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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한 인생
전도서 1 : 2 - 11
지난 시간에는 전도서의 서론적인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저녁부터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생각하는 가운데서 인생의 깊은 뜻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물론 이 말은 솔로몬이 창작해 낸 새로운 말이 아닙니다. 그의 부왕 다윗도 이미 인생이 헛된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은 다 변화무쌍한 것이기 때문에 헛되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시편 39편 4절 이하의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도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야고보서 4장 13절 이하의 말씀을 우리가 잘 기억하지만 이 말씀도 연약한 우리 인간에서 주시는 귀한 교훈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이 얼마나 헛됩니까? 며칠 전에 뵌 분인데 어떻게 안뵈이길래 안부를 물으면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하는 답변을 들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와 같은 사상은 비록 성경만이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부터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철학자들이 입을 모아 말해 왔습니다. 초로인생(草露人生)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풀 끝에 맺힌 이슬 같아서 아침 햇빛을 영롱하게 반사하여 아름다워 보이지만 언제 말라 버렸는지 그 자국도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인생이란 없다고 말해야 옳을까? 있다고 말해야 옳을까?” 참 묘한 표현입니다. 있다고 하자니 너무나 허무하고 그렇다고 해서 없다고 하자니 없지는 않고, 이것이 인생입니다.
어떤 짓궂은 사람은 “인생은 없고, 없고, 없고 없다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릴 때는 철없고, 젊어서는 정신없고, 중년 되면 틈없고 늙어지면 형편없다가 없어지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이 모두가 인생의 허무한 면을 무상한 면을 초월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베드로도 구약 이사야 40장 6절 이하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을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그림자가 지나가듯 빨리빨리 지나갑니다.
지금 여기 60이 지나신 분이 여러분 계십니다. 젊은이들은 10대 20대 소리할 때는 시간이 좀 빨리 지나가고 세월이 좀 빨리 흘러서 나도 좀 어른이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 젊은이시여! 60이 넘으신 할아버지 할머니 (혹 이렇게 말하면 내가 왜 벌써 할아버지야? 인생은 60부터인데라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에게 여쭤 보세요. “세월이 얼마나 빨리 지나갑니까?” 그러면 그 분들은 한결같이 대답하실 것입니다. “세월? 말도 말게.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눈 깜짝하는 동안에 내가 벌써 60이 지났네”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시편 90편에 보면 모세가 그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오며 밤의 한 경점같을 뿐입니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면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 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70년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편 89편 47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인생 일생이 하루 해와도 같습니다. 어린애는 아침이고 청년은 대낮이고 장년은 오후이고 노년은 저녁입니다. 밤이 다가옵니다.
인생 일생이 사계절과도 같습니다. 어릴 때는 봄철이고 청년은 여림이고 장년은 가을입니다. 인생의 겨울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은 “헛된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1서 2장 15절 이하에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고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성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쫓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갑니다.
세상에 것들은 헛된 것 중에도 헛된 것입니다. 영어로는 vain이라는 말과 vanity라는 말을 썼어요. 그런데 ‘헛되다’는 말을 다섯 번씩 반복한 이유는 이 일이 너무 사실이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만히 보면 묘한 진리가 많아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어리석어서 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할 뿐더러 알아도 그대로 살지를 않고 있어요.
여러분 오늘 본문 2절을 가장 잘 주석 해주고 있는 것은 사람이 세상에 날 때와 세상을 떠날 때의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어요. 사람이 세상에 ‘악’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태어날 때 손을 보셨습니까? 어미 뱃속에서 나오는 어린애는 한사코 손을 부여 쥡니다. 의욕과 야심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사는 동안 열심히 일하고 힘써서 돈을, 지식을, 권세를 향락을 얻고 누려 보노라고 발버둥칩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날 때는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이 부여 쥐었던 손을 쭉 폅니다. 세상 것에 대한 포기를 의미합니다. 허긴 안 하려야 안 할 수도 없지요.
