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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동의 기억-화성이발관 이달성(남, 1937년생)씨
2020.08.19
도일동 원도일 마을이 고향이다. 초등학교 졸업 뒤 원평동 사촌형이 운영하는 이발관에서 기술을 배우기 시작해서 1968년 화성이발관을 인수 운영했다.
고향은 어디세요?
도일동 원도일. 소씨들이 많고 이씨들도 많죠.
이발관은 언제부터 했어요?
초등학교 졸업하고 사촌형이 이발소 할 때 도일동에서 여기로 머리 감기러 다녔지.
두 시간 넘게 걸리잖아요?
두 시간은 조금 안 걸리지.
사촌형이 먼저 이발소를 했네요?
왜정 때는 요 건너 안중 가는 길(옛 국도 38호선) 쪽에 김구이발관이라고 있었데요. 변예천씨라고 있는데 그 분 아버지한테 사촌형이 (이발을) 배운 거지. 그 분 성품이 무척 까다로워.
어르신은 누구한테 배웠어요?
나는 사촌형 이발소에서 머리감는 거부터 시작했지. 처음 이발소에 들어오면 머리 감는 것도 얼른 가르쳐주지 않아. 그 때는 머리 감는 거 배우면 그 다음으로 면도 칼 가는 것 배우고, 그런 다음에 면도를 맡긴다고. 면도 배우면 시아개를 하고. 시아개는 드라리하고 고대하는 것이여. 옛날에는 고대로 드라이 했잖어. 불 달궈서 수건으로 식혀서 머리 말리고 그랬지. 시아개가 끝나야 가위 잡게 했어.
그런 과정을 거치려면 얼마나 걸렸어요?
오래 걸렸지. 그 때는 얼른얼른 안 가르쳐 줬으니까. 부려 먹을 거 다 부려 먹은 뒤에 하나씩 가르쳐 주지. 우리 큰형님도 이발 일을 했어.
집안이 이발 쪽 일을 많이 했네요?
한 사람이 배우니까 따라서 한 거지. 그 때는 마땅히 할 일도 없으니께. 나도 6학년 때 6.25 나서 졸업장 받는 둥 마는 둥 했고, 졸업하고 할 일 없으니께 사촌형이 나와서 이거라도 배우라고 했지. 우리 아버지 4형제가 다 그 동네(원도일) 살았거든.
도일동에서는 몇 대부터 사셨어요?
우리 할아버지가 수원서 살다가 내려왔데요. 할아버지가 수원 광교 물안골에 살다가 내려왔다나 봐. 처음에는 팔달산 밑에 살았는데 성(수원 화성) 쌓는다고 나라에서 병점으로 가던지 광교로 가던지 하라고 했나봐. 그래서 나무해서 팔아먹고 살겠다고 광교산 밑으로 간 거지.
그럼 도일동에는 어떻게 내려오게 됐어요?
거기(원도일) 김서방네가 처갓집이었데. 김석주씨라고. 원도일의 소진형씨, 석주씨, 우리 형 이화성씨, 이춘성씨 다 사촌간이지.
집안이 좋아서 가문끼리 결혼했나요?
우리는 광주 이씨인데 잘 모르겠어요. 광교 물안골은 산골이었고 할아버지가 살았던 집은 오두막인데 짐승 우는 소리 때문에 할머니가 못 살겠더래요. 그래서 친정 동네로 내려온 거지.
어르신은 몇 형제세요?
할아버지가 4대 독자였어요. 그래서 아저씨고 가까운 친척이 없어서 할아버지가 6남매를 낳았다네요. 우리 할아버지가 힘이 장사였어.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그렇게 꼬부라졌어도 평택까지 나무해다 팔고 오셨어. 고모 한 분은 천안으로 시집가시고 다른 한 분은 서울 청파동으로 가고. 나중에 보니까 천안 분은 술도가를 하더라고. 나머지 4형제는 다 도일동에 사는 거여. 함께 살다 보니까 살림도 편 거고.
어르신 아버님은 몇 째셨어요?
우리는 셋째.
사촌형님은?
둘째 큰 아버지 아들이었지. 사촌형이 왜정 때 이용업을 시작했어요.
어르신은 몇 살 때 이발소 다니기 시작했어요?
