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頓悟思想의 現代的 意味
睦楨培
차 례
1. 頓悟의 현대적 定義
2. 見性의 本體
3. 頓修의 世界
4. 현대에 있어서 頓悟의 位置
1. 頓悟의 현대적 定義
근래에 와서 돈오와 점수에 대한 논의가 수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한 쟁론은 걷잡을 수 없는 논쟁으로 일관할 것인가, 아니면 이 쟁론에 대한 결론을 거둘 수 있는가. 아직은 미지수다.
점수론의 입장에서 보면 학문적, 선학적, 선문적 입장에서 이론이 제기될 여지가 많다. 그러나 돈오적 선문에서 보면 별다른 논의가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양자가 선문적 입장으로 깨달음을 보는 경향과 교학적 논리로 보는 경향으로 상대된다면 아직 미해결의 장이 될 것이다.
사실 頓悟라는 깨침은 선문적 입장으로 투철히 관하여 삼매의 奧義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투철히 참구하여 삼매의 오의를 터득한 세계를 교학이나 논리로 해석하려면 상당한 문제를 내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소론에서는 현대에 와서 제 문화양태가 복잡하게 대두되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복합문화, 즉 혼돈문화 속에 한줄기 생명의 빛이 없을까, 아니 如如明明한 문화의식은 없을까하는 점에 입각하여 어떤 경우는 비논리적 직관적 사려에 의한 논급이 될지 모르지만 이러한 점에 관점을 맞추어 退翁 著의 禪門正路를 근간으로 하여 현대적 頓悟思想의 意味를 밝혀보려 한다.
먼저 聖德主神鐘의 비명을 보기로 한다.
지극히 완전한 진리는 온 누리를 싸고 있으므로 그 모양을 볼 수 없는 것이고, 진리의 소리는 온 누리에 차고 넘치는 까닭에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지극히 깊은 진리를 우리 중생들도 깨달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진리의 본보기로 가설하여 神鐘을 매어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지극히 완전한 진리는 그 모양과 소리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진리를 모양과 소리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예술의 극치요 장인의 혼신의 마음이 여기에 하나된 것이다. 지금까지 무수한 종이 주조되어 종소리를 올리고 있지만 ‘에밀레’ 종소리처럼 거룩한 圓音을 담고 있는 것도 없다. 모두가 도상과 형틀은 모방을 하였지만 一乘妙音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점수적 형틀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본래 면목은 모양을 지을 수 없고 소리도 만들 수 없다. 본래면목은 진리이기에 인위적 用相으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예술의 극치가 자연과 계합한 것을 神造라고 표현한다. 이 神造라고 표상되는 의미가 무엇인가. 眞如一現의 세계를 의미할 것이다. 이처럼 예술문화에는 神造가 인정되고 있는데 어떻게 깨달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未完으로 남기려고 하는가.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器物의 편리를 보고 있다. 人爲的 科學的 창의성을 쏟아부어 만들어낸 것은 절대적 편리성을 인정하고 또한 그 사용에 있어서 효용가치가 최상으로의 것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절대적 가치성에는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완전무결하게 될 수 없다. 인간은 오욕의 무명이 잔재하고 있으므로 이 무명습기가 탈각하지 않으면 절대절명의 청정유리광명이 되지 못한다고 낙담하는 것이다. 이러한 낙담의 의식이 범부의 생활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과감한 표현을 하고자 한다.
제도나 형식을 점진적으로 수정하는 경우와 제도와 체제를 혁명적으로 바꾸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보수적 제도를 일정 한계까지 인정하고 수정․보완하는 것은 이익보는 쪽은 언제라도 향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일시에 모든 제도와 체제가 혁명적으로 바뀌게 되면 모두가 동일한 지평에서 생활하게 된다.
점수는 제도적 수정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돈오는 혁명적 지평을 전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오는 三賢, 十聖의 위계로서 참입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三賢, 十聖의 위계가 점층적으로 경력 수행이 되었다 하더라도 解悟的 차원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깨달음’이란 앎의 수준이 아니다. 완전하고 무결한 앎이다. 一切智의 깨달음이 바로 돈오이고 無餘涅槃이고 無心地가 되는 것이다.
