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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수필
등사판 주보
추연구 / 수필가
이사를 자주 하던 와중에 설마 이런 것이 남아 있을까 싶은데 어느 구석에서 문득 튀어나와 추억을 되살려 주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1979년에 가리방으로 찍은 주보 네 장이었다.
그 시절 등사판을 일본말인 가리방(がりばん, がり版)이라고 불렀다. 사실상 내가 뜻길에서 처음 감당한 공무라면 바로 그 등사 일이었다. 그해 2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에서 나오다시피 해서 광주 사동에 있는 교구본부에 머물던 즈음이었다.
당시 황현수 교구장 시무 말엽이었다. 육촌 형의 인도로 성화학생 시절에 입교한 나는 누가 권하거나 부르지도 않았는데 자기 발로 그렇게 무작정 나와서 지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냥 그러고 싶은 이끌림이었다. 누가 봐도 한심한 실상을 두고 선배들은 진학을 걱정했다.
당연히 부모님과 형을 비롯한 가족의 심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오셔서 종종 나를 집으로 데려다 놓았고, 때론 가족 친지가 모여 온갖 시름을 안고 만류했다. 그런데도 나는 또 집을 나와 교회로 가기를 반복했다.
그때는 성화 23회 동기들과 후배들이 의지가 됐다. 주방에서는 밥을 챙겨줬으니, 얼마나 폐가 됐는가. 교회 허드렛일 돕기나 후배들 수학 공부도 지도했지만, 그래도 자타가 고정으로 여긴 공무는 가리방 일이었다. 거기에 수제로 행사 현수막 만들기가 큰 몫으로 더해졌다.
교구 사무실에서 원고가 나오면 얇은 기름종이 등사원지를 강철 줄판 위에 놓고 뾰족한 철필 펜으로 긁어 글씨나 그림을 새겼다. 원지 원본이 완성되면 등사기 망에 붙이고 갤판에 롤러를 굴려 잉크를 묻힌 다음 등사 망 위에서 밀면 아래 놓은 갱지에 글씨가 박혔다.
그런데 철필에 원지가 찢겨서 다시 긁기도 하고, 롤러를 잘못 굴려 등사가 제대로 안 되고 잉크만 여기저기 범벅이 됐다. 그렇게 해서 예배나 행사 시간이 임박해서야 완성품을 낼 수 있었다.
나중에는 수동 타자기가 들어와 원지에 타이핑해서 찍기도 했다.
옛 앨범에는 지하실에서 주보와 현수막 작업하는 사진 몇 컷이 용케 남아 있다.
8월 11일경, 그해 얼마 전 부임한 김중수 교구장이 나를 불렀다. 지금은 코스타리카 국가메시아 회장인데, 당시는 30대 연소한 교구장으로 발령돼 와서 새벽부터 밤까지 초인적으로 움직이던 세찬 모습이었다. 김 교구장님은 첫마디로 “너를 지켜보며 기도했는데, 내가 공직자로 키우려 한다”라고 했다. 당시 나에게 공직이란 말은 매우 낯설고 어마어마하게 다가왔다.
그때 나는 불쑥 “감사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가고 싶어서 기도 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실은 그전에 대전교회에서 열린 고3 총회에 어렵사리 갔다가 신학교 선배가 와서 소개한 말에 꽂혀서 정말 막연하게 그런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 교구장님은 “그럼 잘됐다!” 하면서, 교구 총무부장 행정사무를 분담해 맡으라고 했다. 나는 과분하게도 곧 교구 사무를 인수했고, 응당 가리방 밀기도 격상된 공무로 수행하게 됐다.
그 무렵 소지품은 형이 쓰던 외손잡이 대학생 가방 하나에 단벌옷, 머리는 몇 달 기른 덥수룩한 장발이었다. 보다 못한 김매자 사모님이 어느 날 단골 미장원을 예약하고 가보라고 해서 이발하고 왔더니, “대표 미남자로 세워야겠네!” 하며 위로해 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새벽기도로부터 성지기도, 조식 금식, 철야기도 등을 계속하며 일했다. 식구 릴레이 철야에 연일 동참하다가 고단해서 기도 중 코를 골기도 했지만, 매일 신나고 감사했다. 지방의 공직자들이 오면, “추 군이 어려서 수석 교역장이 앉는 자리에서 일하는 걸 보면 복이 많아!” 했다. 실제는 서무 일이지만, 그땐 좁은 사무실에 책상이 하나뿐이라서 그랬다.