6.25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지. 내가 17살 되던 해니께.
그 때도 화성이발소였어요?
그렇지. 우리 사촌형이 우리가 본래 화성에서 내려왔다고 ‘화성이발관’이라고 했거든. 우리 뿌리가 화성이니까 그렇게 했지.
6.25 후 화성이발관 주변은 어땠어요?
폭격 맞아서 집들이 줴다 부서지고 엉망이었지. 6.25 때 여기서 싸우려고 무기랑 다 갔다 놨는데 호주 비행기가 잘못 폭격을 해서 그렇게 됐지.
여기(통복동 삼거리)도 폭격을 맞았어요?
여기는 안 맞았어. 왜정 때 집들이 남아 있었지.
세무서는 어디였어요?
저기 24시간 마트 있잖어. 거기서 꺾어져 한 집 아니 두 집 째인가에 있었지.
읍사무소는?
읍사무소는 반대편으로 넘어갔었나봐. 원평동에 없었어. 6.25나고 나서는 평화병원 자리가 경찰서 역할을 했다고 하더만.
군청은 어디였어요?
그건... 잘..,. 어디쯤인가 잘 생각이 나지...
6.25 뒤에는 이발소 앞 땡땡거리가 삼거리였네요?
그냥 땡땡거리라고 불렀지. 요 앞에서 안중 가는 길이 갈라졌응께.
근처에 마방들도 많았다면서요?
지하도 건너 쌍용장 있는데 밑쪽으로 많았지. 순 말마차들이었지. 그 때는 뭐여 구들장 파는 집, 대장간, 말 편자 만드는 집들이 많았지.
대장간은 몇 개가 있었어요?
저기 (통복)지하도 건너에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반 벙어린디 그 아버지가 했었구, 여기 길(옛 국도1호선) 건너 찌개마을 있는디 거기에서도 소 편자 만들었고, 이쪽(쌍용장 주변)은 말편자 만들거나 소 편자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은 그 분들 다 돌아가셨지.
화성이발관은 최고로 번화했던 길목에 있었네요?
위치가 참 좋았지. 여기 아니면 다니는 길이 없었으니까.
손님이 많았겠네요?
많았지, 그 때는 밥 먹을 새도 없었으니께.
어르신이 정식 이발사가 된 것은 몇 살 때였어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사촌형 밑에 있다가 나중에 둘째 형 밑에 있었지. 그 때쯤에 완전히 배웠어. 사촌형이 하다가 둘째 형이 인수받았는데, 내가 욕심을 부렸으면 내가 먼저 한다고 할 건데 양보했지. 경력은 내가 많았으니까. 둘째 형은 사촌형하고 동갑이야. 생일이 한 달 늦어. 여기서 일하다가 군인을 나갔다가 사촌형이 물려줄 무렵에 제대를 하고 오게 됐어. 그래서 우리가 받기로 했는데 사촌형네 형수가 자기 친정 동생을 주려고 사촌형을 꼬셨어. 처남 주라고. 그런디 우리 큰 아버지가 ‘안 된다’라며 우리를 준 거여. 우리 큰 아버지가 우리를 무척 생각해줬어. 우리 아버지가 해방되던 해 여름에 멱 감으러 갔다가 우물에 빠져서 돌아가셨거든. 그게 마음에 걸렸나봐. 지금까지 겪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큰아버지가 우리를 무척 생각해줬어. 우리 아버지는 잘 생각도 안나. 6남매 남겨두고 일찍 가셔서. 그래도 아버지 형제들이 동네 사니께 그냥 살았던 거지. 큰 아버지가 3남매, 둘째 큰아버지가 7남매, 넷째 작은아버지가 6남매, 우리가 6남매였으니까 의지하고 살 수 있었던 거지.
다복했네요?
대단했지. 할아버지 돌아가셔서 제사지내러 가면 정말 대단했다고. 산에 갔다 와서 우리 집에 모이면 굉장했어.
이발소 물려받은 것은 언제였어요?
글쎄 몇 년도더라. 결혼하고 나서도.... 한동안 직원으로 일하다 받았으니까.
직원은 몇 명이었어요?
5명이었나 봐. 이발사 두 명에 나머지는 시다였어. 머리 감는 사람에 시아개까지.
당시 직원들 월급은 어땠어요?
