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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과 소금의 비유를 통해 바라본 성경적 올바른 빛과 소금의 삶의 원리 = 마 5:13~16 >
오늘 우리들은 이 빛과 소금의 비유의 내용을 쉽게 접근하여 이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이 소금과 빛의 비유를 이야기 하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서 세상을 비추고 세상의 부패를 막는 훌륭한 사람이 되자’로 미리서 결론을 지어버립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선행도 행하고, 사회 개혁에도 참여하고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나가기도 합니다.
그의 대한 근거로 마5:16절을 주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마5:16절을 보면 이 이야기의 주제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자’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 단어가 ‘착한 행실’입니다.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개혁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이 구절을 근거로 그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15:18~19절에서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말씀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
그리고 또한 요한복음 16:33절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16:33) ----
이처럼 세상은 우리에게 감동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성도가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게 되어있다 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니까 절대 세상은 우리의 빛과 소금됨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과 소금을 존경해 주지도 않고, 오히려 그 빛과 소금을 핍박하여 환난을 당하게 만듭니다. 그게 성경의 진술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오늘날 정말 교회가 세상이 추구하는 도덕적, 윤리적, 사회적, 상식적으로 그런 착한 일을 했을 때에 오히려 세상은 교회를 칭찬하면 했지, 미워하거나 핍박하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불쌍한 불우이웃을 돕는다던가, 불우이웃에게 구제비를 전달한다든가,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던가, 불쌍한 이웃의 경조사를 돕는 등의 행위를 했을 때 일간 신문에서조차 칭찬해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착한 일을 했을 때에 세상이 교회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칭찬을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드러나게 되면 세상은 교회를 성도를 미워할 것이다! 그리고 핍박할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세상과는 다른 관점으로 세상에게 욕을 먹게되는 다른 차원의 것으로 성도에게 요구되는 착한 행실, 착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만일 성도의 세상적 착함이나 올바른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라면 타 종교인들의 착한 행실은 그럼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겠느냐? 는 질문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 보다 타 종교인들이 훨씬 더 착하게 사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그들의 착한 행실은 과연 누구에게 영광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1절에 보게되면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 하시면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10:11절 기록에서 선한 목자에서 ‘선한’이라고 번역이 된 이 단어가 바로 헬라어 ‘칼로스’ 라는 단어인 착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착함이 어떤 착함이냐하면? 세상을 위하여, 원수를 위하여,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착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1장 6절의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신이가 라는 어구에서 그 착한이가 헬라어 ‘아가도스’ 라는 단어로 선한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착한 일, 성도에게 요구되는 성도의 착한 행실은 이 세상의 선악 기준에 의한 착한 일이라기보다는 칼로스 아가또스, 예수님의 착한 행실, 혹은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서 비롯되고 기인한, 성도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착한 행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착한 행실은 이 세상 역사 속에서 어떠한 모양으로 나타났습니까?
십자가, 순종, 수난, 자기비움, 자기부인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 의해서 교회가 탄생을 한 것입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바로 그 새 창조의 행위, 자기부인과 순종으로 지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그 확장 과정, 그게 하늘나라 백성들의 세상 속 착한 행실입니다.
빌립보서 1:6절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에서 그 착한이란 그 헬라어 아가도스 라는 단어가 구약에서 인용 된 단어로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해 놓으시고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에서 그 선이라는 토브라는 단어가 착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 착한 일이라는 것은 새 창조의 일입니다.
우리 안에서 시작되어지고, 진행되어져 있고, 완성되어져 가는 그 새 창조의 일이 착한 일이고,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비워지고 새로운 존재로 완성되어져 가는 그 길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착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착한 일에 주도권은 예수님이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 안에 들어온 성령께서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착한 행실은 우리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착한 행실의 주도권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게 빛과 소금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행10:38절 보세요?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바로 이 예수님의 착한 일이 성도에게서 그대로 재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과 소금의 삶, 그 착한 행실의 키워드는 자기를 부인당하고, 수난의 삶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내가 부인당하고, 내가 비워지고, 내가 손해 보는 삶을 살게 됨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잉태 된 새 생명이 점점 점점 성숙되어져 결국 완성이 되는 것이 새 창조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통하여 아직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않는 어떤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게 되는 새 창조, 그 사역에 우리가 동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착한 일입니다. 토브(선한) 그것이 보시기에 좋은 일입니다.