김중수 교구장은 종종 나에게 대표 기도를 시켜 심정 성장을 체크하고, 공무에는 정확하고 따끔하게 지도했다. 사실상 개별 지도와 함께 공적 삶의 본을 통한 교육이 소중했다. 섬세하고 엄중하면서도 따뜻하고 자상한 리더십에서 참아버님의 모습이 보이곤 했다.
밤에는 거의 자지도 않고 항상 창가 의자에 앉아 기도하고 구상했다. 부임 초기에는 교구본부 대청소로부터 시작해 교구수련 강의를 도맡아 하면서 대외 강의도 자주 다녀왔다. 지방 교회를 한 곳씩 순회하며 현장을 살피고, 공직자와 대원들을 독려했다. 교구 공직자 보수교육도 직접 강의하며 역량 강화에 힘썼고, 젊은 헌신자들을 육성해 내는 데 성심을 기울였다.
밝은 영안으로 사람이나 일들을 빛처럼 꿰뚫어 봤다. 아이디어는 샘솟듯 했고, 특유의 추진력은 역동적이었다. 3층 성전을 별관 대강당으로 옮기고 전도용 뮤직 카페를 만들고, 노인대학을 설치해 지역사회와 소통했다. 승공연합 도지부, 초교파, 카프 등을 활성화하는 데 열정을 기울였으며, 사모님도 꽃꽂이 강좌나 서예 프로그램 등을 개발해 소통에 힘썼다. 그러면서 도전적으로 세상 앞에 나아가 섭리 기반을 넓혀 나가던 용장의 모습은 전설처럼 회상된다.
그런 가운데 11월 6일부터 3일간 김영휘 협회장을 모신 전국 교구장 회의가 전남교구본부에서 열렸다. 당시로서는 매우 큰 경사였다. 그 첫날 저녁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심각한 표정으로 오셔서 교구장을 만나자고 했다. 그 분주한 와중에 김 교구장님은 흔쾌히 접견해 줬다.
그때 아버지는 “자식의 일을 부모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제 뜻이 그렇다면 하는 수 없는데 다만 학교는 진학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 교구장님은 감동하며 흔쾌히 확답했다. 며칠 뒤 형도 방문해서 진학 준비를 잘하라고 격려해 줬다.
그에 힘입어 이듬해 3월에 통일신학교 제4회로 입학하는 감격의 순간을 맞았다. 시험을 보러 처음 서울에 갈 때나 입학할 때 동기들과 가족 친지들이 버스 정류장까지 나와 전송해 줬다. 부모님은 이후로 뜻길을 후원하고 지지하며, 36만 기성축복에 동참하셨다.
김중수 교구장의 목회는 1년간의 설교 제목이 미리 정해질 만큼 말씀의 요점이 명료하고 체계적이면서도 깊었다. 나는 그때 심령의 밭이 일궈진 덕분에 신학교 공부를 비롯해 평생 말씀 공부에 있어 원동력이 됐고, 어디서든 교회 공직의 기준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 무렵 교구본부 참모로 시무한 존경하는 선배가 여럿이다. 그중 몇 해 전 바로 그 사동의 남광주교회에서 오래 목회한 소병원 목사님은 당시 전도부장으로서 지금까지도 나에게 큰 사랑의 응원군이다. 공교롭게 2019년에 남광주교회에서 묵으며 목사님 내외의 새벽 정성에 동참해 40년 전 시절을 돌아보는 눈물의 기도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그리고 2년 전에는 ‘중수 TV’ 영상 자서전(제15화)에 그 시절 감동의 경험담을 간략히 적어 보내드릴 기회가 있었다. 돌아보면 베푸신 정성과 은혜에 보람을 못 드린 세월이었다.
그렇기에 나의 뜻길 향수는 가리방을 밀며 한없이 기쁘고 감사했던 그 질박한 때에 늘 아련히 닿아 있다. 오늘 새삼 그 옛 갱지 주보와 사진 컷을 한참 어루만진다.
~2편~
수필
수북 대방제 둑방
추연구 / 수필가
우리 집 형이 근래 건강관리에 힘쓰면서 무공해 로컬 푸드를 사다가 식단을 챙긴다. 그래서 우리가 가끔 광주에 가면 장에 따라가서 그 식재료를 많이 나눠 받곤 했다.