2. 見性의 本體
그러므로 退翁은 禪門正路에서 ‘見性하면 卽是에 여래가 되느니라’라고 선언하였다. 즉 깨닫는 그 자리에서 바로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부처의 자리에 들어간다거나 증득한다는 것은 어떤 敎理를 參究하여 논리적으로 단계를 지어 들어갈 수도 있지만 깨닫는 공부를 열심히 하여서, ‘纔得見性하면 當下에 無心하야 乃藥病이 俱消하고 敎觀을 咸息하느니라(宗鏡錄 1 「標宗章」)’는 宗鏡錄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退翁의 평석은 眞如의 광명은 항상 법계를 밝게 비추고 있지만 번뇌망상으로 뒤덮인 無明의 구름이 가린 중생은 이 밝음을 보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또한 구름이 걷히면 푸른 하늘이 나타나서 광명을 보게 되는 것과 같이, 미세한 極微妄念이 사라지면 환히 깨달아 참다운 本性이 발견된다고 하였다. 일체의 망념이 끊어져 없어졌으므로 이것을 無念 또는 無心이라 하며, 이름하여 無餘涅槃인 妙覺이다. 그러므로 起信論에서는 깨달음이란 미세한 극미망념이 멀리 떨어져간 究竟覺이라 밝혔고, 元曉․賢首도 그들의 起信論疏에서 일체중생은 무명의 생각이 아직 떠나지 아니한 것이고, 佛地를 無念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金剛, 즉 等覺 이하의 일체중생은 생각과 마음이 있으니 등각도 부처님의 聖敎와 法藥이 필요하며 약과 병이 다 없어지교 敎와 觀을 모두 쉬어버린 無念無心은 번뇌가 영원히 사라져 自性을 발견한 妙覺 뿐이다.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바로 진리 그것으로 現成되는 것이다. 진리와 진리를 요해하고 진리를 파지하는 사람이 二分的으로 分化되면 그것은 진리를 바르게 깨달은 것이 아니다. 진리와 眞理了解者가 未分的卽一로 되는 그곳에 진리와 진리요해자가 現前하여야 한다. 진리요해의 길은 분석이 아니다. 진리와 깨달으려고 하는 자가 卽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見性하는 그 자리가 바로 無心이 되어야 하고 無心이 바로 見性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無心의 자리는 主客이 一致하고 있는 상태이므로 藥과 病이 함께 소멸된 현장인 것이다. 사람은 몸이 아프면 약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아픈 몸이 치유되었다면 약을 먹는다는 것은 과남인 것이다. 약과 병은 몸체와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몸체가 나타나면 그림자가 생기고 몸체가 사라지면 그림자를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병이 없을 때는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 또한 병이 들면 그 병을 고치기 위하여 약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게 된다. 그러나 병이 낫고 보면 저절로 약 먹고 싶은 생각조차 사라져야 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煩惱妄想이 생기고 있으면 그것을 斷滅하여야 한다. 그러나 번뇌망상은 큰 병이 아니라고 단멸할 약을 쓰지 않으니, 자연 번뇌는 치성하고 망상은 우리를 괴롭히게 된다. 불교 수행에 있어서 깨침을 성취하였다는 것은, 우리 마음 속에 부단히 치성하고 있는 망상이 사라지고 사라진 寂滅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또 적멸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종국적 적멸에 도달하고 항속시켜야 한다.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열반이라 이름할 수 있다. 불교의 언어적 표현으로는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절대적 의미는 마음이 어떠한 대상에도 흔들림없는 不動心에 이른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寂滅의 마음은 無心이 되는 것이다. 절대 不動하고 절대 평정한 무심의 마음으로 경영되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최상의 자유를 향유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자유는 자기 스스로 창조한 것이므로 누구의 구속에나 제약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해탈이란 無心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고, 인간이 가장 원초적인 실재를 향유하여야 할 절대적 초월적 자기 잠재성의 구현이며 자기 해방의 자유가 될 것이다. 초월적 자기 해방은 大無心이다. 大無心이란 무엇인가. 一切寂滅의 한 마음이 大無心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마음에는 미세하기 한없는 번뇌가 연동운동으로 발생하고 있다. 즉 8만 4천이나 되는 무량한 미세번뇌가 연쇄적으로 갈등하며 충격파를 일으키고 있다. 어떻게 보면 8만 4천 가지에다 8만 4천을 제곱한 만큼 많은 번뇌가 직접 망동하고 있는 현실로서 人間事가 전개되고 있다. 이렇게 미세한 마음의 갈등이 人間行程을 誤導하고 있는 것이다. 誤導의 行程이 常道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전부가 아닌가. 그런데 이 미세하고 무량한 번뇌가 하나없이 사라지고 完滅한 상태가 현전하게 되었다면 이 자리가 大無心地가 될 것이다.
