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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좌절하십니까? (애 3장 19-29)
성경본문 : 예레미야애가 3: 19-29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21.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7.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29. 입을 티끌에 댈찌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찌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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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강석 목사 / 새에덴교회
지금은 포르투칼의 수도가 되어 있습니다마는 한때 스페인령에 속해 있던 리스본이라는 항구도시가 있었습니다. 그 항구도시의 해안이 끝나는 곳에 큰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이 바위에 다음과 같은 말이 씌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가 끝입니다. 이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1492년에 한 사나이가 이 항구에서 자그마한 배에 오르면서 함께 한 무리들과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바위에 새겨진 글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이 너머에는 위대한 희망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사나이가 바로 누구인줄 아십니까?
그가 바로 유명한 탐험가 콜롬부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15세기말에 유럽남부는 두차례에 걸친 커다란 지진을 겪었고 콜레라와 페스트가 휩쓸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은 깊은 절망 속에 주저 앉았습니다.
그러나 이때 절망을 거부하고 희망의 항해를 출범시킨 사람이 바로 콜롬부스였습니다. 바로 이런 그는 마침내 그 광활하고 위대한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절망을 만나면 모든 것이 끝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어느 날 절망의 골짜기에 떨어지게 되면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믿었던 사람이, 그래도 존경했던 사람에게서 절망을 느낄 때 우리는 그렇습니다. 또한 그렇게 믿었던 하나님, 그렇게 사랑했던 하나님께서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모순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될 때 그렇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문제는 나에게 있고 내가 오해하였기 때문이지만요.
그렇습니다.
절망한 자에겐 앞이 보이질 않습니다. 좌절한 자에게는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갈수록 어두운 골짜기에 자신의 마음을 맡겨 버립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과 좌절을 거부하고 희망을 가진 사람은 그곳이 끝이 아닙니다. 그에겐 별다른 새세계,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희망의 세계가 보입니다. 더 찬란하고 무궁한 축복의 세계가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좌절하지 않고 그 희망의 세계, 희망의 고지 위로 올라갑니다.
오늘 본문도 먹장구름 속에 휩싸여 도무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한줄기 빛을 붙잡고 희망을 노래하는 한 선지자 예레미야의 노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BC 587년경의 일이었습니다.
조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적국의 손에 초토화되고 조국의 왕은 두눈이 뽑힌 채 적군의 손에 붙잡혀 갔으며 동포들은 모두 바벨론의 노예가 되어 적국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유대 민족은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졌습니다. 앞을 보아도 절망, 뒤를 보아도 절망, 좌우 옆을 보아도 절망, 어디를 보아도 연달아 절망뿐이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럴수가 있을까?"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애가 3: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모든 소망은 다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소망이 다 끊어진 절망 속에서도 예레미야 선지자는 한가지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였습니다.
절망했지만 아직 그의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다 보니 한줄기 희망의 빛이 보이는 것입니다.(2X) 그래서 마침내 계속되는 기도 속에서 예레미야는 희망의 줄을 한 가닥 붙잡습니다.
애가 3:19-21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
그는 깊은 기도를 통해 희망의 줄을 붙잡았습니다.
그 희망의 줄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그 희망의 줄은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런 절망 속에서도 아직도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희망의 근거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절망 속에서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왜 예레미야는 그런 절망 속에서 하나님 한 분을 희망의 근거로 삼게 됩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이유를 하나님의 세 가지 속성에서 찾고 있습니다.
1) 첫째로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22절)
22절 :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여기서 자비란 말은 히브리말로 헷세드로 기록했습니다. 이 말은 아주 의미가 깊은 중요한 단어입니다. "Love and compassion in spite of."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과 자비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헷세드는 조건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 이해를 초월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이해를 초월한 자비입니다.
바로 예레미야는 이 하나님의 헷세드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지금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노예로 끌려가는 상황 속에서도,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도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도 다시 한번 이 하나님의 헷세드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아무리 우리 나라가 망하고 우리가 노예 민족으로 끌려가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의 희망 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이 희망 줄을 붙잡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져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못된 짓을 하고 저주받을 짓을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희망 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었습니다.
