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131편
*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를 드는 법(法)
서론(序論)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란 무엇인가 ?
선가(禪家 선종)에는
《일전어(一轉語)》라고
하는 말이 있다.
선사(禪師, 佛祖師,
또는 선종의 큰 스승)가
거두절미(巨頭絶尾)하고
단 한마디
말(화두, 공안)로써
미혹(迷惑,
망령된 유혹)을 깨부수고
심기(心氣 마음의 기운)를
일전(一轉 하나로 전환)시켜서
전미개오(轉迷開悟,
미혹된 마음을 깨우침)하도록
하는 법문(法問)을
바로
화두(話頭, 본참화두,
또는 공안(空案))라고
말(언급)한다.
이러한
옛 선사(禪師),
또는 불조사(佛, 祖師)들의
선문답(禪問答 묻고 답함)과
가르침(敎義)들이
공안(空案)
화두(話頭)로
하나 둘 모아지고 이루어져
쌓이고 또 쌓여져서(累積)
편집(編集)되었다.
바로 그 것이
선어록(禪語錄 선종)의
가장 백미(白眉 최고봉)로서
손 꼽히는
《벽암록(碧巖錄)》이다.
이렇듯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는
다시 한번 우리들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그러므로
불제자(佛弟子)
수행자(修行者)이던
불제자(佛弟子)
수행자(修行者)가
아니던
누구나 한 번씩은
《벽암록(碧巖錄)》의
일독(一讀)을 권(勸勉)하며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를 드는 법(法)을
여기에
풀어서 해석(解釋)하고
자세히 설명(說明)하며
나와 함께
공부(功夫)를 하고저
기록(記錄)하고
올려 본다.
본론(本論)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를 드는 법(法)
"
그러므로
절대적(絶對的)으로
체험(體驗 실천, 수행정진)이
반드시 필요(요구됨)하고
또한 정말로
그러한 경지(境地)에
이르렀는지
확인(確認)할 수 있는
검증의 절차(檢證節次)도
요구(要求)된다는
이러한 의미에서
방편이라는 방법적(方法的)인
진전(進前 나아감)을 더한 것이
바로
간화선(看話禪,
화두, 공안, 본참화두를 잡고
탐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기(上記,)의
위에서도 기록(記錄)하고
설명(說明)했듯이
본각적(本覺的)
신심(信心 믿음, 초발심)에
깨달음으로 스며 들어가는
입각처(入覺處)를
두고 있으되
화두(話頭 공안)
참구(본참화두 參究)라는
시각적 의심(始覺的 疑心)을
일으켜(初發心) 내는
구체적(具體的)
세세한 방법(方法 방편)을
채택(採擇 선택, 차선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방법(방편법)은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禪師)
12세기 중국 스님으로
화두를 관하는 명상법인
간화선을 만들었다))가
특히
묵조사선(默照邪禪)을 질타,
비판하고 공격(攻擊)하면서
그 잘못 되고
옳지 못한 경향이나
해(害)로운 현상으로 대두되는
폐단(弊端 폐해)을 벗어나고자
새롭게 제시(提示)한
것이다.
근년(近年) 이래로
일종(一種)의
삿된 스승(邪魔僧)이 있어
묵조선(默照邪禪,
삿되고 삿된 선법)을 설하여
사람(수행자)들로 하여금
열두시간(十二支時) 가운데에
이 일을
관여치(關勵 얽매임) 말고
쉬어가고 쉬어가되
소리(색성향미촉,
육경, 육식, 알음알이)를
짓지 말라.
금시(今時)에
떨어질까(고정, 집착, 장애받음)
두렵다.
”
말을 하니
왕왕(旺旺, 힘있고
왕성함)에 사대부(四大夫)가
총명이근(聰明耳根,
지혜(智慧)가 밝고 슬기로우며
예지(叡智)가 있음))에
부린(이끌림함) 바 되어
대부분이
시끄러운 곳(染汚處 물듬)을
싫어하다가
자못
삿된 스승(사마외도 僧)들의
고요히 앉아(坐禪) 있으라는
헛된 지령(志令)을 입고는
도리어
힘(노력 땀방울 수행정진)
덜음(편리함)을 보고는
문득 이로써(방편)
족(吾唯知足)함을 삼아
다시
묘한 깨달음(妙悟 진공묘유)을
간절히 구(참구)하지 않고
다만
묵연(默練 침묵수련)함으로써
극칙(克則 계율을 이겨냄함)을
삼아서 사마외도(邪魔外道)를
하나니
내가(대혜종고 선사)
구업(口業 입으로 짓는 죄)을
아끼지(두려워) 아니하고
힘써
이러한 잘못 되고
옳지 못한 경향이나
해(害)로운 현상으로 대두되는
폐단(弊端 폐해)을
구하고자 하니
지금(至今)
조금씩 그 허물(虛物 잘못됨)을
아는 이(수행자 佛弟子)가
있음이라.