이 자리는 인간이 삶을 바르게 살 수 있는 無位眞人의 자리라 할 것이다. 호리의 차이가 천지를 갈라 놓는다고 한다. 오늘날 우주공학이 발달하여 극미의 오차가 있으면 실행할 수 없음이 입증되는데, 우리 마음 속에 극미의 오차가 아니라 극미의 번뇌마저 다 사라져간 상태가 되어야만 열반이 될 것이다. 번뇌가 나지 않는 그 자리가 열반의 자리로 갈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날 것이, 생길 것이 없는 그 자리가 적멸위락 즉 열반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깨달음의 자리는 번뇌 不生의 세계이다. 분별하는 마음, 차별하는 마음, 간택하는 마음, 즉 마음으로 작용하는 일체의 행위가 止滅한 적정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昭昭靈靈하고 惺惺寂寂한 본체가 그대로 나타난 진여의 실상이다. 사람은 눈이 있으므로 사물을 바라본다. 그러나 우리가 본다고 하는 것은 형체를 보는 것이지, 그 본질을 간파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다만 자기 안목이나 척도에서 일체를 보거나 측량한다거나 해량할 뿐이다. 이러한 측량이 바르게 될 수 없으므로 인간으로서 오류를 범하게 되고 오차인생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相似覺이나 근사치에서 오는 비극인 것이다. 어림짐작이 우리에게 주는 계산적 함정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에 침입하지 못한 假我는 항상 불완전하고 모순성에 뒤엉키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분별, 자기차별, 자기간택의 척도에서 과감하게 일탈하여야 한다. 일체 自我自體의 분별의식을 떠난 無心의 바탕, 평등의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여야만이 자연스레 무심, 평등의 마음이 자리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최고성지로 자신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우리는 항상 分別意識이 일어나는 망상을 제거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退翁은 견성의 자리를 바르게 인도하기 위하여,
佛性을 밝게 발견하여 대열반에 주하게 되면, 곧 不思議解脫에 상주하게 되느니라.
一切萬法에 眞心의 自性을 밝게 발견하면 곧 진실한 구경각이며 바로 成佛함이니라.
견성하면 곧 如來를 성취한다.
만약에 佛性을 頓見하면 한 생각에 成佛하느니라.
등으로 견성이 바로 佛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苦口丁寧 선문정로에서 일러주시고 있다.
그러면 인간이 인간다운 최고의 위치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또한 진리를 체달하여 涅槃의 대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사람이 살면서 부질없이 야기하는 분별망심으로 衆生業을 소진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禪行으로 자아정립의 공부를 하는 것이나, 敎學으로 理路탐구의 공부를 하는 것, 이 모두가 마음 속에서 형성되는 분별 망심인 번뇌를 소멸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無心으로 지향하는 최상의 길이 될 것이다.
우리들이 了解하였다고 할 때 全一的인 것을 知解하여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부분적인 현상이 알아졌다고 하여 모든 것을 다 證解한 것처럼 과장하여 표현하게 되면 엄청난 착각이다. 사실 우리들이 알았다고 하는 것은 世諦的인 것도 부분적인 것만을 아는 데 그치고 있는데, 하물며 眞諦의 理法을 직파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頓知하여야 만이 實在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 완전한 깨달음, 그것은 번뇌가 하나없이 消盡하고 또한 번뇌가 不生, 無生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不生이란 一切가 영멸하였으므로 다시 나지 않는 경계를 말함이고, 無生이란 본래 청정심이므로 번뇌가 나올 것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漸修行的인 次第禪으로 가능하긴 하지만 頓證으로 깨달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 같이 頓悟의 세계를 제시한 退翁의 徹見이 畏敬스럽다.
