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천점바구와 외서댁
동백꽃이 봉오리를 열었다. 매운 바람 속에서, 아무도 눈여거보는 이가 없었다. 동백꽃이 지고 있었다. 피눈물을 뚝뚝 떨구는 듯이 꽃송이째로. 더욱이 눈여겨보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동백꽃은 떨어지며 매운 바람을 데려갔다. 달이 지며 어둠을 데려가듯이. 그래도 그걸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진달래만 그걸 알아 동백꽃이 남긴 빈 꽃자리를 게으름 피우지 않고 채웠다. 산자락에서부터 진달래가 피고 있었다. 얼음풀린 개울물 소리를 벗삼아 아무도 눈여겨보는 이가 없었다. 아이들마저 산을 무서워해 산에서 눈을 돌렸다. 진달래는 배고픈 아이들을 불러대듯이 지고 피고, 지고 피고, 산들을 느리게 타고 오르며, 보리싹은 눈독이 들도록 쳐다보아도, 아무도 보지 않았다. 찬바람 속 동백꽃의 그 처연한 핏빛 꽃송이를, 메마른 산자락 진달래의 그 애잔한 분홍빛 꽃무리를.
그러나, 그 꽃이 벙글고 이우는 것을 눈물 어린 눈으로 새김질해가면 보는 여인이 있었다.
소화였다. 소화는 꽃봉오리가 벙글어 꽃잎 피어남이 그리도 눈물겹고 사무치는 그리움인 것을 비로소 가슴 저리게 아파하고 있었다. 동백의 그 선연한 핏빛 꽃잎이 예전에는 마음 빼앗는 고움이기는 했어도, 그리도 가슴 저리는 아픔은 아니었었다. 어찌 동백꽃의 피어남만이랴. 매운 바람을 더는 견디기 어려워 꽃송이 이울며 꽃송이째로 뚝뚝 떨어져내림이 그리도 애타고 피 마르는 기다림의 끝인 것을 비로소 가슴 찢어지게 아파하고 있었다. 동백의 그 꽃송이째 떨어지는 모습이 예전에는 마음 허망하게 치는 기이함이기는 했어도, 그리도 가슴찢어지는 아픔은 아니었었다.
동백은 어인 일로 그 소식과 함께 피어났다가 그 소식과 함께 지는 것이었을까. 전선이 다시 서울을 지나 아래로 아래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가져오면서 동백꽃은 벙글었다. 동백꽃을 바라보며 그 선연한 핏빛만큼 붉은 그리움으로 그분을 기다렸다. 여섯 달째 접어드는 그분의 아이와 함께. 동백꽃이 매운 바람속에서 붉게 타듯, 그리워 어서 오기 바라는 기다림도 나날이 붉어가는 핏빛의 꽃이었다. 그런데, 전선이 다시 서울로 밀려올라간다는 소식을 남긴채 동백꽃은 이울어갔다. 빛깔도 변함이 없이, 꽃잎도 흩어짐이 없이, 꽃송이째 뚝뚝 떨어져내리는 동백꽃은 그대로 자신이 떨구는 피눈물이었다. 아니, 핏빛 붉은 그리움으로 찼던 가슴이 갈가리 찢겨 동백꽃이 뚝뚝 떨어질때마다 그 붉은 살덩이 한 점씩을 토해냈다. 일곱달째 접어드는 그분의 아이와 함께. 마침내 전선이 서울보다 더 위로 밀리고 있다는 소식을 진달래꽃이 가져왔다. 산자락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진달래꽃들은 예전에는 그저 망연한 슬픔으로 젖어드는 고운 꽃일 뿐이었었다. 그런데 이제 그 꽃무리는 피멍든 가슴으로 울어야 하는 소리 없는 통곡이었고, 그리워 그리워 그분을 불러야 하는 소리 없는 외침이었다.
"상심 마셔야제라. 당장 뱃속 아그가 더 중헌게요." 들몰댁의 신중한 말이었다. 들몰댁의 말을 따라 군당위원장 오판돌의 말도 생각났다.
"아아, 그렇구만이라, 그렇구만이라. 아그 잘 보존허는 것이 동무가 헐 질 중헌 투쟁이구만이라. 명심허시씨요." 조계산지구에서 선을 받은 오판돌 군당위원장이 안전한 거처를 정해주고 나서, 뱃 속의 애 아버지가 그분인 것을 알고 크게 놀라면서 다짐한 말이었다. 그 말의 무게는 곧 그분 정하섭이 지니는 무게였던 것이다.
그래서 소화는 흩어지고 흔들린 마음을 간추리고 다잡기고 했다. 그렇지만 그 일은 하루이틀로 쉽게 되지 않았다. 어느 때 없이 깊은 그리움과 기다림이 남긴 아픔은 컸다. 나날이 커나고 있는 아이와 함께 치른 그림움이고 기다림이었던 탓인지도 몰랐다. 그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불러오른 배를 하루빨리 그분에게 보여주고 싶음은 한없는 기쁨이면서, 한없는 부끄러움이었다. 그 기쁨과 부끄러움이 밤마다의 꿈으로 끝나버리게 되자, 그리움과 기다림은 그대로 아픔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되짚어 생각해보면 그 견디기 어려운 아픔을 가슴에 안고 신음해야 하는 건 터무니없이 커진 욕심 탓이었다. 유산을 한 다음 다시 아이를 가질수 있기를 그리 바라면서도 그분과 현생의 집을 짓기를 욕심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의 욕심이 채워지자 어느 틈엔가 또 하나의 욕심이 생겨나게 되었다. 아픔의 씨는 거기에 뿌려진 것이었다. 어리석고 부질없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욕심을 거두면 자연히 가실 아픔이었다. 인연의 씨를 받는 것으로 현생살이를 흡족한 고마움으로 끝내려 했던 당초의 마음을 찾아내는 것만이 흔들리지 않고 바로 서는 길이었다.
아래서는 지고 위로는 피어나는 진달래꽃밭을 소화는 욕심 다스린 마음으로 바라보며, 한달 동안 정신없이 감아들였던 인연의 실을 그분이 멀어져가는 대로 천천히 풀어내고 있었다. 그분이 무사하기만을 빌면서. 소화는 마음을 바로잡은 다음부터 옷짓기에 더 열중했다. 바늘을 한땀이라도 더 뜨는 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혁명사업이었다. 자신은 엄연히 후방부 대원이었다.
"투쟁은 산에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지하투쟁도 그만큼 중요합니다. 가서 은신하면서 후방부 사업을 계속하세요. 그리고 아이도 순산하구요. 그게 이중으로 혁명사업에 열중하는 일입니다. 그 다음에 다시 만나요. 난 소화동무의 깊은 마음을 믿습니다." 산을 내려오기 직전에 이지숙이 한 말이었다. 임신인 것을 알고 그렇게 마음써준 이지숙이 더없이 고마우면서도, 그녀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서운함은 따로 남았었다. 그러나 이지숙의 마음이 곧 그분의 마음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소화는 솜을 둔 저고리감에 겹실로 되박음질을 해나갔다. 바늘을 위에서 꽂는 것이나 아래서 꽂는 것이나 그 한 땀, 한 땀이 마치 올을 세는 것처럼 고르게 이어져나가고 있었다.
왼쪽 엄지손톱 끝부분에는 아래서 꽂는 바늘자리를 잡느라고 바늘이 스친 자국이 여러개의 가느다란 홈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바늘이 한 번씩 스칠 때마다 손톱이 닳아져 생긴 그 여러개의 홈들은 바느질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소화는 들몰댁과 마주앉아 바느질을 하다가 자신의 늘어난 솜씨에 문득 놀라고는 했다. 자신은 어느덧 들몰댁과 맞먹는 빠르기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 못지않게 굿이나 잘해내려고 마음모았지 바느질이라고는 거의 해본 적이 없는 그녀는 처음에 얼마나 손톱 밑을 찔렸는지 몰랐다. 그러나 아픔과 고역스러움을 참아내며 굿에 모으던 정신을 바느질에 모았다. 자신이 한 땀, 한 땀 뜨는 바느질이 바로 그분이 목숨 내걸고 하는 일과 같고, 앞으로 나서서 적과 싸우는 전사들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떳떳한 혁명사업이라는 굳은 믿음과 함께.
"후방부 사업도 화선투쟁과 똑같은 혁명투쟁입니다. 후방부 사업없이 어떻게 전사들이 화선투쟁을 용맹스럽게 전개할 수 있겠습니까. 여성동지 여러분, 여러분들의 정성어린 바느질이, 여러분들의 정성어린 밥짓기가 전사들의 용맹성을 복돋아올린다는 것을 잠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늘로 한 땀씩 뜰때마다 우리의 적인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인 민족반역세력 이승만 일당을 무찌르고, 따라서 우리가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우리의 후방사업에 온 정성을 다 바칩니다." 이지숙이 학습을 통해서 말한 한 대목이었다.
