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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관을 감찰하는 관서 설치-진흥왕(544년)때 차관급인 경이 책임자. 2. 사정부 설치-무열왕(659년)때 사정부 설치하고 장관급인 영이 책임자,경이 부책임자였다. 관 원으로는 영(令)·경(卿)·좌(佐)·대사(大舍)·사(史)가 있었다. 경덕왕때 숙정대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때 사정부로 복귀되었다. 3.외사정-문무왕(673년; 문무왕 13)때 지방 주현(州縣)의 감찰관인 외사정(外司正)이 두어졌다. 4.중정대-발해는 중정대에서 형법(刑法)·전장(典章)에 관한 일과 모든 관료의 비위를 감찰하였다. 장관은 대중정(大中正)이었다. 5.어사대-고려 성종때 설치하였다.어사대부가 장관이었으나 실질적으로 재상이 겸직한 판사가 있었다. 충렬왕24(1298년)에 관제개혁에 따라 어사대를 사헌부로 바꾸었다. 6. 분대-고려시 대 서경(西京) 및 양계(兩界) 지방에 두었던 감찰 기구이다. 7. 순마소,다루가치-순마소는 원이 고려를 간섭하면서 설치한 감찰 기관으로 정치적으로 정권 쟁 탈, 반대파의 제거 등에 이용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 의금부로 개편되었다. 다루가치는 몽고가 점령 지역에 두는 관원으로서, 일종의 민정 감찰관이다. 8. 사헌부-감찰사(監察司)·어사대·사헌부의 명칭이 반복되다가, 공민왕때 사헌부로 정착되어 조선 으로 이어졌다. 9.도찰원-1894년의 갑오경장때 의정부 직속으로 도찰원(都察院)이 신설되었다. 10.감사원- 공직자의 감찰기능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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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집사부 시중 기능 강화: 무열계 직계 자손이 8세기 후반까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 전제 왕권 확립과 관계된다. 왕명을 받들고 기밀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 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집사부-집사부(執事部)는 신라의 중앙행정관청 13부에 속한 국왕 직속의 최고 행정 기관으로, 국가의 정책 전반을 관장하였다. 진덕여왕(眞德女王) 5년(651년), 중앙의 최고기관으로 존속하던 '품주(稟主)' 가 개편된 것이다. 장관인 중시(中時:경덕왕 때 시중으로 고침) 1명, 차관인 전대등(典大等:경덕왕 때 시랑으로 고침) 2명, 대사·사지 각 2명과 사 14명을 두었다가 671년 6명을 더 두었다. 그러다가 흥덕왕 4년(829년)에 집사성으로 다시 바꾸었다.
③ 30 대 문무왕(661-681)
이름은 법민(法敏)이다. 제29대 태종무열왕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김유신의 여동 생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비는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딸 자의왕후(慈 儀王后)이다.
∙내치
㉠북원경, 금관소경 설치: 673년에 중원성 축조하고 678년에는 북원경(원주), 680년에는 금관소경(김해)을 두어 왕경(수도:경주)의 지리적 편재성에서 오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5소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백금서당설치: 군사제도에서도 9서당과 10정은 신문왕대에 완성되는 것이지만 9서당 중에서 백금서당(672, 백제민으로 구성)을 둠으로써 10정의 기초를 마 련하였다.
㉢김유신,김인문 등의 귀족들에게 일정한 공로로 식읍, 사전, 마거(목마장), 조
공물) 등을 분배하여 주었고, 이에 대해서 일반관료에 대해서는 녹봉을 지급
하였다.
㉣외사정 설치: 지방 주현(州縣)의 감찰관인 외사정(外司正)을 파견하였다.
㉤우이방부 설치: 형률담당기관인 우이방부를 설치하였다. ※좌이방부는 진덕여왕
㉥사록관과 선부 설치: 또한 녹봉사무 기관인 사록관과 선부를 설치하였다.
※ 각 시대별 형률 담당기관
백제 | 신라 | 발해 | 고려 | 원지배기 | 조선 | 현재 |
조정좌평 | 좌이방부(진덕여왕) 우이방부(문무왕) | 예부 | 형부 | 전법사 | 형조, 추조 | 법무부 |
㉦대왕암: 사후에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여 동해에 해중릉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호국신앙을 상징하는 대왕암(사적 158호)이다.