그러한 성도의 착한 행실, 순종의 착한 행실, 십자가의 착한 행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면, 세상 사람들에게 그렇게 들어나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 말도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의 삶 속에 가입을 하게 되면 세상은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인내와 수고와 섬김과 순종의 삶이, 자기부인의 삶이, 십자가의 삶이 성도의 삶 속에서 이렇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절대로 그 삶을 못 삽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힘의 원리라는 토대 위에서 자기가치 향상을 위해서만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만을 위해서 사는데 거기서 어떻게 자기비움의 삶, 자기부인의 삶이 나오고, 어떻게 십자가의 삶이 나오겠습니까?
물론 표면적으로는 얼마든지 쇼는 할 수 있습니다. 연극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 받기 위해서 그 일은 할 수 있으나, 반면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손해보는 일은 세상은 절대로 못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간혹가다가 본성적으로 성품이 좋아서 하는 사람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에 야! 진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능력과 은혜를 진짜 부어서 그렇게 당신의 백성을 완성시켜 가시는구나! 라는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빛과 소금의 삶, 착한 행실, 착한 삶을 산다라는 것은 자기를 부인 당하는 삶이고, 자기가 비워지는 삶이고, 자기가 죄인으로 오히려 연약 한 자로, 무력한 자(무능한 자)로 폭로 당하는 삶이고,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삶인데, 그래서 그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만 살 수 있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상이 봤을 때에 야! 진짜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지금도 일을 하고 계시는구나! 를 알아먹으면 그에게서 능력이 드러나게 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세상에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나를 통해서 드러나는 삶, 그 삶이 바로 착한 행실이고, 빛과 소금의 삶인 것입니다. 그건 세상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그런 삶입니다. 그래서 그 삶이 하나님의 택함 받는 성도에게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래 빛과 소금이라는 것의 근본 성질이 뭡니까? 구별입니다. 그걸 거룩이라고 합니다.
소금은 부패의 대척점에서 부패와의 구별을 의미하는 것이고, 빛은 어두움의 대척점에서 어두움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빛과 소금은 구별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빛과 소금의 삶이란, 세상이 흉내 낼 수 있는 것은 빛과 소금의 삶의 열매일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빛과 소금의 삶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흉내 낼 수 없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는 성도만 해 낼 수 있는 그런 삶이 바로 빛과 소금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불가의 스님도 무소유의 삶, 비우는 삶, 절제의 삶, 청빈의 삶을 자신의 열심으로 얼마든지 살아낼 수 있습니다.
힌두교인인 간디나 슈바이처 같은 사람들도 감히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절제와 버림과 청빈과 섬김의 착한 삶을 살다가 갔습니다. 박사학위 네 다섯 개 다 갖다 버리고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평생을 살았습니다.
아마 행위로만 본다면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훌륭한 소금이고, 우리보다 훨씬 밝은 빛의 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 또한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세상적, 사회적, 도덕적, 윤리적, 양심적인 것이 착한 일이라면 그들도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고, 빛과 소금의 삶을 사는 것이고, 그들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야 맞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나 마지막에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 김대두 같은 살인마는 절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평생 강도짓만 하고, 사람만 죽이다가 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 속에서는 착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착한 일, 토브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일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었다고 가정된 김대두나 예수님 옆에 달린 그 강도나 그들의 무력함과 더러움과 추악함과 불가능함이 폭로되었는데 그들을 덮어서 니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는 그런 예수의 착한 일?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함으로 말미암아 덮혀진 착한 일, 그게 드러나는 삶이 바로 착한 행실의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의 무력함이 폭로되고, 더러움이 폭로되어서 야! 나는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큰일 날 뻔 했구나! 라고 깨닫게 되는 그러한 범죄의 현장에서 저와 여러분은 그러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착한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가 진짜로 예수를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가 진실로 예수님을 믿었다면 그게 성경의 착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러한 그들의 추악함을 덮는, 덮어씌우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게 덮어줌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착한일의 주체가 오직 예수그리스도뿐입니다.