긍휼은 히즈리러로 "라함" 영어로 "mercy"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랑의 양면성을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면으로 표현해 주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주로 평면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평면적인 단어는 우리에게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양면적이고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언어는 절대로 평면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단편적으로 이해하면 큰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를 지어도 덮어놓고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무조건 얼뚱아기처럼 까꿍 까꿍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채찍질을 하십니다.
인정 사정없이 채찍질을 하십니다.
계속해서 삐딱한 길을 가면 내 삶을 갈기갈기 찢겨 주십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고 영영 우리를 버리시는 것처럼 때리십니다.
우리를 영영 저주하시듯 그렇게 우리를 찢으십니다.
그때 우리는 소망이 하나도 안보이지요. 모두가 절망이며 온통 좌절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렇게 하실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버리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새롭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때리십니다. 우리가 죄짓지 않고 지옥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더 이상 우리가 더 큰 재앙이나 저주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징계,채찍을 때리십니다. 죄의 중량에 따라서 처절하게 때리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실 때 마음이 시원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일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보복하는 것이니까요.
이때 하나님의 마음은 더 아프십니다.
더 쓰라리고 더 고통스러우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채찍질을 하시면서 마음으로는 울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손에는 채찍을 드시며 마음으로는 울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 자녀를 절대로 버릴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진멸시키지 않으십니다.
바로 이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매맞는 하나님의 자녀를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고 애처롭게 여기는 것. 이것을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또 하나의 다른 면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불쌍한 자식을 더 사랑해줍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바로 이렇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로 이해하였습니다. 채찍을 드시는 하나님의 본심을 바로 헤아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오히려 내일의 새 아침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내일의 아침을 향해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애가 3: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까지 성실하게 임한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은 성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시는데 너무나 신실하시고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성실과 신실은 일관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실 때 기분 내키는 대로 주시지 않습니다. 너무나 일관성있게, 너무나 성실하고 신실하게 베풀어주십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예레미야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24절을 보니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 기업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께 더 잘 할 수 있는 일에 목숨을 걸고 더 충성을 했습니다.
그는 이미 결정 되어버린 일 가지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결정되어버린 운명의 현실 앞에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현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 내가 주님을 어떻게 하면 더 사랑할 수 있을까?
내가 주님을 어떻게 하면 더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내가 주님께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인가?"
예레미야는 적어도 이런 일에 자기의 힘을 쏟았던 것입니다. 적어도 그는 이것이 믿음의 자존심이요 거룩한 오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신실성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 사랑했고 하나님께 더 잘해 버렸습니다.
그랬을 때 이스라엘에 새로운 길이 열리게 하셨습니다. 패자부활전의 영광스런 길이 열리게 하셨습니다. 마침내 영광스런 해방의 역사를 맞이하여 위대한 시온을 다시 건설케 하는 영광의 축복을 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좌절합니까?
그것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상황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은 얼마든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 상황에 직면하면 사람은 누구나 다 절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팔자와 운명을 비관하며 좌절합니다.
어떤 사람은 타고난 외모, 생김새 때문에 절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부모, 집안환경, 태어난 고장 때문에 절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처절한 실패를 생각하며 절망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기 때문에 절망합니다. 사람의 감언이설에 귀 기울이기 때문에 오해하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닥치게 될 때 내가 판단의 주인이 되고 내가 선악분별의 주체가 되면 더욱 좌절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 열매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선악과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선악의 판단의 주체가 내가 되면 정말 원망, 불평, 절망의 노예가 됩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어찌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일이 있도록 했단 말인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나를 이런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하필이면 저 사람을 만나서 내 신세를 망치게 했단 말인가?"
자기가 하나님까지 선악간에 판단하고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게 생각하여 불평, 원망, 좌절의 노예가 됩니다.
