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金永郞)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시어, 시구 풀이]
여읜 : 이별한, 멀리 떠나 보낸
서운케 : 서운하게
하냥 : 한결같이, 늘, 그대로
우옵내다 : ‘우옵나이다’의 준말, 혹은 ‘우옵니다’의 전라 방언
모란이 피기까지는 -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 시인이 갈망하고 그리워하는 세계는 모란이 활짝 핀 봄이다. 그러나 ‘아직’이라는 부사어를 통해 이 봄을 기다리는 시적 화자의 자세가 오래고 숙명적임을 암시한다.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 봄이 언젠가는 지나갈 것임을 알았지만 소망과 보람과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구절. ‘봄을 여읜 설움’은 삶의 보람과 의미를 한꺼번에 잃은 설움과 같은 맥락에 있다.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 모란이 지는 것을 우수(憂愁)는 ‘봄’이 다 가고 여름의 더위를 느끼게 한다. 시인이 갈망하고 그리워하는 세계인 봄의 끝을 알리는 것은 바로 모란의 낙화이다.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 서정적 자아에게 모란은 인생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란이 지면 인생 전체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생각된다.
삼백예순 날 : 한 해. 그리고 기다리는 나날들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서글픈 정감의 깊이를 드러낸다.
찬란한 슬픔의 봄 : 슬픔이 슬픔으로 끝나는 절망적 슬픔이 아니라 미래의 꿈을 잉태한 슬픔, 즉 아름다운 정서로 승화된 슬픔임을 모순 어법(관형어의 모순 형용)을 통해 잘 드러낸 묘미 있는 표현이다.
[핵심 정리]
지은이 : 김영랑(金永郞, 1903-1950) 시인. 본명은 윤식(允植). 전남 강진 출생. 휘문의숙 입학, 1919년 기미 독립 운동시 강진에 돌아와 학생 운동을 모의하다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복역. 1930년 박용철, 정지용과 함께 <시문학>지 간행. 박용철과 더불어 순수 서정시 운동을 주도. 언어의 섬세한 조탁(彫琢)에 의한 국어의 심미적 가치 개발에 주력하였다. 대표작으로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북’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영랑 시집>(1935), <영랑 시선>(1939)이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순수시
성격 : 유미적. 낭만적
어조 : 여성적
표현 : 역설적
구성 : 수미쌍관의 구성
* 소망의 시로 보는 경우(주제 -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림)
1-2행 모란이 피기를 기다림(기)
3-10행 모란을 잃은 슬픔(서)
11-12행 모란이 피기를 기다림(결)
* 존재론의 시로 보는 경우(주제 - 존재의 초월과 상승)
1-4행 생의 원리에 대한 깨달음(피어남과 떨어짐, 기다림과 여읨)
5-8행 생명의 모순성 및 숙명적 비극성에 대한 탄식
9-12행 기다림으로의 전이와 도치(생명의 원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제재 : 모란의 개화와 낙화, 봄
주제 :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림, 미(美)의 추구
출전 : <영랑시집>(1936)
▶ 작품 해설
‘봄’은 겨울의 불모성을 극복하고 대지에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북돋운다. 모든 생명을 싹트게 하고 사람들은 생명의 약동을 느낀다. 그 봄의 막바지인 5월에 모란은 피기 때문에 모란은 봄의 절정을 장식한다. 따라서 ‘모란’이 지면 ‘봄’도 잃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봄’과 ‘모란’은 시인에게 하나의 의미로 맺어질 수 있다. 이 때 ‘봄’(모란)은 시인의 희망과 소망을 상징한 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모란’을 단지 소망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꽃은 겨울의 시련을 딛고 일어서야 봄에 개화할 수 있다. 따라서 꽃이 아름다움이요, 희망의 상징이라 하더라도 그 이면에 있는 고통과 좌절과 어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어느 면에서 인간의 인생과 공통점을 지닌다. 결국 ‘모란’을 통해 영랑은 인간의 절망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된다. 이 시가 쓰여진 일제 강점기 하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 시의 심각성은 더해지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가는 ‘봄’과 피어나는 ‘모란’의 결합이다. 봄의 막바지에 모란이 피어나기 때문에, 모란은 봄의 절정을 장식한다. 그 절정의 순간이 지나고 모란이 지는 날이면 봄도 잃을 수밖에 없다. 이 시에서 시인이 포착하고 있는 절정의 순간은 결국 봄과 모란을 함께 상실하는 순간이라고 할 것이다. 소멸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정서의 극치를 시인은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참고> ‘모란’과 ‘봄’의 상실감
영랑의 시가 지닌 특색 중의 하나는 ‘오월’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 수의 비율로 보면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나, 영랑의 강렬한 의도적 반영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후기시는 ‘오월’, ‘오월 아침’, ‘오월 한(恨)’ 등과 같이 ‘오월’을 직접 표제로 하고 있다. 또한 ‘가늘한 내음’이나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같은 초기시에서도 ‘오월’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처럼 모란이 피는 ‘오월’에다 봄의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는 영랑에게 봄과 여름의 경계인 ‘5월’은 ‘찬란한 슬픔’의 계절인지도 모른다. 봄 가운데서도 온갖 꽃들이 만개하는 계절적 심상보다는 굳이 5월에 피는 ‘모란’을 통하여 자아의 상실감을 되찾으려 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그의 시를 더욱 애상적으로 느끼게 하는 역할을 한다.
<참고> 김영랑과 순수시
우리 나라의 순수시는 1930년대 박용철이 주재한 <시문학>(1930)을 중심으로 김영랑, 정지용, 신석정, 이하윤 등에 의해 지향되었다. 이 중에서도 박용철과 김영랑이 중심 인물이었다.
박용철은 그 자신이 적지 않은 시를 쓰기도 하였지만 작품보다는 순수시 운동을 뒷받침하는 이론에서 더 중요한 활동을 보였다. 그가 내세운 이론에 어울리는 작품으로서의 뛰어난 성과는 김영랑에 의해 이루어졌다. 김영랑은 우리말을 다루는 언어 감각에서 김소월 이후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서, 섬세하고 은은한 서정시의 극치를 이루었다. 이로 인하여 ‘북도에 소월(평북 출생), 남도에 영랑(전남 출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들이 주장한 순수시란 시에서 일체의 이념적, 사회적 관심을 배제하고 오직 섬세한 언어의 아름다움과 그윽한 서정성을 추구하는 시란 뜻이었다. 그 결과 지나치게 개인의 내면 세계에만 편중되면서 말을 다듬는 데에 빠졌다는 결함은 있으나, 이들에 의해 우리의 현대시가 시의 언어와 형식에서 좀더 세련된 차원으로 나아갔다는 점은 우리 시사(詩史)에 빛나는 업적이라 하겠다.
한편 <시문학> 동인들에 의해 주도된 순수시 문학 유파를 ‘시문학파’라 이르는데, 이들은 문학에서 교훈적 계몽주의나 정치적 목적 의식을 철저히 배제하고 언어의 기교, 순수한 정서를 중시하였으며 특히 정지용에 와서 우리 시는 완전히 현대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첫댓글 모란이 피기가지는 詩
감상 잘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