오늘본문을 잘 보시면 예수님이 빛이 되어라! 소금이 되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이다! 라고 그냥 선언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너희는 착한 행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된다! 그럽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너희는 빛이다! 소금이다! 라고 선언을 해 버리고 나서 그들에게 착한 행실,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라! 라고 이야기 하셨던 것은 바로 내가 너를 그렇게 살게 만들고야 말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착한 행실은 엄밀히 말해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일, 즉 새 창조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옆에 달렸던 강도 속에서 일어난 새 창조의 일, 살인마 김대두의 삶 속에서 일어난 새 창조의 일, 즉 구원의 역사가 바로 그 예수님의 착한 행실이며, 그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 의해 끌려가는 그들의 삶이 예수를 드러내는 빛과 소금의 구별된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하기에 우리의 삶 속에서는 그 자기부인과 무너짐과 비워짐의 삶이 안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금은 수천년이 지나도 절대 짠 맛을 잃을 수가 없고, 다르게 안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소금의 비유는 그 소금처럼 너희들을 향한 나의 언약, 나의 집념 또한 반드시 성취되고야 만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거름 취급도 못 받는 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성도가 그 빛과 어두움, 부패와 세상이 갈라지게 되는 유일한 근거가 무엇입니까? 무엇으로 구분이 됩니까? 오직 성도만이 갖고 있는 세상과의 구별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 자가 착한 행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와 반면에 예수님의 생명이 없는 자는 악한 행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행하는 모든 착한 일은 다 악이고, 다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생명 속에서 일하는 모든 것이 다 착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게 되니까요? 그게 토브, 선입니다. 그게 착합니다. 그게 선한 목자의 선입니다.
세상과 소금, 그리고 빛과 어두움은 착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 안 했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으로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늦게나마 예수를 믿는 사형수 김대두가 천국가는 것이고, 예수를 안 믿고 아프리카에 가서 수년간 봉사를 했던 그 슈바이쳐가 지옥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슈바이쳐는 예수님을 믿지않고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자는 그가 예수를 믿었고, 후자는 그가 예수를 안 믿었다는 단정하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를 믿는 사형수 김대두의 삶 속에 나타나는 게 착한 행실이고, 슈바이쳐의 삶에 나타난 그 착한 삶은 악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빛과 소금의 삶이란, 신자 자신의 착한 행실을 내어놓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착한 행실이 어떻게 나에게 임하게 되었는지를 드러내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의 주도권도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주체적으로 쥐고 계신 것입니다.
밖에서 내 머리에 띠를 띄우고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나를 끌고 가는 성령의 힘(요21:18이하) 그것이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그게 빛과 소금의 삶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소금의 삶, 예수님의 빛의 삶을 성도의 삶 속에서 드러내고, 자랑하는 삶이 바로 성도의 빛 됨과 소금됨의 삶인 것입니다.
그럼 이제 성도가 이 세상에서 드러내야 할, 예수님의 소금과 빛의 삶이 과연 어떤 삶인가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저가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소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물입니다. 역대하 13:5절 보세요? 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 ---
예수님이 소금이라는 소재를 써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신 것은 그 소금이 부패를 막고, 짠 맛을 내는 그런 특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소금의 특성으로 너는 그렇게 이 소금처럼 그런 부패를 막고 짠 맛을 내는 존재로 살아라! 라고 들어서 쓴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구약의 소금 언약에서 끌어다가 쓰신 단어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설교가 소금은 부패를 막고 짠 맛을 내니까, 너희들 나가서 세상의 부패를 막고 세상의 짠 맛을 너희들이 내도록 해라! 이렇게 결론을 맺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본주의자들(율법주의, 알미니안주의)은 너희들은 할 수 있어! 나가서 세상에 빛이 돼! 소금이 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끼치는) 사람이 되야 돼! 부패를 막아! 촛불 들고 나가! 그러면 좋아서 흥분을 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인정해 주는 좋은 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회 부흥 시킬려면 도덕적 윤리적 설교 많이 하고, 인간의 종교심을 부추겨 주면 교회 금방 부흥합니다.
