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3일(토요일) 맑음 전보다 해가 다시 짧아져서 새벽 5시에도 여전히 어두웠기 때문에 나는 손전등을 들고 길을 비추며 걷기 시작했다. 도시를 지나오자 도로 상태가 나빠졌다. 그 넓고 좋던 노견이 없어지고 다시 자갈밭이 시작되었다. 길을 걷느라 고전하고 있는 중에 위니펙 한인회에서 냉면을 준비해 가지고 우리를 찿아 왔다. 그들이 정성껏 준비한 냉면을 맛있게 먹었지만 이야기하느라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말았다. 이런 대접이 반갑고 좋긴 하지만 그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면 30분으로 잡아 놓은 점심 시간을 항상 초과하게 되는 것이 문제였다. 쾌청한 하늘 밑 넓은 들판에서는 이곳 저곳 콤바인들이 추수에 여념이 없었다. 서너 시경 토론토에 살며 나와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신재진씨 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록키산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토론토를 떠나 처음으로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니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토론토 소식이며 교회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8월24일(일요일) 맑음 어제 채우지 못한 거리를 보충하고자 아침 일찍부터 걷기 시작해 73km를 걸었다. 시간을 아껴가며 부지런히 걸었으나 길이 좋지 않아서 힘이 들었다. 오후에는 옆으로 50m쯤 떨어진 거리의 하행선으로 옮겨서 걸었다. 도로 안쪽으로 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요일이지만 동네도 없고 교회 또한 보이지 않아 예배를 드릴수가 없었다. 들판 중간 중간에 유채꽃 비슷한 식용유용 식물의 열매가 들판을 감색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길옆 웅덩이에서는 물오리가 떼를 지어 놀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평원의 한가운데를 향해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8월25일(월요일) 맑음 아침 일찍부터 출발하여 걷다가 마니토바 제2의 도시이며 마지막 도시인 브랜든(Brandon)으로 들어갔다. 사전 약속도 없이 아침에 전화하고는 무작정 언론사로 찿아갔다. 처음 도착한 신문사에서는 우리의 모금운동이 생소한지 나의 설명을 듣고서야 기사화했으나 앞으로 지나갈 소도시의 언론에 기사를 보내겠다는 뜻밖의 도움을 주었다. 다음에 방문한 TV 방송국에는 지방 행사차 모든 카메라가 출동한 상태이기 때문에 취재할 수 없다고 거절했으나 신문사에서의 일을 얘기하고 담당자 면담을 요청하며 버텼다. 결국 카메라맨이 나타나 취재를 했고 그 방송덕으로 다음도시 리자이나(Regina)에 이를 때까지 주민들로부터 좋은 반응과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평원 한가운데의 농업도시 답게 사람들은 순박하고 친절했다. 내일은 마니토바주를 지나 싸스카츈(Sascachewan)주에 들어갈 예정이다. 8월26일(화요일)맑음 오후에 드디어 우리는 마니토바주를 지나 싸스카츈완주에 도착하였다. 주립 안내소에 들려 지도며 각종 정보를 얻었다. 남청색 바탕에 밀 두 단을 세워 놓은 주의 상징이 인상적이다. 싸스카츄완주는 밀의 경작 면적이 마니토바주의 4배정도가 된다. 그러나 마니토바주의 기름진 땅과는 달리 이곳은 호수가 없고 대부분 평지로 되어 있으므로 천수답이 많아서 3-4 년을 주기로 풍작과 흉작이 이어지는 밀 재배 지역이다.. 저녁 무렵 길가에 서 있는 자동차를 발견하였다. 리자이나로 가던 젊은 부부인데 자동차의 엔진 고장으로 서버린 것이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도와주겠다고 하자 극구 사양했다. 도시로 가서 부품을 사와야 된다는 것이다. 한참을 가다가 나는 아무래도 그들이 염려되어 다시 돌아갔다. 우선 나는 앞쪽에 가 있던 Mr.장을 무전으로 불렀다. 캠퍼가 돌아오자 끈으로 그 차를 묶어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끌고 가다 보니 조그만 마을이 나타났고 우리는 그들의 차를 마을 입구의 모텔까지 견인하여 주었다.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그들 부부는 우리에게 각종공구를 빌려 차를 분해하고 고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수리 후 공구를 돌려 줄 것을 부탁하고는 커케라 근처 모텔의 마당에 캠퍼를 세우고 잠자리를 잡았다. 8월27일(수요일)맑은 후 비바람 오늘도 황금빛 들판을 가르며 걸었다. 햇빛은 따갑지만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땐 벌써 가을의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점심때 쯤 횡단 도로와 평행으로 난 철도 옆을 지날 때 철로를 수리하고 있는 수십 명의 수리공들을 만났다. 