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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델비아―충성스런 작은 무리(계 3:7-13)
8절 :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이 한 마디는 특별하며, 주님이 종전에 다른 교회에 하신 말씀과는 다르다. 주님은 결코 여기서 줄곧 그들의 행위를 감찰하고 계신다고 하지 않으시고, 이 곤고하고 연약한 믿는 이들이 그분이 이미 그들의 행위를 아심으로 인하여 만족하기를 바라신다. 주님은 다른 교회에 대해서는 이와 달리 그들의 일의 성질이 어떠한가를 주의하신다. 그분이 사데에게는,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말씀하셨지만, 여기서는 전혀 깊이 따지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의 행위를 알고 계시는 것으로 족하시다. 만일 그분이 우리에게는 사데를 향해서와 마찬가지로 완전하기를 요구하셨다면, 어찌 우리의 행위가 대처하기에 어렵지 않겠는가? 혼잡한 마음, 미약한 믿음, 게으르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 모두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면전에서 고개를 들 수 없게 한다. 사실을 말한다면, 우리의 모든 일 중 한 가지도 우리가 받은 사랑과 견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천연적인 활동이 많고 사람의 칭찬 또한 적지 않지만, 일반적인 것에 비추어 말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응당 주님을 찬미해야 한다! 실로 우리가 세상의 광경과 교회의 상황을 주의해 본다면, 우리의 마음은 나약해질 것이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또한 결코 그들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그들이 여전히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그분의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 주님은 여기서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먼저 그분이 보신 칭찬하실 만한 것을 말씀하신다. 그분은 그들의 「적은 능력」을 주의하셨으며, 또한 그것을 인하여 칭찬하셨다. 능력이 많지 않고 약간만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결코 오순절의 능력과 은사를 보지 못한다. 여기에는 결코 산을 옮길 만한 큰 믿음이 없다. 이 「작은 일의 날」은 바로 유대와 같이 교회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이다. 다윗의 날과 에스라의 날은 원래 같은 날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마지막 시대에 처음의 상황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원래 불가능한 것이다. 처음 사랑이 있으면 좋은 것이다. 비록 영생과 성령의 능력이 쇠약해질 수 없지만, 우리는 이 세대와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물론 그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하지만, 우리는 이 시대 중에서 결코 흠이 없을 수 없다. 주님은 여기서 충성스런 작은 무리를 교회 시대의 마지막 상황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주님이 보실 수 있는 것은 단지 약간의 능력일 뿐이다. 사도 시대의 흥성을 회복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기서 약속하신 바가 없다. 비록 능력은 조금뿐이지만, 주님은 이미 칭찬하셨다.
주님은 무엇이 칭찬할 만한 것인지 아신다. 비록 오순절의 기적과 기사는 없지만, 주님은 이미 칭찬하셨다. 성령의 능력의 충만이 밖으로 나타났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성경은 마지막 날에 처음의 광경을 회복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오늘날 빌라델비아 성도들이 가진 것은 다만 약간의 능력일 뿐이다. 약함은 그들의 표시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두아디라와 사데와 함께 세상에서 병존하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남은 백성의 성질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혈기에 속한 것과 성령의 깊은 조성을 받지 않은 사람은 자연히 나타난 옛적의 능력을 사모하게 되지만, 주님이 오늘날 행하시는 길을 아는 사람은 주님이 칭찬하시는 것이 다만 적은 능력일 뿐임을 안다. 우리의 오늘날의 책임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지 결코 또 하나의 새로운 오순절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빌라델비아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믿는 이들 앞에서 자랑할 만한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의 행위는 응당 빌라델비아의 성질과 상반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나타난 행사를 추구하지 말고 주님 자신으로 만족해야 한다.
