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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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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스크랩 함양오씨 오극성고택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21 13.06.23 19: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오극성고택(吳克成古宅)
소 재 지 :  영양읍 대천리 595
건 축 주 :  오극성(吳克成)
중건시기 :  1760년경 중건
소 유 자 :  오창홍
문 화 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8호

건축 이야기
오극성 고택은 선무원종공신 3등으로 책록된 문월당 오극성이 낙향하여 건립한 가옥이다. 현손인 오학지(吳學智)가 1760년경에 개수한 이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현재는 2006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8호에 지정되어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오극성은 자는 성보, 호는 문월당이며, 본관은 함양이다.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적을 섬멸하기 위해 “왜놈 도적에게 보복하리라[報倭寇]”는 세 글자를 크게 써서 벽에 걸어두고 늘 바라보았다. 1594년(선조27)에 병과에 급제한 뒤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후에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600년(선조33)에 옥선대 아래로 낙향하여 문월당을 짓고 만년을 보냈다. 이외에 자세한 행적은 관련인물 편에 기술되어 있다.

건축 특징
오극성 고택은 1760년경에 개수한 이후로 문화재관리를 위해 최근에 다시 보수한 고택이다. 그리하여 빛바랜 고색의 모습은 덜하나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고, 넉넉한 공간 배치가 돋보인다.

건축 구성
오극성 고택은 정침 7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사랑방 2칸과 사랑마루로 이루어진 사랑공간이 있고, 우측에는 온돌방 1칸과 부엌, 고방을 두었는데, 좌측의 사랑마루와 우측의 고방은 좌,우로 1칸씩 돌출되어 양 날개집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 안채는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너방과 안방을 두었으며, 안방과 건너방의 전면으로는 각각 부엌과 고방을 연접시켜 좌,우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고택에서 남향으로 약 백보 정도를 옮기면 문월당이 중건되어 있다.

 

문중 이야기
- 문중이야기
함양 오씨의 시조 오광휘(吳光輝)는 고려 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좌복야를 지냈고, 명종 조에 명주에 출몰한 외적을 격퇴한 공으로 추충정란광국일등공신(推忠靖亂匡國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이어 삼중대광·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함양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보성 오씨에서 본적을 나누어 본관을 함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오극성은 함양군 오현필(吳賢弼)을 상조(上祖)로 한다. 16세를 지나 오중원(吳仲元)이 있으니 벼슬이 태재(太宰)였다. 오중원이 관찰사 오엄(吳儼)을 낳았다. 뒤에 오강(吳江)은 직산현감이며, 오덕산(吳德山)은 통례원 인의이며 오필(吳?)은 중부장이며 오민수(吳敏壽)는 참봉이다.
오민수는 세 아들을 두었다. 맏아들 오흡(吳?)은 좌랑이며 오익(吳瀷)은 통정이며 오연(吳演)은 사과이다. 한 딸은 현감 이대규(李大圭)에게 갔다. 오흡의 세 아들은 오이건(吳以建), 오이원(吳以遠), 오이달(吳以達)이며, 세 딸은 조유정(趙惟精), 정종주(鄭宗周), 구세해(具世楷)이다. 익의 세 아들은 오이진(吳以晉), 오이정(吳以鼎), 오이승(吳以升)이며, 두 딸은 신석호(辛奭昊), 남빈(南?)이다. 오연의 두 아들은 오이흥(吳以興), 오이극(吳以極)이다.

오극성의 아우 오윤성(吳允成, 1563-1627)은 자가 성립(誠立)이다. 1594년(선조27) 갑오 별시 무과에 오극성과 함께 급제하였다. 임란 때 통제사 이순신 막하에서 거제도 앞 바다의 왜적을 대파하여 큰 공을 세웠고, 벼슬은 5품직인 군자감 판관(軍資監 判官)이다. 세상 사람들의 공의 형제무훈(兄弟武勳)을 난형난제라 칭송하였다.

오극성의 맏아들인 오흡(吳?,1576~1641)은 자는 선원(善源), 호는 용계(龍溪)이다. 1576년(선조9)에 영양 대천리에서 출생하였다. 성품이 굳건하고 재략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일찍이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익혔다. 광해군조에 이이첨이 모후를 유폐한 데 분개하여 여러 선비와 더불어 그를 참하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그 뒤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이듬해인 1638년(인조16)에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되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향리인 대천리 반월산 아래에 내려와 초옥을 짓고 은거하였다. 1639년(인조17)에 그의 절행을 가상히 여겨 승훈랑 호조좌랑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용계문집』2권1책이 있다.