그러나 그와 반면에 예수님이 와서 회개하라고 그럽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그것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유턴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붙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니가 뭔데 나를 부정해! 니가 뭔데 내 능력과 내 열심을 부정해! 하고 그들의 종교행위에 초를 치니까 자존심 상하여 예수님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인간의 힘의 논리적인 구조에 의해 힘을 의지하여 세상의 빛이 되자! 소금이 되자! 하는 그곳에 예수가 오면 그들이 바로 예수를 죽인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이 세상의 힘의 원리인 약육강식, 선악판단이란 패턴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겔 16:4절 보세요? 4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에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
세상 사람들인 그들을 가리켜 어떻게 묘사합니까? 소금을 치지 않았다 그럽니다.
소금을 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이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소금 언약이 그에게 가입이 안 됐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소금으로, 소금 언약으로 끌어 올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만 소금을 친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금을 치게 되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구별이 됩니까?
세상과 어두움과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소금 언약입니다. 거기에서 끌고 나오는 게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모형하고 있는 역사적 이스라엘에게 소금, 즉 소금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뿌리는 하나님과 예수님 간의 피의 언약입니다.
히 9:13~22절에 보니까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 간의 언약이 있었는데 그 언약이 바로 피의 언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언약의 원형은 바로 이 피의 언약입니다.
그 피가 부어져서 죽어야 할 자가, 부정한 자가, 어둠인 자가, 죽음이었던 자가, 없음이었던 자가 있음으로, 살아남으로, 구원됨으로 올라오는 게 피의 언약, 십자가의 언약이고, 그게 소금언약입니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소금이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하나님의 언약, 예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게 소금입니다. 그 복음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실제화 하여 살아지는 것입니다.
나는 계속 무력한 시체로, 죽은 흙으로 폭로되는데 하나님의 그 언약, 소금이 계속해서 나에게 뿌려져서 영원히 나를 끌고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착한 행실입니다. 그게 소금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피로, 죽어야 할 자를 구해내는 피의 언약, 그것이 소금언약입니다.
따라서 소금이란, 죽어야 할 자 대신에 제물에 뿌려지는 예수님의 피 이며, 그 예수님의 피는 곧 예수입니다.
그러니까 소금의 삶이란 피의 삶인 것이고, 비워지는 삶이고, 부인당하는 삶이고, 죽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금과 빛의 삶, 그런 소금 언약의 삶, 피의 언약의 삶 속에서 다른 이와 하나님이 덕을 보는 것입니다.
그 소금을 통해 나 아닌 다른 이가 덕을 보는 것입니다. 그 소금이 하나님의 나라의 삶의 원리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사는 삶입니다. 그게 소금입니다.
그런데 그 삶이 이 세상 속에서는 저와 여러분이 세상에게 당하고, 비워지고, 연약하고, 무력한 자로 폭로 당하고 이런 모습으로 드러나는 그것이 소금의 삶이고 착한 행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피가 자신의 힘을 포기하지 못하고, 은혜를 무시하는 이들에게는 저주요, 걸림돌이 되는 것이고,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 안에 들어온 이들에게는 놀라운 구원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은 그 소금의 역할에 대해서 여러모로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왕하 2:19~21절 보세요? 19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20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 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
여리고에 우물이 있었는데 물이 좋지 않아서 사람들이 그 물 때문에 죽거나 아이를 유산하게 되곤 했습니다. 그 때 엘리사가 여리고의 우물에 소금을 뿌려서 좋은 물로 회복을 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토산이 익지 못 한다라는 것은 임신 된 아이가 유산이 된다라는 뜻입니다. 죽음의 물이 생명의 물로 바뀌는데 소금 언약 그것이 가입되는 것입니다. 소금이 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금은 회복의 상징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금은 어떤 것을 거룩하고 성결하게 구별 시키는데 쓰였습니다.
