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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 2018년 겨울호 계간평>
고통을 건너는 모습들
박수빈
문화는 살아남거나 사라지면서 뒤섞인다. 음악의 진화로 예를 들어볼 수 있겠다. 아프리카인들은 쿠바나 브라질에 노예로 끌려오면서 아프리카의 토속 신들을 버리도록 강요를 받았으나 리듬은 허용이 되었다. 그래서 쿠바의 ‘살사’나 브라질의 ‘삼바’ 에는 열정적이고 원초적인 아프리카의 신명이 이어질 수 있었다.
반대로 미국 미시시피의 목화 농장에서는 아프리카의 리듬이 살아남지 못했다. 폭동을 막으려고 농장주들이 노예들 간의 의사소통 수단이 될지도 모르는 타악기나 피리 연주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미시시피의 노예들은 북 대신에 기타를 튕기게 되었고 목화밭을 바라보면서 서러운 곡조를 읊조렸다. ‘블루스’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1865년에 노예제가 폐지되기는 했으나 흑인들에 대한 인종 차별은 계속되었다. 1930년 인디애나주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흑인 남자 둘이 백인 남자를 살해하고 그의 애인을 강간했다는 소문이었다. 성난 백인 폭도들은 살인자로 지목된 두 명을 집단 폭행한 후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였다. 하지만 피해자로 알려진 여성은 강간 사실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미어로폴은 이 만행에 대해 ‘이상한 열매’라는 시를 썼고 빌리 홀리데이 특유의 짙고 스산한 목소리로 퍼져나갔다. 이 노래는 흑인 민권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블루스는 이렇듯 리듬의 거세와 폭력의 역사를 관통한 슬픈 음악이다.
지난 계절에 발표된 시들에서 이 블루스 음악과 같은 맛이 우러나는 작품들을 발견한다. 단순한 커피 맛이 아니라 찻잔에 밴 맛이라고 할까. 오랜 시간 동안 커피 덩어리가 밑바닥에 눌어붙은 찻잔. 커피 맛이 지워지지 않는 잔에 비유할 수 있는 시편들이다. 진하고 애잔하면서 끈끈한 그 블루지한 덩어리들이 녹아내린다. 다음의 시를 읽으면 스며드는 아픔을 견뎌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죽은 줄 알고 베어내려던
마당의 모과나무에
어느 날인가부터 연둣빛 어른거린다
얼마나 먼 곳에서 걸어왔는지
잎새들 초록으로 건너가는 동안
꽃 한 송이 내보이지 않는다
모과나무 아래 서 있을 때면
아픈 사람의 머리맡에 앉아 있는 것 같아요
적막이 또 한 채 늘었어요
이대로 죽음이
삶을 배웅 나와도 좋겠구나 싶은
바람 불고 고요한 봄 마당
- 김명리,「바람 불고 고요한」,『포지션』, 2018년 가을호.
삶에 대해 고심을 하는 시이다. 생각이 행동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행동이 생각을 가다듬고 정리해준다. 그러니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이 시에서 모과나무가 고통을 견디는 자세는 의연하다. 바람이 부는데 고요하다니 얼핏 제목과 상황이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못났다는 선입견을 동반하는 모과나무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무시 받았을 서러움의 인내가 수반이 된다. 뿌리 깊은 생각이 행위의 열매를 열리게 하듯 실천이 커다란 생각을 대변한다. 걱정이나 불안 등을 날려버릴 의지가 있다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예상하지 못한 길이 열린다. 여기에 시인의 시적 사유가 빛을 발하고 있다.
“죽은 줄 알고 베어내려던/ 마당의 모과나무에” “연둣빛이 어른거”리는 생명의 힘은 얼마나 위대한가. 온 힘을 다해 “먼 곳에서 걸어왔”을 정성은 갸륵하다. “모과나무 아래 서 있을 때면/ 아픈 사람의 머리맡에 앉아 있는 것 같”은 화자의 심정은 기꺼이 아픔을 나누는 자세이다.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옆에 있어 주면서 함께하는 마음과 행동이다. “죽음이 삶을 배웅 나와도 좋겠구나 싶은” 그야말로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 때, 고통을 누군가에게 얘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한결 나아질 것이다.
그러려면 판단이나 표현을 섣불리 하지 말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혼란은 진정한 이해를 통해 줄어든다. 그래야 바람이 불어도 고요할 수 있는 것이다.