㉧감은사지 착공: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후 나라를 더욱 굳게 지키기 위해 이 절을 짓기 시작했으며 신라 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즉 위한 이듬해(682)에 완공하고 감은사라고 불렀다. 현재 터(사적31호)와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삼층석탑(국보 112호)및 1960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서쪽탑 3층 몸돌에서 금동 사리기(보물 제366-1호)와 금동 사리외함(보 물 제366-2호)이 발견되었다. 감은사는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호국사찰로 알려져 있다.
외치:
㉠문무왕은 무열왕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난 후 즉위해 재위기간 동안 백제 저항군 의 진압, 고구려 정벌, 당나라 군대의 축출 등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주류성과 임존성 함락: 663년에는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이 일본에 있던 부 여풍(夫餘豊)을 왕으로 삼아 활동하던 근거지인 주류성(周留城:한산 또는 부 안)과 흑치상지(黑齒常之)·사타상여의 당의 망명으로 지수신(遲受信)이 혼자 끝 까지 항거하던 근거지인 임존성(任存城:충남 대흥)도 함락시켜 백제부흥군의 활 동을 일단 종식시켰다.
㉢백강구 전투 승리(663): 백제부흥군이 일본의 구원병과 합세하여 나당연합군과 벌였던 전투이다. 주류성의 663년 복신과 도침이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백제부흥군 내에 내분이 일어나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고 고구려와 왜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한편 유인궤는 부여융 등과 함께 수군을 이끌고 백강을 거슬러 올 라가 주류성으로 가던 중 왜선을 만나 네 차례의 교전을 치렀는데, 이것이 백강 구전투이다.
㉣당이 계림대도독에 임명: 당이 663년 일방적으로 문무왕을 계림대도독에 임명 해 신라의 독립성을 부정하려 했다.
㉤취리산화맹: 665년에는 문무왕으로 하여금 당의 지원을 받아 웅진도독이 된 부 여융과 취리산에서 화맹을 맺게 했다.
㉥고구려 멸망: 이세적(李世勣)이 이끈 당군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 멸망시켰다.
㉦안승을 보덕국왕 임명: 신라에 귀화한 안승을 670년 금마저(익산)에 고 구려왕으로 봉했다가 674년에 진골로 편입하고 보덕국왕으로 봉했다.
㉧나당전쟁 시작: 670년 사찬(沙飡) 설오유(薛烏儒)를 고구려의 고연무(高延武) 와 함께 각각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이북을 공격하기도 했다.
671년 장군 죽지(竹旨) 등이 석성(石城) 전투에서 당군 3,500명을 죽이는 전 과를 올렸다.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671): 사비성을 함락시켜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 치함으로써 백제 고지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매소성 전투 승리: 이근행(李謹行)이 20만의 대군을 동원해 침략해오자 매소성 (경기 연천군 청산면의 대전리산성)에서 공격해 대파했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 은 군마 3만 여 필과, 비슷한 수의 무기를 노획했다.
㉪기벌포 전투 승리:676년 신라의 시득(施得)이 이끄는 해군은 바다를 통해 남하 하던 설인귀의 당군을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전투에서 크게 물리쳐 4,000여 명을 죽임으로써 서해의 제해권도 장악했다.
㉫나당전쟁 승리: 당은 말갈, 거란과 연결되고, 신라는 적극적인 고구려와 소극적 인 백제유민과 연결되어 나․당전쟁을 수행하였다. 결국 당은 평양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를 요동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고, 신라는 대체로 지금 의 원산만과 대동강을 잇는 이남을 차지해 불완전하나마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 었다.
④ 31대 신문왕(681-692) : 새로운 지배체제 확립
㉠김흠돌의 난 평정과 귀족 세력 숙청: 장인인 김흠돌의 난을 평정하고 귀족 세 력을 숙청하고 정치 세력을 다시 편성하면서 왕권 전제화의 계기를 마련하였 다.
㉡중앙 정치제도 완비: 법흥왕 때 병부와 상대등 설치를 시작으로 관제가 정비되 기 시작하여 신문왕 때 예작부, 공장부 설치를 마지막으로 14관제가 완비되었다.
