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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그네와 본향
본문 / 유다서1:24-25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당할 때마다 다시 한 번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인도의 어느 산간에서 수도하고 있는 성자에게 한 부인이 찾아 왔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어린 아이를 끌어안고 이 성자에게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성자가 보니 이 어린 아이는 이미 숨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성자가 부인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살려 드리겠으나, 그 대신 저 동네에 내려가서 겨자씨 하나를 구하여 오십시오. 그런데 그 겨자씨는 지금까지 죽음의 고통을 한 번도 겪지 않은 집에서 구해 와야만 합니다.
물론 그 부인은 그런 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성자는 다시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죽음의 비애를 겪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고요히 맞이하십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를 떠나 주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정체를 알고 있는 성도들은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절망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과 얼굴을 대하여 만나며, 앞서 간 성도들과 만나는 일입니다. 죽음은 안식입니다. 죽음은 부활의 약속을 갖고 있습니다. 죽음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광의 교량입니다. 실락원의 저자인 존 밀턴(John Milton)은 죽음은 영원한 세계를 여는 열쇠다 라고 말하였으며, 위대한 구약 성경 학자인 에드워드 영은 죽음은 인생의 면류관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인생을 성찰할 때, 인간은 결국 나그네의 삶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그네입니다.
본문에서 히브리 기자는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회고하고 바로 이 진리를 증언하여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가 죽은 후에 족속에게 말하기를 나는 당신들 중에서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창 23:4)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야곱은 바로가 그의 나이를 묻자 내 나그네의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 47:9)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윗도 기도할 때에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시 39:12)라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온 회중 앞에서 말할 때에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역상 29:15)라고 말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 3:20)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우리들 (벧전 2:11)이라고하였습니다.
-은혜목회정보- 97.11 ☞설교/박성규목사
본문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라고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들은 한 번 결단한 믿음을 죽기까지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죽기 이전까지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이 인간의 생을 결산하는 가장 엄숙한 순간입니다. 믿음의 생활이 없이 믿음의 죽음은 불가능합니다. 믿음의 열조들은 소망을 영원한 천국에 두고 믿음으로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아갔습니다.
본문에는 세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첫째로, 보고 , 둘째로, 환생하며 , 세째로 증거하였음이라 는 것입니다. 생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의미있는 나그네의 삶을 시작하려면 이 세 가지 단어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볼 수 없는 천국을 믿음의 눈을 통해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그들의 삶이 전환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환영하였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약속의 멧세지와 약속의 주님인 그리스도를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하였습니다. 영원한 빛 아래서 발견한 놀라운 삶을 증거하였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전인적인 체험이며, 전인적인 결단입니다.
아브라함의 나그네 생활은 어떻게 출발할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출발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 땅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미지의 땅을 향해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멀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커다란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소유하려면 멀리 있는 것을 붙잡아 들이는 커다란 팔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믿음을 위해서는 잡아 들이는 커다란 팔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믿음을 위해서는 멀리 있는 것을 소유한 감격을 증거하는 입술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나그네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까? 본향을 확인하며 삽니다. 나그네는 본향을 확인하고 본향의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본향이 어딘가를 분명히 알 수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고 말하였습니다. 신앙의 사람 바울은 이 땅이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 아닌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고향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여행은 방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나그네가 지나가는 길에 너무 커다란 미련을 둔다면 그는 계속 여행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인들이 세상이라는 순례의 여정을 지나면서 이 세상에 너무 큰 미련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일 2:15-16)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고전 7:29-31)라고 말하였습니다.
욥은 한 순간에 그의 재산과 사랑하는 자녀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람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나그네는 세상의 것으로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 (갈 6:14)라고 바울은 고백하였습니다.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서 얻은 명예를 가지고 자랑하지 말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명예도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권력이나 지식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십자가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본향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십자가는 영원한 삶의 진리를 깨우쳐주고, 이 나그네의 삶에 의미와 보람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 서서 너무 많은 욕심을 가져서도 안됩니다. 따라서 육체의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라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11)고 하셨으며,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 (히 12:1)고 말씀하셨습니다.
나그네가 짐을 많이 지면 그 여행은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나그네가 미련이 많으면 발을 옮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는 미련을 떨쳐버리는 인생의 결단과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영광스런 본향을 향해서 움직이는 삶의 발자욱을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나그네는 이 세상에서 환영을 바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지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실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가 그들의 삶의 마지막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핍박을 당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9)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라고 말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이 그들과 같지 아니함을 비방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것으로 아는 사람과 영원한 목적지를 아는 사람의 삶의 스타일이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자주 길을 확인하고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그네는 옮겨다닐 준비를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은 커다란 집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는 장막에 거하였습니다(히 11:9). 계속하여 옮겨 다녀야 하는 나그네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옮겨다닐 준비를 한 것입니다. 세계를 향해서 한 걸음 옮겨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부르시는 그 날 가장 위대한 옮김을 하였습니다.
