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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3: 10-14 율법과 믿음 ( 1 )
2. 율법과 믿음 ( 3: 10-14 )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 3: 10 저주 아래 있는 자 -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1]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방편으로 삼고자 하는 자는 모두 저주 아래 있다는 바울의 말은 죄의 보편성(普遍性)을 전제하고 있다.
이 말은 '율법을 따르는 자들은 칭의를 받을 수 없다'라는 율법 자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아니다. 율법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모든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나의 율법을 어기면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는 인간의 완벽할 수 없는 연약함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만약에 인간이 하나의 율법도 어기지 아니하고 모든 율법을 지킨다면 그는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아와 같이 말하는 것은 율법의 기능이 인간의 죄인 됨을 드러내는 것이며 또한 모든 사람이 율법을 따라야 하는 필연적인 의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레 19: 2 -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 롬 7: 24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율법은 단지 정죄와 진노의 기능을 가질 뿐이다.
* 롬 4: 15 -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 롬 5: 16, 18 -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2] 저주 아래 있나니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제재(制裁)아래 매였다는 뜻이다. 여기 '저주'란 말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영멸(永滅)에 이름을 의미한다.
* 마 25: 41 -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 히 6: 8 -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3]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기록된 대로' - 이것은 신 27: 26의 기록을 가리킨다.
* 신 27: 26 -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4]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항상 행한다.'는 것은 모든 율법의 조례(條例)들로써 자신을 제재하기 위하여 자기의 전 존재(全存在)와 행위를 율법 안에 내주(內住)시킴을 가리킨다(Greijdanus).
이것이야말로 법화(法化)한 생활이니 사람으로서야 누가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그런즉 사람으로서는 율법을 완전히 지키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저주 아래에 있지 아니하는 자는 그 누구리요? 그러므로 사람은 다만 외래(外來)의 구원을 받아야 함이 절대 필요하였다.
율법주의에 대한 여섯 번째 반론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 즉 법을 지켜 완전케 되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이 모든 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 신 27: 26 -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모든 법(율법)들을 항상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법을 지켜 완전케 되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갈 3: 11 의인은 믿음으로 -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
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바울 사도는 율법의 방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함을 말하고 있다.
* 갈 2: 16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2]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칭의를 설명해 온 바울은 이제 보다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시각으로 칭의에 접근한다.
바울이 구약에서 인용한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합 2: 4)는 구절은 구원에 관한 여러 구절들 중에 하나이다. 롬 1: 17과 히 10: 38에도 같은 말씀을 인용하였다.
바울은 중요한 교리를 밝힐 때마다 성경(구약)말씀을 인용했다. 그것을 보아도 우리는 바울의 성경관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성경이 글자대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변치 않는 진리라고 믿었다. '의인'은 어떠한 사람인가? 그는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자이다.
* 눅 18: 13-14 -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그는 자기 밖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신앙에 의하여 받는 자이다. 이렇게 생명을 얻은 방법은 믿음뿐이다.
본 구절은 원래 하박국이 갈대아인의 침공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즉 사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하박국은 하나님을 향한 겸손과 신뢰로 이와 같이 고백하고 있다.
바울과 하박국의 입장이 다른 것은 사실이나 피할 수 없는 위기와 저주 가운데서 믿음으로 여호와를 바라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Boice).
* 롬 1: 17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히 10: 38 -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결국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앞에 살고자 하는 자는 오직 '믿음'에 의지해야할 것이다.
'믿음으로'라는 말은 '행위로 혹은 법을 지킴으로'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이다.
'산다'는 말은 '영원한 삶, 영광스러운 삶'을 가리킨다.
율법주의에 대한 일곱 번째 곧 마지막 반론은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합 2: 4)고 성경이 말씀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복음의 원리에 맞는 말씀이고, 율법주의에는 맞지 않는 말씀이다.