이외에 문월당 오극성의 11대손인 오승봉(吳承鳳, 1888~1954)은 자는 응상(應祥), 호는 송원(松源), 진암(進庵)이다. 영양읍 대천리에서 출생하였다. 척암 김도화(金道和) 서파(西坡) 유필영(柳必永), 면우(?宇) 곽종석(郭鍾錫)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성리학에 잠심하였다. 만년에 송원정을 짓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9권4책의 필사본으로 된 『송원유고』가 영양읍 대천리 송원정사에 소장되어 있고, 『진암만록』1책이 편간되었다.


관련유물
- 『문월선생문집』
문집은 2권(건 곤) 1책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체제는 다음과 같다. 첫머리는 류치명과 이돈우가 쓴 서문이 장식하고 있다. 권1은 6편의 시와 1편의 상소, 서간문 및 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2는 임진일기(上), 권3에는 임진일기 하편과 <黃間榜諭文>이 실려 있으며 권4는 부록으로 만사, 묘표 등의 행장류와 발문이 실려 있다. 부록으로 「선무원종훈록 전지」와 「장악원계첩」도 별첨되어 있다.

 

관련인물
- 오극성(吳克成, 1559~1617)
오극성은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문월당(問月堂)이며, 본관은 함양이다. 아버지는 오민수(吳敏壽)이고, 어머니는 무안박씨 참봉 박붕(朴鵬)의 딸이다. 1559년(명종14) 정월 아무날에 영산 대천리 집에서 태어났다. 아름다운 자질을 지녀서 어버이를 모시기에 효성이 지극하였고 남다른 기질을 가져서 남들과 함께 숙이거나 우러르지 않았다. 글을 읽는 여가에 활쏘기를 함께 익혔으니 그 뜻은 장차 아울러 쓰려는 것이었다.
임진년(1592년)에 왜적이 쳐들어와서 여러 군이 함락되니 걱정하고 분하여 시를 지었다. “나라의 일을 어찌 말하랴. 외로운 성에는 이미 도움이 끊어졌네. 남쪽 고을에는 의로운 선비가 없구나. 누구와 더불어 충성스러운 귀신이 될까.(國事那堪言 孤城已絶援 南州無義士 誰與作忠魂)” 마침내 여러 관료들에게 글을 올려 지키고 막을 방책을 갖추어 진술하였다. 뒤에 호남의 장사들이 절개를 지켜 죽었다는 것을 듣고 반드시 복수하려고 눈물 흘린 감개가 여러 번 시에 나타났다.
갑오년(1594년)에 오랑캐가 다시 쳐들어오자 아우 오윤성과 함께 권무과에 오르니 주상께서 비로소 그 모습을 알고 특별히 선전관에 제수하였다. 1595년(선조28)에 도총부 도사 겸 비변랑에 옮겼다. 공은 글을 짓는 데에 능했는데 비변사에서 아뢰기 어려운 글들은 공이 지은 글에서 많이 나왔다. 또 명령을 받들어 남으로 내려가서 상소를 올려 아뢰니 임금께서 가납하였다.
1598년(선조31)에 벼슬에서 물러나 돌아왔다. 이때 관찰사 우복 정경세(鄭經世)가 명나라 장수를 따라 사천으로 들어가는데 공이 가서 종군했다. 겨울에 아우와 함께 이통제사의 막하에 나아가 수군을 단속하여 거느리고 도적을 추격하여 남해 바다에 이르러 크게 깨뜨리고 삼등공신에 기록되었다.