삶에서 죽음으로 ! 지상에서 영원으로 ! 그 때 아브라함은 미련없이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그네는 영원한 본향을 향해서 투자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서 얻은 사업에 많은 것을 투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나그네의 일시적 거주지를 위해서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원한 귀향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이 본향에 대한 향수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삶과 죽음 사이에 끼었으니)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이 영광을 가진 것이 더욱 좋을지라고 했습니다. 그는 소망을 하늘에 두고 있었으므로 죽음을 환영하며 하나님을 만나는 영광스런 환희를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그네 길에서 유혹이 있습니다. 옛날 삶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유혹입니다.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15-16). 아브라함은 돌아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 있는 그의 고향에 넓은 땅과 가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기는 고생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돌아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돌아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보다 더 위대한 본향이 아브라함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어거스틴은 로마가 함락되었을 때 밀폐된 그의 조그만 방에서, 영원한 하늘의 소망을 기억하면서 불후의 명저인 [하나님의 도성]을 저술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소망은 하늘에 있었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은 믿음의 사람들 삶을 순결하게 하였습니다. 이 소망이 믿음의 사람들을 용기있게 만들었으며, 이 소망이 그들의 생을 위대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뛰어난 신앙인이었던 한 탁월한 문필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웃고 있었습니다. 그를 보는 사람들은 그의 마음에서 넘쳐나는 기쁨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미소는 천국의 빛이라고 불리워졌습니다. 그는 행복을 묻는 사람들에게 천국에 대한 소망 때문이라고 늘 말하였습니다. 그는 임종을 맞이하여 환한 얼굴로 말하였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나는 행복한 여행을 떠나가는 순간이다. 잠시 후에 내게는 영광의 부활이 있을 것이며 낙원은 나의 영광의 안식처가 될 것이다. 그가 쓴 [천국의 새벽]이란 시는 수 많은 성도들에게 위로와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시간의 모래들이 가라 앉으면
천국의 여명이 밝아오고
한숨으로 가득했던 무더운 여름,
이 여름이 가고
어둡고 외로운 짧은
밤이 지나면
광명한 아침이 내 손을 흔들어 깨우네.
오 ! 영광 !
영광의 임마누엘 당신의 땅 !
나의 본향을 나는 찾았네.
알랙스 헨리의 {뿌리}가 현대인들에게 그토록 커다란 감동을 준 것은 고향에 대한 동경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의 의식 구조 깊은 곳에는 우리가 돌아가야 할 영원한 본향에 대한 깊은 열망이 있습니다. 본향을 생각할 대마다 제 가슴을 저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향에 대한 우리 성도들의 신앙을 환기시켜 줍니다.
아프리카에서 일하던 어느 선교사님은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열정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아들이 별에 걸려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잠시 후 충격을 받은 부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번에 큰 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부인마저 잃은 선교사의 슬픔과 비감한 심정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그는 선교를 포기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선교가 내게 무엇이 유익한가 ?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 ?] 마침내 그는 선교를 포기하고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에는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미국의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되었을 때 은은하게 울리는 군악대들의 예포 소리와 함께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부둣가에 나와 있었습니다. 배에서 대통령이 내려올 때 거기에는 붉은 주단이 깔렸고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을 맞이 하였습니다. 대통령이 지나가자 붉은 주단은 걷히고 군악대의 나팔 소리도 멎었습니다. 그 뒤를 선교사 홀로 고독하게 내려왔습니다. 사냥 갔다오는 대통령은 저렇게 환영을 받는데, 큰 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부인마저 잃고 선교를 하다가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는 환영객은 아무도 없구나 ? 하는 생각으로, 고독감과 실패감을 느끼면서 정신없이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아 ! 네가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군악대의 나팔 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하늘의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내가 맞이해 주마. 붉은 주단이 문제가 아니라 황금의 유리길을 깔고 내가 친히 너를 마중 나오마. 사랑하는 아들아 끝까지 충성하라 ! 이 말씀을 들은 선교사는 그 동안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충성을 다하지 못했던 죄를 회개하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당신도 고향을 바라보며 꿈이 있는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철학이 있는 삶을 사십시오. 그 때 비로소 우리들의 나그네 삶은 참 보람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이 고향을 발견하셨습니까 ? 당신이 만약 구도자(求道者)로서 이 책의 멧세지를 접하셨다면 이 마지막 몇 마디 말씀을 꼭 읽어 주십시오. 당신은 지금까지 복음의 멧세지와 복음의 초청을 들으셨습니다.
복음(福音)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신 사건입니다(고전 15:1-3). 왜 그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이 나에게 좋은 소식이 됩니까 ?한 마디로, 그의 죽으심이 인류의 최대의 문제인 죄 문제를 해결한 까닭입니다. 그의 부활이 인류의 의의 문제를 해결한 때문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롬 4:25).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롬 3:23) 죄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사망과 진노는 정한 바 되었습니다(히 9:27).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롬 6:23).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습니다(히 9:22). 하나님께서는 죄없는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의 제물로 보내심으로써 그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케 하셨습니다(사 53:6). 그러므로, 이제 그의 피흘리심,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용서의 유일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
그러나, 그의 죽음심만으로 기독교는 아직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은 것은 새로운 삶의 근거를 제공했지만 이제 이후부터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형기를 치르고 형이 면제되고 감옥에서 출옥하는 죄수가 직면한 보다 중요한 물음은 이제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 ? 입니다.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된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죄사함 받아 죄인에서 의인된 우리가 참으로 의인답게 살아가도록, 우리의 삶의 주장자와 안내자가 되시려고 그리스도는 다시 사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이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의의 문제를 해결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이 복된 소식의 결과가 바로 당신과 나의 구원인 것입니다.
출처: 목회자의 요람 한서노회 글쓴이: 요세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