내가 손을 흔들자 한 두 명씩 손을 흔들어 응답하기 시작했다. 그 때 한 수리 차량에서 경적을 울리자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손을 흔들며 격려를 하는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20여대의 제각기 모양이 다른 기계들도 작업을 멈추고 내가 있는 쪽을 향하여 춤을 추듯 움직이며 경적을 울려댔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화답에 나는 당황하여 고맙다는 뜻으로 그들에게 큰절을 했고 그들은 더욱 길게 경적을 울리며 환호하였다. 나는 무대에 선 배우처럼 다시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으나 그들의 환호는 그후로도 잠시동안 계속 되었다. 나는 만화에서 우스운 장면을 보았을 때처럼 웃고 말았다. 그들의 행동이 너무나 순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후에 우리는 횡단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이틀 후 29일 금요일까지 리자이나에 도착 하여야만 했다.그렇지 못하면 연휴인 9월2일까지는 언론과의 접촉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토요일 도착 일정을 하루 앞당겨 금요일에 도착하는 것으로 변경해야 했다. 오후에는 비바람이 몰아쳤으나 일정상 쉴 수가 없었다. 우의를 입고 강행을 했다. 저녁 무렵 비는 그쳤으나 바람이 몹시 불어 걸을 수가 없었다. 대평원이라 그런지 아침나절엔 날씨가 화창했다가도 오후만 되면 록키 산맥 쪽에서 몹시 바람이 불어와 나를 괴롭혔다. 버로우(Burrow) 근처의 농가 옆에서 일박하다. 8월28일(목요일)흐린 후 맑음 또 시계를 한시간 늦추어 마운틴 타임에 맞추었다. 그러나 새벽 6시경에 일어나 보니 밖은 어두웠다. 할 수 없이 손전등을 들고 길을 나섰다. 반시간쯤 지나 동녘이 훤히 밝아 올 무렵 눈앞의 아스팔트위에 선혈이 낭자하게 뿌려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밤새 지나가던 차량이 사슴을 친 것이었다. 대낮이 되도록 그 광경이 지워지지를 않았다. 인디안 헤드라는 마을이 가까워 오자 이제까지 왕복 일차선이던 대륙 횡단 도로는 이차 선으로 바뀌면서 중간이 분리되었다. 리자이나까지 70여km 남은 지점에 이르렀을 즈음이었다. 나는 이차선옆으로 1m 정도의 나 있는 노견의 끝 부분을 걷고 있었다. 한순간 뒤에서 오던 차 한대가 나의 바지깃을 스치며 고속으로 지나가더니 차선으로 다시 들어갔다. 너무 놀란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 차를 바라보았다. 1인치의 차이로 차에 치이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횡단 도중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며 갑자기 걷기가 무서워졌다. 그 이후로 나는 뒤에 차가 오는 듯하면 뒤를 돌아다보며 걸었다. 이삼십 분을 걸었을까 차 한대가 나의 옆에 와 정차했다. 깜짝 놀라는 나에게 그들은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그들은 나의 옆을 차량이 스쳐 갈 때 멀리서 그 광경 목격했고 역시 놀란 그들은 곧장 앞차를 쫒아가 그 차의 번호, 모양, 운전자의 인상착의등을 적어온 것이었다. 내가 리자이나에 도착해 경찰에 신고하면 자기가 증인을 서겠다고 했다. 그들의 호의는 고마웠으나 그 후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았다. 오후에도 강한 서풍이 불었다. 마지막 구간에서 10km전방에 잠자리를 정하기로 했으나 캠퍼를 15km지점에 세우게 되어 하루 동안 몹시 힘이 들었던 나는 Mr. 장과 또 언쟁을 하는 실수를 범했다. 다시 나 자신을 반성했다. 우리 있는 곳까지 리자이나 한인회 총무 조교만씨와 한인 교회 목사님이 마중을 나오셨다. 밤새 비바람이 몰아쳐 잠을 자기가 어려웠다. 8월29일(금요일) 아침에 비가 그치고 해가 구름사이로 고개를 내밀자 나는 시내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리자이나 교민들과는 시내 입구에서 합류해 시내로 행진하여 들어가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약속 장소까지의 거리를 잘못 계산하는 실수로 반시간정도 늦게 도착하고 보니 그 곳에는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매우 당황했다. 그 때 몇 대의 차량에 분승한 교민들이 도착하였다. 의아해 하는 나에게 “일찍 도착하셨습니다”하고 교민 한 분이 말했다. 사정인즉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사스카츄완주만이 서머타임(Summer Time)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즉 아직도 다른 주의 겨울시간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이 반시간 늦게 도착한 것이 되었으니 그런 인사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워낙 큰 나라이다 보니 전국이 5시간 다른 표준 시간을 사용함으로 이런 아이러니가 생기게 된 것이다. 