바울은 위의 사실을 보충하여 법은 믿음과 근원이 다르다고 말한 후에, 법을 행하는 자가 그 법 가운데서, 그 법으로 인하여 살리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
* 레 18: 5 -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갈 3: 12 율법을 행하는 자 -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
본 절은 사람이 율법을 행하여 의를 이룬다는 것이,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과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
1]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믿음이 율법의 길에서 난 것이 아니며, 믿음의 길은 율법의 길에서 난 것도 아니다.
이 두 길은 그 체계(體系)를 서로 달리 한 것이다.
2]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바울은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구약을 인용하여(레 18: 5) 믿음과 율법이 조화될 수 없는 관계임을 증명한다.
율법으로 행하려는 자들은 끝까지 율법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율법을 행치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 레 27: 26 - 오직 가축 중의 처음 난 것은 여호와께 드릴 첫 것이라 소나 양은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성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결국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구원하시지 아니하는 심판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저주를 깨닫게 될 것이다.
* 딛 3: 4-5 -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갈 3: 13 율법의 저주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본 절은 이 부분의 핵심이다.
한마디로, 율법주의의 오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역사적이며 객관적이며 대리적이며 완전한 사역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는 완전한 의이었다.
* 롬 10: 4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은 의는 완전한 의, 곧 도덕적 완전이며 거기에 무엇이 더 첨가될 것이 없다.
그 의(義)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속박과 저주와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누린다.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우리를 위하여'란 말의 헬라 원어는 '우리를 대신하여'란 뜻이다(Greijdanus).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 그 결과는 저주 곧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 나무 - 위에서 죽었을 때 그것은 저주 받은 자의 표식이었다.
* 신 21: 23 -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것은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 - 저주 -를 받아들이는 표식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죗값을 치르고 우리들을 저주에서 건져내시는 속량(贖良)이었다.
저주(詛呪, Curse)는 하나님이 죄를 인하여 사람에게 내리도록 명하시는 것, 혹은 신이 저주의 대상에게 악이나 해를 내리기를 구하는 것, 즉 재앙이 내리라고 비는 것을 의미한다.
* 신 28: 20 -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혼란과 책망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하게 하실 것이며
* 신 27: 15-26 -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 16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7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8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0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1 짐승과 교합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2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어머니의 딸과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3 장모와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4 그의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5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6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 시 109: 17 -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왕이나 귀머거리, 부모, 혹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 출 21: 17 -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저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 레 24: 16-17 - 16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17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성경에서는 자기를 저주하는 자에게 복을 비는 것이 덕으로 간주되고 명령으로 내려지기까지 한다.
* 시 109: 28 - 그들은 내게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그들은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 눅 6: 28 -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아브라함과 하나님은 상호 공수 맹약을 맺으셨다. 따라서 이제 아브람의 이웃은 아브람과의 관계에 따라 그들도 각각 하나님께 축복과 저주를 받게 될 것을 의미한다.
* 창 12: 3 -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원리는 신약 시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의 '저주'(칼랄)는 '감소시키다, 낮게 여기다'는 뜻으로 곧 남을 멸시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과 특별 맹약을 맺은 하나님의 종 아브람을 멸시여기는 행위는 곧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가 된다는 뜻이다.
내가 저주 하리니의 '저주'(아라르)는 하나님의 법에 따른 공적인 저주를 의미 하는데 이에는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징계 조처와 형벌이 따르게 된다.
* 삼상 2: 30-33 - 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31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32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33 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2]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한 관계로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또 저주하게 된 것이다(10절).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이 저주를 받으셨다. 고로 이 저주는 우리에게서 떠나게 되었다.
'속량하셨다' 함은 값 주고 사서 풀어냈다는 뜻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그 보혈로 우리의 죄 값을 내시고 정죄와 저주에서 우리를 풀어내시어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 롬 8: 1-4 -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속량에 해당하는 헬라어 - '엑세고라센'(*)은 '값을 치르고 사다', '되돌려 사다' 등의 의미를 가진다. 본 절에서 이 말은 율법의 노예가 된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사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대가는 십자가의 피였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전(贖錢)의 개념에서 해석되었다.