이것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었던 사람, 존경했던 사람에게 절망을 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포도원을 허는 여우의 소리때문이지만요. 결국에는 불평과 절망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심령이 캄캄합니다. 마음이 원망, 불평, 의심, 회의, 절망으로 가득합니다. 신앙생활에 기쁨도 없고 평안도 없습니다. 생명이 꺼져갑니다. 그리고 세상일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늘 마음에선 비난의 원성만 더 높아집니다. 왜? 좌절의 노예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선택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긍휼하심,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판단의 주체가 하나님이 되지요. 내가 판단하고 싶고 내가 선악을 분별하여 내 스스로 판단의 주체가 되고 싶지만 모든 것을 유보합니다. 판단의 권한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오히려 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 더 잘할 수 있는데 목숨을 걸고 모든 힘을 쏟습니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에 모든 충성을 다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생명나무(Tree of life)는 내 스타일에 맞느냐 안 맞느냐, 내 판단에 맞느냐 안 맞느냐 이전에 이것이 생명이냐 아니냐, 이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냐 아니냐를 분별하고, 오직 생명,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목숨을 겁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자기 안에 영적인 생명이 풍성합니다.
우선은 현실이 캄캄하고 절망, 좌절의 상황인 것 같지만 마음만은 평안과 기쁨과 자유와 행복이 넘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생명의 노예, 자유의 노예, 기쁨과 평안과 행복의 거룩한 노예가 됩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세상일도 잘 됩니다.
하늘보좌에서 축복의 물고, 기적의 물고, 은혜의 물고가 확 터지니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가정일, 직장일, 사업 일도 확 풀리고 형통하게 됩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모르는 높음과 깊음의 세계가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저 높은 세계와 더 깊은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나무를 선택하면 이 높음의 세계와 깊음의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혀 새로운, 전혀 다른 높고 깊은 축복의 비밀세계를 누리며 삽니다. 우리가 생각치 못하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믿습니까?
불평과 좌절하면 아무 생산성이 없습니다.
선악과를 선택하며 좌절하고 앉아만 있으면 아무 생산성이 없습니다.
오히려 좌절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생명나무를 선택하면 이런 놀라운 축복의 세계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너무나 좌절을 잘합니다.
너무나 사람들이 연약하고 시험도 잘 들고 잘 넘어지기도 합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신앙의 기본이 틀려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기초가 신본주의적이 아니라 인본주의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지 않고 상황과 사람을 봅니다.
생명나무를 선택하지 않고 선악과나무를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선악과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이젠 우리 모두 힘있게 살아봅시다.
생명나무를 선택하며 멋있게 살아 봅시다.
우리가 왜 좌절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왜 절망과 상처의 노예로 살아가야 합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환경은 무엇으로 절망할 상황입니까?
돈 문제입니까?
사업문제 입니까?
사람문제 입니까?
인간관계 때문입니까?
자신의 무능, 한계 때문입니까?
그러나 그럴수록 하나님을 더 사랑해 보십시오.
오히려 하나님께 목숨걸고 충성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더 잘할 수 있는 곳에 목숨을 걸어 보십시오.
그러면 아무리 깨지고 찢어지고 산산조각이 난 인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십니다.
패자부활전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나의 모든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믿습니까?
보세요. 송명희양이 언제나 선악과 선택하여 불평, 원망, 좌절했더라면 자기 인생에 어떤 생산적인 일이 있었겠습니까?
늘 부모를 원망, 자기 인생을 저주, 하나님을 탓하며 원망, 불평, 좌절, 저주의 노에로 살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결정된 운명을 탓하지 않고 생명나무를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얼마나 생명이 충만하고 전혀 별다른 생을 삶 살고, 수십, 수백만 성도, 아니 수천만 국민들에게 얼마나 위대한 인간승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얼마나 엄청난 영향력과 감화력을 주었습니까?
여러분! 왜 좌절하십니까?
왜 절망하며 살아야 합니까?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저주에 이르게 하는 병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자에겐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으로 다가 오십니다.
패자부활전의 영광의 길로 인도하시는 역설의 하나님을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전혀 모르던 높음과 깊음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다 생명나무를 선택하며 이런 은혜를 누렸던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예레미야가 그랬고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모세와 갈렙, 욥과 사도바울 등이 그랬습니다.
여러분 모두도 이런 은혜를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