그중 담양 수북농협 마트에도 가서 근처에서 식사를 함께했다. 지형이 바뀌어 얼른 몰랐다가 다시 보니 오래전 낯익은 지역이었다. 지난해 연초에 형이 다시 주선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7남매와 조카들까지 그곳 단청이라는 식당에서 식사 모임을 가졌다. 나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조금 일찍 도착해서 기억나는 아련한 옛길을 더듬어 둘러보고 내려왔다.
그리 길지 않은 나의 협회 발령 교회 공직 생활의 첫 임지는 바로 그 수북교회였다. 1982년 초에 통일신학교를 졸업하고 광주로 내려왔을 때 중흥동의 새 교구본부 교회 건물 보수 공사에 석 달 정도 투입돼 일하던 중 4월에 발령받았다.
담양으로 가서 교역장께 인사하고 함께 수북에 도착해 중심 식구들을 만난 다음 날 삼일 밤 예배로부터 시작했다. 입대를 앞둔 몇 달이었지만, 매우 정겹고 알차고 보람찬 시간을 보냈다.
교회 식구들은 정성이 극진했고 청년 학생들도 헌신적이었다. 바쁜 철에 새벽기도회나 주일 낮 예배는 물론 밤 예배도 나오고 쌀과 김치, 계란, 감자, 과일, 떡 등을 들고 자주 들러줬다.
중‧고등학생이 많아 입회원서를 일괄 정리하고 창립총회를 열어 협회에 등록했다. 40일 야간 원리강의와 원리시험, 강의 실습 등으로 신앙적 기초를 다지게 했다. 궂은 날에도 어두운 밤길을 걸어 매일 빠짐없이 참석한 학생들도 있어 시상했다. 광주와 인근의 동문 지인들도 먼 길을 찾아와 정담을 나누며 묵어가고, 아버지 어머니도 다녀가셨다.
그때는 가정교회 집중 시대여서 수북면을 5개 구역으로 나눠 중심 식구들에게 임명장을 주고 분담해서 활동했다. 내가 맡은 1구역을 가가호호 서둘러 방문하고 나니 입대 날짜가 다가왔다. 그때 지역 어른이 “그렇게 열심히 하니 통일교회가 크게 발전하겠네요!” 하던 말이 기억난다. 그런데 어느 날 동행한 학생 식구가 “왜 전도하지 않고 인사만 하고 다니세요?”라고 묻더니, 내가 날짜가 되어 떠날 때 큰 소리로 울었다. 물론, 학생과 청년 새 식구가 전도되기도 했지만, 그만큼 서로 아쉬움을 남긴 기간이었다.
입대한 뒤 휴가 나와서 수북교회에 갔더니, 후임으로 부임한 김석진 교회장과 석별한 식구들이 환대해 줬다. 김 교회장은 선배인데도 언제나 나를 보면 옛 전임자로 존중하며 교회 공직을 권면하곤 했다. 지금은 우리 천승교회 대교회장으로 시무하고 계셔서 나는 식구 일원으로서 남다른 인연을 귀하게 되새긴다.
수북면 북쪽으로는 명산 병풍산이 있다. 남쪽으로 펼쳐진 수북평야에서 보면 동서로 뻗은 산세가 북쪽을 막아주는 병풍을 둘러놓은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수북교회는 대방리 3구 395번지에 있었는데, 지금은 교회가 없고 지형도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옛날에는 면 소재지 중심부에서 병풍산 쪽으로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코스모스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면 푸른 농경지 한 가운데 외딴 자리에 A형 교회와 사택이 있었다.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 같은 풍치였다.
풍수지리학 상으로 ‘대방’은 큰 배(大舫)를 대놓은 형국의 이름이라고 한다. A형 교회는 높은 삼각 지붕에 좌우로 여러 개 노가 달린 큰 배 형상이라서 ‘대방’ 곧, 그대로 푸른 물 위에 뜬 구원의 방주 모양이었다.