그러므로 見性하는 것이 바로 성불이 된다는 것은 본래 면목의 확인이며 여래진실상의 현발이 됨을 주장하신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완전한 인격을 갖추어 남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다면, 그 내면세계에는 道德律이 잠재하고 있을 것이다. 인격이 고매하게 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大涅槃을 얻어 자유롭고 평등하게 된 사람이면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존경의 대상이 된 사람은 먼저 불교적 수행으로 加行精進한 사람일 것이다. 즉 淸淨持戒를 지키므로 열반을 얻게 되고, 불성을 봄으로 대해탈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持戒-涅槃, 涅槃=佛性, 佛性=解脫로 바꿔놓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불성을 갖고 있다고 하였으니, 지계를 지키는 생활을 쉬지 않고 계속한다면, 불성이 해탈로 환원되고 그 해탈이 바로 열반이 될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으로 지향하는 길이 쉽게 밝혀져 있지만 惱亂하고 있는 번뇌로 살림하는 습벽 때문에 우리의 생활은 흔들리고 있다. 이 깨달음이 우리들 자아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馬祖語錄에서 보면,
자아와 깨침은 일원적 法相임을 증명하고 있다. 즉,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自我의 본성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이니 한번 깨닫고 나면 영원한 깨침이어서 다시 미혹하지 않는다. 해가 솟아오르면 어둠과 상함하지 않는 것과 같이 지혜의 해가 솟아오르면 번뇌의 먹구름이 사라지고 의식과 경계를 소멸하여 망상이 나타나지 않으니 이것이 곧 無生法忍이며 본래 있었던 것을 지금 찾아가는 것이다. 修道와 坐禪을 가차할 것 없이 修治하지도 않고 生起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바로 如來의 淸淨禪이다(傳燈錄 28).
라고 하고 있다.
망상이 쉴새없이 일어나 청정심을 물들이고 오염되게 하였다 하더라도 본래 있는 여래의 청정선으로 척파하면 바로 본래광명이 법계를 照光하게 된다. 그리하여 退翁은,
망상이 멸진하고 無生을 확철하게 깨달아 다시 미혹하게 되지 않는 여래 청정선을 내용으로 하는 馬祖의 頓悟는 참으로 깨달음의 최종인 無心인 깨달음이라고 하였다. 馬祖뿐만 아ㅣ라 達摩가 전한 것을 바로 받아들인 正眼宗師들도 모두 無生法忍을 원만히 大聖들이니 禪門正傳의 頓悟見性은 分證과 解悟가 절대로 아니요, 圓證인 證悟임이 확연하다.
고 하여 헤아려 깨닫거나 분별로 증득하여서는 禪法을 沒解한 것이라 하였다. 해가 솟을 때는 어둠과 서로 합하지 아니함과 같이 지혜의 日光이 나타나면 번뇌의 먹구름이 소멸되어 버린다.
이러한 것이 바로 깨달음의 경지인 것이다. 이와 같은 깨달음은 인간에 先在하고 있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찾아내고 발견해 내는 것이다.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 속에 참 생명이 내재하여 있는데 번뇌망상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이 번뇌의 먹구름만 거둬버리면 광명 여래가 바로 거기에 현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번 깨달았다’함은 자기의 본성을 확연하게 깨달은 것이므로 한 번 깨닫고 나면 영원히 깨닫는 상태로 있어야 하며 다시 미혹하게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 경계를 物理的인 방법을 도입할 수도 없지만 10평의 방을 1촉광으로 밝히면 어둡다. 그러나 100촉광으로 밝힌다면 환한 광명당이 될 것이다. 점진적으로 촉수를 높이는 것보다 일시적으로 100촉광을 밝히는 경우를 생각할 때 우리는 頓悟의 實證이 그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부분적으로 안다거나 약간 이해하고 있는 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견성의 의미가 이처럼 난해하고 어려운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3. 頓修의 世界
退翁은 禪門正路 제13장에서 밝혔듯이 頓悟漸修를 혐기하고 있다. 돈오점수를 직역하면, ‘깨달으면 부처라도 닦음이 필요하다’고 하거나 ‘천천히 닦으면서 깨치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지근하고 모호한 수도방법을 退翁은 호되게 쳐부수고 있다. 즉 깨달았더라도 계속 닦아야 하고 또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설법은 못하며 다른 사람이 물을 때 대답도 못한다. 왜냐하면 처음 깨쳤다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완숙이나 원만성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初見性에 비할 수 있는 미완성의 知解的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退翁이 평석하기를, ‘見性은 現證圓通한 究竟覺이므로, 十信初位를 내용으로 하는 解悟인 頓悟는 견성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미지의 세계를 처음 답사하여 참으로 굉장한 세계가 있구나 하고 감탄한 것이지,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완연하게 知悉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退翁도 말씀하시기를, ‘自古로 禪門에서 頓悟하였다 함은, 甚深極玄한 難問으로써 시험하여 靑天白日과 같이 明明了了한 正答이 불능하면 打出되어 印可를 받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廓徹大悟, 그것이 頓悟의 圓證일 것이다. 비슷하게 알거나 相似覺으로 알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고 정확하게 바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선가에서 수행도중 喝을 하거나 방망이로 때리기도 하지만, 이것은 머뭇거림없이, 참구함 없이, 사고함이 없이 곧 물음에 바로 대답하는 卽時的 해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소리도 주장자를 경상에 두드리면 바로 나고, 빛도 밝히면 바로 밝아지는 것이다. 소리가 시간적 간격을 두거나 빛이 사이를 두고 빛나는 것이 아니다. 소리와 빛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울리고 발광하는 것이다. 卽時的 見聞覺知가 頓覺의 實體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완전하고 원만한 깨달음을 내용으로 하는 禪門의 頓悟, 즉 견성과 알음알이로 깨달은 敎家의 頓悟와는 찬양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항상 깨침의 상태에 있는 것은 물론, 卽時的 通時的 지혜가 생명하고 있는 세계가 頓悟의 경지이다.