후방부에 속한 여자들은 이지숙의 그런 힘이 넘치는 말을 들어가면 자신들이 하는 바느질이나 밥짓기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소화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이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을 갖게 된 데는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입산해서 비로소 확실하게 보게 된, 여러종류의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뭉쳐져 있는 모습이었다. 입산자들 중에는 머슴은 말할 것도 없고, 대장장이, 백정, 선소리꾼에다가 무당의 자식들까지 수두룩했다. 그들이 왜 그리도 많이 입산했으며, 왜 목숨 아까워하지 않고 싸움에 나서는지를 가슴 뜨겁게 알게 되었다. 그들은 아무런 죄도 진 것이 없이 평소에 천대와 구박을 받고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기본출이라는 새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 그 사람들은 당당한 사람대접을 받아가며 행세하고 있었다. 자신도 남자라면 온 천지를 그런 새세상으로 만들기위해 총을 들고 앞으로 나서고 싶은 가슴떨림을 느꼈던 것이다. 아니, 임신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 여자 외서댁처럼 이지숙에게 요구하고 나섰을지도 몰랐다.
"나가 아새끼덜 띠놓고 역부러 입산헌 것이 요런 일이나 헐란 것이 아니었구만이라. 나야 냄편 웬수갚음 톡톡허니 허고 죽자고 입산혔당께요. 긍께로 요런 심에 안 찬 일 말고, 나도 앞으로 나서서 총들고 싸우게 혀주씨요." 외서댁이라는 여자가 이지숙 앞에 나서서 당당하게 한 말이었다.
"동무의 마음 알겠어요. 그러나, 혁명투쟁이 사사롭게 남편의 원수를 갚는 일이 아닙니다." 이지숙의 엄한 말이었다. "위원장님 말씸 아능마요. 근디 나가 허잔 일은 냄편 웬수만 갖자는 것이 아니구만이라. 웬수도 갚음서 냄편이 다 못허고 간 몫아치럴 나가 맡아서 헐란 것이구마요. 웬수만 갚자먼 염상구놈 죽이고 나도 죽어뿌는 그 쉰 일얼 두고 멀라고 입산혔을 것이요. 안그런게라?" 외서댁의 말은 다부졌다. "예, 강동식 동무는 훌륭한 전사였습니다. 동무는 남편이 아닌 혁명 전사 강동식 동무가 이루고자 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이지숙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야아, 말로는 조단조단허게 못혀도 맘으로야 다 알아묵고 있구만이라. 앞으로 학습얼 착실허니 받다가 보먼 더 잘 알아질 것이고라." "그건 맞는 말이예요. 그런데 동무, 적과 맞서싸우는 화선투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압니까? 언제 죽게 될지 모를 위험은 말할 것도 없고, 날마다 남자들과 똑같이 산을 타야 하고, 한뎃잠을 자야 하고, 밥도 주먹밥을 먹거나 어떤 때는 굶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 고생들을 다 견딜 수 있겠어요?" "냄편이 견디고 헌 일인디 워찌 나라고 못 견딜랍디여. 냄편허고 항꾼에 농새지었디끼, 고런 맴으로 헌다면야 무신 고상이라도 못 이길 것 있겄는가요." 외서댁은 전혀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좋아요. 동무의 결심 잘 알겠어요. 동무의 요구를 일단 접수하고, 이삼 일 안으로 결말짓도록 하겠어요." 물러선 건 이지숙이었다. "고맙구만이라. 위원장님." 외서댁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외서댁의 행동은 후방부 여성대원 전부를 놀라게 만들었다. 소화도 외서댁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외서댁이 그리 당찬 것은, 죽으려고 저수지에 뛰어든 것을 보면 알 수 있고, 결국 자기 때문에 죽은 남편에게 죄닦음을 하려는 것이고, 어쨌거나간에 남편을 끔찍이도 좋아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일이라고, 외서댁이 없는 틈을 타서 여자들이 입을 모은 말이었다.
외서댁은 이틀 뒤에 후방부를 떠나 군사학교로 갔다. 군사학교에서 훈련을 마치고 부대에 배치된다고 했다. "동무덜 잘 있으씨요. 나넌 인자 총을 쏘는 여자빨갱이가 된단께라." 외서댁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떠나며 남긴 말이었다. 여자들은 그 겁없는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었다.
소화의 눈앞에는 후방부를 떠나던 외서댁의 모습이 어리고 있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었다. 자신은 화선투쟁으로 나선 외서댁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았다.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보더라도 그런 기구한 곡절을 겪은 외서댁이 그렇게 마음 공그린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외서댁이 한겨울을 병나지 않고 무사하게 넘겼는지, 총질을 해내는 싸움을 겪으면서 무슨 탈이나 없는지, 새삼스럽게 마음이 조계산 골짜기 골짜기로 쏠려갔다.
소화는 허리를 펴며 오른손을 주먹쥐어 왼쪽어깨를 콩콩 두들겼다. 베짜기가 힘들다는 말을 들었지만 바느질도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삯바느질이 십 년에 삭신 골병들어 내려앉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소화는 알 것 같았다. 일이 손에 익어가면서 차츰 나아지기는 했지만, 한동안씩 움직이지 않고 일정한 자세로 앉아 해야 하는 바느질은 전신 마디마디를 굳어지게 만들고, 결리게 만들고, 저리게 만들었다. 정신을 바늘 끝에 모아 한참씩 일에 빠지다 보면 눈은 시고 씀벅거려 앞이 침침했고, 엉치는 남의 살처럼 먹먹하고, 다리는 저릿저릿 저렸다. 팔다리를 거칠 거 없이 휘두르고 뛰는 굿에 비하면 바느질은 영락없이 벌서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느질을 따라 마음먹은 대로 옷이 되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몸고역을 풀고, 이지숙의 힘찬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새롭게 다잡고는 했다.
소화는 지게문을 빠꼼하게 열어보았다. 어느새 햇발이 걷혀 있었다. 들몰댁이 왜 아직 안돌아오는지 마음이 쓰였다. 들몰댁은 집주인과 함께 장을 보러 집을 비웠다. 물론 자신들이 먹자고 보는 장이 아니었다. 선을 따라 산으로 보내기 위해 보는 장이었다. 옷말고도 산에서 필요한 물건은 많았다. 약, 소금, 운동화, 고무신... 그러나 돈이 있다고 그런 것들을 양껏 살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장터에나 표 안나게 숨어 있는 감시의 눈을 피해 조금씩 사서 모아야 했다. 소금 한말, 고무신 서너 켤레만 사도 덜컥 잡혀간다고 했다. 들몰댁이 그나마 나설 수 있는 것도 벌교가 아닌 탓이었다. 들몰댁은 두 아이와 자신의 해산 수발을 겸해 하산했으면서도 아직까지 아이들을 데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오판돌 위원장의 말로는 감시가 심해 좀 더 두고 보아야 한다고 했다. 들몰댁은 두 아들을 옆에 두고 싶어 애가 타련만 참을성 많은 성품이라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들몰댁은 외서댁의 그 당찬 행동을 이해는 하면서도 한편으로 무서워했다. 그리 나섰다가 죽기라도 하면 자식은 어쩔 거냐는 게 들몰댁의 걱정이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소화는 일감을 놓고 지게문을 밀쳤다. "혼자 깝깝허셨제라?" 머리에 인 짐을 내리며 들몰댁이 반색했다. "들몰댁이 웂응께 일도 잘 안 되고 어먼 생각만 나고 그러요." 소화는 기지개를 켜며 쪽마루로 나섰다. 치마를 입었는데도 배가 불룩하게 표가 났다. "무신 딴 일 웂었제라?" 주인남자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야아." 소화는 고개까지 끄덕여보였다. 그때였다. "꼼짝 말앗!" 두 남자가 삽짝을 뛰어들며 외쳤다. 그들 손에는 총이 들려있었다. 주인 내와와 소화, 들몰댁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요런 빨갱이 연눔덜, 손 번쩍 들어!" 한 사내가 총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네 사람은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다른 사내는 집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고, 고것이 무신 말이다요. 누가 빨갱이라고 그러시요. 시방?" 주인남자가 간신히 말했다. "요런 씨부랄눔에 늙은이, 워디다 대고 개좆 겉은 소리여, 소리가!" 사내가 번개같이 총을 돌려잡아 개머리판으로 주인남자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어쿠!" 주인남자가 벌렁 넘어갈 듯하다가 푹 고꾸라졌다. "워메 영감!" 주인여자가 남편을 붙들며 주저앉았다.