월급은 약했죠. 그 때 얼마 받았나 모르겠네. 거의 돈 안 받았어. 그냥 기술 배우러 왔다고 생각했지. 사촌형 하고 우리 형은 이발소 운영해서 부자됐지. 사촌형도 돈벌어 인삼밭하고 땅 사고 돈 많이 벌었슈. (통복)시장 안에 교장 사택을 사가지고 살았지. 하여간 여기 저기 땅도 많이 사놓고. 그런데 술을 그렇게 좋아했는데도 돼지고기 한 점에 술 한 잔 제대로 먹지 못하고 돌아가셨어.
사촌형님은 이발소 넘기고 뭐 했어요?
(통복시장) 싸전이 새로 생길 때 교장 사택 들어가는 곳에 터가 있었어. 거기서 이발관 했지. 거기서 하루 종일 이발하면 밤 새워 돈을 센다고 그랬어. 그렇게 벌은 돈으로 삼밭을 샀는데 삼밭은 6년을 가꿔야 잖아. 세교동 소주공장 하던 집도 샀고. 그 양반 돈 무척 벌었고, 우리 형도 삼성아파트 넘어 논 70마지기 사고 그랬지. 이발소 하면 직원들 월급 얼마 안 주지 나가는 거 없으니까 돈이 모였지. 지금은 인건비 땜에 어렵지만.
어르신이 물려받은 건 언제예요?
결혼하고 5년 뒤에. 27살에 결혼했으니까 32살쯤에 받았을 꺼여.
그러면 1968년이네요?
그렇게 될 거요.
그 때도 운영은 잘 됐죠?
괜찮았죠. 나중에 학원에서 배워서 나오는 사람들이 쏟아지면서 어려워졌지.
그 때는 자격증 없어도 영업이 가능했나요?
있어야지. 어딘가 가서 자격증을 땄는데, 이론시험도 보고 실기도 보고.
옛날에 많이 하던 헤어스타일은 어땠어요?
다들 상고머리였지. 기계로다 밑을 싹 돌려가지고... 그 때만 해도 한 번 깎으면 오래 가야하니까 기계를 많이 썼지. 지금은 짧게 자르니까 가위를 많이 하잖우. 그 때는 바리깡을 많이 썼지. 옛날 바리깡은 손으로 했어. 잘 안 들면 뒤를 받쳐서 쓰고 그랬지. 오래 쓰면 닳아버리니까 시장가서 갈아서 쓰고.
이발비는 얼마였어요?
내가 인수했을 때는 이발하면 면도를 싹하고 고대로 각을 잡아야 이발이었지. 그런데 얼마 받았는지는 모르겄네. 애들 오면 빨래판 놓고 앉혀서 깎았고. 면도 할 때는 난로에 수건 데워서 하고 그랬었지.
이발소에서 바리깡 기계를 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죠?
옛날부터 바리깡은 있었지. 두 손으로 하는 거. 전기바리깡은 30년도 더 넘었을 거유.
어르신들은 손으로 하다가 기계로 하면서 불편한 점은 없었나요?
(전기바리깡) 편하지. 손 바리깡으로 하다가 전기바리깡 쓰니까 아주 편해졌지.
이발업이 어려워진 것은 언제죠?
전에는 보통 이발소에도 여자 면도사를 뒀어요. 안마는 안했어도 여자 손이 닿으면 남자들이 좋다고 하잖아. 면도사 구하기도 쉬웠고. 이발업이 어려워진 것은 20년도 됐어. 미용학원 출신들 나오면서 시원찮아졌다고 봐야지. 지금은 미용실에서 다 하잖아. 그래도 옛날부터 우리한테 했던 사람들은 미용실에 안 가. 거기서 하면 이발 한 거 같지도 않다고. 안면부터 (면도)싹 하고 고대도 하고 했던 사람은 (미용실)안 가지. 그런 사람들이 지금은 없어. 죽어가지고.
옛날에는 이발 기계를 어디서 들여왔어요?
이발소마다 다녀요. 다니며 화장품하고 기계하고 공급해주지.
옛날에는 화장품도 발라줬는데?
지금은 알아서 바르라고 놔둬요. 맘대로 바르게.
이발소 수건은 누가 빨았어요?
머리 감는 사람이 담당이었지.