다시 말하면, 이론적으로 이해된 지식과 궁극적 자각에 의하여 自內證한 깨달음과는 하늘과 같은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
보조스님 定慧結社文에서,
우선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공적함을 깊게 믿고 이해하여 그 信解를 의지하여 훈습 수행하는 것이 무방하리라.
고 한 대목에 대하여, 退翁은 평석하기를 보조스님이 말씀한
이 信解는 解悟인 頓悟를 말함이니 이는 敎家의 頓悟漸修思想이다.
라고 하였다. 다시 普照 修心訣의 돈오점수를 평하기를,
解悟는 重妄想을 벗어나지 못한 虛幻妄境이므로, 客塵煩惱가 前日과 같이 치연히 起滅하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 煩惱妄想을 제거하는 것이 悟後의 漸修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가에서는 번뇌망상은 물론이거니와 미세한 번뇌마저 영원히 없어진 절대무심의 大休歇地가 돈오이며, 견성이므로 일체망상이 멸진하고 참다움이 증득된 그 자리, 즉 無心․無念․無爲․無事의 금강과 같은 禪定位가 바로 圓證의 자리인 것이다. 자못 후대 선객이 돈오란 말로써 교가가 지칭하는 것과 선가에서 말하는 것이 대별될 수 없는 것인데도 이것을 동일한 의미로 보아 온 것은 선을 오도하고 佛祖의 뜻을 그르치는 大罪過가 된다고 하였다.
達摩가 직접으로 전한 것은 慧能이 이어받았으며, 이것은 오직 돈오만 있고, 점수는 없는 것이다. 즉 慧能이 頌한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는 본래부터 無․空의 法性體를 悟達함을 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돈오돈수가 선가의 정통사상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해오를 근본으로 하는 돈오점수는 교가의 수행방편이요, 선문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철칙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을 바르게 하려면 오직 선문의 바른 법으로 준수하여 수행하여야 하며 이단잡설에 현혹됨을 벗어나야 한다. 이로써 解悟는 麤重妄想을 벗어나지 못한 虛幻妄境이므로 客塵煩惱가 항상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煩惱妄想을 제거하는 것이 깨달은 뒤에도 닦는 漸修이다. 그런데 禪門에서는 麤重妄想은 말할 것도 없고 第八의 微細한 알음알이 마저 永斷한 구경 무심의 大休歇處가 돈오이며 견성이므로 妄滅眞證한 이 無心․無念․無爲․無事의 金剛大定을 보림하는 것이 長養聖胎이다. 깨달음과 아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는데 이들을 見性이란 말로 얼버무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敎家에서는 解悟의 상태밖에 이르지 못한 것을 頓悟라고 주장한 이상, 아직가지 完盡하지 못한 煩惱妄想을 제거하여야만이 大休歇處에 도달하게 되므로 漸修問이 필요함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禪門正傳에서는 일체망상이 完滅한 大休歇處가 頓悟라 하고 見性이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解悟와 頓悟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普照스님이 結社文과 修心訣에서는 荷澤․圭峯의 頓悟漸修를 達摩正傳이라고 주장하다가 節要에 와서는 荷澤․圭峯은 知解宗徒로서 曹溪嫡統이 아님과 동시에 그의 사상인 頓悟漸修는 依言生解하는 敎家요, 離言忘解하는 禪門이 아니믈 분명히 말하였으니 이것은 커다란 사상의 전환인 것이다.