"힝, 무당년꺼정 항꾼에 아지트럴 틀고 앉았었구만 그랴." 사내가 콧등으로 웃으며 침을내뱉었다. 소화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랫배에서 찬바람이 일어났다. 저놈이 날 어떻게 알까. 여기 벌교가 아니라 복내면인데. 저것이 벌교놈 아닐까? "어이 하대치 마누래! 나가 누군지 몰르시겄어? 입산혔다가 여그 복내면 구성텡이로 숨어들었다고 암시랑 안헐 성불렀드랑가? 빨갱이 새끼덜 즈그덜만 대갱이 잘 돌리고, 우리 경찰이나 청년방위대넌 돌대그빡으로 알었든갑제? 그리 알었드람사 돌대그빡은 바로 느그다! 여그꺼정 말혔응께 나가 워디 사람인지 똑똑허니 알었겄제?" 소화도 들몰댁도 고개를 떨구었다. "야! 사내끼 갖다가 각단지게 손 뒤로 묶어라." 총을겨눈 사내가 다른 사내에게 명령했다.
"보시씨요, 요것이 집에서만 입고 있는 치맨디, 요 우에다가 몸빼만 잠 걸치게 혀주시씨요." 소화가 사내를 쳐다보며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안 뒤어!" 사내가 내쏘았다. "금메 봇씨요, 혼자몸이 아니고 요리 애 밴 몸잉께 불쌍허니 생각혀서 허락해 주시씨요." 소화는 두 팔을 얼른 내려 손바닥으로 치마를 몸에 붙게 쓸어내려 잡으며 배를 내밀어 보였다. 아이를 보호해야 된다는 생각뿐 수치스러움도 부끄러움도 느낄 새가 없었다. "애럴 배?" 사내는 소화의 배로 눈길을 옮겼고, 옆의 사내가, "금메, 애 밴 몸으로 저 치매만 입고서야 워디 지서꺼지 가지기나 허겄소? 밤이 되는디 가다가 얼어 뒤지제." 하고 말했다. 처음의 사내가 옆의 사내를 옆눈길로 쏘아보다가, "싸게 몸빼 입고 나와!" 했고, 소화는 허둥지둥 방으로 들어갔다.
소화는 몸빼만 입지 않았다. 순식간에 솜저고리도 꿰입고, 솜버선도 꿰신었다. 밖으로 나오니 들몰댁의 손은 벌써 뒤로 묶여 있었고, 주인내외의 손이 묶이고 있었다. "그 여자넌 냅둬. 그냥도 걷기 심들 것잉께." 총을 겨누었던 사내의 말이었다. 소화로서는 들몰댁과 주인내외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자아, 싸게 나서!" 사내의 명령을 따라 네 사람은 삽짝을 나섰다. 회색빛 어둠살이 여리고 묽은 안개발처럼 퍼지고 있었다. 소화는 그 슬픔처럼 내려 앉고 있는 어둠살을 밟기가 두려웠다. 어둠살은 갈수록 진해지다가 끝내는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되고 말 것이다. 이 길이 그 어둠처럼 캄캄한 죽음의 길일 것만 같았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날 방도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소화의 눈앞에는 새벽안개를 밟고 떠나간 정하섭의 모습만 어른거릴 뿐 도움을 청할 사람은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거창양민학살이 마침내 부산의 피난정국에 회오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국민방위군사건으로 이미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는 정국에 거창양민학살사건은 또 하나의 태풍으로 몰아닥쳤다. 국민방위군사건은, 경찰력을 동원한 강압과 공공기관에 만연된 부패로 이승만정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품어왔던 국민들이 일제히 원성을 터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칠팔만, 재기불능자 이십여만, 중환자 사십여만명을 낸 이승만 정권은 난파 위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또 거창양민학살사건이 몰아닥친 것이다. 그러나 학살 자행이 정치, 사회문제로 표면화되기까지는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거창학살은 반공을 앞세운 이승만정권의 무자비성과 자기방어적 살해의식뿐인 군부의 잔혹성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사건이 완전히 표면화되기 전에 양효석의 대대에서는 장교회의가 열렸다. 그즈음에 사건현장을 헌병대에서 다녀가고, 그 지역 국회의원이 다녀가고, 국방장관까지 다녀가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민간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은 걷잡을 수없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우리 대대는 구일날 신원면에 진입해서, 그곳에 경찰과 방위대원으로 편성된 일개중대병력을 남겼고 산청 쪽으로 이동했다. 도중에 산에서 야영을 하고 산청에 도착해서, 지난 밤에 신원면이 공비들의 습격을 받아 주둔시켰던 일개중대가 전멸했다는 정보를 듣고 다시 신원면으로 진격했다. 신원면에 도착해서 조사해보니 과연 백오십여 명이 전멸해 있었다. 십일날 밤에 다시 공비들이 쳐들어와 밤새도록 교전을 해 적을 퇴치했는데, 그 결과 우리측에서는 사십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백여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래서 통비분자들을 색출, 체포해서 신원국민학교에 모았다가 처단하게 되었다. 자아, 이상과 같이 작전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다들 명심하기 바라오." 양효석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그 의미를 곧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 어떤 조사에 대비한 그런 작전일지와 작전상황의 변조에 대하여 환영했으면 했지 따지고들 하등의 이유가없었다. 그 일이 공비소탕이 아니라 양민학살이라고 골치아픈 사회문제가 되는 경우 아무리 작전명령대로 수행했다 하더라도 현장지위를 한 장교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모면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그런데 새로 짜여진 작전일지와 작전상황에 의하면 그 행위의 정당성이 완전히 입증되고, 그 어떤 장교든 책임을 충분히 모면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양효석은 께끄름하게 남아 있던 심적 부담을 시원하게 털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더 기막히게 기분좋은 일이 양효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위 진급에다가, 사단 작전지역내의 전출지 자유선정이었다. 한꺼번에 겹쳐진 경사에 양효석은 정신이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그는 지체없이 고향 쪽으로 전출을 희망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경사는 연달아 일어났다. 그는 그저 막연하게 고향 가까이를 원했을 뿐인데, 중공군을 다시 서울 북쪽으로 밀어올리게 되면서 병력확충과 함께 토벌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사단에서는 그동안 보류시켜왔던 일부 군단위까지 병력을 배치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보성군도 끼어 있어서 그는 바로 고향으로 전출하는 행운을 잡게 되었다.
대위 계급장을 번쩍거리며 중대병력을 이끌고 고향에 진군하는 토벌군사령관 양효석!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벌교의 큰길을 행진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이 두근거리다못해 벌떡거려 자리를 차고 일어나기를 몇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는 그때마다 읍장이고 경찰서장이고 유지들이고 가릴 것 없이 발 아래 깔아뭉개던 심재모라는 계엄사령관의 막강했던 권한을 떠올렸고, 돈벌기에만 급급하다가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를 떠올렸고, 아버지의 원수갚기를 그리도 소원하며 자신의 육사지원을 적극적으로 환영했던 어머니를 떠올렸고, 반도호텔에서 블랙커피라는 것을 시켜놓고 자신을 참담하게 모독했던 송경희를 떠올렸다. "이봐 연락병, 광약을 미제로 한 서너 통 구해. 그리고 계급장이고 빠클이고 매일 번쩍번쩍하게 닦어." 주둔지로 출발하기 전날 양효석이 내린 명령이었다. 그리고, 그동안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꼭 서울말을 쓰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다소 어색스럽다 하더라도 토벌군사령관으로서의 위신과 체통을 중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효석이 벌교에 모습을 나타낸 분위기는 심재모와는 너무도 달랐고, 백남식과도 상당히달랐다. 심재모는 아무런 격식도 없이 부대를 이끌고 읍내로 들어왔고, 백남식은 노천플랫폼에서 굳이 사열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양효석의 경우는, 그가 모습을 나타내기 하루 전에 벌써 역의 앞마당과 남국민학교 교문 위에 현수막이 내걸렸다. 거기에 큼직큼직하게 쓰인 글씨들은 "경 양효석 토벌군사령관 환영 축"이었다. 앞뒤의 경자와 축자가 상하좌우로 네 개의 꽃잎모양으로 싸이고, 빨간색으로 싸인 것은 물론이었다.
그 현수막이 내걸린 하루 동안 읍내에서 제일 기분좋은 사람과 제일 기분잡치는 사람이 하나씩 있었다. 하늘로 금방 날아오를 것처럼 기분이 들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양효석의 어머니 된재댁이었고, 사지에 맥이 풀릴 대로 다 풀려 딱 죽고 싶은 심정일 뿐인 사람은 염상구였다. 된재댁은 자기 아들이 장교인 줄만 알았지 그 높은 사령관이 되어 이렇게도 빨리 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고, 염상구로서는 자신의 완력 앞에 생쥐새끼 뿐이었던 것이 육군사관학교를 가네 어쩌네 하더니만 고작 이 년 사이에 이렇게도 입장이 뒤집힐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특히 양효석의 어머니는 포목점에서 비스듬하게 내보이는 남국민학교 교문 위에 현수막을 손님들이 드나들 때마다 손가락질하며 입에 침이 말랐다.
