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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광풍이 몰아친 지 30년이 채 되지 않아, 잭 웰치를 비롯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이 반성문을 속속 발표하고 있다. 최고의 주식투자가로 전세계 젊은이들의 망상을 조장했던 워렌 버핏도 두손두발 다 든 채 공황을 떠벌이고 있다.
2008년도 노벨상 수상자였던 크루그먼은 요즘 신자유주의 반대자였던 것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신자유주의자들의 개방 주장에 대하여 뜬금없는 표정을 지었던 동아시아의 경제관료들에게 이죽거렸던 인사였다. 다시 말해 크루그먼조차 전향자, 좀 더 약삭빠른 전향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요즘은 권위의 붕괴시대다. 시장의 반응이니, 시장의 신뢰니 하는 말을 주문처럼 외며 돈놀이의 논리로 세상을 유린하던 자들이 이제 같은 입으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정부의 개입을 악행으로 몰던 자들이 너도 나도 신속하고 과감한 정부의 개입을 주장하고 있다.
국제적인 공조를 강조하며 전 세계 20개국이 동시에 경기부양책을 진행하고, 무너진 금융시스템을 살리기 위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하고 있다. 언론에서는 그동안 세상을 풍미했던 신자유주의 시대가 가고 케인즈주의 시대가 다시 오게 된 것이 아니냐는 너스레를 떨고 있다.
권위의 실종으로 두려움에 떠는 자들
이들이 갑자기 말을 바꾸고 호들갑을 떠는 이면에는 자본주의가 더 이상 작동될 수 있는 가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자신들의 회의가 대중에게 공유되는 것이 사실은 더 두려운 것이다.
이들 모두에게 위기라는 말은 그들 권위의 위기이다. 펀드매니저, 은행가, CEO, 정부관료, 그리고 소위 경제칼럼니스트라는 사람들은 이제 조롱과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가하면 시장이라는 말의 권위 또한 추락했다. 불안하고 불합리한 체제로 인식되고,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체제라는 것이 날로 폭로되었다.
좋은 시절로 윤색되고 있는 케인즈주의가 등장했던 때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케인즈주의가 세계화된 것은 2차대전 직후였지만, 이미 미국에서는 대공황을 겪고 나서 뉴딜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요구된다는 식의 정책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흐름이 형성됐었다. 결국 2차대전이라는 미증유의 학살이 일어나고 난 다음, 자본가들이 현실의 막막함에 귀뺨을 맞고 망신을 당했을 때 지금처럼 다급한 정책전환이 모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위기, 자본주의 주역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이 권위를 보완하는 세력이 필요했고 그 세력들이란 미국에서는 공산당도 입당했던 민주당이었다면, 유럽에서는 사민주의자들이었다.
사민주의자들의 어부지리
2차대전이 끝났을 때 승전국 미국을 제외하고 자본주의는 대중들에게 그 권위를 상실하였다. 자본주의를 이끌던 자본가들은 영국에서는 파시즘과의 전쟁이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나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병사들과 그 가족들의 의문에 답을 해야 했다. 독일에서는 자본가들이 나치당원들이었기에 그들은 패전과 나치즘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의 공범 취급을 받아야 했다.
자본주의체제 하에서의 무분별한 과잉생산과 대중의 궁핍이 대공황에 이어 전대미문의 사상자를 낸 2차대전으로 이어졌다는 자각은 노동자나 자본가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궤도 수정을 요구했다.
전후의 폐허 위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미국의 원조라는 도움이 없었다면, 유럽은 말 그대로 우왕좌왕으로 끝날 운명이었다.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1500억 달러는 족히 넘었을 무상원조가 마샬플랜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고, 최고의 수혜자는 말할 것도 없이 영국과 프랑스였고, 그 뒤를 독일과 이탈리아가 이었다.
소위 적화의 위험은 독일국경선에 배치돼 있었던 4만대가 넘는 T-34탱크만이 아니었고, 궁핍한 가운데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를 보내고 있던 대중들의 불온한 기운이었다. 이런 불온한 기운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현금다발이었고, 체제보존을 위한 양보가 불가피해졌다.