여러분,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은 할 수 없이 손을 펴기 전에 자기 스스로 손을 폅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빌립보 3장 4절 이하에 “나는 육에 있어서도 신뢰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에 있어서 신뢰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나는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베냐민 지파에 태어났고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에 있어서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열심에 있어서는 교회를 박해한 자며 율법의 의에 있어서는 흠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은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겼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고도 그 모든 것을 오물같이 여겼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나는 나 스스로 손을 폈습니다. 그 대신 가장 귀한 그리스도를 소유하였습니다.
여러분! 헛된 세상의 것 부여 쥐고 있는 동안 가장 귀한, 없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헛된 세상의 것을 포기할 때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쓴 솔로몬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세상 사람들의 소망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고, 다 누려 본 경험이 있는 분입니다. “다 누려 보아도 그렇고 그렇더라. 모든 것이 헛되도다”는 간증입니다.
3절을 보십시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여기 “수고”라는 말은 염려와 애씀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전도서에 특히 많이 사용되는 낱말인데 전도서에서만 스물 여덟 번이나 나옵니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것은 세상을 위하여 다시 말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을 위해서 염려하고 애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것 위해서 애쓰고 염려하여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만족합니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헛되고 헛된 것 뿐입니다.
우리 집사님 가운데 한 분은 전에 예수 믿기는 하고 교회도 안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옛말대로 “나무 끝에 앉은 비둘기가 마음은 콩밭에 있다”고 교회는 그저 형식으로 다니며 자나깨나 돈버는데 온 정신을 다 쓰며 정말 수고해서 적지 않은 돈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의 것으로 만족합니까?
천만원 바라던 사람이 그것 얻으면 만족합니까? 일억원 정도만 있으면 부족함이 없습니까? 십억원 있으면 사업할 만 합니까? 천억 있으면 부족함이 없습니까? 해 아래에서는 만족이란 없습니다. 이 분도 그저 “돈돈돈돈”하면서 해 아래서 수고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다 몸에 이상이 좀 있어서 병원엘 가서 진찰해 보았더니 아주 당뇨가 심해졌으니 식사는 보리밥 한 공기와 두부 한 모씩만 드시라는 처방이 나왔습니다.
그 집사님 간증인데 그 처방이 나올 때 사방이 캄캄해 지더래요. “내가 보리밥 한 공기 두부 한 모씩 먹으려고 이 수고를 했단 말인가?” 그 순간 그는 정신이 바싹 들었습니다. “세상의 것이 다 이렇게 헛되구나.” 그래서 그때부터 주를 위해 힘써 봉사하는데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전에 발견치 못했던 기쁨, 만족, 평화, 사랑, 감사, 건강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잠언 23장 4절 5절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라,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하였습니다.
잠언 27장 24절에도 “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지 아니하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19절에 이렇게 교훈하십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왔다갔다하는, 돌고 도는)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은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얼마나 뜻 있는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사람의 사는 것이 그 소유의 풍부함에 있지 아니합니다”(누가복음 12장 15절). 그런데 여러분! 해 아래 살면서 헛되지 않은 수고가 있습니다. 보람있는 수고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고린도전서 15장 마지막절 58절을 한번 찾아보세요.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고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사람이 해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유익한게 없지마는 주안에서 수고하는 그 수고는 말할 수 없이 유익하며 헛되지 않고 우리에게 상급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햇빛 넘어 저 영원한 세계에 들어갈 때 우리가 해 아래서 수고한 만큼 행한 대로 갚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평생에 행한 길 돌아보니
부끄럼 뿐이라 죄송하나
아버지 사랑이 날 용납하시니
생명의 면류관 내 것이라
이 세상이 얼마 큼이나 헛됩니까? 전도자는 말합니다. 4절 이하를 보십시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뜨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이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삶의 길이 밝히 보입니다. 잠깐되는 세상, 헛되고 헛된 세상, 육신 위해서 살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세상, 보람있는 일을 위해서 살 것인가? 그 판단과 결단은 여러분 스스로 하실 것입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여러분에게 간곡히 권면하고 싶습니다. 잠깐 되는 세상, 헛되고 헛된 세상 위해 살다가 허무하게 가시지 마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루를 살아도 보람있게 부지런히 일하며 사십시다.
아직도 세상 줄 끊지 못하신 분 계시면 주님 앞에서 다 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빛의 아들답게 사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