비록 오늘날 대단한 능력의 나타남―물론 많은 사탄의 가장이 있다―은 없지만 성령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신다. 교회 안에 하루도 성령이 계시지 않은 적이 없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로마의 흑암 시대 중에서도 성령은 여전히 교회와 함께하셨다. 물론 그분은 그곳에서 결코 죄악을 의라고 칭하지 않으셨고, 패역을 옳다고 여기지 않으셨으며, 그분의 임재는 바로 주님의 말씀―『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의 실제를 증명했다. 성령이 우리 몸에 강림하시기를 앙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의 희망이다. 교회가 만일 이렇게 기도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이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응당 우리가 늘 그분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응당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의 행위가 마치 그분을 영접한 자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칭송하자. 이는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를 연합되게 하여 하나님의 처소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이것의 외형은 이미 파괴되었지만, 이 사실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시인한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환경의 연고로 타락할 수 있지만, 그가 여전히 한 사람인 것과 같다. 교회에는 성령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다! 이것은 우리로 더욱 겸비하게 한다. 사람들은 만일 우리가 또 하나의 오순절을 얻는다면, 성령이 다시 하늘로부터 강림하여 우리가 잘못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은 이미 오순절을 지나왔다. 이 희망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하시는 것은 결코 새로운 은사를 얻도록 기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겸손하게 그분의 면전에서 우리가 비록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분께 패역했음을 시인하게 하는 것이다. 비록 성령이 여기 거하시지만, 금송아지는 계속 일어나 교회 안의 죄악을 이스라엘 사람들같이 많아지게 한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을 느끼게 하신다.
주님은 아마 표면적인 영광을 이미 실패한 교회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그러나 그분은 오히려 필요한 은혜와 능력을 주셔서 개인의 영성을 유지하게 하신다. 머리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생명은 그분의 땅 위의 몸이 부족해 하지 않도록 영양을 공급한다. 예를 들면, 교회 중에 이적의 은사(방언을 말함이나 병고침 등과 같은)는 이미 감소했지만, 머리로부터 온 지체들을 양육하는 은사는 영원히 부족하지 않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엡 5:29)라고 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는 특별히 교회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지를 말하는데, 우리는 그것의 은사의 기능이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4:12)임을 볼 수 있다. 또한 에베소서는 전혀 기적적인 은사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서 우리는 「병 고치고」 「방언을 말하고」 「방언을 통역하는」등의 은사를 보게 된다(고전 12:9-10). 이와 같이 우리는 성경이 은사를 두 종류로 나누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것과 같은 기적적인 은사로, 교회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나타내는 기적적인 능력인데, 이것은 교회가 불신의 세상에서 간증이 될 수 있도록 보존해 주는 것이다. 또 하나는 머리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몸의 전체를 적시고 공급하는 은사이다. 은사에 이러한 분별이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준다.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은 가장 분명한 구절이다. 기적적인 은사는 지나갈 수 있지만―물론 그것은 소수의 개인만이 얻는 것이다―적시고 공급하는 은사는 영원히 남아 있다. 어떤 때는 외면적인 것으로부터 증거하고, 어떤 때는 주님 자신의 직접적인 은혜를 베푸심으로 인하여 얻어진다. 그러나 여하를 막론하고 머리의 공급은 정지될 수 없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빌라델비아 교회 안에서 본 것이다. 그들의 성질은 원래 연약하고 능력이 부족하지만, 오히려 다른 교회보다 더 능력 있는 주님과 가깝고, 더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과의 교통이 더욱 친밀하며, 주님이 그들에게 주신 약속 또한 주님 자신과 더욱 일치한다.