이러한 양보를 이용해 나치즘과 파시즘 앞에서 가장 무기력한 세력이었던 사민주의자들이 파시즘의 폐허 위에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그것도 관리되어지는 자본주의라는 수십 년간 이어져온 사민주의자들의 기대를 갖고서 말이다.
케인즈주의의 한계
케인즈주의는 생산의 무정부성이라는 자본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생산의 무정부성이 유지될 수 있는 수요를 창출하는데 정책의 초점을 맞춘다. 경제성장이 지속되기 위해서 적정한 규모의 인플레가 용인되었고, 이에 따라 생산은 늘고 고용도 확대되고 임금도 인상되면서 확대된 생산에 걸맞은 수요가 창출되는 것이 케인즈주의자들의 바램이었다. 실제 20년간에 걸쳐 고도성장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전략은 영원히 먹혀 들어갈 것 같았다.
그러나 케인즈주의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무한하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인구는 늘어나고, 그에 따라 수요는 점진적으로 확대되어야 하고, 이에 따라 일자리도 늘어나야 한다. 만약 인구가 기대만큼 늘어나지 않는다면 소비자는 소비를 계속 확대해야 한다.
전후에 수요 자체가 있을 수 없었던 유럽이나 일본은 엄청난 규모의 소비시장이었던 미국에 물건을 파는 것으로 생산 확대의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지나서 내수시장이 확보되자, 무역의존도가 조금씩 낮아지면서 내수 또한 성장기반이 되기 시작했다. 시장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무한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자원은 결코 무한하지 않았다. 언제나 낮은 비용으로 자원이 확보될 것이라는 기대는 석유파동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고분고분한 노동력의 공급이 원활할 것이라는 기대는 68혁명으로 젊은이들이 방종(?)으로 빠지며 날라 갔다.
그러면 유한한 자원이라는 한계, 이윤율의 한계에 부딪힌 경제적 동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유한한 자원, 즉 광물자원이건 화석연료건 인구이건 산업시설이건 간에 최대한 쥐어짜는 것이 한 방법이다. 자본이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인 이윤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쥐어짠 과실은 자본에게 돌아가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나온 배경은 이러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수동적인 추종자
신자유주의 혹은 워싱턴 컨센서스라 불리는 막가파식 자본주의의 시작은 석유파동 이후 끝장이 난 케인즈주의 하에서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장기침체를 견디지 못한 자본가들이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내면서 이루어졌다.
전후의 타협이 거추장스러웠고, 그 타협을 유지하는 비용이 계속해서 늘어나자 자본가들은 제도화된 전후 질서를 집요하게 공격하면서, 과잉화된 자본의 과실만을 따먹으려고 달려들었다.
이러한 자본의 공격 앞에 속절없이 나가떨어진 것이 사민주의자들이다. 작은 정부니 규제완화니 세계화니 하는 담론 앞에서 사민주의자들은 고작 인간의 얼굴을 하니 어쩌니 하는 도덕적 명분만을 내세웠다.
결국 노동당 블레어가 부시의 푸들이 된 것처럼, 각국의 사민주의자들은 박력 있게 신자유주의에 대해 저지선을 치지 못하고 그저 끌려갔을 뿐이다. 그리고 ‘제 3의 길’이니 뭐니 하면서 새로운 타협모델을 짜는데 골몰했을 뿐이다.
또다시 권위의 실종에 동요하는 사민주의자들
케인즈주의든, 신자유주의든 사민주의자들은 적극적인 역할을 해 온 적이 없다. 결국 상황에 수동적으로 대응했던 것이 그들의 유일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1세기 만에 처음 도래했다는 大경제위기에 대해서도 사민주의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금융자본이 기둥뿌리까지 흔들리자 다급한 맘에 국가라는 거인을 불러 세우는 일조차 자본가들에게 뒤쳐졌다.
케인즈주의는 사민주의자들에게 타협모델이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그들은 세계화된 금융자본과 타협을 끌어내는데 골몰할 뿐이었다. 사실 사민주의자들의 경제모델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타협의 모델이 가지는 유사성으로 사민주의자들의 경제정책을 규정할 뿐이다. 이제 이 상황에서 사민주의자들이 어떤 타협모델을 들고 나올 지가 궁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