출 30:34~35절 보세요? 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
이렇게 소금은 어떤 것을 거룩하게 구별시킨다는 의미도 함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금은 어떤 이들에게(구별된 자들에게) 먹혀지게 됩니다. 레 2:13절 보세요? 13 네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 지니라 ---
특히 유월절 삼일 후인 첫 이삭 드리는 날에는 소금을 친 소제만 드리는 날이며, 그 소제를 드린 나머지로 떡을 만들어 먹습니다. 소금 친 재물을 먹은 것이니까, 소금을 먹는 것입니다.
그렇게 첫 이삭 드리는 날에 밀을 빻아서 소금을 치고, 그리고 그 소금으로 떡을 만들어서 어떤 구별 된 무리가 먹는다라는 것은( 그 것을 태워 소제를 드리는 것에는 ),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열매를 맺는 구원의 이야기가, 그 첫 떡, 첫 열매, 예수의 이야기를 그 속에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제에는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합니다. 물론 다른 번제에도 소금을 칩니다. 그런데 소제에 친 소금은 그대로 떡으로 만들어져 아론과 그 후손, 즉 제사장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소금은 누가 먹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하나님의 백성들만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물에 소금이 처진다는 것은 제물과 소금에 연합을 말합니다. 소금이 본래 저주, 예수님의 피, 십자가, 비워짐, 부인 당함을 뜻하는 상징적 언약입니다.
그런데 그 소금이 제물에게 얹혀지면은 이 제물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 어떤 제물도 하나님 앞에 강한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거기에 예수의 피가 보태져서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소금이 처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금이 처진 제물만 하나님이 맛있게 흠향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것을 먹고 그리고 그것을 유업으로 받고, 분깃으로 받고, 그 소금처진 제물의 삶, 예수의 삶을 이 땅에서 작게나마 그림자로 또 재현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먹는 다는 것은 곧 나와 연합이 된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성찬식 때에 예수와 함께 연합되었다는 뜻으로 떡을 먹는 것입니다.
요 6:32-35절 보세요?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 이니라 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이게 소금 친 떡이고, 소금 친 제물입니다. 예수, 생명의 떡, 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소금으로 살라고 하는 것은 예수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니가 죽고 니 안에 잉태 된 새 생명 성숙시키고 완성시켜라!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니가 죽고 아직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 끌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소금되라는 것은 니가 먼저 죽어라! 라는 뜻입니다. 열심히 착한 일 많이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인기 끌어라는 말이 아니라, 죽으라는 것입니다. 죽는 다는 것은 곧 나의 옛 사람의 육적인 삶이 점점 소멸되고, 삭제당하며, 십자가 뒤로 함몰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8장에 보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나옵니다. 혈루병은 율법에 의해 부정한 병으로 기록이 된 병입니다. 그런데 그가 소금을 만졌습니다. 예수님을 만졌더니 그 여자가 거룩해 졌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예수님이 그 혈루병 환자가 되고, 예수님의 생명이 그 여자에게로 옮겨지는 일입니다.
그 혈루병에 소금이 닿자 부정함이 정함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냥 낫는 것이 아니라, 소금이신 예수님이 사망과 사망의 증상들인 그런 부정함 들을 빨아들이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마 8:16~17절 보세요?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 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
그 병을 누가 졌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가져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제물에 소금이 처지고 그 소금이 저주의 소금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죽어야 할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그러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 것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의 피가 뿌려지고, 그 피의 언약의 소금이 뿌려지고, 예수님이 그의 저주와 죽음을 다 갖고 가셔야 됩니다. 그게 제물에 소금이 뿌려진 것입니다.