연주하라
숨 가픈 하루의 가락에서 다음 가락까지 서툰 숨 가락의 간격은 너무 멀고, 몰아쉰 숨의 고비가 거칠다 해도, 밝은 귀까지 닿아야 할 소리를 위해
때론 연주하지 마라 힘든 한 매듭의 음과 음을 건너느라 소리로 번지는 향기를 제쳐버리고 춤사위를 놓친 채 고저장단에만 매달리려거든
다시 연주하라
삼백예순날 도돌이표를 몰고 온, 숨의 박자에 고이는 숨결로 네 숨결의 무늬를 타라 오선지의 고저가 멈춘 바로 그 자리, 오직 박자만을 안고 있는 거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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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을 탓하는 정신이여 , 쉼표도 악보의 일부입니다 ,
- 조영심,「쉼표를 연주하라」,『애지』, 2018년 가을호.
조영심의 시에서 음악은 마음을 정화하는 묘약이다. 현대인들은 저마다 살기 바쁘고 복잡한 인간관계들에 매여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삶에 대한 반성이 “숨 가픈 하루의 가락에서 다음 가락까지 서툰 숨 가락의 간격은 너무 멀고, 몰아쉰 숨의 고비가 거칠다”는 구절에 드러나 있다. 그래서 “밝은 귀까지 닿아야 할 소리를 위해” 시인은 숨을 고르며 삶을 연주하라고 말한다.
음악은 실로 삶의 조화를 위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정신없이 살다 보면 “춤사위를 놓친 채 고저장단에만 매달”리게 되니 반음악적인 생활로 치닫는 것이다. 쉬지 못하고 생활에 쫓겨 사는 삶은 고통스럽고 피곤하다. 하여, “때론 연주하지 마라”면서 쉼표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쉬면서 재충전을 하고 “다시 연주하라”는 메시지를 통해서 만물이 생동하는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나아가 우주까지 열리는 생을 연주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악보에 있어 쉼표는 살아가는 방법을 일깨워준다. 지치고 힘든 삶에서 쉬어 가는 것 역시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편이다. 쉼표는 마냥 쉬는 마침표와 다르다. 낮이 지나면 밤이 오고 전쟁을 치르면 평화로 이어지고 노동 다음에는 휴식이 있어 쉼표는 “삼백예순날 도돌이표를 몰고 온, 숨의 박자에 고이는 숨결로” 삶의 윤활유인 셈이다.
근래에 자주 접하는 단어가 ‘힐링’이다. 이는 현대인들이 행복과 거리가 멀고 불안과 스트레스를 많이 겪는 반증이다. 힐링은 고통을 건너는 대안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근본적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욕망에서 파생이 된다. 서로의 욕망을 관철하려다가 충돌하고 상대에게 피해를 주거나 폭력이 되기 때문이다. 삶의 악보에 있어서 쉼표는 존재의 소중함을 확인하게 한다. 쉬는 것에서 내면의 말을 귀 기울이게 되고 거기서부터 회복과 치유는 시작된다.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
햇빛이 이사 왔다
햇빛은 꿈속에 사는 소문인데
어느 구멍으로 흐른 것일까
의자가 있던 자리에
그림자가 남았다
그림자는 기억 속에 사는 유령인데
어느 벽을 허문 것일까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
소문이 무성하다
피아노가 중고로 팔렸다고 하고
애인이 떠나자 주인이 버렸다고 하고
피아노와 의자가 사라진 건
애인의 실종과 관련 깊어서
모두 주인의 애인되기를 갈망한다고 하니
우리는 조용히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서랍장이 햇빛을 몰아내고 (그래서 소문이 사라졌다)
탁자가 그림자를 몰아내고 (그래서 유령이 사라졌다)
새로운 구석과 중심이 되어간다
사라지고 싶은 것들은
낯선 8요일에 한 쪽 발을 담그고
미련과 슬픔을 두고 가지 않는
예의의 절차를 모색하고 있다
- 강순,「사라지고 싶은 것들」,『리토피아』, 2018년 가을호.
“피아노가 있던 자리”는 선율로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 역시 역지사지로 보면 달라진다. 피아노가 지배하고 있던 덩치만큼이나 햇빛은 가려져 있고 피아노를 치운 자리에 비로소 햇빛이 이사를 올 수 있다. 여기서 사유는 불확정적이다. 1연의 “피아노”가 2연에서는 “의자”로 대체되고 “햇빛”과 상대적인 “그림자”를 안치하고 있다. 각각 “꿈 속에 사는 소문”과 “기억 속에 사는 유령”으로 댓구를 이루며, 나아가 3연에서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는 무성한 소문이 이어진다. 4연의 “모두 주인의 애인되기를 갈망한다”는 표현에서는 시기와 질투를 예감한다.