원컨대
공(空, 진공묘유 妙空)은
다만
의정(話頭疑精, 공안의정,
본참화두)이 깨뜨려 부수어지지
아니한 곳을 향(向)하여
참구(參究)하되
걷거나 앉고
서고 누워있어도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놓아버리지 말지어다.
옛 경전(經典)에
기록(記錄)하여 전하기를
어떤 스님(僧)이
조주(趙州從諗, 778~897)
화상(和尙)에게 묻되
“
구자유불성
(狗子有佛性)
개(狗)에게도
불성(佛性 부처님 성품)이
있습니까 ?
”
물음(問)하니
조주화상(趙州從諗)이
답(答)하시되
“
없다(無,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
하였으니
바로
이《무(無)》자(字)
한 글자(文章)는
문득
이 모든 고해(苦海)
생사(生死 윤회, 삶과 죽음)의
의심(疑心 의구심, 번뇌)을
깨뜨리고 부숴내는
칼(지혜의 칼,
취모검(吹毛劍))인
것이다.
―《서장(書狀)》―
※
취모검(吹毛劍)이란 ?
선승(禪僧)들이
반드시 구족(具足 갖춤)해야 할
지혜작용(智慧作用)을
검(칼 劍 , 칼 刀)으로
비유한 것으로
살인도(殺人刀)와
활인검(活人劍)으로
살인도(殺人刀)는
번뇌 망념(煩惱 망상 잡념)
중생심(衆生心)의 흐름
또는
통로를 막거나 끊어서
통(通 일어남)하지 못하게 하여
차단(遮斷)하는
교화(敎和, 교단 화합 가르침)
수단(手段, 무엇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나 또는 도구)이며
활인검(活人劍)은
번뇌 망념(煩惱 망상 잡념)을
모두 다 일체
텅 비운(諸法空常)
반야(槃若 보리 광명 )
지혜 작용(智慧作用)을
일으켜준다는
중국 송나라 시대의
선종 불교서적(禪佛敎 책)
《벽암록(碧巖錄)》
제 100칙(第 100則) 마지막
파릉 화상의
취모검(吹毛劍)에서
유래(流來) 한다.
취모검(吹毛劍)이란 ?
칼날 위에
솜털을 올려놓고
입(口 호흡)으로 불면
끊어지는 아주 예리(銳利)하고
날카로운 칼(刀劍)로써
고대의 명검(古代名劍)이다.
선어록(선語錄)에는
금강보검(金剛寶劍)
막야검(鏌鎁劍)
관우 장군의 대도(大刀)가
자주 등장하는데
반야의 지혜(槃若智慧)
영묘한 작용(作用, 신통묘용)을
비유한 것이다.
《유마경(維摩經)》에
지혜(智慧)의 검(槃若劍)으로
번뇌(煩惱)의 적(敵 마구니)을
물리치고 타파(打破)한다고
하는 것처럼
일체(一切)의
모든 사량분별(思量分別,
연기적인 관계를 못 보는 것
즉,
이 세상 유정물. 무정물,
정신적(精神적)이거나
물질적 현상은
그 탄생과 소멸과
모든 작동이 연기법에 의해서
된다는 것을 모르고
부처님, 신, 하나님 등의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끊어버리고
곧바로
여래(如來 부처님)의 경지를
체득(體得)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불교(佛敎)에서
지혜(智慧)의 상징인
문수보살(文殊菩薩,
또는
문수사리(文殊師利)
문수시리(文殊尸利)의 준말로
범어 산스크리트어 원어는
만주슈리(Manjushri))
지혜(智慧)의 칼(반야검)로
일체(一切)의 모든
번뇌 망념(煩惱 망상 잡념)을
끊어버리는 비유를
수많은
불교 경전(經典)과
어록(佛祖師 語錄)에서
설(說)하고 있다.
《임제록(臨濟錄,
선종(禪宗)의 일파인
임제종(臨濟宗)의 기본이
되는 책》에도
지혜의 칼이 작용하면
무일물(無一物,
한 물건도 없음)의 경지(空)라고
설(說)하며
《증도가(證道歌)》에도
“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반야의 칼날이요
금강의 불꽃이다.
외도의 심장을
쳐부술 뿐 아니라
천마(天魔)의
간담도 떨어뜨렸다.
”
읊고 있다.
※
ㅡㅡㅡㅡㅡㅡㅡ
※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 견해(見解)와
해석(解釋)으로
오역(誤譯)
오판(誤判)한 부분도
분명하게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글 내용 가운데
잘못 된 부분은 옳고 바르게
지적(指摘)해 주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 마음그릇 心椀 드림 -
ㅡㅡㅡㅡㅡㅡㅡㅡ
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