민 18:19절 보세요? 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거제는 흔들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 이니라 ---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몫, 과업, 의무, 규례가 주어졌는데, 분깃이 주어졌는데, 그 분깃이 소금을 친 제물입니다. 그것 안 먹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은 반드시 소금을 친 제물을 먹어야 하고, 그 제물과 연합이 되어 소금 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금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제물에는 소금이 쳐지는데 그 소금은 피의 소금이요, 십자가의 소금이요, 저주의 소금입니다. 소금과 제물은 그렇게 연합이 됩니다.
그렇게 그 소금이 쳐진 제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 소금 쳐진 제물을 먹고, 그 소금 쳐진 제물과 연합이 되어서 소금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이스라엘, 즉 교회, 성도라는 것입니다.
막 9:43~50절 보세요?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 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 하시니라 ---
하나님의 언약 아래 들어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그 피의 언약, 소금의 언약에 의해서 자기들은 예수님의 피가 없었으면 큰 일 날 뻔 했구나! 라는 자리로 끌려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와 반면에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들 즉 그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야! 내가 쪽팔리게 왜 하나님의 말만 들어야 되냐! 나도 선악과 따 먹고 하나님처럼 됐는데 나도 할 수 있어! 나도 율법 지킬 수 있어! 나도 착하게 살 수 있어! 내가 왜 예수만 믿어야 돼! 내가 예수만 붙들어야 돼! 내가 왜 은혜만 붙들어야 돼! 나도 보태고 싶어! 거기에 은혜의 소금이 떨어집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니가 나를 뭘로 보고 나보고 은혜로 들어오라는 거야! 왜 나에게 소금 쳐! 소금을 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소금이 밟히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의 죽음입니다.
율법 잘 지키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회개하라!라고 외치는 예수님을 소금을 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소금언약이 불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지옥입니다. 지옥에 있는 자들은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가치를 포기 못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치 향상을 위해서만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선악과 따 먹은 죄인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서 더러움이 발견되면 자신의 팔 다리를 잘라서라도 자기의 품위를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더러운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힘이들어도 세상의 착한 일과 그리고 세상의 윤리와 도덕 뒤로 자꾸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가치향상과 자존심 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 전 인생을 올인 하는 삶을 삽니다.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과 양심으로 자기들 생각에 더러운 것들을 다 정죄하고 잘라내며 엉터리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그들에게서 어떻게 서로 간에 화목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반면에 하나님의 소금 언약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 백성들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죄가 폭로되고, 자신들의 연약함이 들킬 때마다 예수님의 팔 다리가 ‘아포콥토’ 찍혀 내 던져졌다는 은혜와 긍휼 속으로 들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신자인 그들의 팔 다리는 찍혀 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마음에 소금을 두면 너희들이 이제 큰 자, 경쟁을 하지 않고 화목하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막 9:50절에서 이렇게 끝나는 것입니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악인들에게는 불소금이지만 하나님의 선택 안에 들어오는 언약 안에 들오는 이들에게는 좋은 것입니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절대 맛을 잃을 수가 없습니다. ---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큰 자, 작은 자 경쟁 그런 것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이 그 힘의 논리적인 구조의 패턴 속에서 큰 자, 작은 자, 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포츠, 오락, 게임, 사업, 공부, 다 무엇입니까? 다 이기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게 승부욕으로 지나치게 되면 지옥이되고 마귀적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런 은혜의 소금, 그 소금 언약을 제대로 알면 알수록, 그 소금 언약을 아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절대 자기를 드러 내는 그러한 삶으로 빛과 소금이 되어, 내가 무슨 세상의 영향력을 끼치겠다 라는 그런 모양으로 절대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으로부터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절대 그리로 안 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그런 세상의 힘의 경쟁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의 화목입니다. 그런데 소금은 절대 짠 맛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겠나! 못 잃어! 왜냐하면 내가 절대 너희들을 그냥 그렇게 안 놔 둘 거니까!