退翁의 禪門正路에 의하면 普照의 저술 연차를 結社文을 지은 것이 33세, 節要는 입적하기 전 해인 52세 때이다. 그런데 修心訣은 撰述年代가 없으나 그 내용이 結社文과 동일하므로 초년에 저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초년에 지은 結社文과 修心訣에서는 禪敎를 혼동하여 敎家쪽에서 주장할 수 있는 사상으로서의 頓悟漸修를 達摩禪宗이라고 하였으나, 慧解가 增高함에 따라 만년에는 앞의 過誤를 해맑게 깨치어 禪宗은 徑截門임을 說破한 것이다. 普照가 만년에 이르러서 依言生解하는 것이 頓悟漸修하는 知解임을 명백히 밝힌 것은 禪門을 위하여 중요한 轉機를 내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고려 禪宗史에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禪家에서 상용어로 회자되던 頓悟漸修가 언어에 의하여 了解되는 知識組織으로서 본래의 究竟本覺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普照가 활동할 때에 이미 頓悟漸修가 禪宗이 아님을 명백하게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普照入寂 以後 8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도 普照를 빙자하여 頓悟漸修를 禪宗이라고 주장하는 禪僧이 있다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退翁은 강력히 질타하고 있다. 그리하여 退翁은 頓悟漸修를 祖述한 普照 自身이 頓悟漸修의 元祖인 荷澤․圭峯을 知解宗師라고 斷言하였으니 그 누구를 막론하고 頓悟漸修思想을 신봉하는 사람은 전부 知解宗徒가 된다고 하였다. 오늘날 한국 불교에서 禪을 주로 하는 曹溪宗에 아직까지도 頓悟漸修의 行法은 강하게 선을 그어져 오면서 도도히 흐르고 있다. 다시 말하면 頓悟見性이 禪의 구경처가 되어야 함을 알지 못하고 解悟의 논리로서 닦아가려는 경향이 강한 것이다. 이것은 退翁이 어떤 형태로 敎示하던 간에 오늘날 한국 禪門이 흘러온 물결에 연유한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조계선의 巨峯 普照에 隨應하여 수행하는 것을 한 법으로 삼아오니 자연히 頓悟漸修의 수행이 禪門山脈에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다.
이처럼 普照禪이 한국선종사에 미친 영향이 다른 방향으로 치닫고 있으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禪敎를 혼돈한 초년의 저술인 結社文과 修心訣로서 頓悟漸修의 大宗으로 추앙되는 普照自身도 만년에는 敎外別傳은 逈出敎乘이라 宣說하여 頓悟漸修를 知解인 死句라고 규정하고 禪宗의 徑截門活句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였거늘, 만약에 頓悟漸修를 禪宗이라고 다시 云謂한다면 이는 禪宗正傳의 반역일 뿐만 아니라 普照에 대하여도 몰이해한 어리석은 견해이다. 그러므로 敎外別傳인 達摩兒孫은, ‘禪門의 最大禁忌인 荷澤․圭峯의 知解宗徒가 되어서는 아니된다’고 누차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普照는 禪의 理解가 처음에는 잘못 들어갔지만 看話決疑論을 저술할 때는 禪宗正傳의 길로 들어왔다고 하였고 또한 禪을 參究하는 者들도 반드시 이 길을 택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退翁은 禪門正路 15장인 多聞知解의 끝머리에,
頓悟漸修를 내용으로 하는 解悟인 圓頓信解가 禪門 최대의 禁忌인 知解임을 明知하였으면 이를 완전히 포기함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禪門正路의 本分宗師들은 추호의 知解도 이를 佛祖의 慧命을 단절하는 邪知惡解라 하여 철저히 배격할 뿐 一言半句도 知解를 권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普照는 圭峯의 解悟思想을 知解라고 비판하면서도 節要 圓頓成佛論 등에서 解悟思想을 연연하여 버리지 못하고 항상 이를 고취하였다. 그러니 普照는 만년에 圓頓解悟가 禪門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으나, 시종 圓頓思想을 고수하였으니, 普照는 禪門의 표적인 直旨單傳의 本分宗師가 아니요, 그 思想의 主體는 華嚴禪이다.
