22장)을 말한 것이고, “行乎國政이 如彼其久也로되 功烈이 如彼其卑也라”고 한 것은, 제환공을 도와 40년을 집권했으나 패제후만을 이루게 했을 뿐, 二帝三王처럼 그 功業이 후대로 이어지지 못한 점을 꼬집은 것이다.
참고로 관중의 三歸는 관중이 환공과 仲父(중보) 관계를 맺고, 제후와 같은 수준으로 부인을 두었고(一娶三姓女), 삼귀의 대(三歸之臺)을 세웠으며, 녹읍지 세 곳을 가진 三歸之家라 뜻이다(자세한 내용은 拙著 『논어역해』 제1권 팔일편 제22장 해설 참조). 또한 관중은 임금만이 둘 수 있는 색문을 자신의 집에도 세우고 손님을 접대할 때 반점을 둘 정도였다. 그러므로 공자는 관중에 대해 “그릇이 작다(管仲之器 小哉)”고 하였으며, 맹자는 “如彼其專也”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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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若是則弟子之惑이 滋甚케이다 且以文王之德으로 百年而後崩하시되 猶未洽於天下어시늘 武王周公이 繼之然後에 大行하니 今言王若易然하시니 則文王은 不足法與잇가
曰文王은 何可當也시리오 由湯으로 至於武丁히 賢聖之君이 六七이 作하여 天下歸殷이 久矣니 久則難變也라 武丁이 朝諸侯有天下호대 猶運之掌也하시니 紂之去武丁이 未久也라 其故家遺俗과 流風善政이 猶有存者하며 又有微子微仲王子比干箕子膠鬲이 皆賢人也라 相與輔相之故로 久而後에 失之也하니 尺地도 莫非其有也며 一民도 莫非其臣也어늘 然而文王이 猶方百里起하시니 是以難也니라
<家苑
譯>
(공손추) 가로대, “이와 같다면 제자의 의혹이 심히 불거지나이다. 또한 문왕이 덕으로 다스리시고 백 살이 된 뒤에야 돌아가셨는데도 오히려 천하를 적시지 못하셨거늘 무왕과 주공이 이은 연후에야 크게 행해졌으니, 이제 왕 하는 것을 쉬운 것처럼 말씀하시니 그렇다면 문왕은 족히 법할 만하지 못하나이까?”
(맹자) 가라사대, “문왕은 어찌 가히 당할 수 있으리오. 탕임금으로부터 무정에 이르기까지 어질고 착한 인군이 여섯, 일곱이 일어나서 천하가 은나라에 돌아감이 오래되었으니, 오래한다면 변하기가 어려운지라. 무정이 제후를 조회하고 천하를 두었는데 마치 손바닥을 운전하는 것같이 하셨으니, 주와 무정과의 세월이 오래되지 않은지라, 그 옛 가문과 전해진 풍속과 흐르는 풍속과 선정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또 미자, 미중, 왕자 비간, 기자, 교격이 다 어진 사람이라. 서로 더불어 돕고 도운 까닭으로 오래된 뒤에야 없어지니, 한 자의 땅도 그 소유가 아닌 것이 없으며, 한 사람의 백성도 그 신하가 아님이 없거늘, 그런데도 문왕이 오히려 백 리로 일어나시니 이것이 어려운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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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苑
說 2>
西伯昌(文王은 추존시호)은 97세에 崩하셨으니, 공손추가 百年이라고 한 것은 成數(10×10)를 들어서 말한 것이다. 서백창은 殷나라 당시 제후들의 3분의 2를 호응을 받고도 은나라와 대적하지 아니했고, 아들인 무왕에 이르러서야 은나라를 이기고 周나라의 천자가 되었으나 3년 만에 돌아가시고, 어린 성왕이 등극하자 무왕의 동생인 주공이 조카를 도와 주나라의 禮樂을 정비했다.
이런 사실에 대해 공손추는, 儒家에서 성인으로 존숭하는 문왕 또한 오랜 동안 덕치를 펼쳤지만 은나라의 모든 이를 歸順시키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그 아들인 문왕과 손주인 成王에 이르러서야 왕도정치가 꽃피었는데 어찌 왕 하기가 쉽겠느냐는 물음이다.
맹자는 이에 대해 문왕 혼자 감당하기에는 은나라가 결코 만만치 않은 나라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은나라의 처음 이름인 商나라는 湯임금이 夏나라 말기의 폭군인 桀을 치고 세운 나라로, 어진 정치를 펼쳐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복속시켰다. 이후 紂(30대)에 이르러 망할 때까지 太甲(4대) 太戊(9대) 祖乙(13대) 盤庚(19대, 殷 땅으로 遷都) 武丁(22대, 高宗) 등의 성군들이 나왔기에 오래도록 은나라의 정치체제는 안정적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美風良俗이 누대로 전해지는데다가 덕망 높은 世臣들이 있기에 은나라는 결코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은나라가 비록 폭군 걸의 시대를 맞이해 나라의 정치는 급격히 문란해졌으나 微子 微仲(微子 啓의 아우인 衍) 王子比干 箕子 膠鬲(告子하편 제15장에 따르면 어물전에서 일하다가 문왕에 의해 천거된 인물로 알려짐) 등의 현인이 있었기에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나라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문왕이 천하의 3분의 2를 지지를 받고도 쉽게 은나라를 치러 갈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은나라의 멸망을 내다보고 종묘사직을 지키고자 조상의 위패를 갖고 도망간 미자, 간언하다가 죽임을 당한 비간, 거짓 미친 체를 하며 끝까지 남아 은나라의 멸망을 지켜보았던 기자, 더욱이 기자는 ‘홍범(洪範)’(『書經』 周書)이라는 오행 대법의 이치를 무왕에 게 전해주어 주나라의 문화를 꽃피우게 하는데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준 인물이다. 공자가 이들 세 사람을 은나라 말기의 三仁으로 일컬을(『논어』 미자편 제1장) 정도였으니, 은나라는 쉽게 와해될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은나라에서 서백창이 백 리의 땅으로 제후를 하고 있었으니 쉽게 왕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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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苑 說 3> 滋甚만 하다가 언제 ‘툭탁’하고 터지는 소리가 날까? 제나라에서 왕 하기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다는 맹자의 말의 말에 공손추는 의혹만 더욱 불거졌다. 의혹이 불거졌다는 것을 공손추는 ‘滋甚’이라고 표현했다. ‘불어남이 심하다, 심히 불어나다.’는 뜻이다. 어떤 물건이든지 계속 불어나게 되면 ‘툭~탁~’하는 소리와 함께 터지기 마련이다. 이 ‘滋甚’과 관련해 재미있는 내용이 전해진다. 예로부터 『맹자』는 역사뿐만 아니라 깊은 철학적 내용까지 두루 담겨 있어 이해하기가 어려운 책으로 알려졌다. 막힘없이 종횡무진(縱橫無盡)하는 맹자의 논리를 이해하려면 천 번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곧 웬만큼 공부하지 않고는 문리(文理)가 터지기 어렵다는 뜻이다. 『맹자』를 千讀하면 文理가 터지며 ‘툭탁’ 소리가 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한 제자가 千讀을 했음에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자 선생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孟子千讀에 未聞‘툭탁’之聲하니 弟子之惑이 滋甚케이다.” 선생이 답장을 보냈다. “此 툭탁之聲이라.” |
출처 : 孟子易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