사모님과 함께 이발소를 운영한 것은 언제부터죠?
우리 집사람은 아무 것도 안 해요. 직원 두고서 하다가 지금은 혼자 하는 거지.
이발소 운영하고 돈 좀 벌었어요?
못 벌었어. 애들 가르쳐서 결혼 시킨 거가 다지. 애들 결혼할 때 집도 못 사줬고. 딸들은 부모 재산 있는데 시집가서 괜찮은데.
어르신이 이발기술 가르쳐서 내보낸 사람도 많죠?
많지. 요즘은 연락 안 해서 소식도 모르지만 총회하면 만나고 했었는데.
평택지역 이발소는 몇 개였어요?
잘 나갈 때는 120개쯤(평택시 전체). 미용실은 200개쯤 되었고. 요즘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미용실 가는데 그래도 다른 거 하는 거 보담 나을텐데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지금 다른 데는 12,000원 받는데 우리는 1만원 받어. 그래도 손님이 있어야지.
요즘 수입은 얼마나?
한 달에 30만원이나 나오나. 그냥 문 닫을라고 해도 나한테 오던 사람들 땜에 못 닫고 있지. 점심 먹으러도 오고. 동네 마을회관 안 가고 여기로들 와. 요즘에는 농번기라 안 오지만 그 사람들 8, 9명쯤 되는데 추워져야 모여.
이쪽에는 연탄공장이 있었잖아요?
있었지. 저 아래 역전 옆 주차장 자리에 광신연탄, 여기(통복지하도)는 대동연탄. 지금은 TMO건물 지었는데. 참 게네들(미군)은 브로꾸(벽돌) 몇 장 지어 놓고 몇 달 논다잖아. 옛날에는 물건(연탄) 받으려고 트럭 대 놓고 그랬다고. 지금은 그거 만들어 놨잖아 TMO. 아이구 옛날에는 대단했는데 요즘 봤더니 부대 물건 들어가는 거 쌓 놨던데. 지금은 (보급물자) 별로 나가는 게 없더라구. 비행기로 실어 나르나봐. 트럭으로 실어 나를 땐 똘마니 애들이 물건 무척 훔쳐댔잖아. 그놈들 참, 건널목에 서면 뛰어 올라서 물건 던지고, 실어 나르고 굉장했쥬.
그렇게 해도 가만있어요?
우리나라 형사들만 있는데 돈 쳐 먹고 못 본체 하고 그랬지. 그 때는 별거 다 내렸어요. 하여간 닥치는 대로 훔쳤어.
중국집이나 요리집은 기억나는 집 있어요?
영춘관이라고 중국사람 진서방이 운영했지.
쌍홍관은 그억 나세요. 소락천이나?
요 아래로 여러 집 있었으니까.
국도 38호선으로 갈라지는 지점(화성이발소 옆골목)에는 뭐가 있었어요?
논 같은 거 있었고, 집들도 몇 집 없었고. 대동연탄 자리도 철도청 땅인데 거기도 논이었슈. 나중에 그 땅을 불하했더라고.
박명구 교장 댁이 마방조합이었다는데?
조합장 자격도 안 되고 말 만 몇 마리 있었지. 저거지 중계인. 제주도에서 말을 사가지고 팔고 그랬지.
서울방앗간은 40년 넘었죠?
넘었지. 아마 한 50년은 된 건데 먼저 사람이 오래했지. 지금은 아들이 하고.
경기소금도 오래됐죠?
그것도 오래됐지. 저 사람들(최정식)이 하고 엄마는 아들들이 하니까 쫓아왔었지. 꽃소금 만들어서 식당에 팔러 다녔지. 거기가 옛날에 전기회사자리였어요.
무슨 전기회사였어요?
한전이지. 옛날에는 전기회사 아녀. 그래서 땅 덩치가 크지. 저기 불교상회 해서 이쪽 지하도 있는데까지 해서 다 전기회사 자리지. 그랬다가 나중에 삼화건재사가 들어왔다가 저 사람들이 사서 소금공장이 된 거지.
삼거리 조화자전거도 오래됐죠?
저 사람 집이 여기 원룸 앉은 거유. 아버지, 엄마 죽고 큰 아들이 했는데 젊은 나이에 벌써 상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