비록 빌라델비아는 절대적으로 연약하지만, 그들은 도리어 충성스럽다. 많은 때 밖으로는 큰 능력이 있지만 내면은 참으로 약하다. 성령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믿는 이들이 천사의 말과 만 가지 방언을 할 수 있고, 각양의 비밀과 각양의 지식을 알 수 있을지라도 동시에 극히 연약하고 능력이 없을 수 있다. 외적인 능력의 표현이 내적인 하나님과의 동역과 합심에서 지나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외면의 능력은 반드시 내면의 생명과 부합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사와 계시가 결코 우리의 능력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적과 기사는 결코 사람에게 내면적인 능력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곤고할 때 우리를 안위할 수 있고, 시련의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명해 줄 수 있지만, 내적인 능력을 우리에게 줄 수는 없다. 바울의 체험은 바로 이에 대한 하나의 예이다. 삼층천과 낙원에 이끌려 가서 사람이 들을 수 없는 비밀을 들은 것은 물론 매우 놀라운 것이며, 바울이 시련을 당할 때 일부 안위를 얻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에게 내적인 능력을 줄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특별히 역사하신 말씀이 아니었으면 그는 자고했을 것인데, 이것은 물론 능력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그로 하여금 자신이 연약함을 느끼게 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하였다.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만물보다 악하여 만일 깨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사를 이용하여 스스로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우리의 위험은 원래 동일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를 지켜 주는 동일하지 않은 「찔림」이 필요하다. 바로 이러한 「찔림」의 상황에서 바울은 비로소 자기의 연약함을 알았다. 바울은 반드시 이러한 연약한 느낌이 있어야만이 능력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적의 은사를 주시는지의 여부를 막론하고, 연약한 느낌이 만일 믿음과 조화를 이룬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능력이다. 스스로 연약함을 알고 불신의 마음이 없어야 가능하다. 주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실 때에도 이러한 느낌이 있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요 12:27). 고난은 주님으로 아버지와 더욱 친밀하게 했다. 우리는 어떠한가? 한번 고난을 보면 고난과 더욱 친근해지고 하나님의 능력에는 의혹을 품는다. 우리의 생각은 다 해결 방법을 구상하고 환경 안에 머물거나 혹은 자기 안에 머물며, 하나님은 밖에 가두어 둔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결코 이러하시지 않았다. 슬픔이 있을 때 그분은,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셨다. 자기의 연약함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불신이다. 늘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이 능력 있는 것이다. 어려움이 올 수 있고, 하나님 역시 많은 사물들로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내도록 허락하신다. 그러나 단순한 믿음은 우리를 줄곧 전진하게 하며 미리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계획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믿을 것이다. 참된 능력은 바로 줄곧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삼상 17:37). 다윗의 눈에는 사자나 곰이나 골리앗이 차이가 없었다. 그는 동일하게 연약했고 그들은 동일하게 사나왔다. 그러나 그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역시 동일했으며,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신다는 마음 역시 동일했다. 하나님이 전에 이미 나를 구원하신 이상, 나는 그분이 반드시 다시 나를 구원하실 것으로 「본다」. 이것이 믿음이다. 모세가 땅을 정탐하도록 보낸 사람들이 자신을 메뚜기같이 본 태도는 완전히 이것과 다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 아낙 자손과 대항하시게 하는 것을 잊고서 도리어 자기들을 아낙 자손과 비교했는데, 이것은 물론 실패하는 것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것이 이기는 비결의 전부이다. 자기를 바라보는 것은 소용이 없는데, 이는 자기는 연약함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를 앙망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 전반적으로 황량하고 부패한 때 위대한 능력을 상으로 주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규정이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상으로 주신 풍성한 은혜를 보았다. 그것은 결코 외면적인 능력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의 외면은 참으로 볼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대적은 비웃으며 그들의 성벽에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겠다고 말했다(느 4:3). 빌라델비아도 이러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무런 견고하고 강한 방어의 역사가 없어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막을 수 없었지만, 주님은 그들의 불 성벽이 되시고, 그들이 가장 먼저 건축해서 주님께 드린 것은 하나의 제단이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에서 가장 으뜸되는 지위에 거하신다. 주님이 그들의 성벽이 되신 이상 그들은 다른 건축물을 먼저 기공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결코 천사가 장자를 죽이는 일이 없고, 아무런 특별한 재앙이 대적들에게 발생하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아무런 특별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그들에 대한 약속은 다만,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지니라』(학 2:5)였다. 원수를 두려워하면 능력이 없어지며, 주를 앙망하면 원수를 잊어버리게 된다.
