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隋人)의 손자 당최조(唐崔祖)가 금마저에 정착한 것은 사실인 것 같지만, 그것으로 모든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성씨가 없는 사회였고, 신라도 이제 막 왕실과 최고 귀족 가문에서만 사용하기 시작했으므로, 당최조 할아버지가 비록 최씨 성을 가지고 고구려에 왔더라도 당최조 후손에까지 최씨 성이 세습(世襲)될 수 있었나?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당최조가 최씨 성을 사용했다면 신라 최초 최씨라고 말할 수 있다.
최씨 성을 가진 수인이 고구려에서 살았는데 주변에는 아무도 성씨가 없고, 또 “당신 성이 뭐요?” 묻는 사람도 없는데 성씨를 챙겼겠는가? 특히 처가살이가 보편적인 고구려 사회에서 어머니 성이라면 몰라도 아버지 성을 세습한다는 것은 이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신라에서는 귀족이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니 당최조는 몰라도 손자 세대는 성씨 필요성을 인식했을 수 있다. 당최조의 손자가 최씨 성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당최조가 최씨를 자기 성이라고 인식하고 아들과 손자에게 전수해 주어야 한다.
최씨 성 세습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641년 진대덕의 방문을 들 수 있다. 고구려에서 사는 수나라사람들이 진대덕을 만나 회포를 풀고 고향이야기를 나눌 때 자연스럽게 성씨나 군망(郡望)이 거론되었을 것이고, 아들과 손자들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진대덕이 왔을 때 수인, 수인자, 당최조의 나이를 검토해보면
수인이 612년 포로가 되었으므로 615년에 수인자가 태어났다고 가정할 때 진대덕이 방문한 641년에 27세 성인이므로 자신의 성씨를 인식하기에 아무 문제도 없는 나이다. 당최조가 637년에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5세 정도 어린아이로 아직은 성씨를 인식하기에는 어리다. 다만 어른들이 중국에서 왔다는 사람과 만나서 눈물을 흘리면서 소동을 벌이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 훗날 성씨를 인식하는 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는 있었을 것이다.
또 수인자가 아들 당최조에게 “우리가 비록 고구려에서 하층민으로 살고 있지만, 우리 조상은 선진국 당나라에서 뼈대 있는 집안 후손”이라고 가르쳐주면서 예전에 진대덕이 방문했을 때 상황을 상기시켜 주었을 가능성도 있고, 더욱이 수인자까지 금마저로 왔다면, 손자 즉 당최조의 아들에게까지 할아버지로서 그런 이야기를 전해주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774년(혜공왕 10) 태어난 진감선사는 637년 태어났다고 가정했던 당최조와 약 140년 차이가 나기 때문에, 진감선사 아버지 최창원(崔昌元)은 당최조의 5대손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진감선사 세대가 당최조로부터 장손(종손)으로 이어져 왔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 계산이므로, 장손으로 이어져 온 것이 아니라면 증손(曾孫)이나 현손(玄孫) 정도일 수도 있어서 당최조가 기억한 성씨가 전해졌을 가능성을 부정하기 어렵다.
당시 신라 사회는 성씨가 보편화 되어 있지 않았고, 일부 왕족(王族) 김씨나 왕비족[1] 박씨, 그리고 일부 귀족이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상황으로, 경주최씨는 물론 경주이씨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금마저 고구려 유민이 “나는 성이 최씨요.” 한다 해서 주목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즉 아무도 인정하지 않지만, 집안에서만 “우리는 당나라 명문 최씨 가문 후손이다.” 정도로 전해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다가 사회 안정화를 위해 도입된 본관제도(本貫制度)에 의해 처음으로 완산최씨가 되었고, 최씨 성은 더욱 공고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에는 대부분 사람이 성씨가 없었고 본관도 성씨를 기반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산최씨라기 보다는 본관이 완산이라는 정도로 통용되었을 것이다. 다만 가문 안에서는 우리는 성이 최씨요 본관은 완산이다. 라고 통용했다면 지금의 성본(姓本)과 크게 다를 것은 없지 않겠는가?
* 각주 ------------------
[1] 王妃族. 처음에는 왕비도 김씨 이었는데, 중국인들이 왜 왕과 왕비 성이 같으냐고 문제 삼으므로 왕비 성을 박씨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