"봇씨요, 쩌그 저 핵교 대문 우에 씨인 토벌대사령관 양효석 대위님이 바로 우리 아덜이요!" 된재댁은 어깨가 뒤로 젖혀지고, 배가 앞으로 나올 지경으로 빳빳하게 서서 자기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두어 번씩 토닥여 보였다. "그려라? 참말로 장헌 아덜 둬부렀소이." 어느 여자는 눈을 휘둥글하게 뜨며 된재댁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고, "워메, 집안에 큰인물 났소이." 어떤 여자는 부러운 눈치를 감추지 않았다.
된재댁은 장사를 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런 여자들을 상대로 아들자랑에 정신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손님들의 독촉을 받고서야 포목을 풀고 자를 집어들었다. 그런데 그 자질이 어느때 없이 후했다. 손에 익을 대로 익어버린 눈속임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덤도 대여섯 치씩이나 더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된재댁으로서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을 딴 기분으로 아들이 장해 보이고 고맙고, 남편과 자기 설움까지 다 풀리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된재댁이라는 남다른 택호에 그녀의 설움은 서려 있었다. 봇짐장수들이 얼마나 오르기 힘든 고개였으면 된재라고 이름지었을 것인가. 봇짐지고 오르기가 되고 된 그 잿마루의 주막집 딸이 그녀였고, 어떤 봇짐장수의 아들이 그녀 남편이었다. 주색잡기를 모른 채 오로지 봇짐장수를 면하고 한자리에 말뚝박고 장사하며 사는 것이 소원인 남편을 따라 그녀는 천하고 험하게 초년을 살아냈다. 뒤끝없는 고생이 없더라고 결국 장삿발이 좋은 벌교에 터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재산이 늘어나도 봇짐장수아들과 주막집딸이라는 주눅드는 마음은 씻어지지 않았다. 돈이 힘인 것이 분명했지만 돈으로 안 되는 대목도 있는 것이 세상살이였다. 그럴수록 돈을 더 많이 갖고자 했다. 남편은 끝내 봇짐장수아들이라는 설움을 풀지 못한 채 빨갱이 손에 억울하게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아들 효석이가 읍장보다도, 경찰서장보다도 높은 군인대장이되어 돌아올 판이었다.
어떤 부대가 일정지역에 주둔하게 될 대 그 첫발을 내딛는 곳이 행정중심지여야 하는 것은 공적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작전효과를 높이기 위해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하며 지역사령부를 어디다 설치하느냐는 그 다음의 문제였다. 그런데, 양효석의 부대는 순천 쪽에서 오는것도 아니고 광주 쪽에서 오면서도 군청소재지인 보성을 무시해버리고 벌교로 직접 왔다.
양효석은 광주에서 전화를 걸어 현수막을 내걸게 했던 것처럼 보성경찰서장 남인태도 벌교로 오도록 지시했다. 남인태는 울화통이 터졌지만 어찌 하는 수 없이 군수와 함께 벌교로 넘어와 플랫폼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기차가 뙈액-뙤, 하얀 증기를 뿜어 기적을 울리며 기운차게 달려오고 있었다. 흐트러진 자세로 서 있던 군수 이하 열댓 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똑바로 서며 줄을 맞추었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이 다른 사령관들을 맞을 때와는 다르게 떫고 쓰고 시고 제각각이었다. 그중에서도 구겨질 대로 구겨진 염상구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청년단이 청년방위대로 바뀐 이상 그는 옴쭉달싹할 수 없는 양효석의 부하였던 것이다.
기차가 육중한 쇳소리들을 내며 멈추었다. 기차가 멈추자마자 객실문 여기저기에서 군인들이 쏟아져나왔다. 그 군인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은 분명한데 와글거리거나 떠드는 소리 한마디 없이 조용한 가운데 그들은 하나같이 가볍게 뛰면서 기차에서 내리는 대로 네 사람씩줄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군인들은 줄을 맞추고서도 계속 가볍게 뛰고 있었다. 기관장들과 유지들은 군인들의 그 기민하고 질서정연한 동작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긴장하며 서로서로 다시 줄을 맞추었다. 그런데 군인들은 동작만 그렇게 돋보인 게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군인들과는 확연하게 달라 보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색다른 차림을 한 것도아니었다. 똑같은 철모에, 똑같은 군복에, 똑같은 총을 들었을 뿐이었다. 기관장들과 유지들은 한참씩 군인들은 살핀 끝에 그 연유를 알아내게 되었다. 그 군인들은 하나같이 말끔하고 깨끗했던 것이다. 계급장이 빛을 발했고, 허리띠의 고리쇠가 반짝거렸으며, 바지에 줄이 곧게 서 있었고, 군화가 반들반들 윤을 내고 있었다.
"부대에, 차려우왓!" 그때까지 가볍게 뛰고 있던 군인들이 일제히 뚝 멈쳐 섰다. 그 절도 있는 동작에 따라 플랫폼에 갑자기 정적이 밀려들었다. "부대에, 세우워 총!" 개머리판이 일제히 땅을 울리는 소리가 화음을 이루었다. 그때까지도 양효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개머리판 울리는 소리를 신호로 삼기라도 한듯 양효석이 잠시 후에 기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대위 계급장이 유난히 반짝거리는 그의 차림새에는 그 어디에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은 것처럼 말쑥했다. 권총을 찬 그의 오른손에는 새빨간 수실이 끝에 달린 지휘봉이 들려 있었다. 똑바로 앞을 보고 걷는 그의 뒤를 사병 하나가 따르고 있었다.
"사령관님을 향하야, 받들어이 총!" 군인들은 총을 일제히 들어올려 몸의 중앙에다가 일직선으로 맞추었다. 양효석은 손가락끝들이 파르르 떨릴 정도의 힘찬 거수경례로 부하들의 받들어 총에 답례했다. "부대에, 세우워 총!" 다시 개머리판들이 땅을 울렸다. "전원 이상 무!" 구령을 붙이던 선임하사의 보고였다. 보고를 받은 양효석이 돌아섰다. 빠르게 휘돌던 그의 눈길이 한곳에 멎었다. 노천플랫폼에 다 하나 서 있는 작은 건물 앞이었다. 역원들만 사용하는 그 작은 건물 앞에 한 여자가 진분홍 치마저고리를 입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양효석은 기관장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여자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그 여자는 된재댁이었다.
반가움과 자랑스러움으로 가슴 울렁거리는 된재댁은 기쁜 울음이 넘치는 얼굴로 아들에게로 달려가야 할 지 어쩔지를 몰라 멈칫거리고 있었다. "엄니, 대한민국 육군 대위, 보성군 토벌군사령관인 아들 절 받으십시오. 군인의 절은 이것입니다." 어머니와 서너 발짝 간격을 두고 우뚝 멈춰 선 양효석이 큰 소리로 외치듯하며 거수경례를 붙였다. 그의 크게 퍼진 목소리를 플랫폼에서 못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효석아, 내 아덜 장허다!" 마침내 된재댁이 아들에게로 달겨들며 울음과 함께 토해낸 소리였다. 거머잡은 아들의 손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아들을 올려다보고 있는 된재댁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계속 솟는 눈물로 얼보이고 있는 아들의 모습은 자신의 아들이라고 믿기 어렵게 옛모습은 간곳 없니 당당한 대장, 실한 어른으로 변해 있었다. 어금니를 꾹다문 양효석은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엷게 웃음짓고 있었다.
"엄니, 사령관으로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 여기선 이만해요." 양효석이 나직하게 말했다. 된재댁은 명령복종에 익숙한 병사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의 손을 놓았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하늘처럼 높게 보이는 아들한테서 된재댁은 남편과의 평생에서 느낄 수 없었던 어려움과 튼실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사령관의 위신과 체면을 터럭끝만큼이라도 상하게 해서는 안되고, 자신도 사령관의 어머니답게 체통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다.
양효석은 어머니한테서 돌아섰다. 그리고 지휘봉을 오른손에 바꿔들며 기관장들과 유지들이 서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양효석이 그들에게 가까워지자 도열한 속에서 경찰 한사람이 직각보행으로 걸어 나왔다. 그 경찰은 양효석 앞에 이르러 거수경례를 붙였다. "사령관님, 어서 오십시오. 사령관님과 장병 일동을 환영합니다. 저는 벌교경찰서장 권병제입니다. 현지 서장으로서 군내 주요 기관장들과 유지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권병제는 격식을 갖춰 말했고, 양효석은 지휘봉을 왼손에 바꿔들며 경례를 받았다.