* 출 21: 30-31 - 30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부과하면 무릇 그 명령한 것을 생명의 대가로 낼 것이요 31 아들을 받든지 딸을 받든지 이 법규대로 그 임자에게 행할 것이며
3] 기록된바
'기록된 바' - 이것은 신 21: 23을 가리킨다.
* 신 21: 22-23 - 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4]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나무에 달려 죽음은 저주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나무 형틀)위에서 죽으셨으니 이것이 저주의 죽음이란 말이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 때문에 저주를 받으심은 지극한 사랑이다. 아들을 나무에 달리게 하는 저주까지 받게 하신 것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다.
* 사 53: 4-6 -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본 절은 이 부분의 핵심이며 결론적 요지이다.
한 마디로, 율법주의의 오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건져내셨다.
그리스도의 이 구속의 일은 역사적이며 객관적이며 대리적이며 완전한 사건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는 완전한 의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받는 의는 완전한 의, 곧 도덕적 완전이며 거기에 무엇이 더 첨가될 것이 없다. 그 의와 완전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속박과 저주와 공포로부터 자유를 누린다.
갈 3: 14 성령의 약속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
본 절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결과를 말한다. 그것은 두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복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특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믿는 자들은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둘째는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성령께서는 죄인들 속에 거하실 수 없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 속에 들어오셔서 거하시게 되셨다.
이 두 가지는 다 믿음으로 오는 참으로 큰 복이며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결과이다.
1]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아브라함의 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천국 기업을 의미한다.
* 롬 4: 13 -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 롬 8: 16-17 -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2] 또 우리로 하여금
'우리'란 말은 이방인과 유대인들 가운데 있는 모든 기독신자들을 가리킨다.
3]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성령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다고 하신 약속이다.(Greijdanus)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 함께 믿음으로 이 약속에 참여하여 같은 성령을 받은 것이다.
* 욜 2: 28 -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 행 10: 47 -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2)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 행 11: 15 -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 행 15: 8-9 -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성도들을 구속한 목적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
(1) 아브라함의 복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는 것이다.
(2) 믿는 자들이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복'은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은 신약의 성도들에게 널리 미치게 되었고(9절 주석 참조), 성령의 약속은 예수의 부활 이후 성취되었다.
* 요 14: 16-18 -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 행 1: 4-5 -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이처럼 의롭다함을 얻는 것과 성령을 선물로 얻는 것은 아브라함이 받은 복과 같은 성격이다. 왜냐하면 이방인에게 미치는 아브라함의 축복이 하나님의 약속이듯이(8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성령을 받게 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 눅 24: 49 -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1-14 절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본문은 율법주의 곧 법을 지켜야 완전케 된다는 생각에 대하여 일곱 가지의 반론을 제시한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사람이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지 않으셨을 것이다.
둘째, 우리는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오심은 죄 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전제한다.
셋째, 사람은 율법을 지키려는 육신적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
그것은 성경의 역사와 성경 자체가 증거하며 또 우리가 경험하는 바다.
* 사 64: 6 -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 렘 13: 23 -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 렘 17: 9 -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넷째,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성령의 기적들을 베푸신 것도 신자들이 율법을 지킬 때가 아니고 단지 예수님을 믿을 때었다.
* 행 3: 12, 16 -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다섯째, 아브라함은 행함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 창 15: 6 -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여섯째,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이다.
* 신 27: 26 -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일곱째, 성경은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고 예언하였다.
* 합 2: 4 -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므로 율법주의 곧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생각은 명백히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의 불완전한 행위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죄인들의 유일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義) 안에 거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만족해야 하며, 그 의 안에서 자유와 기쁨과 평강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그 의 안에서 날마다 기쁨의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또 우리는 그 의 안에서 의롭고 선한 삶을 추구하며 실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