라고 하여 한국선종사에 새로운 地平을 개연한 것이다. 여기서는 普照의 선사상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普照가 지향하였던 敎禪理解를 바르게 인식하자는 생각이 앞선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4. 현대에 있어서 頓悟의 位置
退翁이 저술한 禪門正路는 19章으로 엮어진다. 章別마다 특성이 있는데, 참다운 마음을 발견하고 그 참다운 마음으로 바르게 생활하여야 함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禪을 수행하는 衲子에게 교시하는 것이 아니라 禪의 正統이 오도되고 있으므로 禪이 현대에 와서도 정통적으로 전수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며 와전된 보수적 선수행을 혁파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길이 바른 길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는 합리적이고 방편적인 방법으로 禪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禪과 건강, 禪과 서예, 禪과 茶, 禪과 詩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선과 관계되는 무엇이지 一如, 卽如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茶禪一如, 詩禪一如 등으로 많은 표현들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선과 관련되어 나오는 어떤 상황일 것이다. 普照國師의 사상 속에 華嚴的인 것이 농후함으로 선과 화엄이 융섭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선이라 하지 아니하고 화엄선이라고 명명하였는데 하물며 禪詩․禪書․禪茶․禪武 이것들은 선을 통하여 새롭게 형성된 詩․書․茶․武일 수 있어도 禪 그것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보면 禪은 생활 속에 있어서 아니면 현대에 있어서 不可能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질 것이다.
인간의 생활 속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인 倫理마저 파기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즉 ‘父母를 살해한 大逆重罪는 오히려 참회할 수 있으나 大般若를 비방한 罪는 참으로 참회하기가 極難하다’라고 설파한 것도 있다. 사실 부모를 살해한 것이 극악무도한 대죄인데 이것은 참회하면 가능하고 득도를 사칭하여 반야를 비방한 죄과는 참회하여도 구제 받지 못한다고 하니, 이것은 윤리성의 모순이 아닌가. 이러한 표현이 바로 禪만이 특유하게 갖고 있는 언어논리인 것이다. 이것은 뒤바꿔 설명하면 대반야를 비방하는 사람은 항상 다른 일들도 法軌에 맞추어 보지 아니하고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리를 무서워하고 진리에 맞추어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殺父殺母가 가능한 것인가. 즉 得道하지 못하고 得道하였다 함은 增上慢인지라 大般若을 비방함이니 懺悔로써 통하지 못한다. 빈궁한 賤人이 임금이라고 거짓 외치고 다니면 자기 일신만 망치게 되지만 득도를 가장하여 法王이라 사칭하여 행법하고 다니면 無數衆生을 기만하게 되어 사악한 길로 끌어들이니 그 죄상은 千佛이 出現하여도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邪見을 내어 놓고 이것을 如實한 生活로 引用하려는 사람들의 作戱인 것이다. 그런데 禪門에서는 이러한 邪見作戱를 용납하지 않는다. 즉, ‘見性成佛하면 一得永得하여 스스로의 寶藏에 의거하여 스스로의 家寶를 운용하는데 그 수용함이 한계가 있겠는가(圜悟心要)’라는 대목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인간이 절대적 완성자가 되면 한번 얻어 깨달은 것으로 영원히 깨닫게 된다. 이것은 바로 스스로의 무한동력으로 항상 일용할 동력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발현하는 무한동력은 아무리 오래 쓴다고 하여도 무제한의 동력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들의 심성을 참다운 見性으로 발현하게 한다면 그것은 무한동력을 활용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한정된 동력을 쓰고 나면 다시 충전하거나 다른 연료로 바꾸어야 하는데 한번의 깨침으로 무한동력을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생활의 위대한 轉機가 될 것이다. 이러한 깨침이 自我에 定坐한다면 그 自我는 무한한 청정성에서 生命할 것이다. 圓頓이 禪으로 성취되면 두 번 다시 퇴몰하지 않는 不生 無生의 경지에 참입하여 일체를 전용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眼前에 현현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退翁의 교설은 고원한 禪說로서 일관되어 있기 때문에 보통 세속적인 사람으로는 그 법문을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많다. 그러므로 스님이 한 때 오늘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간결한 법문이 있었다. 즉, ‘인간의 마음은 생명의 주체이고 모든 만물의 근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성을 잃고 일상의 수레에 이끌려 가고 있다. 이것은 물질만능에 의해 자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조사들은 財色을 보기를 독사보는 것 같이 하라’고 하였다.