㉢ 지방제도완비 : 9주 5소경 체제의 지방 행정 조직을 완비하였다. 통일 전 5주 2소경(중원경, 동원경)이었으나 민족 융합책의 일환으로 수도의 치우침을 극복 하기 위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각 3주 9주를 설치하였다. 지방장관은 군사적 의미가 강한 총관이나 신문왕때 민정장관 성격의 도독을 파견하여 행정․군사권 분리를 의미한다. 5소경은 수도를 모방한 특수행정구역으로 지방문화의 중심지이 고 수도가 동남쪽으로 치우침을 보완하고자 설치했는데 지방장관으로 사신을 파 견하였다.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는 2개, 신라에는 1개가 설치되었다(사민정책).
cf) 통일신라시대부터 사민정책이 시작되었다. 조선을 태종때부터 중종때까지 삼남지방 주민들을 4군 6진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 2소경 - 중원경, 동원경 ※ 5소경 - 중원경(충주), 서원경(청주 - 민정문서), 남원경(남원), 금관경(김해), 북원경(원주) |
※ 2소경에 3소경을 합쳐서 5소경이 되었다(×). |
㉣ 국학설립 : 유교정치이념 수용하기 위해 국학을 설치하고, 경 1인을 두었다. 이때 활약한 학자가 신문왕에게 도덕정치를 강조한 작품인 화왕계를 바친 설총과 답설인귀서와 불교를 세외교라고 비판한 강수가 있다.
※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확립 → 고려전기 성종때 최승로의 시무28조 채택
독서출신과(원성왕) - 학문적 차원의 왕권강화 → 통일신라 하대
㉤군사제도 완비: 9서당과 10정(한산주에 2정 설치)을 완성하였다.
㉥최초의 토지개혁: 귀족세력의 경제기반 약화와 국가수입의 증대와 민생안정을 위하여 관리들이 수조권 수취만 할 수 있는 관료전을 지급하고, 689년에는 수조권과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녹읍을 폐지하는 대신 세조를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 5묘제 성립(687년): 직계조상인 태조대왕․진지대왕․문흥대왕․태종대왕․문무대왕의 5묘제를 확립하여 중대 왕실의 정통성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만파식적 : 왕으로부터 영험한 대를 얻어 만든 피리로 이것은 단군신화의 천부인, 진평왕의 천사옥대, 이성계의 금척가 같이 건국할 때마다 나타나는 신성한 물건 으로, 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에 이어 즉위한 신문왕은 정치적 힘의 결핍과 동질성 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강력한 왕권을 상징할 수 있는 신물을 등장 시킨 것으로 이해되고 왕실의 안녕과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 신라의 5묘제 비교
신문왕 | 태조대왕 | 진지대왕 | 문흥대왕 | 태종대왕 | 문무대왕 |
혜공왕 | 태조대왕 (미추이사금) | 태종무열왕 | 문무대왕 | 성덕대왕 | 경덕대왕 |
원성왕 | 시조대왕 | 태종대왕 | 문무대왕 | 조부 흥평대왕 | 부 명덕대왕 |
㉨설총의 화왕계: 당시 신문왕을 풍간했다는 일화로서 『삼국사기』 설총 열전에 실려 전한다. 이 「화왕계」는 「풍왕서 諷王書」라는 이름으로 『동문 선』 권53에도 수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인 1022년(현종 13) 1월에 설총에게 홍 유후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경주 서악서원에 제향되었다.
④ 32대 효소왕(692-702)
㉠서시전, 남시전을 설치: 경주에 서시전, 남시전을 설치하여 서시와 남시를 감 독하게 하여 시장을 활성화시켰다.
cf) 6세기 지증왕 - 동시전, 소지왕 - 경주에 시장개설
㉡처음으로 의학박사(醫學博士)를 두었다.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건립: 효소왕 1년(692)에 아버지의 명 복을 빌고자 세운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 습이며,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1934 년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을 해체·복원할 때 나온 사리함에서 출토된 금동 아미타불 좌상은 국보 제79호, 금동 여래 입상은 국보 제80호로 지정되어 있다.