이러한 정황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싶”은 화자의 태도에 주목해 보자. 자신의 주장을 강요할 경우, 또 다른 갈등을 유발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구석과 중심이 되”려고 사라지는 것은 “낯선 8요일에 한 쪽 발을 담그”는 것이라서 새롭고 그야말로 깨달음을 탐구하는 시인의 자세라 하겠다. “서랍장이 햇빛을 몰아내고” “탁자가 그림자를 몰아내”는 등 “미련과 슬픔을 두고 가지 않는” 모습에서 유동적인 “자리”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나아가 인연이 다한 상황도 그려본다.
예를 들어서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싹이 돋지만, 가을이 되면 지는 게 순서이다. 시절 인연이 다하고 이별을 할 때, 지나치게 붙들려고 애쓰거나 슬퍼하지 않는 태도가 이 시에서처럼 필요하다. 꽃잎처럼 낙엽처럼 사람의 인연도 오고 가는 이치이다. 싱싱하고 어여쁜 꽃도 때가 되면 지고 말 듯이 인연이 다하면 부질없이 잡지 말고 잘 보내주는 것도 방법이다. 그래야 다음에 또 새로운 인연을 맞고 꽃이 필 수 있지 않을까.
이 시의 열린 사고와 역발상은 조용한 듯 쿨하다. 하지만 단순한 감각적 자극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다. 텍스트들을 뒤집어보고 그것에 숨어 있는 굴종의 관념을 보여준다. 상투적 편견과 인습에 갇힌 사유를 일깨워 우리를 각성하게 한다.
채송화의 생활을 봅니다
채송화 옆에 앉아 있으면 좋아서 나는 자꾸 웃는데요. 괜히 채송화 주변의 흙들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봅니다. 채송화가 그러지 말라고 해도 나는 자꾸만 더 그러는 것입니다. 살면서 들었던 죽고 싶었던 마음들, 저 구름을 밀어 올린 무심한 마음들, 나 없이도 더없이 아름다울 세상들, 이제 어떻게 살지라고 웅성거리는 모든 것들과 노래가 되지 못한 이야기들을 거기다 두고 올 수는 없잖아요.
나의 부음을 채송화가 제일 먼저 받아보았으면 싶어서
문상객으로 채송화가 와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어서
채송화의 생활을 하루치의 밥으로 먹습니다
좀 간절하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깊어지지 않아도 좋겠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건 다 여름이라 그래요
여름은 그런 거니까
- 이승희,「그건 다 여름이라 그래요」,『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18년 가을호.
여리고 순박한 이미지의 채송화가 세상의 풍파를 겪을 생각을 하니 안쓰럽다. 이 시에서 “채송화의 생활”을 애잔한 서정으로 독해해 본다. 채송화에 관심을 보이는 화자는 채송화와 이심전심으로 위로를 주고받을 것 같다. “채송화 주변의 흙들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는 행위에는 연민의 정서가 깃들어 있다. 중심부가 아닌 주변이 느끼는 약자 의식까지 해석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다.
흔히 성공과 실패를 따지듯이 인생도 좋다 나쁘다 구분을 하며 목적을 지향한다. 그런데 그냥 사는 것은 어떤가. 좋고 나쁜 기준은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남이 알아봐 주지 않는 평범함도 좋은 일이다.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니 차라리 사는 게 편할 수 있다. 구석에서 무슨 일을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으니 채송화처럼 수더분하고 행복할 것이다. 그러니 방황해도 괜찮고 실패해도 괜찮고 평범해도 괜찮다.
“살면서 들었던 죽고 싶었던 마음들, 저 구름을 밀어 올린 무심한 마음들, 나 없이도 더없이 아름다울 세상들”에서 죽고 싶을 정도의 회오가 스며든다. 이 시의 화자가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장면은 햇살 아래 오종종하게 피어있는 채송화꽃밭일 것 같다. 지나온 삶을 돌이키는 순간, 후회와 미련을 떠올리기보다는 아름답고 사랑했던 모습을 기억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지금 “채송화의 생활을 하루치의 밥으로 먹”을 정도이니 결핍 속에서 근근이 사는 게 아닐까 상상해 본다.