『네가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다』. 능력이 조금뿐이라면 그들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주님은, 『네가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어떻게 그들에게 약간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셨는가? 이는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교회가 상실해 버린 은사를 얻은 것이 아니며, 교회에서의 지위와 숫자 혹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의 위치를 얻은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능력을 얻었다. 순복과 경배만이 참된 능력이다. 주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경시되기 때문에 지켜야 하며, 주님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버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실로 교회 중에서 주님의 말씀은 이미 통행되고 있지만,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있는가? 주님의 이름은 이미 알지만, 그들은 존경하는가? 믿는 이들은 재물을 좇는 것과 같이 이것들을 사모하고 추구한 적이 있는가? 믿는 이들이 더욱 주님의 말씀을 알고자 하며 더욱 주님의 이름과 친근하기를 바라므로 모여서 기도하며 말씀을 읽는가? 얼마나 많은 믿는 이들이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참으로 권위가 있다고 여기는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능력―내면의 영적인 능력―이야말로 이러한 상황 중에서 주님께 순복하고 경배할 수 있다. 여기에는 결코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큰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 없고, 다만 작은 단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기며 칭송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특징은 응당 교회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바로 마지막 날 충성스런 자들의 성질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라고 말했다. 이러한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진다」. 비록 이러하지만 하나님의 남은 백성에게는 걸어갈 정당한 길이 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딤후 3:1-1, 5, 13, 14-15). 세상의 상황이 변천할 때 오직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지킬 수 있다. 하나님이 기록한 말씀을 가까이하고 지키는 것이 우리를 위험 가운데서 안전하고 확실하게 지켜 준다. 디모데가 어렸을 때 읽은 것은 구약이며, 그가 사도로부터 「배운것」은 바로 오늘날의 신약인데, 이것들이 우리의 지침이다. 큰 능력의 나타남이나 기적을 행하는 것이 우리를 지켜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록하신 말씀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주님은 결코 『너에게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가 『나의 말을 지켰고』라고 말씀하신다.
『나의 말』.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결코 교회의 말이 아니다―을 지키게 하시고 그리스도 자신을 가까이하게 하신다. 우리가 만일 교회의 말을 받는다면, 교회에 권위가 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며,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께 권위가 있음을 승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응당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일체의 사물을 판단해야 하며, 교회라 할지라도 응당 이 말씀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교회의 실패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교회에 가서 들어야 한다는 아무런 명령도 하시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두아디라 안에서 이세벨이 자칭 계시를 받은 자이며 스스로에게 권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으며, 또한 사데 안에서도 이렇게 자칭하고 자부하는 사람이 이미 사람들에 의해 버림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비록 계시를 받지 않았더라도 여전히 가르칠 수 있다. 사람들은 지금 우리에게 지금 이미 한 권의 공개된 성경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사실임을 인해 주님께 감사한다.) 이에 따라 자연히 많은 빛 비춤도 있다. 그러나 신조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개신교의 신조는 복음의 근본적인 교리를 아주 중시하지만, 그러나 이것조차도 사람의 가르침인데, 이는 『천하게 되고, 귀하게 되는 것이』 사람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이 신조들이 처음 창시한 사람들의 믿는 바였다. 후에 의견의 연고로 부득이 또 다른 신조를 만들어야 했다. 다시 후에 신조의 분쟁은 갈수록 증가되어 오늘날에는 분열이 분열을 낳고 종파에서 또 분파로 나뉘어지는 지경에 이르러 개신교에 막대한 수치를 남겼다.
물론 오늘날의 개신교가 로마 천주교회와 같이 자칭 「공(公)교회」로, 유일한 교회로 칭하지는 않지만, 개신교의 각종 신조는 바로 개신교가 종파를 주장함을 나타낸다. 성경 외에 다시 일종의 신조를 세우는 것은, 그것이 성경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막론하고, 다 스스로 세운 울타리이며, 의견이 다른 사람을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마음을 합할 수 없다면 다른 데로 가라고 하는 태도는 바로 다른 종파를 세우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만일 모든 거듭난 사람들을 기꺼이 받지 않고 성경 외에 다시 어떤 신조를 더한다면, 바로 하나의 종파가 된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불러내어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자녀들은 오늘날의 분란한 신조와 조직과 명칭을 보고 참으로 무엇을 따라야 할지 모르게 된다. 우리가 존중하고 따르는 것은 그분의 말씀이지 교회의 말이 아니다.