1600년(선조33)에 훈련판관에 제수되고, 1601년(선조34)에 봉상시정에 제수되었다. 인사를 담당하는 한 낭관이 있었는데 오극성이 타는 말을 좋아하여 저자에서 흥정하는 것처럼 사고자 하였다. 오극성은 마침내 세상에 뜻을 버리고 옥선대(玉仙臺) 아래에 집을 지었다. 그 집에 문월당이라는 편액을 달고, 옛 사람을 마음에 품고 날마다 시골의 늙은이와 들판의 벗들과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1617년(광해군9) 11월에 돌아가시니 수가 59세였다. 이듬해 3월에 청기 관령 부감원에 장사하였다. 부인인 숙인 평해황씨(平海黃氏)는 교위 황승백(黃勝白)의 딸로, 맑고 현철하여 부인의 행덕이 있었다. 오극성보다 12년 뒤에 돌아가시어 오극성 묘 왼쪽에 붙여 장사하였다.

 

영양 > 영양청기권 > 영양읍 대천리
- 영양읍은 서북쪽으로 일월산이 뻗어 내려와서 일월면을 읍의 경계로 접해 있으며, 다시 청기면 금성산을 사이하여 팔수곡 큰재를 분기점으로 읍내 서부리와 연접해 있다. 영양읍의 동과 서를 가르는 반변천은 일월면 곡강에서 상원리를 돌아 대천 2리 입구에서 동천(東川)과 합류하고 감천리를 지나 입암면으로 흘러 낙동강의 동쪽 원류를 이룬다. 1676년에 이르러 현재의 군청 자리에 동헌(東軒)이 들어서게 되면서 동부리와 서부리가 영양군의 중심을 이루었다.
대천리(大川里)는 흔히 한내[大川,旱川]라고 부른다. 이는 큰 냇물이란 뜻으로, 마을 앞에 큰 내가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조선 인조조에 함양오씨 용계(龍溪) 오흡(吳?)이 이 마을을 처음으로 개척한 뒤에 가뭄이 십여 년간 계속되어 강이 말랐던 것에서 연유하여 한천(旱川)이라고도 한다. 영해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골짜기가 많고, 들이 넓게 퍼져 있어 논농사를 주로 한다.

대천리의 상징은 비파담 소와 그 근처에 세워진 삼구정(三龜亭)이다. 비파다소[沼]는 한내 서쪽에 있는 소로, 옛날에 어떤 미인이 이곳에서 비파를 타다가 빠져 죽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삼구정은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의 장자인 오흡이 세운 정자이다. 소 아래에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셋이 있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대천리는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 선당동 , 문양동 , 고월동 , 옥산동의 일부를 가르고 합쳐 대천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각각 자연 마을 단위로 이름과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고월(古月)은 고달골, 고드랫골이라고 불리며 지형이 반달 모양이다. 이곳에서 달맞이를 하며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직곡(直谷)이라 하여 곧은 골짜기란 뜻으로도 불리었다.

문양(汶陽)은 시내의 북쪽[陽]이라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문양 앞을 주머이골이라는 하는 것과 관련하여 마을의 자리가 주머니처럼 움푹 들어간 모습을 이르기도 한다.
구전(口傳)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남루한 옷차림을 한 선비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주의에 집에 한 채밖에 없어 가까이 가보니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주인 몰래 부엌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새벽녘에 주인이 나가 보니 나그네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으니 그것을 부끄럽게 여겨 방으로 모셨다고 한다. 그 나그네는 암행어사였다고 전하고, 이 문양 앞을 주머이골이라고 한다. 암행어사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수비면에 위치한 문수담이 있다.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효험이 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오가면 기도한다.

선당(仙塘),선댕이는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다가 간 곳이라고 전해진다. 문양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옥산(玉山)은 마을 북쪽 산이름에서 유래한다. 신선이 구슬을 가지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간 산이라고 하여 옥산이라 불렀다. 마을 입구에 절벽으로 된 바위가 있는데 이것을 옥선대(玉仙臺)라 한다. 추수(秋水) 엄순봉(嚴舜奉, 1903~1938)이 태어난 마을이다. 그는 김좌진 장군을 도와 조국의 광복운동을 하였으며 조선인 아나키스트(arnachist, 무정부주의자) 연맹에 가입하였다.
장숫골[長壽谷,長水谷]은 산이 아늑하고 물이 깊어 식수가 좋아 예부터 사람들이 장수하는 마을인데서 이름이 유래한다.
황곡[黃谷,篁谷]은 평해 황씨가 부유하게 살아서 황씨 성을 따서 황곡이라 하였다. 그러나 황씨가 떠난 뒤에는 황곡이라 하였으니 깊고 큰 골짜기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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