얼마 후 리자이나 전 교민 200여명 중 대부분이 일이 참가하여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우리는 두 줄로 서서 고속도로를 따라 시내를 향하여 행진을 시작했다. 행진을 시작하여 30분 정도 지났을 때 도시진입 고속 도로변에서 갑자기 지역 TV 3사가 모두 나와 취재 경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반시간 가량 공동 취재와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언론과의 인터뷰 내용은 대부분 몇 가지로 압축이 된다. 나의 대륙 횡단 동기, 북한의 기근 상황에 관한 질문들, 그리고 나의 건강에 관한 것이었다. 횡단 동기에 관하여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금세기 최악의 북한의 식량난을 캐나다 사회에 알리고 도움을 호소하자는 것” 이라고 대답했으며 북한의 기근에 대하여는 “캐나다 국영 TV의 발표대로 올 내로 다량의 식량 원조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수백만 명이 아사할 수 있다“라고 대답했다. 나의 건강은 좋은 편이며 꼭 캐나다 최초로 대륙 횡단을 무사히 마치어 캐나다에 사는 한국인(Korean-Canadian)의 의지를 보여 주겠다고 했다. 언론 취재 후 우리는 시내 중심부에 있는 주 청사 앞까지 행진하여 분수대 앞에서 예배와 보고대회를 갖고 캐내디언들의 진정한 화합을 위해 내가 가지고온 온 대서양의 물을 청사 앞 광장에 뿌렸다. 저녁에는 리자이나 한인 교회에서 북한 돕기 모금 예배가 있었다. 나는 간증과 찬양을 하였고 모금 액수는 놀랍게도 천 팔백 나 되었다. 예배에 참석한 인원 모두가 평균 육십 불 이상을 헌금한 셈이다. 예배 후에는 한 교민 가정에 초대되어 저녁을 식사를 하였다. 한 한인회 관계자는 오늘 리자이나 교민회 사상 가장 많은 인원이 모였으며 그 동안 교민들이 서먹한 관계였는데 오늘을 계기로 다시 뭉칠 수 있게 되었다고 우리를 치켜세워 주기도 했다.. 교회 주차장에 캠퍼를 세우고 자려 했으나 이태식 장로의 막무가내 초총에 그의 집에서 묵기로 했다. 오늘 낮에 왜 언론에서 한국 태생인 나를 그처럼 환대했을까 생각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그 지역 한인들의 이미지와 사회 기여도때문이라 생각된다. 리자이나에 사는 많지 않은 한인들은 대부분 전문직 종사자인데 그들의 자녀들 또한 우수하기로 이름이 나서 대부분 지역 사회로부터 존경 받고 있기 때문이다.. 8월30일(토요일) 맑음 이 장로님 댁에서 차려준 따뜻한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났다. 대평원에는 두 개의 대륙 횡단 도로가 있다. 대서양에서 시작한 대륙 횡단 도로는 위니펙을 지나며 갈라져 하나는 서쪽으로 리자이나(Regina)-칼가리(calgary)-밴프(Banff)를 지나 록키를 넘어 뱅쿠버에 이르는 1번 도로로 통행량이 제일 많고 다른 하나는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싸스카툰(Sascatoon)-에드몬톤(Edmonton)-제스퍼(Jaeper 록키)를 거쳐 프린스죠지-프린스루퍼트에 이르는 옐로우 헤드 횡단도로이다. 나는 이번 횡단의 목적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북한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중간에 큰 도시 없이 칼가리로 가는 1번 도로대신 더 멀기는 하지만 싸스카툰(Sascatoon)과 에드몬톤(Edmonton)으로 향하는 엘로헤드(Yellow Head) 쪽으로 결정을 하였다. 그러나 나의 목적지는 뱅쿠버였기 때문에 에드몬톤에서 칼가리(Calgary)로 내려와 밴프(Banff)에서 록키(Rocky)를 넘기로 최종 계획을 세웠다. 원래의 계획보다 400km 정도가 길어지게 된 셈이다. 우리는 이 장로님 부부와 한가한 토요일 아침의 거리를 걸어 고속도로 입구에 도착한 후 헤어졌다.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되지만 그들은 우리를 누구보다도 뜨거운 사랑으로 대해 주셨으며 이별할 때 이 장로님은 끝내 오열하셨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이 길이 나 혼자 가는 길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나는 나의 의지와 집념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행동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 나를 앞으로 가게 하는 원동력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의지와 뒤에서 나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있는 여러 교민들의 성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무슨 능력으로 이 길을 간단 말인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그저 그의 뜻에 따르고 있을 뿐이다. 