"좋소." 양효석의 딱딱한 얼굴과 절도 있는 동작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있었다. 도열한 사람들의 소개가 시작되었다. "보성군수십니다." 권 서장이 첫 번째 사람의 직함을 댔다. "어서 오십시오. 김달수입니다." 첫 번째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토벌군사령관 양효석입니다." 양효석이 손을 내밀었다. "보성경찰서장이십니다." "우리 군에 주둔하신 걸 환영합니다. 남인태라고 합니다." 벌교로 넘어올때의 아니꼬왔던 생각이 싹 가셔버린 남인태는 절도 있는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권병제를 소개자로 지목할 때까지만 해도 아니꼬움은 창창하게 살아 있었던 것이다.
"토벌군사령관 양효석입니다. 앞으로 잘해봅시다." 경례를 받은 양효석이 손을 내밀었다. 그런식으로 인사가 계속되었다. "좌익척결위원회 위원장이십니다." "이, 나 최익달이시. 자네가 영판 출세혀부렀..." "차렷!" 양효석이 느닷없이 소리질렀다. 그 찌렁하게 울리는 외침에 도열한 사람들이 움찔했고, 부동자세로 서 있던 군인들도 놀라 더 꼿꼿한 자세가 되었다. "이 영감탱이! 대한민국 육군대위를 뭘로 보는 거얏! 토벌군사령관이 뭘로 보이냔 말야! 늙어빠진 눈구멍에는 계급도 안 보이나! 공무수행, 특히 전시하의 작전수행에서 군직책이 최우선이란 걸 아나, 모르나!" 양효석은 오른팔을 쭉 뻗어 지휘봉으로 최익달을 겨냥한 채 악을 쓰고 있었는데, 지휘봉 끝이 금방 최익달의 눈을 찔러버릴 것만 같았다.
"아느만요, 아는구만요." 하얗게 질려버린 최익달이 더듬거렸다. 겁 질린 최익달의 늙은 얼굴에 비해 열받친 양효석의 얼굴은 너무 앳되 보였다. "알면서 어디다 대고 자네야, 자네가!" 최익달의 심보가 바로 송경희년의 심보와 같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양효석의 화는 걷잡을수 없이 치솟았던 것이다. "다시는, 다시는 고런 일 웂을 것이구만이라." "한번만 더 그따위 짓 하면 아주 박살을 내고 말 것이다. 알겠나!" "예에, 예." 최익달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굽신거렸다. 그는 초장에 양효석의 기를 꺽으려고 들었다가 오히려 되감겨 망신을 톡톡히 당하고 있었다.
"당신이 무슨 위원장이라고?" 걸음을 옮기려던 양효석이 물었다. "예, 벌교보성지구 좌익척결위원횝니다." "그건 도대체 어떻게 된 단체요?" 최익달이 머뭇거렸고, 옆에 선 권 서장이 대신 대답햇다. "예,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한, 그러니까 민간인 임의단쳅니다." "거기서 하는 일이 뭐요? 좌익을 척결하려고 총을 들고 나섰소?" "아니, 그런게 아니라..." 권서장은 뭐라고 설명할 말이 궁색해지고 말았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이름만 내걸어놓은 그따위 단체, 오늘부로 당장 해체하시오. 전시하에 혼란만 일으키니까. 이건 토벌군사령관의 명령이오!" 양효석은 최익달을 보기좋게 몰아치고 있었다. 그 단체를 해산시켜버려 그가 이런 자리에 아예 끼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권 서장의 또렷한 대답이었다. 그도 아이고 잘됐다 싶은 심정이었다. 몇 사람을 거쳐 맨끝의 염상구 앞에 이르렀다.
"청년방위대장입니다." "어여 오시씨요, 사령관님. 반갑구만이라." 염상구는 어깨가 들썩하도록 뒤꿈치를 들었다 놓으며, 팔을 넓게 휘둘러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반갑소, 염대장님. 앞으로 잘 좀 도와주시오." 웃고 있는 양효석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부드럽고 다정했다. "알것구만이라. 잘 받들어 모시겄구만이라." 염상구는 양효석에게 손을 잡힌 채 얼떨결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염상구는 양효석이가 최익달을 다루는 것을 보고 그만 기가 완전히 꺾이고 말았던 것이다. 완력판을 휘어잡는 것도 따지고 보면 주먹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주먹에 앞서 절반 이상이 배짱놀음이었다. 와따메, 저자식이 저거, 좆대감지 지대로 달아뿌렸네. 잉, 저것이 통학열차 지붕 타고 댕기든 눔이기넌 헌디. 고런 독기에다가 권세할라 하늘 밑구녕얼 찔러뿌러? 아이고메, 일찍허니 모강댕이서 심 빼고 죽은디끼 대허자. 염상구는 눈치빠르게 제자리를 찾았던 것이다. 양효석으로서도 가장 신경쓰이는 존재가 염상구였다. 그가 앞뒤없이 나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그런데 그는 규율에 어긋나는 동작으로 야단스럽게 거수경례를 하며 사령관님이라고 깍듯이 예의를 차렸던 것이다. 그 순간 그의 긴장되었던 신경은 확 풀리게 되었다.
양효석이 앞장선 부대는 착착, 착착 구둣발 소리를 내며 역 앞마당으로 나섰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와아 소리치며 박수를 쳐댔다. 양효석은 앞만 똑바로 보고 걷는 것 같았지만 순간순간 현수막을 훔쳐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역 앞마당에만 모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양조장을 돌아 국민학교에 이르는 길 양쪽에 학생들과 어른들이 줄지어 서서 지나가는 부대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들이 동원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길가의 사람들은 그냥 흩어지지 못하고 부대를 뒤따라 학교로 들어갔다. 그들은 청년방위대원들이 시키는 대로 운동장가를 따라 빼꼭하게 둘러섰다. 양효석이 조회대로 올라가고, 기관장들이며 유지들이 줄을 서자 부대는 곧 열병분열을 시작했다. 무장한 군인들이 가로, 세로 똑바로 줄을 맞춰 힘차게 걸어가고, 길고 짧은 구령이 여기저기서 울려퍼지고, 구령에 맞춰 부대마다 다른 동작을 틀리는 구석없이 이루어내고, 줄줄이 꺾어져 돌면서도 줄이 비틀어지는 일이 없었고, 대열이 길어져도 처음의 간격이 그대로 유지되는 군인들의 질서정연한 움직임은 아이들에게는 더 말할 것이 없었고 어른들의 눈에도 볼 만한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다.
열병분열이 끝나고 사열이 시작되었다. 양효석과 나란히 서서 걷는 두 사람은 군수와 남인태였다. 남인태 서장은 그런 대로 격을 맞추고 있었지만, 군수의 걸음걸이는 옹색스럽고 제멋대로라서 영 볼품이 없었다. 와따 자석, 참말로 쌈빡허니 폼 재뿌네이. 이 년 만에 사람팔자가 요렇크름 훼까닥헐 줄 누가 알었을 것이여. 전쟁이 좋기넌 좋네. 전쟁덕 아니었음사 저것이 저리 팔자 고쳤을 것이여? 대갱이에 안직 피도 안 몰른 자석이. 염상구는 부러움과 질시로 심사가 살살 꼬이고 있었다.
사열을 마친 양효석은 다시 조회대로 올라왔다. "장병 제군, 우리는 마침내 새 주둔지에 도착했다. 우리 부대는 오늘부터 보성군지구 토벌군이다. 장병 제군들은 새로운 각오로 임무에 임하기 바란다. 각오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군민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 부대의 정신을 다 같이 힘차게 합창하기로 한다. 다 같이 부대정신 합창!" "언제나 씩씩하게, 언제나 용감하게!" 군인들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지며 운동장을 흔들었다.
"좋다. 거기다가 한 가지를 첨가한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 언제나 겸손하게다. 이건 적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대민관계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다. 민간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민폐근절은 말할 것도 없고, 언제나 친절하고 겸손한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다. 긴 말 하지않겠다. 그리고, 보성군민 여러분, 우리부대는 이미 사단내에서 최강의 부대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앞으로 공비를 토벌해 여러분 앞에 그 실력을 실제로 보여드림과 동시에 여러분의 민생안전이 하루빨리 이루어지도록 할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의 많은 협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상." "사령관님으 향하야, 받들어 총!." 군인들이 일제히 총을 들어올렸고, 운동장가에 둘러선 사람들은 누가 치기 시작했는지 모를 박수를 따라서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 중에는 치고 있는 박수와는 다르게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들고 있는 사람들도 꽤나 있었다. 입산자의 집안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양효석의 여러 행위들은 단순히 자기과시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어, 아직 시간이 멀었긴 합니다만, 부대를 환영하는 뜻에서 장병들의 저녁을 읍민후원회에서 장만하면 어떨까 합니다." 조회대를 내려온 양효석에게 다가서며 읍장이 말했다. "말씀은 고맙지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게 다 민폐 아닙니까. 우리 집에다 돼지 열댓마리 잡으라고 진작 일러놨습니다. 내가 알아서 하지요." 읍장은 그만 머쓱해지고 말았다.