우리 이제 좀 채송화처럼 작고 가볍게 살면 어떨까. 작으면 작은 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인생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적어도 괴로움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 살아있는 것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오늘도 살아있네 하면서 기뻐하면 행복의 우선순위는 달라진다. 행복은 가까이에 있는데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다른 데서 행복을 찾는 게 아닐까. 그러다 죽을 때까지 행복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니 안분지족은 채송화는 미덕이다.
무더울 때는 여름이 그 언제 가나 싶지만, 지나고 보면 그런 여름도 지나가게 된다.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나 싶다. 우리가 난관에 봉착할 때 이 어려움이 징글맞고 길게 느껴지지만 언젠가는 지나간다. 즐겁고 좋은 시절은 영원했으면 좋겠으나 이 또한 잠시다. 인생의 즐거움과 괴로움은 한갓 꿈과 같다. 좋든 나쁘든 다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으면 당장 닥친 일에 여유가 생긴다. 뜨겁고 열정적인 여름이 시켜서 좌충우돌하게 되는 논리이다.
의자는 죄의식의 냄새를 갖고 있다
전생이 나무였거나 멸종한 짐승의 시체였거나
모체를 떠난 기억이거나
하나도 남김없이 버려야 하는데
나는 너무 늦었다
의자가 다시 의자가 아니었던 때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자기로부터 떠나온 것
아픈 나와 마주앉아 생각해보니
함부로 의자를 떠올리기도
함부로 의자를 해체하지도 못했던 내 지난날들이 모여
생애를 이룬 것을 알겠다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의자를
어떤 이는 희망의 또 다른 서자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늦었다
의자라는 말이 있기도 전에
나는 늘 의자를 가지고 다녔으므로
내 의자는 항상 한쪽 다리가 기울어져 있다
- 배영옥,「이상한 의자」,『내일을 여는 작가』, 2018년 하반기호.
유고가 되어버린 이 시에서 “아픈 나”라는 단어와 “그래도 나는 늦었다”는 문장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나는 늦었다”는 고통의 무게로 인한 절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다시 읽으면 자신의 삶을 냉정하고 엄하게 진단하는 명징한 정신이 돌올하다. 각 연이 끝날 때마다 “늦었다” “알겠다” “기울어져 있다”면서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의자는 시인을 비유한 객관적인 상관물이다. 화자이자 시인 스스로인 “죄의식의 냄새”에 대한 각성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대목이다. 자신이 “전생이 나무였거나 멸종한 짐승의 시체였거나/ 모체를 떠난 기억”과 같은 환생의 이미지는 오랜 생명력으로 이어져 온 것이 아니다. 의자처럼 머무는 상태로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또한 “내 지난날들이 모여” “생애”를 이룬다고 언술한다. 이는 “어떤 이는 희망의 또 다른 서자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늦었다”라는 진술과 함께 사람들과의 관계를 저버리거나 믿음을 지닐 수 없었던 상처에 대한 시인의 내면을 드러낸다. 의자를 여기서 정체성과 사람들과의 상호성을 오가는 갈등 혹은 시인의 고충으로 파악이 된다. 단순히 자연이라는 막연함에 인간을 대입하는 도식에서 벗어나 생명의 섭리와 도의적인 인간 사이에서 고민하는 흔적이 느껴진다. 그러다 보니 어정쩡하게 시인의 이상한 의자가 놓여 있다. 외롭고 높고 맑게 생명의 이치를 궁구하는 동안, 자신은 “한쪽 다리가 기울어져” 불편한 상태인 것이다.
왜 하필 “죄의식의 냄새”라고 했을까. 미각과 후각이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감각이고 오래 남아서 그렇다. 또한 “죄의식”이라는 단어에서 존재론적인 염결성과 불안의식이 감지된다. 기울어진 의자가 아닌 진정한 자신으로 살기 위해 “하나도 남김없이 버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내적 갈등으로부터 불안한 것 같다. 이는 진정한 나로 놓여 있기 위한 고뇌이다. 감상적인 표출이 아닌 실존적인 차원의 고뇌가 깊이 있는 서정을 그리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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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빈 약력 : 전남 광주 출생, 2004년 시집 『달콤한 독』으로 작품 활동 시작, <열린 시학> 평론 등단, 시집『청동울음』, 평론집『스프링 시학』, 『다양성의 시』, 상명대 강사, wing28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