엊그제 차에 치일 뻔 하였을 때에도 주님은 그 차와 나 사이에 방패를 쳐 나를 보호하시지 않았던가? 그때 나는 나의 왼쪽에 보이지 않는 보호막 같은 것이 있음을 느꼈다. 더 거슬러 올라가 출발 이틀 째의 차량 사고때에도 어느 거대한 힘이 내가 운전하던 차의 방향을 분리대와의 정면충돌 직전에 180도 바꾸게 하여 충돌을 면하게 하지 않았던가. 또한 의사도 어쩔 수 없었던 발의 고통이 감쪽같이 사라지지 않았던가. 생각할수록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었던 것이다. 또다시 펼쳐지는 황금빛 들판 한 가운데를 까만 아스팔트가 가로지르며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점심 식사 후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일자로 뻗은 아스팔트의 중간에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까만 아스팔트 위에는 누가 흘리고 갔는지 막 추수한 노란 밀들이 흩어져 있었다. 한 웅큼을 주워 손바닥에 놓으니 비디오에서 보았던 굶주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북한 어린이의 모습이 그 위로 클로즈 업(Close-up)되어 나타난다. 황금색 들판이 밀밭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 평원을 지나 오면서 여지껏 밀알을 본 일은 없었다. 나는 떨어진 밀알을 보며 계속 걸었다. 너무나 많은 밀들이 버려져 있었다. 한곳에 이르자 그곳엔 반 가마쯤 되는 밀이 쏟아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여기엔 지천으로 깔린 것이 곡식인데 왜 그들은 굶어 죽어야 하는가? 무엇이 그들을 굶어 죽게 만들고 있는가? 하나님 저 들판의 한 자락을 베어서 그들에게 보낼 순 없나요? 하나님 그들을 원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굶어 죽지 않게 해달라고 목을 놓아 울면서 기도했다. 마침 지나가는 차량도 없어서 나는 이것저것 볼 것 없이 맘껏 큰소리로 하늘을 보며 울었다. 아마 이 나이 되도록 제일 큰소리로 울었으리라. 얼마 후 나는 울음을 멈추어야 했다. 앞쪽에 미니 밴 한 대가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에서 내린 젊은 부부가족은 자신들을 나에게 소개했다. 그들은 부르스(Bruce Lecky), 그의 아내 리사(Lisa) 그리고 어린 두 아들 매튜(Mathew)와 스티븐(Steven)이었다. 캐톨릭 신자인 그들은 TV에서 북한의 식량난을 본 후 북한 어린이들을 도울 방법을 찿고 있었는데 오늘 위니펙에서 그들의 집이 있는 에드몬톤으로 가던 중 우리를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는 나를 그냥 지나쳐 갔으나 가다가 앞에 있던 캠퍼의 싸인들을 보고 차를 세운 그들은 Mr.장에게서 우리의 캠페인에 대한 설명을 듣고 가던 길을 돌려 나를 찿아 왔다는 것이다. 우리의 캠페인을 통하여 북한 돕기에 동참하겠다며 리사는 나에게 10불을 성금으로 주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와 작별한 그들은 아스팔트 속으로 멀어져 갔다. 그 후 그들은 성금을 모으기 위해 각종 모금 행사를 주체하고 언론사에 연락해 주는 등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리사와 그의 가족들 또한 오 천여 불을 북한 돕기 성금으로 내 놓았다. 해질 무렵 베스런(Bath Run)이라는 작은 마을 길옆 공원에 주차를 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8월31일(일요일) 맑음 오늘은 주일이라 가다가 교회가 보이면 예배를 드릴 생각으로 캠퍼를 떠나 걷고 있었는데 뒤에서 Mr.장이 나를 불러 세웠다. 캠퍼로 돌아와 보니 어제 헤어졌던 이 장로님 부부가 와 계셨다. 우리와 헤어진 후 밤새 각종 요리며 쿠키등을 손수 만들어 몇 보따리의 음식을 싸가지고 오신 것이다. 그것도 밤중에 쓰셨다는 격려 편지와 함께. 우리는 너무 많은 음식에 놀라고 말았다. 그분들이 만들어주신 쿠키는 뱅쿠버에 도착할 때까지 남아 있었다. 나는 잠시 후 그들과 헤어져 길을 재촉했다. 나를 떠나보내며 그는 뱅쿠버 도착 후에는 남북 종단을 이루어 분단된 조국에 희망을 주라고 당부하였다. 고마운 분들이었다. 누가 그렇게까지 하겠는가? 하루 저녁 재워주고 아침 대접해서 보냈으면 그만이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그들의 사랑을 생각하며 걷는 어려움을 잊을 수 있었다. 오늘은 크레이크(Craik)라는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저녁식사 후 아침에 우리와 헤어졌던 장로님 부부와 목사님, 그리고 한인회 조규만 총무 부부가 우리를 찿아왔다. 우리의 소식이 궁금한 그들이 이 장로님을 부추겨 다시 찿아 온 것이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그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이별을 아쉬워해야 했다. |