⑤ 33대 성덕왕(702-737)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성덕왕대는 통일신라 시대의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기였으 며, 특히 정전(丁田)제를 실시하여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온 것으로 이해 되고 있다. 또한 신라 천년의 역사를 통해 최대의 태평성대를 이룩했다고 칭송 받는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정전 지급: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정전은 백성들의 사유지를 법제적으 로 추인해 준 조치였음과 동시에, 토지가 없는 백성들에게 국유지를 급여해 준 조처였다고 헤아려진다. 그리고 국유지의 지급내용은 경작권이었을 것이다.
㉢당 현종과 국교 재개: 721년 발해 무왕의 영토확장을 견제하여 강릉지방의 북쪽 경계에 장성을 쌓았다. 732년 신라와 당과의 국교가 재개되었고, 733년 발해의 장문휴가 당의 등주 공격시 김유신의 손자로서 왕의 총신이었던 김윤중 (金允中)과 적잖은 병사를 파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735년 당나라는 신라가 통 합한 대동강 이남지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왕은 재위 36년간 46회의 견당 사(遣唐使)를 보냈으며 유학생도 보내어 국학에서 유학을 배우도록 조치하였 다.
㉣불교식 왕명 사용: 그가 전광대왕(典光大王)이란 불교식 왕명을 가진 중대 유 일의 군주였다.
㉤누각 제작: 718년에 물시계인 누각을 처음 제작하였다.
㉥상원사종: 우리나라 최고의 종인 평창군 상원사종(국보 제36호)이 725(성덕왕 24)년에 주조되었다.
㉦백관잠 저술:유교적인 충군사상을 강조한 백관잠을 지어 군신의 도리를 제시 하였다.
⑥ 34대 효성왕(737-742) : 전제왕권이 흔들림
⑦ 35대 경덕왕(743-765)
㉠한화정책: 중앙의 통치기구 및 지방 주․군․현의 칭호에 한화정책을 실시하여 전제왕권 강화하였는데, 우리나라의 고유한 지명이 중국식으로 이 때 바뀌었 고, 혜공왕때 옛 명칭으로 모두 환원되었다.
㉡ 녹읍 부활: 757년 관료전을 혁파하고 녹읍을 부활시켰다. 이것은 왕권이 서서히 약화되는 것을 암시한다.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 이때 불력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고자 석굴암과 불국사:김대성으로 하여금 석굴암과 불국사를 지었다. 또한 754년 황룡사 종을 주조하고, 굴불사 등을 창건하였고, 각 사찰의 수축과 탑 ·불상의 제작에 힘쓰는 등 불교 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751년(경덕왕 10)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이 경은 닥종이 12장을 이어 붙인 두루마리로서 각 행의 글자 수를 7∼9자(字)로 새긴 총 길이 620cm 소형목판 권자본(圈子本)이다. 이 판본은 1966년 10월 경주 불국사의 3층석탑(석가탑) 보수공사중 2층 탑신부에서 금동제 사리함 등의 여러 유물과 함께 발견되어 이들 유물과 함께 국보 126-6호로 지정되었다.
㉤만불산: 목과 옥으로 만든 인조산인 만불산을 당나라 대종에게 주었다.
④ 36대 혜공왕(765-780) : 무열왕 계열의 왕위세습이 끝남
㉠5묘제 : 미추왕을 김성시조로 태종무열왕, 문무왕을 세세불훼지종, 할아버지 성덕왕, 아버지 경덕왕의 친묘를 합하여 5묘를 정하였다.
㉡중대의 종말: 혜공왕 대는 신라 중대의 전제 왕권이 한계점에 도달 한 시기로, 진골 귀족들의 대대적인 모반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대표 적인 예를 들면, 767년의 일길찬(一吉飡) 대공(大恭)의 반란, 770년 대아찬 김융의 반란, 775년 이찬 김은거의 반란, 그리고 780년 이찬 김지정의 반란 등이 잇따라 일어났다.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이 군사를 일으켜, 김지 정을 주살하고 혜공왕과 그 후비까지도 난중에 시해되었다. 중대 무열왕계 열의 왕위 세습은 종말을 고하게 되고, 내물왕계인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 위함으로써 하대가 시작되었다.
㉢ 신행: 그는 우리나라에 중국의 신수의 북종선(北宗禪)을 전래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