무릇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누구의 속박도 받지 말아야 한다. 그의 양심은 오직 한 분 주님을 향하여만 책임을 진다. 그는 마치 땅 위에서 오직 그만이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주님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알고 또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것이 점점 증가해야 한다. 오늘날 배도의 시대 가운데서 늘 조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로 그리스도를 가까이하게 하고 우리를 지켜 줄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말세의 미혹과 분별되게 하고 또한 상반된 행위를 갖게 할 것이다. 현시대의 특성은 바로 미혹이다. 『악한 사람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딤후 3:13),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요일 2:26).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바로 속이는 것과 미혹으로 인도하는 일이다. 오래지 않아 물론 그 유일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겠지만,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기 때문에』(요일 2:18) 우리는 반드시 그들을 『믿지 말아야』(마 24:23) 한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의 『각종 능력과 기적』(살후 2:9-10)에 미혹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응당 성경의 진리를 견지하여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자에게 미혹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유일한 보장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뭔가 개인적인 일인데, 이는 미혹이 은밀히 몰래 들어오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넘어지는 것이다. 이 미혹의 능력은 마치 뱀이 궤사로 하와를 유혹한 것과 같아서 우리에게는 늘 그리스도를 향해 품은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위험을 면하게 해 주는가? 결코 기적과 기사와 같은 외면적인 능력의 나타남이 아니며, 오히려 이런 일들은 대부분 미혹의 도구이다. 우리는 결코 기적이나 기사로 사탄을 다룰 수 없으며, (우리는 원래 가장 약한 자이다) 우리의 안전함은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성경을 견지하고 그 이름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나의 말을 지켰고!』 이 말씀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큰지! 말씀은 주의 명령의 대강과 세칙을 포함하고 있다. 빌라델비아의 믿는 이들은 여기저기서 한 말씀을 부분적으로 지키지 않았고 지키지 못할 정도로 대가가 너무 클 때 포기한 것이 아니다. 『영광과 수욕과 아름다운 이름과 악한 이름』을 막론하고 똑같이 지켰다. 만일 우리가 모든 것을 순종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순종할 수 없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것은 그분을 청종하고 어떤 것은 청종하지 않고를 우리와 조정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분이 만일 모든 것의 주가 아니라면, 그분은 어떤 것에도 주가 되실 수 없다. 우리는 응당 무엇이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만일 「지킨다」는 이 단어의 의미가 있다면, 그 「지킨다」의 의미는 최소한 완전히 순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중요한 것으로 보지 못한 것에 대해 그 중요성을 본 것과 같이 완전히 순종하고, 주님이 명하신 것을 미소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가장 중요한 것에 순종하듯이 가장 미소한 것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주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늘 우리의 마음을 시험한다. 우리는 기꺼이 흑암 중에서(의심이 아닌) 주님을 청종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지만 그분의 인도를 따라가기 원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원치 않음이 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저지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많은 일에서 우리가 다른 성도들과 다를 때, 우리는 이것들을 의견과 견해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배후에 감추어진 이유가 바로 하기를 싫어하는 생각임을 모른다. 오직 원칙상에서 「뜻을 세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실제상에서도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사람들의 분쟁은 틀림없이 사람의 일이지 결코 성령이 사람을 인도하여 이렇게 많은 분쟁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일은 없다. 비록 우리가 많은 경건한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상반되는 많은 일들을 본 적이 있지만, 이것은 결코 우리 역시 패역할 수 있다는 「허가증」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우리에게, 사람은 그가 가장 좋은 때에도 역시 이러할 뿐이고 육체는 본받을 것이 아님을 말해 줄 따름이다. 만일 우리가 전심으로 주를 따른 적이 있다면, 누가 감히 그분이 우리를 바른 길(오직 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신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완전히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대체 몇이나 있는가?