다른 기관장들이나 유지들도 놀라고 무색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도 사령부는 벌교에 설치하겠소. 우선 경찰서로 갑시다." 양효석의 말이었다. 교문을 향해 걷고 있는 그는 자신이 벌인 일들의 반응에 대해 꽤나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기관장과 유지들은 저것이 나이에 비해 예사 물건이 아니라는 식의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천점바구는 자신의 소대병력을 이끌며 어둠을 헤치고 있었다. 비무장 여섯을 제외시킨 대원은 그 자신까지 합해 스물이었다. 스물 중에는 여자가 하나 끼어 있었다. 외서댁이었다. "오늘 출동은 돌격전인디요." 출발을 앞두고 천점바구는 그녀에게만 따로 말했다. "또 나이 작은 오빠노릇 허고 잡아 그요?" 외서댁은 눈을 흘기며 하늘에 대고 헛바람 새는 웃음을 웃었다. 언제나 변함없는 태도였다. "동무, 오늘은 행군질도 먼디다가, 상대도 검은 개가 아니라 노란 개란께라. 기관총에 수류탄으로 무장허고 말이여라." "나가 기관총 무섭고 수류탄 무서왔슴사 작년 십이월에 폴세 하산허뿌렸을 것이요. 나야 대포도 안 무선 사람잉께. 벌교 바람이나 쐬게 내빌라두씨요." "참말로 소고집이요이." "사상성이 투철헌께라." 외서댁이 오금을 박으며 짖궂은 웃음을 지었다.
천점바구가 어렵고 위험한 출동에서 외서댁을 빼내려고 하는 것은 여자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군당에서 하대치 동지와 맞먹는 무게를 지녔던 강동식 동지의 아내라는 것에 더 마음을 쓰고 있었다. 하대치 동지나 강동식 동지는 염상진 위원장 다음으로 그가 존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강동식 동지의 그 허망한 죽음은 그를 얼마나 슬프고 안타깝게 했는지 몰랐다. 강동식 동지는 목숨을 바칠 정도로 외서댁을 귀하게 여겼고, 외서댁은 또 남편 대신으로 입산투쟁을 하고 있었다. 천점바구는 그런 외서댁을 언제나 보호해야 될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외서댁 동무럴 워째 천 동무 소대에 배치허는지 알아묵겄소?" 하대치 동지의 말이 그 책임감을 더 무겁게 했다. 그러나 외서댁은 한번도 천점바구의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구구식장총을 들고 어떤 출동에나 몸 사리지 않고 나섰다. 천점바구는 매번 신경이 쓰이는 반면에 그런 외서댁의 용맹성이 소대원들의 용기를 고무시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천점바구는 아직까지도 외서댁에게 가벼운 카빈총을 구해주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천점바구는 눈에 익고 발에 익은 산길을 가면서도 신경은 줄곧 곤두세우고 있었다. 앞을 경계하면서, 걸음이 빨라지지 않도록 신경쓰고 있었다. 앞사람의 등에 종이 한 장씩을 붙여 행군대열을 유지하고 있는 어둠 속에서 자칫 자신의 발빠르기로 걸었다가는 대열이 끊길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종이의 빛이라는 것은 십 보 이상 간격이 벌어지면 어둠에 묻히기 마련이었다. 종이가 없을 때는 고사목을 쪼개 그 속살을 손바닥 크기로 얇게 떠서 등에 매달았다. 그 효과도 종이와 다름이 없었다.
천점바구는 특히 야간행군을 할 때는 외서댁을 대열의 가운데다 세웠다. 전방의 기습에 대비해 안전하기도 했고, 행군 중에 절대로 조는 일이 없는 외서댁에게 바로 앞의 네사람사이에서 대열이 끊기는 것을 막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섯 사람을 한 묶음으로 해서 조장을 중간 중간에 세웠으니까, 소대 이십 명이 일령종대를 이룬 행군에서 외서댁 같은 임무를 맡은 대원은 셋이 더 있었다. 야간행군에서 위험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적의 기습을 받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누군가가 졸다가 대열이 끊기는 일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어이없고 어처구니없이 당하는 위험이었다. 대열의 중간에서 어느 한 사람이 졸며 걷다가 주저앉게 되면 그 다음 사람들은 그저 휴식인 줄 알고 따라서 주저앉게 마련이었다. 그렇게 되면 대열은 영락없이 반 토막이 나고 말았다. 산이 겹겹인 어둠 속에서 그런 식으로 몇십 분이 지나버리면 앞서간 대열에서도, 뒤떨어진 대열에서도 한동안 서로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뒤떨어진 대열은 혼란에 빠지게 되고, 다급한 마음들로 이리저리 헤메다가 적에게 노출이 되는 경우 몰살을 면하기가 어려웠다.
경험없이 시작된 사십팔, 구년의 초기투쟁에서 그런 실수로 빚어진 희생이 적지 않았었다. 졸음의 위험에 대해서는 군사학교에서는 물론이고 매일 두세 시간씩 실시되는 학습을 통해서도 끝없이 강조되고, 반복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졸면서 걷는 대원들은 꽤나 많았다. 그것은 사상성의 빈약도, 정신무장의 해이 때문도 아니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언제나 체력의 한계를 넘고 있는 빨치산투쟁 자체에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날마다 산을 타고, 야간투쟁을 주로 해야 하는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졸음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대원들 사이에서는 수면투쟁이니 졸음투쟁이니 하는 우스갯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천점바구는 어둠 속을 유심히 살피며 걸음을 늦추었다. 군당위원장 오판돌과 접선하기로된 산골짜기가 머지 않았다. 그는 걸음을 완전히 멈추며 몸을 뒤로 돌렸다. "휴식, 뒤로 전달." 그의 목소리는 속삭임이었다. 그 속삭임은 빠른 줄잇기를 하며 뒤로뒤로 전해졌다. 뒤에서 무슨 상황이 생겼을 때도 같은 방법으로 앞으로 전달이 이우어졌다. 천점바구는 작전에 돌입하기 전에 잠깐이나마 대원들을 휴식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담배 한 대 짬의 휴식이 얼마나 새 기운을 돋우는지 그는 오랜 투쟁을 통해서 잘알고 있었다. 야간행군 중에는 절대로 담배를 피울 수가 없으니까 대원들은 휴식하는 동안 거의 잠을 잤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자는 잠은 맛으로는 꿀맛이 댈것이 아니었고, 몸 가뿐하게 기운을 돋우는 데는 그 어떤 명약도 당할 도리가 없었다. 대원들의 태반은 꼭 거짓말처럼 앉자마자 잠이 들었고, 어떤 사람은 코까지 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천점바구는 소대장직을 맡고부터 그 맛있는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었다. 아무리 눈을 붙이려 하면서도 간부들이 지치지 않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건 책임감이 만들어 내는 힘이었다. 입산투쟁이 시작되면서 그에게는 여러개의 별명이 붙여졌다. 총각대장, 올빼미, 불가사리가 그것이었다. 구빨치 시절에 군당에서 붙여준 새끼대장까지 합하면 넷이나 되었다. 조계산지구에서 가장 나이어린 소대장이라서 총각대장이었고, 밤눈이 유난히 밝아 올빼미였고, 전과를 올리면서도 사상자를 거의 내지 않아 아마 적의 총탄을 들이마셔버리는 모양이라고 해서 불가사리였다. 염상진 대장처럼 되는 것이 꿈이라서 붙여졌던 새끼대장은 이제 불리지 않았다. 그 별명을 불러주었던 나이많은 동지들은 구빨치투쟁을 통해서 거의가 죽어간 탓이었다. 그 어떤 별명이든 싫은 것이 없었지만, 새끼대장이 없어져버린 것을 그는 못내 아쉬워했다. 그건 죽어간 동지들에 대한 그리움이었던 것이다.
"천 동무야 투쟁경력으로 치나, 밤눈 볽아 조계산서부텀 군당 지광산꺼지 훤허게 뀌는 것으로 보나, 발 빨르고 용맹시런 것으로 보나 대대장 아니라 연대장깜으로도 넘치시. 근디,동무가 저질른 그 과오 안 있드라고? 고것 땀세 천상 소대장부텀 시작혀야 되겄구만. 당 결정을 접수헐 수 있을랑가?" 기동대장 하대치가 따로 불러 한 말이었다.