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 역사속에서 계속 원치않는 코너로 이렇게 밀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짠맛 내라고, 소금으로 살라고, 소금언약, 피의 언약 그것이 주는 예수처럼 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소금들은 이 세상 역사 속에서 힘겨운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는 자들이 그 고난을 어떻게 넉넉히 통과하는 지를 시청각교육적 교보재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이 참게 하시고, 하나님이 견디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감당할만한 시험을 주신다고 한 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시험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감당하게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 사람 저기서, 저런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저렇게 참지! 하고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과 부정함을 폭로 당하는 현장에서도 절대 자기의 자존심이나 자신의 가치를 챙길려고 부산을 떨거나 율법과 도덕과 윤리 뒤로 숨지 않고, 그냥 있는 그 모습 그대로 그의 연약함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인간은 이렇게 자기의 어두움이 폭로되면, 반드시 율법과 도덕 뒤로 숨게 됩니다. 왜냐하면 더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그 어두움인 자기를 숨기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성도는 거기서 그냥 자기를 드러내면서 인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걸 덮은 하나님의 은혜를 높여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가 부정되는, 자기부인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무능한 자이고, 내가 죄인중에 최고의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 말입니다.
그러니까 소금의 삶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사는 것 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부패성과 연약성을 폭로 당하면서도 그 더러움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삶인 것이고, 그렇게 힘겨운 고난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꿋꿋이 견디며 인내하며 소망으로 일어서는 예수의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나는 쇠하고 예수가 흥하는, 나는 망하고 하나님이 흥하는, 내 이웃이 흥하는 삶을 사는 것이 소금의 삶입니다.(요3:30)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끼치는) 것이 빛의 삶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의 영광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는 삶이 진짜 빛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되든, 나를 어떻게 취급하든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인 저와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이 세워 놓은 그 선악의 패러다임의 가치기준으로 판단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가 저주의 소금을 맞고, 온전한 제물이 되어서, 하나님께 드려 졌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감추어지고, 숨겨진 자로, 연약하고 무력한 자로 폭로되면 그것을 덮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은혜를 드러내는 삶을 반드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빛으로 이제 인도 된, 그래서 빛이 된 우리 신자들은 이 세상의 어떤 면을 보아야 합니까? 렘 4:22-23절 기록에서처럼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버린 이 세상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점철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새 창조를 일으키겠다는 것이 빛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이 세상 속에서도 당신의 백성들을 시대시대마다, 때마다, 건져내어 빛으로, 당신의 나라로 끌어 들이는 그걸 보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 이 세상은 하나님이 빛으로 인도해 내지 않으면 흑암과 공허와 혼돈으로 영원히 지옥일 수 밖에 없는 곳이구나!를 경험하며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그러한 힘의 원리 속에서 나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이 세상에서는 약자의 삶으로 연약하게나마 보여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빛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사 59:9-10절 보세요? 9 그러므로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10 우리가 소경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
이걸 보는 것입니다. 세상이 바로 이런 세상이라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다는 것이 이 세상이 강함이라고 규정하는 것들이 강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 다른 하늘의 세계가 진짜 가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걸 못 보는 자는 죽은 자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전부 죽은 자들이 재벌도 되고, 죽은 자들이 인기스타도 되고, 죽은 자들이 스포츠 스타도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이 세상의 실체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부러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소수의 진짜 그리스도인이 포함될 수도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안타깝게 그 죽은 이들이 갖고 있는 그 소유와 인기와 명성을 교회가 보고 부러워하며 그걸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직시할 수 있는 이들이 빛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눈이 어떻게 밝아졌는지도 아는 이들입니다.