많은 믿는 이들―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이 어떤 한계에 이르면 의외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누가 이러한 손실을 계산할 수 있는가? 많은 믿는 이들은 주를 위하여 수고함으로 이 손실을 회복하려 하거나 혹은 그 손실을 대치하려 한다. 이것은 마치 성경에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활동은 여전히 있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장애가 있음을 안다. 가련하게도, 이렇게 할 때 발은 동행하고 있을지라도 피차 이미 더 이상 동반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통을 잃어버린 것을 무엇으로 대체하겠는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요』(요 14:23). 말씀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관리하고, 붙잡게 하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저장해 두고 그것에 순복하는 것이다. 빌라델바아의 믿는 이들이 주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절대로 복종하고 절대적으로 굴복함으로 주님은 그분이 마땅히 얻어야 할 지위를 얻으셨다. 이것은 얼마나 좋은가! 온 교회가 다 주님의 말씀을 지켰다! 그들은 사랑으로 인하여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주님과 교통했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와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일체의 외면적인 사정에서 에베소 교회는 우선적인 지위에 섰지만, 그들은 사랑이 부족하고 도리어 일로 가득했다. 일체의 외면적인 사정에서 빌라델비아는 부족했지만, 그들은 일이 부족하고 도리어 사랑으로 충만했다.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이유이다. 주님은 그들의 행위와 일을 보기보다 그분의 자녀들의 사랑을 보기를 더 기뻐하신다. 물론 사랑이 있으면 데살로니가에서와 같이 『사랑으로 인한 수고』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이 중시하시는 것은 바로 그분의 백성들이 품은 마음이지 결코 그들의 행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한 방면으로 에베소의 위대한 일들은 사랑의 부족으로 인하여 값이 깎였으며, 그 방면에서 빌라델비아의 미소한 일들은 도리어 사랑으로 인하여 칭찬을 받았다. 주님은 오직 그들 가운데서만 자신을 그들의 동역하는 자로 나타내시면서 그들에게 열린 문을 주셨다.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 자신을 표명하시고, 아버지 하나님도 이 말씀으로 인하여 나타나신다. 그분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계시하셨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 외에는 아무도 이 일을 하실 수 없다. 주님의 이름은 우리에게 그분 개인이 이곳에 계시지 않고 이미 승천하시어 영광을 얻으셨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이러한 주님을 생각하고,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을 계시하셨는가를 생각하고, 그분이 어떻게 완전하시며, 보배로우시며, 거룩하신지를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다른 일은 없다. 비록 그분 자신은 이미 여기에 없지만 성도들이 그분의 이름을 시인할 때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지만, 우리의 언행이 어떠하든,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것들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가이다. 이렇지 않은 모든 것은 바로 그분의 이름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중심 생명으로 삼고 종파의 선입견을 옹호하는 것은 오히려 주님의 이름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자기를 버리지 않는다면(자기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버릴 것이다.
우리가 만일 주님의 이름을 시인하려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불가피한 조건이다. 만일 우리가 베드로와 같이 자신(自信)이 있다면, 죽을지라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기 원한다고 생각하며, 모든 사람이 다 실족할지라도 그는 그들과 같이 연약하지 않다고 여긴다. 바로 이러한 자신을 과신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기도하며 장래의 시험에 대비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부주의는 바로 그의 자신한 결과였다. 그럴 때 과연 베드로는 어떤 지경으로 빠져 들어갔는가? 그는 주의 이름을 부인했다. 우리는 결코 너무 부주의하거나 너무 자신하지 말고, 우리가 「능」하고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자신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 없음을 알고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앎으로 두렵고 떨며 의지할 곳 없이 주님의 면전에 와 깨어 기도하며 그분의 얼굴을 구하고 그분의 힘을 의지해야만 주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자신하든지―사실 자신은 바로 실패의 원인이다―어떻게 자신이 이미 안전한 곳에 서 있는지를 막론하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면 늘 실패할 것이다. 우리는 응당 육체를 믿는 일체의 마음을 제해야 하는데, 이는 육체와 주님의 이름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표명한다. 이 이름은 바로 그분 자신의 신분과 일과 권위의 어떠함을 표명한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그분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 불리심으로 인하여 그분은 오셔서 「예수」―여호와 구원자―가 되셨는데, 이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분은 또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 곧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되셔서 중보의 직분―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시고 하나님을 우리에게 이끄시는―을 이행하신다.