병풍산 가운데 등산로 입구에는 유역 면적이 500ha에 이르는 1945년에 설치된 대방제라는 꽤 큰 저수지가 있다. 수북사거리에서 직선거리로 2.7㎞, 교회에서 1.9㎞ 가량 된다. 그 위로 청소년야영장이 있는데, 그쪽 계곡물이 몹시 청정하고 시원했다. 나는 몇 번 그 계곡에 올라가 몸을 담그고 심신을 정화하며 정성 모아 강의 준비를 했다. 그때마다 “생명수 솟아나는 심정의 깊은 골짜기가 돼라!”라는 감동의 메시지를 일지에 적곤 했다.
그 청명한 시절 5월 중순 두 번의 토요일 학생예배에서 ‘통일교회사’ 중 참아버님 학생 시절을 강의했다. 두 번째 강좌는 대방제 둑방에서 드린 야외 예배에서였다. 모두 상쾌한 표정으로 은혜로워했다. 그 두 번의 강의는 마치 뱃길의 돛대처럼 굳세게 자리 잡았다.
앞서 1978년 10월 협회가 발행한 117쪽 『통일교회사』(상권)는 유광렬 당시 협회 문화부장이 집필했다. 범위는 참아버님 성탄에서 협회 창립 이전까지다. 나는 이듬해 광주 교구본부에서 서무 일을 보면서 중앙의 간행물 보급을 맡던 때 그 책을 구입해 단숨에 통독했다.
그해 3월 협회 기관지 월간 「통일세계」가 지령 100호를 맞았을 때 유광렬 문화부장은 전국 소장자 점검을 위해 광주에 들렀다. 그때 마침 주일 설교를 했는데, 『통일교회사』의 일부를 강의했다. 참아버님 삶에 대한 은혜는 물론 집필자를 직접 보는 감동이 몹시 컸다.
그런 터에 통일신학교에 입학하자 1년 동안 ‘통일교회사’가 정식 과목으로 개설돼 집필자 직강으로 전체를 수강할 수 있었다.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적어가며 경청했다. 물론, 당시 2년간의 학과목마다 주옥같은 섭리사적 사료를 제공하고 있었다.
2학기 때 유 문화부장이 『통일교회사』 책자를 들고 미국으로 가서 참아버님께 일일이 봉독해 올리면서 검토를 받아온 결과를 우리에게 소상히 알려줬다. 그리고 얼마 뒤 협회 역사편찬위원회 신설과 함께 편사실장으로 임명돼 이후 내내 그 일을 수행했다.
어쨌거나 나는 그런 배경 가운데 참아버님 생애와 삶에 대한 특별한 감동 감화의 여운을 안고 수북에 와서 그 엄중한 주제를 들고 처음 강의를 했다. 그 뒤로 군복무와 4년제 통일신학교를 거쳐 경기 이천교역 부교회장으로 일할 때 그 주제로 새 식구를 위한 6강좌 강의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서울 제1교구 총무부장 일을 하다가 1990년 참아버님 말씀연구와 함께 ‘참부모님의 생애노정’이란 제목으로 체계를 잡고 강의하는 개척의 길로 접어들었다.
당시 신문로 공관에 있던 교수교회 전도사로 일할 무렵 1992년에 아내가 고생 끝에 4년의 축복임지 활동을 수료하고 왔을 때였다. 나는 “1년만 밥을 먹여주면 할 일이 좀 있다.”고 부탁하고 함께 한강로 월세방으로 나와서 집중 작업에 들어가 갖은 수고를 끼쳤다. 그때 임지 교구장이 전화해서 “연구만 하며 살아도 괜찮나요?” 하면서 걱정하던 말이 생생하다.
어찌 괜찮을 리가 있었을까. 그 척박한 현실의 외골수 나날이 그 뒤로도 거듭되었다. 지난해 대방제 둑방에 가족 셋이 함께 서서 사진을 찍다 보니, 어쩐지 아득하고 가슴 먹먹했다.
본래 나는 원리강사 이름을 으뜸으로 여긴다. 그 둑방길에서부터 스스로 애써 참부모님 역사 강사 이름의 돛배를 탄 셈이었다. 두 마디 말씀이 나침반과 같았다.
“원리에 첨부돼야 할 것은 선생님의 역사가 들어가 있는 통일교회 역사다”
“원리는 교통순경이요, 원리의 목표는 선생님의 생애다”
원리는 궁극적으로 그 본체인 참부모님 삶과 역사로 가는 정도의 길잡이이자 이정표였다.