"하먼이라, 하먼이라. 지가 저질른 과오 지가 아는디라." 천점바구로서는 소대장이나마 맡겨주는 당의 결정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를 일이었다. 당이 특전을 베풀어 석방시킨 사람들을 넷이나 쏘아 죽인 것은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는 큰과오였다. 그런데 당은 목숨을 구해주었고, 마침내 소대장직까지 허락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반당적 과오의 청산을 뜻하는 것인 동시에 당원이 될 수 있는 길이 다시 열린 것을 의미했다. 천점바구는 이를 맞물며 스스로 각오를 다짐했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 열렬한 투쟁으로 당의 은혜에 보답하리라고,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 투쟁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구빨치투쟁을 통해서 몸에 익힌 전술과 지형지세, 남달리 밝은 밤눈, 펄펄한 젊은 기운, 새롭게 세운 각오, 소대장으로서의 책임감, 그런 것들이 한덩어리로 뭉쳐졌다. 그 결과 그는 전과를 높이면서도 사상자는 제일 적게 낸, 지구내의 최강 소대를 탄생시켰다. 그의 소대 별명은 철갑소대였다. 자기네 소대가 그 명예로운 별명을 얻는 데 단단히 한몫을 한 대원이 바로 외서댁이라는 것을 천점바구는 잘 알고 있었다.
"소대장 동무, 나럴 여자로 시퍼보덜 마씨요이. 나넌 인자 손꾸락에 봉숭아물이나 딜임서 좋아라고 시시덕이든 실웂는 가시네도 아니고, 치자물 딜인 모시 치매저구리 부러바허든 속창아리 웂는 지집도 아닝께라. 나넌 우리 냄편이 워째 좌익얼 혔는지 알게 됨스로 딴 사람으로 변해뿌렀소. 나도 당당헌 전사가 되고 잡은께 자꼬 여자로 볼라고 허덜 마씨요이." 외서댁은 정색을 하고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워째 그 어린 나이에 빨갱이질로 나섰드라냐 혔등마 백정자석으로는 그 상호가 지맘때로 장군상호로 생게묵어부렀당께로" 이런 농담을 해서 대원들을 웃기기도 했고, "백정자석에다가, 밤눈 볽겄다, 생간 많이 묵어 기운 씨겄다, 천생에 빨치산팔자로 태인 사람이여." 이런 말로 추켜세우기도 했다.
사실 빨치산 활동에서 밤눈이 밝은 것은 남보다 큰 무기를 하나 더 지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밤눈이 유독 밝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밤만 되면 완전히 장님이 되어버리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발바닥이 편편해 빨리 오래 걷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빨치산 생활에는 선천적으로 부적합한 사람들이었다. 천점바구는 자신의 밤눈 밝은 것을 더없이 큰 재산으로 여기며 야간투쟁에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출발, 뒤로 전달." 천점바구는 옆의 대원을 흔들며 다시 속삭였다. 그 속삭임은 다시 입에서 입을 건너 뒤로옮겨갔다. 야산 하나를 돌자 접선지점이 나타났다. 천점바구는 부대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혼자 접선지점을 향해 몸을 바짝 낮추고 이동해갔다. 적에게 정보가 누설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것이었다. 산밭 위로 무덤이 나타났다. 양쪽에 산등성이를 낀 골짜기의 어둠 속에서는 무슨소리 한 가닥 들리지 않았다. 그는 무덤가를 더듬어 작은 돌 두 개를 주워들었다. 하나를 바위를 겨냥해 던졌다. 그리고 숨을 한 번 들이켰다 내쉬며 두번째로 던졌다. 곧 저쪽에서 날아온 돌이 무덤가에 떨어졌다. 하나, 둘, 셋! 합해서 다섯, 암호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꼬막, 꼬막!" 저쪽에서 들리는 낮고 긴장된 소리였다. "탁주, 탁주!" 천점바구는 비로소 몸을 일으키며 이쪽의 암호를 댔다. 위험을 완전 제거하기 위한 이중암호였다. 저쪽에서 검은 그림자 둘이 빠르게 이동해왔다. "잉, 천 동무 왔구만. 애썼소." 군당위원장 오판돌이었다. "야아, 인자부텀 써야제라. 근디 워쩔라고 위원장님이 여그꺼지 직접 오시고그러요?" 천점바구의 걱정스런 말이었다.
"나가 시방 뒷전치고 앉았을 기분이겄소? 그라고 급허고 중헌 때넌 앞차고 나스는 것이야 염상진 동지가 갤친 것잉께 아무 걱정 마씨요." "알것구만이라. 근디 적정을 워떤게라?" "병력은 똑겉이 일개분대고, 석거리재 몬댕이, 광주쪽으로 오른쪽 깔그막에 전호럴 구축허고 기관총얼 내걸었소. 긍께 우리 군당에서 왼쪽 깔끄막으로 올라챔스로 공결헐 것잉께, 천동무는 오른쪽에서 내리까시오. 글먼 양쪽서 협공당헌 그눔덜이 못 견디고 쨀 디넌 읍내 쪽뿐이다 그것이요. 그눔덜이 꾸불꾸불헌 잿길얼 내리뛸 판잉께. 우리 군당얼 반으로 갈라 매복시켰다가 싹 떼레잡아뿌는 것이요." "야아, 작전은 존디라, 근디 군당이 너무 위태롭덜 않겄는게라? 왼쪽 깔끄막얼 타고 올른다먼 적허고 정면으로 맞다띠리는 것인디, 적이 기관총 쏴질르고, 수류탄 퍼붓고 허먼 고것이 올매나 위태롭겄소." 천점바구는 그쪽의 지형을 환하게 떠올리며 말했다.
"긍께로 나가 철갑소대럴 불른 것 아니겄소? 우리 군당은 깔끄막얼 올라채서 바로 신작로로 나스는 것이 아니라 깔끄막 끝머리서 일단 정지혀갖고 몸 숨킴서 총질얼 해댄다 그것이요. 글먼 적들이야 우리쪽에 대고 넋얼 뺄 것이고, 그틈에 천 동무가 뒤에서 들이치는 것이요. 그리되먼 즈그덜이 몰살얼 허든지, 뽕빠지게 째든지, 양단간에 하나 아니겄소?" "고런 이중작전이면 되얐구만요. 근디, 적은 거그 말고 워디다 또 진얼 쳤제라?" "이, 횡계다릿목이시." "거그먼 멀도 않고, 가찹지도 않고, 한바탕 벌일 만허겄구만이라." "되얐소. 우리 군당이야 배치 다 끝냈응께, 천 동무 소대만 자리잡으먼 시작이오. 갑시다!" 천점바구는 소대를 이끌고 오판돌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거점이 노출되어 소화와 들몰댁 등 네사람이 잡혀간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오판돌은 그만 눈이 뒤집힐 지경이 되고 말았다. 거점의 노출로 입은 피해도 피해였지만 소화와 들몰댁이 잡혀간 것이 그를 못 견디게 만들었다. 두 여자를 적의 손에 넘겨준 것은 군당위원장으로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업태만의 과오였던 것이다. 당적 입장을 떠나서 사적으로 보더라도, 한 여자는 동지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고, 다른 한 여자는 동지의 아내로서, 그는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임신한 몸이 어찌될 것이며, 하 동무를 무슨 면목으로 대할 것인가. 그는 그 생각만 하면 당장 죽고 싶은 심정일 뿐이었다. 그가 더 미칠 것 같은 것은 어디가 잘못되어 거점이 노출되었느지가 밝혀지지 않는 점이었다. 군당의 선에도, 다른 거점들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렇다면 단 하나, 그 세포의 변질이었다. 그러나, 그들 내외는 그 자신이 가장 믿는 사람들이었다. 오판돌은 아무런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 채 그 불상사를 조계산지구에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소화와 들몰댁이 조계산지구 소속이기 때문이었다. 사고의 사실기록과 함께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는 내용이었다. 당의 소환을 각오한 그는 네 사람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서를 거쳐 보성경찰서로 넘어가 있었다. 그리고 거점노출의 원인도 알아내게 되었다. 그는 뒤늦게 땅을 쳤다. 벌교, 보성의 방위대가 각 면단위에 침투되고있는 줄을 몰랐던 것이다. 적들의 작전도 예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구에서는 의외의 지시가 내려왔다. 어쩔수 없는 일이니 투쟁사업에 전념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그의 죄책감은 더 커졌고, 적에 대한 증오는 더 끓어올랐다. 자기 손으로 네 사람을 구출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다. 그는 뒤늦게 밝혀낸 거점노출의 원인보고와 함께, 구출작전으로 보성경찰서를 깔 계획이니 지구의 기동대 지원을 바란다고 했다. 지구의 회답은 또 의외였다. 성공률 희박하고, 빨치산 투쟁방법으로 적합치 못함이었다. 오판돌은 한숨을 토하며 계획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하대치 동지가 이 사건을 아는지 모르는지, 만약 알고 있다면그 심정이 어떨지, 그는 생각할수록 기가 막힐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토벌군이 군에 주둔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리고 며칠 만에 석거리재에 토벌군의 진지가 구축되었다. 전에 볼 수 없었던 적극작전이었다. 용감하다고 할 수도 있었고, 무모하다고 할 수도 있는 전진배치였다. 어쨌거나 적이 거기에 고정배치된다는 것은 조계산지구와 유치지구가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길목을 차단당하는 것이었다. 그 진지를 제거하지 않으면 군당은 군당대로 반 고립상태에 빠지고 두 지구는 지군대로 해방구 일부를 위협당하게 되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진지는 파괴시켜야 했다. 그 진지의 파괴는 투쟁의 장애물 제거인 한편 주둔군의 기를 꺾는 이중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지체없이 지구에 보고했다. 그제서야 지구의 지시는 예상대로였다. 조속히 시행할 것.