물질로는 인간의 공허를 메울 수가 없다. 그리고 잃어버린 자기는 오직 자기의 심성 속에서 되찾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출가자를 本分回歸의 순례자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인간은 자기 스스로만이 구제할 수 있고 자각시킬 수 있는 열쇠를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스님은 이러한 자각의 길로 가는데 있어서 인간은 어떻게 수행하여야 하며 자각하는 그 목적이 무엇이며 중생은 영원히 중생인가에 대하여 ‘佛法에는 중생이 없다. 이는 중생의 허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하였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스스로 자아의 허물을 발견하여 본래 자기를 실현하며 살아가야 한다.
‘法이나 道가 모두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며 경전은 단지 참된 면목을 일깨워 주는 방편일 뿐이다. 경전을 읽지 않고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의 길이 있으니 이를 불러 敎外別傳이라고 한다’고 갈파하였다.
현대인은 문제에 얽매이고 남의 사상에 가탁하여 살려고 한다. 남의 사상이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그것은 남이 解知한 것이지 자기의 것이 아니다. 불교의 교설, 圓證의 세계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그것은 교설이고 사상이며 착함이나 완성으로 이끄는 방법밖에 되지 않는다. 그 세계에 스스로 참입하고 스스로 증득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 길이 바로 禪修行의 길이요 頓悟頓修의 길이다.
그러므로 禪은 교수하는 것이 아니고 직시하여야 한다. 우주만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禪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내면세계에서 밝아온 光明體인 것이다. 중생은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마음이 없는 부처는 존재하지 않는다. 뭇 생명체가 하나라면 거기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본래면목이 있는 것이다.
禪은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본질을 달관하려는 心行인 것이다. 현상은 대상을 상대하는 것이라 할 것 같으면 본질은 생명의 근원을 투시함은 물론 禪行을 하는 사람은 생명의 근원으로 일치하는 본원력이 발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禪의 구경으로 이룩된 힘은 佛力ㅣ요, 菩薩力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알음알이로 되는 인식적 논리이거나 또는 동정심으로 구원하는 윤리적 봉사가 아닌 것이다. 禪은 자기 생명의 실현임과 동시에 일체 생명의 평등성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이나 논리, 사회적 상관관계에서 부여될 수 있는 윤리적인 봉사가 아닌 것이 禪이 짊어져야 할 길이다. 이 길을 무조건 나아가야 한다. 조건에 의미를 두거나 조건에다 자기의 면목을 내세우려 한다면 그것은 禪에 參入한 것이 아니다. 다음의 자기에 어떠한 일이 닥친다 하여도 그 조건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현재의 모든 조건을 상대하며서 해결해 가는 것이다. 이처럼 선은 不退轉의 精進이며 문제의식에 살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이다. 그러므로 禪은 現存性의 次元에서 歷史的 存在로서 大我가 되려한다. 이것은 歷史를 책임의식으로 담당하는 행동선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退翁이 이와 같은 행동선으로 대경을 척파하지 아니하였다면 과거의 역사 앞에서나 지금의 실존 앞에 사악한 행위가 난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退翁의 행동선이 과거의 시간 속에 일어났던 모든 문제들, 또한 현실 앞에 파생되었던 모든 不義를 혁파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세간적 입장에서 말하기 좋아한다. 왜 退翁이 山下市井에 내려와 下垂하지 않는가고, 禪이 山 아래 내려오면 禪의 獨悟性은 물들고 만다. 山山水水하는 그 自在性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山과 水를 別異로 보고 있다. 그러나 山과 水가 六相圓融과 無餘涅槃을 明顯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頓悟의 現代的 意味는 깨달음으로 시작하는 절차가 아니고 또한 깨달음이 끝이 난 解證도 아닌, 깨달음이 常日恒光하는 如來體顯인 것이다. 口頭禪․生活禪․禪文化 등으로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모두가 禪으로 解悟하는 것이지만 頓悟는 중생을 혁명케하며 一切煩惱漏垢가 頓除되어 두 번 다시 無明業妄으로 생활하지 못하게 하는 光明의 世界다. 이러한 세계를 논리적 교리적으로 이해하고 닦으려고 하니 사회적․윤리적․인간적 갈등이 선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정념으로 야기되는 모든 갈등․소외․고독․번민이 일시에 사라져 天眞童의 心光이 서로를 비추는 비로광이 되고 중생이 佛性을 구현하는 무조건적 階位를 인지하는 宇宙的 연기법인 의 衆生佛思想이 바로 頓悟의 現代的 이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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