교회가 황량하고 배도하는 때에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것은 실로 아주 만족스런 일이다. 우리가 소극적인 방면에서 주님의 말씀을 보고서 한 마디 한다면(「내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고 했지 「내 이름을 높였다」고 하지 않았다), 바로 이때 배도가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극적인 방면에서 주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는 것도 이미 하기 어렵고 귀한 것이었다. 그들은 적극적인 방면에서 아무런 한 것이 없었지만, 주님은 그들을 칭찬하셨다. 주님의 안목에서는 결코 엘리야처럼 불을 하늘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을 위대한 일로 간주하지 않으시며, 불충성의 환경 중에서 충성은 위대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그 칠천 명의 남은 백성들이 과연 무엇을 했는지를 말씀하지 않으시며, 성경은 다만 그들이 바알에게 굴복하지 않았다고만 기록한다. 시대가 험악한 때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결코 그분의 자녀들이 그분을 위하여 한 것이 얼마나 되는가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 그분을 위하여 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되는가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당시의 환경이 다 바알을 경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경배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에게 무엇이든 다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밭에는 가라지들이 너무 많다. 만일 믿는 이들이 기꺼이 주를 위하여 단독으로 움직이거나 서 있지 않다면, 그는 계속 실패할 것이다. 미혹을 받거나 시세에 따르지 않고 행동하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충성하는 작은 무리의 성질이다. 외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죄악 중에 충성되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면의 능력은 외면적인 능력보다 더 필수적인 것이다.
빌라델비아의 믿는 이들은 주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은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죄인이 만일 주님의 이름을 버렸다면 그는 물론 멸망할 것인데, 이는 죄인은 오직 그분의 이름을 믿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며(요 1:12), 오직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가 사해지기 때문이며(요일 2:12),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믿을 때만이 영생을 얻기 때문이다(요일 5:13).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그러나 이 몇 서신이 말하는 바는 결코 죄인이 구원을 받는 문제가 아니며, 여기서 말한 이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고, 여기서의 문제는 그들이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지 혹은 버리는지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말한 것은 교회 안의 일이다. 그들은 구원의 문제에서는 이미 주님의 이름을 영접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일에서는 결코 이와 같지 않았다.
교회 안에서 주님의 이름의 가장 중요한 용도는 바로 그분의 믿는 이들의 집회에서 중심이 되는 것이다(마 18:20). 성령은 주 예수를 유일한 중심으로 삼으신다. 그분은 사람을 그분께 이끌어 모이게 한다. 이렇게 주님의 이름 안으로 모인다는 의미는 바로 주님을 머리로 하고 경배의 목적으로 하며 사람을 이끄는 중심으로 하여, 그분 앞에서 그분을 경배하고 높이고 전파하며 찬미하고 그분께 기도하며 모든 것을 그분께 바치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 안으로(원문) 모이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직접 주님의 앞에 와서 경배하는 것이지 결코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하는, 사람들이 세운 목사나 의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인(一人) 의장제」는 오직 그만이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고 그 나머지 사람은 다 그를 중개인―중보―삼아 그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이 사람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인데, 그것은 사람들이 오는 것은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한 것이며, 사람들은 그를 따라 기도하고 그의 지휘를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결코 이렇지 않다. 그분의 원래 뜻은 그분의 자녀들이 다 직접 그분의 아들 앞에 와서 그분을 경배하고 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며, 그분은 그분의 자녀들이 오랫동안 세워져온 한 사람의 경배를 전체의 경배로 여기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각 사람이 그의 아들의 인격을 가까이함으로 그분과 개인적인 교통을 갖는 것이다. 유대교적인 경배는 그분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진정으로 부합하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중심 삼는 집회 안에서 결코 한 사람의 예정된 의장이나 사람들이 묵인한 의장이나 습관적인 의장을 갖지 않는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이 제정한 질서―서면상으로나 구전상으로나 습관적으로―역시 없다는 것이다. 결국 주님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임 중에서 주가 되신다. 그분은 모든 질서를 안배하시고, 그분의 쓰기를 기뻐하시는 사람들(다수)을 선택하시며, 그 가운데서 그분의 자녀들의 경배를 받으신다. 입을 여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지배하지 않으며 다만 주를 위하여 선택되어 대중들의 의사를 발표할 따름이다. 모든 이에게 다 동등한 기회가 있고 다 직접 주님의 면전에 나올 수 있다.