"우리가 총얼 한바탕 쏴질러 앞에만 정신풀 적에 쌈빡하게 내레쳤뿌시오. 매복조가 따로있응께 너무 위태롭게 공격하지는 말고." 오판돌의 최종적인 작전지시였다. "야아, 명념허겄구만이라. 수류탄 조심시키씨요이." 천점바구도 끝다짐을 했다. "알겄소. 이따가 만냅시다." 오판돌은 금방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천점바구는 소대를 사개조로 나누었다. 그리고 적의 진지를 향해 반원형으로 배치시켰다.
사격의 집중효과를 내기 위해서였다. 진지를 얼마나 튼튼하게 구축했는지 모르지만, 분대병력이 포위상태의 협공을 받고 끝까지 진지에서 버티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협공당하는 것을 아는 순간 누구나 도망칠 생각을 먼저 한다는 것을 천점바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별루 어려울 것 없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긴장을 풀지는 않았다. 전투란 적의 움직임에 따라 순간순간 상황이 변하게 되어 있었다. 새벽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외서댁은 땅에 엎드린 채로 하늘끝자락에 박힌 별들을 보고있었다. 입산하기 전에는 몇번이나 새벽별을 보았을까. 입산하고 나서 몇 개월 동안에 수없이 새벽별을 보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벽별을 유심히 보아 버릇하면서 언제부턴가 그 별들이 가슴에 담겨오기 시작했다. 남편의 음성으로, 남편의 체온으로, 남편의 마음으로, 남편의 생각으로... 그리고 남편에 대한 죄의식이 차츰차츰 남편이 걸어간 길로 바뀌어갔다. 그래서 막연한 슬픔이던 새벽별들은 남편을 만나는 먼 그리움으로 변했다. 남편은 혁명의 별이 되어 저리 반짝이는 거라고 그녀는 믿게 되었다. 그녀는 그동안 눈과 마음이 열려 위대한 인민혁명의 세상을 보고, 믿을 만큼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외서댁은 눈길을 돌려 켜켜이 쌓인 어둠 저편을 바라보았다. 읍내는 보이지 않았다. 새벽별들이 떨어져 박힌 것처럼 어둠 속에 몇 개의 불빛이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기가 읍내 복판인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눈길을 끌어당겼다. 굽이굽이 도는 잿길을 허리에 감은 산이 흘러내리다가 들녘이 펼쳐지는 저 아래 짬이 천장마을이었다. 그러나 천장마을도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젖비린내를 물큰 맡았다. "엄니이- 가지 말어어." 울음에 섞인 긴 외침도 들려왔다. 딸아이의 냄새고 울부짖음이었다. 그녀은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묻었다. 이마에 총의 딱딱한 감촉이 부딪쳤다. "니가 미쳤냐, 설쳤냐. 새끼덜 둘이나 두고 워디로 간다는 것이다냐!" 어머니가 치마를 거머잡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따당. 땅땅땅땅... 외서댁은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총을 움켜잡았다. "공격 준빗!" 천점바구의 탄력으로 튕기는 소리였다. 따당탕탕탕탕... 기관총 소리가 숨가쁘게 터지고 있었다. 소총 소리가 거기에 휘말리고 있었다. 꽈광! 폭음과 함께 부챗살처럼 퍼지는 불살들이 어둠을 찢었다. 수류탄이었다. "공격, 공격!" 방아쇠를 당기며 천점바구가 외쳤다. 외서댁도 방아쇠를 당기며 땅을 박찼다. 기관총소리와 소총 소리와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뒤엉클어져 어둠을 흔들어댔다. 산들이 메아리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엎드렷!" 천점바구가 외쳤다. 비탈을 타내리던 소대원들이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했다. 꽈광! 저 앞에서 수류탄이 터져올랐다. 수류탄은 두 개, 세 개, 연거푸 터졌다. 그러나 피해를 입을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수류탄이 터지는 사이에 기관총 소리가 멎어 있었다. 천점바구는 적들이 진지를 탈출하고있다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연거푸 터진 수류탄은 위협투척이었던 것이다. "저기다! 저기 도망간다. 돌진 사격! 돌진 사겨억!" 천점바구는 다시 방아쇠를 당기며 비탈을 내닫고 있었다. 진지를 벗어난 그림자들이 비탈을 굴러내리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소대의 집중 사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그쪽에서 비명 소리가 두어 번 울렸다. 천점바구는 적의 진지에 이르러 있었고, 신작로를 내뛰던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천동무, 천 동무! 우리 생각대로 아조 딱 들어맞어뿌렸소. 뽕빠지게 삼십육계헌 눔덜이야 쪼깐있으면 우리 매복조가 싹 치워뿔 것잉께." 신작로를 가로지른 오판돌이 비탈을 타고오르며 숨차게 말하고 있었다. 그 뒤를 부하들이 우르르 따르고 있었다.
"야아, 부대에 무신 탈 웂으신게라?" 천점바구는 이마에 내밴 땀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물었다. 한겨울에도 작전을 한바탕 치르고 나면 이마에는 땀이 끈적하게 내배고는 했다. "잉, 아무 탈 웂소." 미처 확인해볼 겨를도 없었으면서 오판돌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땅땅땅땅... 총소리가 울려왔다. "매복조요!" 오판돌의 기쁨에 찬 소리였다. 진지와 주변의 수색이 시작되었다. "위원장님, 쩌그 저것 좀 봇씨요!" 누군가가 소리쳤고, "이, 불빛이 욜로싹 다 비치는디." "본대가 치고 올랑갑제?" 하는 말도 뒤따랐다.
오판돌은 읍내 쪽을 쳐다보았다. 네댓 개의 불빛이 엇갈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횡계다리께라고 짐작했다. "암시랑 않은께 싸게싸게 뜰 채비덜 허씨요." 오판돌이 일렀다. 매복조 쪽에서 울리던 총소리가 그쳐 있었다. 진지에서 노획한 무기는 기관총과 총알 세 상자, M1한자루와 총알 두 상자, 수류탄 두 개였다. 신작로에는 도주하던 두 명이 죽어 있었다. 거기서 M1 두자루를 노획했다.
"시 눔밖에 못 잡었구만이라." 매복조가 그 증거처럼 카빈 한 자루와 M1두자루를 내놓았다. "어허 참, 분대먼 아홉일 것인디, 이리되면 반타작 아니라고?" 오판돌은 짭짭 입맛을 다시다가 혀를 차다가 했다. "요만허먼 섭헐 것 웂응께 싸게 막음하고 뜹시다." 천점바구는 오판돌을 일깨웠다.
운반의 어려움도 있고 해서 기관총과 그 탄알은 일단 군당이 맡기로 했다. 소총은 상례에따라 지구에 네 자루, 군당에 두 자루로 나누었다. 천점바구는 외서댁만을 생각하며 눈 질끈감고 카빈부터 집어들었던 것이다. 군인을 상대하고 보니 구하게 된 카빈이었다. 수류탄 두개로는 적의 진지를 폭파하기로 했다.
그런데 인원점검을 하고 나서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았다. 군당에서도, 천점바구의 소대에서도 한 명씩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전원이 흩어져 수색을 시작했다. 군당의 한 대원은 비탈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 그런데 소대원은 아무데도 없었다. 천점바구는 분명 사상자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대원은 유동수였다.
"어여 뜹시다. 알 만헌께." 천점바구의 침통한 말이었다. 그는 유동수가 고의로 부대를 이탈한 것으로 결론짓고 있었다. 전선이 다시 멀어지면서 생겨난 현상이었다. 사령부에서 벌써 주시해온 문제거리가 자기소대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에 천점바구의 심정은 참담하기만 했다. 적의 진지에서 수류탄이 터져올랐고, 그들의 모습은 삽시간에 어둠 그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