~3편~
아들의 손 편지
추연구
아들이 어느덧 청년이 되다 보니 더 늦기 전에 어려서부터 찍은 사진 등 자료파일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잃어버린 부분도 최대한 복원하면서 보니 디지털 시대로 전환하는 때라서 곳곳에서 많은 분량의 활동 자료가 모아졌다. 시대의 혜택에 감사하며, 다행으로 여긴다.
그중 아들과 나눈 편지글을 폴더에 모으다가 깜짝 놀랐다. 글은 2002년 4돌 아들 생일 때와 그해 아빠 생일 때로부터 시작됐다. 그런데 그 뒤로 내가 보낸 글은 한두 개뿐이고, 아들은 거의 매년 어버이날이나 아빠 엄마 생일이나 특별한 날에 편지를 썼다. 그것도 오랜 시간 정성 들여 카드를 꾸미고 애틋한 마음을 적은 글이었다. 모아보고서야 실상을 알았다.
매년 고운 고사리 손으로 아빠 엄마를 감동시켜 주고, 세월이 지날수록 더 큰 추억과 감동을 되새겨주는 아들의 손 편지! 용돈도 없던 시절에 작은 선물도 마련해 전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정작 아빠 된 나는 당일은커녕 훗날 아들이 추억할 마음의 글 한 편 제대로 남겨주지 못한 세월을 보냈다. 케이크를 사다가 자르고 밥을 먹는 정도면 축하가 됐다고 생각한 것일까. 여럿도 아니고 10년 만에 얻은 늦둥이 외아들인데 말이다.
1998년에 아들이 우리에게 오면서부터 선사해 준 위안과 감동은 너무나 특별했다. 여느 부모라도 그렇겠지만, 마치 우주가 빅뱅해서 세상이 새로이 열리는 듯한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때부터 커서도 나는 아들을 ‘건욱 군!’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정작 그런 소중한 아들에 대한 나의 처신은 상반적이었다. 두 살 때 머나먼 남미 브라질까지 장시간 비행하며 데려가서 그 폭염 속에서 40일 동안이나 고생시켰다. 그때 찍은 사진은 많지만, 정작 본인은 그리 기억하지 못하는 시기였다. 자르딘에 도착하자 몸에 열이 심해서 중간에 돌아오려던 차에 다행히 회복해 줘서 마칠 수 있었다.
돌아와서 아내가 21일 입적수련을 받고 임지가 부산으로 배정됐다. 그래서 부산으로 가서 집을 얻고 2000년 11월에 수영구 광안2동으로 이사해 3년 넘게 떨어져 살게 했다. 지금도 그 나이 아이를 보면, ‘저만한 때에 그랬다니’ 하며 한참 걸음을 멈춰 선다.
굳이 꼭 그래야 했을까. 섭리를 위한 명이라서 그랬지만, 응당 부모님이나 가족, 주변 누구도 수긍하고 동의하지 못한 독단적 결정이었다. 거기에 현실적 이유를 들자면, 서울 전세금을 돌려받고 부산에 방을 얻으면 그 차액으로 총생축헌금을 할 수 있어서였다. 본래 부산이 참아버님 섭리 재출발의 성도이고, 아내의 축복 첫 임지가 영도여서 뜻이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뜻이나 영문을 전혀 알 길 없는 어린 아들에게는 얼마나 날벼락 같은 무정한 상황이었겠는가. “안 가면 안 돼요?”라며 떼를 몇 번이라도 쓸 만한데, 아들은 마음으로만 안고 엄마를 따라가 지냈다. 지나고 나니 그것이 더 마음 아프다.
당시 역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하던 나는 청파동에서 하숙도 하고 한강로교회에서 지내기도 하면서 출퇴근했다. 한 달에 몇 번 주말에 열차를 타고 내려가 가족과 함께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들은 뛰며 환호했다. 주일에는 임지교회인 남천동 수영교회로 가서 김규수 교역장님 내외와 식구들을 뵙고 예배도 드리고, 행사가 있을 때는 동참하기도 했다. 섭리적 행사에 교회 식구들과 올라오면 만나고, 명절이면 각기 출발해서 광주 집에서 만났다가 돌아왔다.
초기 어느 날 내가 서울로 오려는데 아들이 “아빠가 보고 싶어요!”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잘 내색하지 않는 아이가 그랬으니, 나도 참지 못해 붙들고 눈시울을 적셨다. 그때 엄마는 옆에서 지켜보면서 “참 리얼한 장면이다”라고 농담하며 나를 떼어 보냈다. 아들을 데리고 떨어져 지내는 엄마는 어찌 안 그랬을까만, 그래도 나보다는 좀 초연했다.