성경 중에서 우리는 또한 주님의 이름의 또 다른 중요한 용법을 볼 수 있다. 주님의 이름은 믿는 이들을 그분 자신께로 분별한다. 이 때문에 주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린 것은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원래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분별해 내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마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미 우리를 분별하기에 부족한 것 같다. 사람들은 당시의 고린도인들이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고전 1:12)라고 말한 것을 따르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종파의 분별은 주님의 이름을 가벼이 보고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파」라는 단어의 원뜻은 바로 「이름」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종파에 가입하는 것은 바로 하나의 이름이 더해지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의 오류는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위에 교단의, 종파의 이름을 더하려 하는 데 있다. 나는 루터교의 믿는 이라고 하며, 나는 장로교의 믿는 이라고 한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설마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를 분별하기에 부족하다는 말인가? 달리 교단의 이름이 있어야만 우리를 분별하기에 충분하다는 말인가? 우리가 만일 마음속에는 결코 아무런 종파의 명칭의 분별도 없다고 여긴다면, 왜 우리는 실지로 종파에 있는가? 지금의 믿는 이들은 마치 하나의 종파에 속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하나의 명칭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불가능한 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결과는 바로 주님의 이름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의 종파의 명칭이 모든 믿는 이들에게 보편적이지 못하고 또한 믿는 이들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라면, 종파의 명칭이 남아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분리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이 어떠한 해석을 가하는가는 그 사실이 어떻게 사람에 의해 해석될 수 있는가? 물론 성령은 여기서 다만 사람에 의해 가벼이 여겨지는 적은 무리를 우리 앞에 두셨다. 우리가 응당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의 이름은 절대로 우리로 하여금 두 개의 죄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게 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딤후 2:19). 불의가 없는 하나의 길이 있다. 결코 완전할 수 없고 결코 잘못이 없을 수는 없다는 것은 바로 불신자의 말투이다. 불의의 길은 결코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주의 이름을 집회의 중심으로 삼은 후 죄악이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의 육체는 늘 죄악을 가지고 들어온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과 그분의 성령께서 우리를 지켜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죄악을 용납하지 못하게 하도록 앙망해야 한다. 도덕상의 죄악은 물론 좋지 않지만, 교회의 죄악―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은 더욱 좋지 못하고, 주님 자신에게 득죄한 죄악은 가장 좋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가장 큰 죄악인데(요이 7), 이것은 우리 영성의 시금석이다.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부정하다면, 무슨 또 다른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성심으로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은 모두 그들이 주님 자신과 특별히 가깝다는 것을 볼 것이다. 죄악이 집회에 침입하여 우리의 인내를 시험할 수 있지만, 스스로 약하고 의뢰하는 위치에 처하는 것은 우리를 주님 안에서 깨끗하게 보존할 것이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언제나 빌라델비아 믿는 이들의 특징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을 주목한 것임을 주시해야 한다. 그들은 비록 「빌라델비아」(형제사랑)이지만, 그들이 사랑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였으며, 또한 그들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매우 개인적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그리스도와 친밀하고 또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친밀했기 때문에, 그들은 「빌라델비아」가 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무릇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온 교회를 포용하고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큰 마음을 갖게 되기 때문이며, 개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모든 것으로 피차 연합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책임은 먼저 머리와 간격 없는 교통을 갖는 것이며, 그다음에 그분으로 말미암아 각 지체와 교통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지체와 소통하려 하나 먼저 머리와 교통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중히 보아야 할 것과 가벼이 보아야 할 것을 뒤바꾸는 것이다.
적은 무리만이 대가를 치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감(스 2:64)
워치만 니 전집 제5권 제6장(P133~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