사 42:18~20절 보세요? 18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19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20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 도다----
소경아! 봐라! 귀머거리야 들어라! 너희들이 어떻게 눈을 뜨고, 어떻게 빛이되고, 어떻게 귀머거리에서 해방이 됐는지 아니! 내 종, 내 아들 예수가 내려가서 소경이 되고, 예수가 내려가서 귀머거리가 됐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니가 빛이 된 거야! 바로 그렇게 나를 빛 만든 그 참 빛이신 그 예수를 증거 하는 것이 빛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참 빛이신 예수를 드러내기 위해 감추어진 빛으로 살아야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도 막 4:21~23절을 기록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2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이 구절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보면 ‘드러내려고 숨기고, 나타내려고 감추었다’라는 뜻입니다.
누가 등불을 등경 위에다가 두지, 말(한말, 두말 재는 되박을 말함) 아래다 두겠느냐! 그럼 등불이 비추어지니! 당연히 등경위에 두어야지! 그런데 등경위에 등불을 두는 게 어떻게 나타나냐 하면 그 등경 위에서 비추게 할려고 이 등블의 빛을 비추게 하기 위하여, 그 등불을 오히려 감추고 숨긴다는 뜻입니다.
이게 역사 속에서의 빛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역사 속에서 내가 빛이 되어 내가 드러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쇠하고 예수가 흥하여야 되는 삶의 자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참 빛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 땅에, 이 세상 역사 속의 빛인 우리가 감추어지고 숨겨져야 된다는데 어떻게 이 세상에서는 이 감추어져야 할 빛들이 오히려 드러나고 예수가 꽁꽁 숨어 있느냐? 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속에서는 등불이, 빛이 제 역할을 할 때 은닉되고, 감추어지고, 숨겨진다는 말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천국 자체가 이 역사와 세상 속에 은닉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빛들 역시 이 세상 속에서 감추어지고 숨겨진 빛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드러나기 위한 감추어짐이요, 나타나기 위한 숨겨짐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삶, 소금과 빛의 삶은 이 세상에서 부인당하고, 비워지고, 약해지고, 무력한 자로 낮아지고, 섬기는 자로 내려가고, 부정한 자로 폭로 되어지는 삶인 것입니다. 그게 감추어지는 빛이고, 숨겨지는 빛입니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의로움이나 선한 행위로 세상을 비추는 그런 빛과는 다른 것입니다.
뭔가 인간들이 대단한 업적을 쌓아서 세상을 놀래키는 삶이 아니라, 티끌 됨이 폭로된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영광의 빛으로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게 빛입니다. 그게 소금의 삶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저와 여러분은 소수의 구별 된 거룩한 무리, 성도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만을 위해서 삽니다. 왜냐하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게 되며 오직 예수의 이름, 예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사는 삶으로 지향되어져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삶에 자꾸 그렇게 무력한 자로, 나를 부인하며, 내려가는 일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다른 것 없습니다. 뭐 대단한 것 할려고 하지마시고 그냥 살아 있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세상은 항상 빛을 끄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어두움을 감춥니다. 소금을 짓밟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부패를 감춥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의 소금과 하늘나라에서의 빛은 찬란한 영광을 발하고,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묵시 속의 존재이지만, 그러나 그 소금과 빛이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면, 세상에 의해 오히려 짓밟히게 되어지고, 꺼지는 모습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산상수훈의 삶입니다.
그건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가시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의 삶 속에서 격발되고 발휘되는 산상수훈의 말씀은 하나님에 의해 주도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철장으로 우리의 옛사람의 그 육적자아를 죽여 가시며,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만드시고, 우리의 죄와 악을 폭로시켜 우리를 애통하게 하시며, 예수를 위해 핍박을 받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게 산상수훈이고, 그게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그게 이 땅에 감추어진, 은닉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의 자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소금이 처진 제물의 삶, 예수의 삶의 모형으로 이 땅에서 작게나마 그림자로 또 재현하여 살수 있도록, 나의 그 옛 사람의 육적인 삶이 소금처진 푸성귀(배추)처럼 점점 소멸되고, 삭제당하며, 십자가 뒤로 함몰되어 감추어지는 등불로 참 빛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그분의 은혜를 올 곧게 드러내는 증인의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의 삶의 자리가 되시길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