아들은 민락동 장로교회 어린이선교원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부산 생활에 잘 적응하고 수영교회나 선교원 친구도 많이 사귀어 명랑하고 씩씩하게 자라줬다. 나중에 서울로 온 뒤로도 서로 오래 오갈 정도로 정든 이웃으로서 큰 힘이 되어 줬다. 서울에서도 여러 지인이 부산까지 내려가 함께해 주기도 했다. 그 고마운 마음들을 아로새긴다.
아내는 수영구‧남구 입적대원 총무도 맡고 교회학교 교사도 하면서 대연4동 구역을 맡아 열심히 활동했다. 마침 그곳에 있는 유엔기념공원 묘역에 함께 가서 조국광복을 위해 기도도 했다. 과분하게도 연합회장‧교구장‧교역장님이 공로패를 주셨고, 서울에 있었으면 불가능했을 천일국 주인상 본상을 받는 큰 은사도 있었다. 엄마와 아들이 김규수 교역장님으로부터 그 상을 전해 받을 때 어린 아들이 어떤 의미를 알았는지 너무나 좋아했다고 한다.
아들이 만 여섯 살 되던 2004년 4월에 부산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이사했다. 나는 아내와 아들에게 감사장을 증정했다. 그리고 쉴 새도 없이 아내의 청평 40일 수련을 위해 아들을 일본 외가로 보내 보육원에 몇 달 다니게 했다. 덕분에 일본말을 일찍 터득했지만, 그때 적응하느라 많이 애썼다.
본가 식구들도 그렇지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외가 식구들은 아들에게 매우 각별해서 거의 매년 다녀온다. 그 보육원 시절 아들과 주고받은 편지가 여러 장 남아 있다.
그때 아들은 “엄마는 내가 없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청평 수련 재밌게 받으면서 조상님, 하나님, 예수님, 참부모님, 지구와 우주를 감동시키세요”라고 적고 있었다. 또,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아빠도 나 없는 동안 서울에서 일 많이 하고 재밌게 지내세요”라고 쓰고 있었다.
가슴 찡하게 야무진 그 필적에서 나는 부모님이나 참부모님, 하나님 앞에 이런 위로와 감동의 순간을 드린 적이 있었는지 문득 돌아봤다. 누구에게 배운 마음 씀일까. 하늘이 친히 주신 본성이 아닐 수 없어 감사했고, 그런 마음 밭을 일궈준 아내에게도 감사했다.
부산 민락선교원 선생님도 아들 졸업식 때 아내에게 준 글에서 “항상 예의바른 모습의 건욱 어머님. 건욱이가 엄마를 닮아 예의가 바른가 봅니다. 또래 아이들보다 똑똑해요. 이해력도 참 좋구요. 그래서 수업함에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라고 찬사했다.
스물이 넘은 지금까지 아들의 손 편지는 한결같았고, 대학 시절부터는 아빠 엄마에게 종종 큰 선물을 준비해 줬다. 혼자서 둘을 챙기느라 애써서 미안한데, 오히려 나이 든 아빠 엄마를 걱정하며 건강하게 기다려 달라는 말에는 악착같이 건강하자고 다짐한다.
나는 섭리사를 정리하고 강의해 오면서 1950~60년대 개척시대로부터 특히 1970년대 3년 총동원 전도 등 선배들의 고난 노정을 전설처럼 증거하곤 한다. 그런 시절 자녀들이 함께 겪은 아픔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경지였다. 그런 역사의 대열을 뒤따라가는 인연에 우리 가족의 부산 시절 동참의 정성이 조국광복 실현에 작은 밑거름되기를 염원한다.
아들의 손 편지는 지금도 “힘을 내요, 슈퍼 대디! 사랑해요, 원더 맘!” “너무 사랑하고 우리 오래오래 행복해요”라고 말한다.
올해 26돌 아들 생일에는 뒤늦은 장문의 위로 글과 그간의 생일에 주지 못한 꽃 한 다발을 선물했다. 그 시절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무한히 열린 미래 날들이 우리에게 있으니, “힘내요, 슈퍼 선!” “너무나 사랑해요. 우리 함께 오래오래 행복해요!”라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